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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86화 (86/132)

86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14)

엘피는 열없는 마음에 눈을 굴리다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새, 생일 선물로 준 소원으로 쓸게!”

“……그런 데다가 쓰지 말래도. 알았어. 괜찮아.”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뗀 후 엘피가 잡기 쉽도록 옆으로 내주었다. 엘피는 기뻐하며 트론의 손을 깍지 끼워 꽉 잡았다.

손에서 찌르르 전기가 도는 것 같기도 하고, 벅찬 것 같기도 했다.

트론과 이렇게 손을 잡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가 어릴 적에는 어디를 가든 함께 손을 잡고 걸었는데. 그때는 너무 당연한 일이라, 닿아 있는 소중함을 몰랐다.

엘피의 손 안에 쏙 들어오던 그의 작은 손은 어느샌가 한참 커졌다. 그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많은 것이 변했다.

‘그래도 계속 곁에 있고 싶어.’

그 마음만은 변치 않은 채.

그와 손을 잡으니 어쩐지 그 감촉만 의식되어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아름다운 경치라고 감탄하고 있었는데,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휴양지로 멀리 여행온 거, 처음이네.”

엘피는 괜히 의식되는 것을 흐트러뜨리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게. 누나랑 같이 돌아다닐 때는 도망가거나 일 때문에 움직일 때가 많았으니까.”

“후후. 론이 미아가 될까 봐 이렇게 손잡고 돌아다녔지.”

“나는 오히려 누나가 미아가 되지 않을지 걱정했어.”

“너무해!”

말은 그렇게 하지만, 트론의 얼굴에는 장난기 서린 웃음이 올라가 있었다. 엘피는 엄지로 그의 손등을 꾹 누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짐짓 투덜댔지만, 지금 트론과 함께하는 이 시간은 무척 소중했다.

“휴가 가고 싶으면 말하지 그랬어. 그 정도야 얼마든지 허가할 수 있는데.”

“나 혼자 가면 무슨 소용이야. 론이랑 가야지.”

그녀는 트론의 손을 자신 쪽으로 끌어온 다음 꽉 쥐었다.

“……론은 항상 바쁘니까. 이렇게나마 쉴 수 있어서 다행이야.”

엘피가 오지 않았다면 오늘도 여느 때처럼 일만 하고 있었겠지만, 트론은 그녀의 말을 정정하지는 않았다.

“론이 왕이 되고 나면, 그래도 좀 여유가 생기겠지? 그때는 정말로 순수하게 휴양만 하러 어딘가 놀러 가자.”

“…….”

왕좌에 도달하면, 멸망으로 향하는 나락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엘피는 그런 미래를 모르기에 천진하게 자신을 생각하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

하지만 트론은 즐겁지 않은 진실을 고하여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미소를 만들어 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언젠가 같이 가자.”

“응!”

쥐고 있는 부드러운 손의 감촉, 소금기가 감도는 바다 냄새, 새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백사장에 불규칙적으로 부딪치는 파도 소리.

이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은 없었다.

분명히 그것을 어떤 단어로 정의한다면, ‘행복’이 맞을 것이다.

그녀가 행복하냐고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에 거짓은 없었다.

***

루베인은 포털을 통해 착지한 후 순간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바깥이라 해가 정면에서 비추어 순간적으로 시야가 방해되었다.

그녀는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포도밭?’

기후가 온화한 솔피시언 영지는 와인 산지로도 유명했다. 이곳도 와인을 생산하기 위한 포도 농장 중 하나인 듯했다.

언덕에 위치한 포도밭 아래로 저 멀리 치롤헷 시내 전경과 바다가 보였다. 날씨가 좋아 전망이 확 트여서 더할 나위 없이 멋진 경치였다.

“이쪽으로…….”

제시드가 동쪽을 향해 걸어가며 그녀를 안내했다.

포도밭 옆 평평한 양지에 자그마한 정원이 있었다. 아마도 가장 경치가 좋은 곳에 일부러 조경을 설치한 듯했다.

정원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세운 근사한 정자가 있었다. 정자 아래에는 티세트가 갖춰져 있었고, 시종과 하녀들이 정자와 거리를 둔 채 고개를 숙여 대기했다.

테이블 앞에는 갈색에 가까운 어두운 주홍빛 머리를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저 사람이 제시드가 말한 형님인가?’

형제치고는 그다지 닮지 않은 것 같았다. 길게 찢어진 붉은 눈과 갸름한 얼굴이 어딘지 여우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분위기의 미남이었다.

루베인이 정자에 다다르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과장된 포즈로 인사했다.

“일부러 발걸음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루베인 마그달리사 영애.”

“……안녕하세요. 저를 아시는군요.”

“이렇게 뵙는 것은 처음이지만요. 반갑습니다. 나는…….”

그는 자기소개를 하기 전에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을 하다가 빙긋 웃었다.

“세드릭 율페이든이라고 합니다.”

“네, 저를 이곳까지 데려다 준 제시드 님의 형님 되신다고 들었습니다.”

“대충 그렇겠군요.”

세드릭이라고 자신을 밝힌 청년은 애매하게 대답하며 루베인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제시드도 함께하리라 생각하면서 테이블을 보았는데, 식기 세팅이 2인분만 되어 있었다.

“제시드 님은 같이 안 드시나요?”

루베인이 그렇게 묻자, 옆에 서 있던 제시드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저었다.

“과,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저는…….”

“제시드.”

세드릭이 위압적인 목소리를 냈다. 제시드는 움찔했다.

“네 역할은 끝난 것 같으니 물러나 있어. 포털로 이동해야 할 때 다시 부르겠다.”

“예, 예엡! 부디 좋은 시간 되시길!”

제시드가 꾸벅 인사하며 바쁘게 정자에서 멀어졌다.

루베인은 두 사람을 지켜보며 위화감을 느꼈다.

‘……동생을 대한다기보다는 종을 부리는 것 같은 태도인데.’

보통 장자가 맡는 가문의 후계자와 그 이하 형제자매들 사이에 큰 격차가 존재하긴 한다. 실제로 가장 손윗 형제를 상전 모시듯이 하는 집안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타인 앞에서 그런 천박한 태도를 티 내는 것은 무척 상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평범하게 형제끼리 사이가 좋은 집에서 자란 루베인으로서는 더욱이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애초에 이 다과회 자체도 무척 예의에 어긋난 형태로 초대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동생을 종 부리듯 하는 세드릭에게 호감을 갖기란 무척 어려웠다.

루베인은 속내를 티 내지 않으며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제시드 님도 함께하시면 좋았을 텐데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동생이라서요. 영애의 기분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되었습니다.”

루베인은 ‘제시드 님보다는 당신이 기분을 해쳤는데요’라고 대꾸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저도 많이 부족한 사람인데, 큰일이네요. 영식의 기분을 해치게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참았어도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어딘지 빈정거리는 듯한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루베인은 나중에 딜이 알게 되면 혼나겠다고 생각하면서 생글 웃었다. 설마 웃는 낯에 뭐라 할까.

세드릭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의자에 기댔다.

“흥미롭군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

그가 대놓고 그런 식으로 말할 줄은 몰랐기에, 루베인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바로 부정하지 않는다는 건, 그 말이 맞다는 뜻이겠군요.”

“그게…….”

“난 당신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난 지루하고 별 볼 일 없는 여자를 싫어하거든요.”

루베인은 점점 더 기분이 나빠졌다. 세드릭은 이제 대놓고 사람을 품평하는 소리까지 지껄이고 있었다.

그녀는 권위를 내세우는 타입의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공작의 딸인 자신에게 너무도 예의 없는 태도가 거슬렸다.

‘……예전에 트론 전하랑 파티에서 재회했을 때 일이 생각나네.’

일방적인 친근함에 트론에게 반말을 하자, 그가 말했다. 대화를 나누고 싶으면 정당한 자세를 갖추라고. 왕족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기본적인 존중으로서.

비슷한 일을 당하고 나니 새삼 그때의 철없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루베인은 결심하고 고개를 들었다. 나중에 딜에게 한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고, 부친의 귀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눈앞의 재수 없는 청년에게 한 방 먹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율페이든 영식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요.”

“……하하. 영애는 지금 이 자리가 왜 만들어졌는지 모릅니까?”

“모르니까 얼떨결에 찾아온 거겠죠? 영식처럼 재수 없…… 아니,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인간을 상대할 줄 알았다면 절대로 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한 번 고삐가 풀리니 언어가 순화되지 않았다.

세드릭은 큭큭 웃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 재미있네요. 나는 정말 영애가 마음에 들어요. 바꾸어 나가는 재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

루베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답하지 않았으나, 그는 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물론 꺾이지 않는 걸 보는 것도 즐겁지요. 내 동생이 그랬거든요. 그 아이의 경우에는 내 앞에서 순순한 척하면서, 그 눈빛이 변하지 않았어요.”

“……제시드 님이요?”

“아하하, 아뇨. 제시드 같은 타입은 재미가 없지요.”

그는 깍지 끼워 턱을 괴며 은근하게 답했다.

“훌륭해요. 솔직히 마그달리사 공의 딸이라고 해서 기대하지 않았는데, 정말 마음에 듭니다. 일부러 이런 자리를 마련한 보람이 있었군요.”

“……이보세요. 멋대로 망상을 펼쳐 나가는 건 대화라고 부르지 않거든요?”

루베인은 어쩐지 소름이 끼쳐 몸서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후 상황으로 보아,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의미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눈앞의 기분 나쁜 남성과 자신을 붙이려는 모양이었다.

“지금 이거, 선 보는 거랑 비슷한 거죠? 저희 각하와 제대로 이야기는 된 건지 모르겠네요.”

“설마 솔피시언 공이 그 정도 이야기도 안 하고 자리를 마련했겠습니까.”

“…….”

루베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르터바이스에서는 그녀를 상품처럼 걸더니, 이제 본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가문에 이득이 되는 혼인으로 치울 생각인 것일까.

부친이 나름대로 자신을 아끼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며 이런 현실과 부딪칠 때마다, 그 믿음이 점점 부서졌다.

‘……이 따위 남자랑 결혼하라니, 절대로 싫어.’

그녀는 세드릭을 노려본 다음 몸을 돌렸다. 끈적거리는 눈빛으로 사람을 핥는 듯이 바라보는 저 남자와 한 시라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세드릭이 그녀의 뒤에서 재미있다는 듯 충고했다.

“제시드가 없으면 저택까지 돌아갈 방법이 없을 텐데요.”

“돌아갈 방도도 마련해 놓지 않고 사람을 부른 점에 대해, 나중에 솔피시언 공에게 정식으로 항의하기로 하죠.”

“아하하.”

그는 루베인을 더 말리지 않고 웃음을 뱉었다. 그 웃음소리조차 기분 나빠서 귀를 막고 싶었다.

그녀가 정원 입구까지 도달했을 때, 멀리 있던 제시드가 달려왔다.

“루베…… 아니, 마그달리사 영애. 있던 곳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이름으로 불러도 돼요.”

“네, 네에! 루베인 님!”

그의 얼굴이 마치 칭찬받은 강아지처럼 들떠 보였다. 세드릭과 마주하고 있을 때의 불쾌한 기분이 그나마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제시드는 바로 포털을 열어 루베인을 원래 있던 응접실로 돌려보내 주었다.

루베인은 응접실에 도착한 후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원래대로라면 힐을 벗고 치롤헷까지 걸어서 돌아갈까 하는 무모한 생각을 했을 정도로 열이 받았으나, 이제야 좀 진정되었다.

“생각보다 두 분의 만남이 짧았네요! 이야기는 잘 나누셨어요?”

제시드는 정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루베인과 세드릭의 대화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글쎄요.”

그녀가 애매하게 얼버무리자, 제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특이한 분이시긴 해요. 그래도…….”

“……?”

“아, 아뇨. 그것보다 영애, 어깨에 뭐가 묻었네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제시드가 손을 뻗더니 먼지를 털어내듯 그녀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러다가 그의 소매 단추에 걸린 것인지 루베인의 머리칼이 일부 엉켜서 빠졌다. 그녀가 눈을 찡그리자 제시드는 바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죄송해요.”

제시드는 거듭 사과한 후 꾸벅 허리를 숙여 작별 인사를 했다. 다시 포털을 불러내어 넘어가기 직전,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꼭 다시 뵈어요.”

루베인이 답하는 것보다 먼저 그의 모습이 포털 사이로 사라졌다.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

“대체 뭐가 뭔지…….”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며 루베인은 오늘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저택에 돌아가는 대로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트론에게 전할 생각이었다. 할 일을 정하고 나니 그나마 침착해졌다.

아무튼 중요한 건, 저 재수 없는 영식과 결혼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계획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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