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87화 (87/132)

87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15)

엘피는 저녁 전에 솔피시언 별저로 돌아와 간단한 식사를 마쳤다. 기다리던 루베인이 돌아온 것은 오후 9시가 다 되어서였다.

그녀는 무척 피로한 기색이었지만, 엘피를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언니, 보고 싶었어! 오늘 정말 괴로운 일만 가득했는데, 언니 얼굴 보니까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아!”

“루, 루베인.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엘피는 그녀가 자신을 껴안으며 외친 소리에 걱정이 되어 물었다. 루베인은 엘피에게서 몸을 뗀 후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있었다면 있고, 없었다면 없는데……. 일단 가이 님 연결해 줘. 가능하면 바로 트론 전하랑도 이야기하면 좋고.”

“응, 그럴게.”

루베인은 아일란을 통해 트론과 가이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전달했다.

공작부인이 2주간 부재중이라는 것과 그 외에 중요하게 느껴지는 제시드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전달했다. 불쾌했던 세드릭 율페이든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전후 관계를 알 수 있을 정도로만 말했다.

[아하하, 루베인 님답네요! 그만큼 그 영식의 태도가 무례했던 거겠지만요. 솔피시언 공작은 별말 없었나요?]

가이의 질문에 루베인이 콧등을 찡그리며 답했다.

“석찬 때 아예 언급이 없더라고요. 저쪽에서 말을 안 꺼내는데 제가 말하기도 뭣해서, 그냥 넘어갔어요. 제 태도를 문제 삼으면 저도 할 말은 있으니 상관없지만요.”

[율페이든 후작가라……. 솔피시언 공작가의 방계 중에서도 딱히 특출난 가문은 아닐 텐데.]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트론이 입을 뗐다.

[음, 그러게요. 이번 일 때문에 방계들도 조사했지만, 딱히 특색 있는 가문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엘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예의 뛰어난 실력을 지닌 소년 마법사의 이름이 제시드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당연히 동명이인이겠지만. 그렇게 특이한 이름도 아니니까. 그래도 괜히, 마음에 걸리네.’

트론이나 다른 이들에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속으로만 묻어 두었다.

[그 제시드라는 영식이 신경 쓰이니, 조사는 진행하겠습니다.]

[그것도 그렇고……. 세드릭이라는 자도 조사해야겠군.]

“그 재수 없는 남자는 왜요?”

루베인이 불퉁하게 물었다.

[그대와 혼담이 있었던 자니까.]

“호구조사해서 문제없어도 그 사람이랑 결혼 안 할 건데요?”

루베인의 단호한 태도가 재미있었는지 가이의 웃는 소리가 돌아왔다. 트론이 한숨을 내쉬며 가이를 조용히 시킨 후 답했다.

[……그런 의미로 조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부친이 특출 나지도 않은 가문의 영식과 그대를 붙인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흠……. 그러게요. 저희 각하라면 저를 더 비싸게 팔아먹으려고 하실 테니.”

엘피는 루베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실제로 그녀가 모르는 새에 트론과 혼담이 오가다가 깨진 상황이었으니, 루베인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트론은 그 사실을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율페이든 가문에 숨겨진 가치가 있든, 혹은 그 세드릭이라는 자가 뜻밖의 인재든,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이 부분은 확인해 보겠다.]

“네. 뭐가 됐든 결혼은 안 할 거지만요.”

[불평은 나 말고 그대의 부친에게 하도록 해.]

“……그러니까 저희 각하에게 한 방 먹여 줘야죠! 전하만 믿고 있어요.”

[선처하지.]

그 밖에 추가적인 정보를 교환한 후 연락은 종료되었다.

루베인은 팔을 쭉 펴며 침대에 쓰러졌다.

“하, 힘들었다.”

“고생했어, 루베인. 불쾌한 사람을 만나서 기분 안 좋았겠다.”

“정말 그래, 언니. 딱히 연애에 환상 같은 건 없지만, 정략결혼은 싫다고.”

루베인이 몸을 비틀며 강하게 주장했다. 엘피는 달래듯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정략결혼으로 그 따위 남자하고 결혼할 바에는, 차라리 왕자님이 낫겠네.”

“…….”

엘피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루베인이 ‘아’ 하고 실수한 듯한 얼굴을 하고 얼른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냥. 말하자면 그렇단 거지! 난 결혼 생각 없어, 언니! 왕자님한테 요만큼도 그런 관심은 없고!”

그녀가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엘피가 마음에 걸린 것은 그게 아니었다. 실제로 트론과 루베인 사이에 혼담이 오고갔다는 사실이었다.

‘……계속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처음에는 말해 봤자 루베인만 속상하겠다 싶어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녀 본인의 일이다.

여전히 모르는 걸 보면 마그달리사 공작도 따로 그녀에게 알리지 않은 모양이지만 계속 입을 다무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

오늘 루베인은 사전에 언질도 듣지 못하고 율페이든 영식과 선을 보게 된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그렇다면, 트론과의 일도 모른 채 지나가다가 나중에 알게 되면 배신감이 클 것 같았다.

그녀를 친구로 여기는 입장에서, 그렇게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엘피는 결심하고 루베인과 마주보았다.

“있잖아, 루베인.”

“응, 언니.”

엘피의 진지한 기색이 전해졌는지, 루베인도 자세를 바로하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번에 르터바이스 마물 토벌 때 마그달리사 공작님하고, 우리 왕자님 사이가 갈라진 거 말인데.”

“응.”

“실은, 마그달리사 공이 비공식적으로 왕자님한테…… 혼담을 넣으셨어. 루베인 너하고.”

루베인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엘피는 더듬더듬 전후 상황을 설명했다.

트론이 그 제안을 거절해서 마그달리사 공작이 딸을 거부당한 모욕으로 느꼈다는 것. 그 때문에 마그달리사 공작이 트론과 갈라서서 솔피시언과 손을 잡은 것으로 추측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랬구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은 루베인의 표정은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웠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맥이 풀린 것 같기도 했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기도 했다.

“루베인 너는 모르는 상황인데 괜히 말 보태 봤자 속상할 거 같아서 지금까지 말 안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서.”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말해 줘서 고마워.”

“아니…….”

엘피는 조심스럽게 루베인을 안았다.

루베인은 엘피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베인의 등을 토닥이고 있으려니,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이것저것 있는데 말이야.”

“응.”

“말해 줬으면 먼저 전하를 찼을 텐데 내가 차인 것 같아서 자존심 상해.”

그 말투는 평소처럼 익살스러웠다. 루베인이 그래도 기운을 차린 모양이라고 안도하면서 엘피는 후후 웃었다.

“에이, 됐어! 지난 일이야, 지난 일. 괜히 우리 각하랑 일이 꼬이게 된 건 나도 마음이 안 좋지만, 어차피 나도 거절했을 일인걸. 털어 버릴래.”

루베인은 다시 침대에 푹 누웠다.

“언니, 같이 자고 갈래?”

“그럴까? 옆에 사람 있으면 불편하지 않아?”

“괜찮아!”

엘피는 루베인을 따라 꾸물꾸물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루베인은 마법 등불을 끈 후 몸을 돌려 엘피와 마주 보았다.

“그건 그렇고, 전하 말이야. 왜 혼담을 거절하신 거래? 내 입으로 말하는 것도 뭣하지만, 정치적인 이해득실만 따지면 받아들이는 게 좋았을 텐데.”

“으음, 혼인할 생각 같은 거 없으시다고 그랬어. 루베인 너를 그런 의미로는 보지 않으신다는 이유도 있었고.”

“혹시…… 전하께서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야?”

루베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엘피는 오늘 트론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가장 먼저 말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글쎄, 나는 아무도 좋아하게 될 것 같지 않아.”

“전하께서는 아무도 좋아하게 될 것 같지 않다고 그러셨어.”

“……언니는 그걸로 괜찮아?”

“으음……. 별로 좋진 않지. 난 전하께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니까. 전하께서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했으면 좋겠어.”

루베인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엘피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언니도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나야 뭐, 지금도 행복한걸!”

“…….”

엘피의 얼굴에 구김살은 없어 보였지만, 루베인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필시, 트론과의 신분 차이 때문에 결혼 같은 걸 체념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녀가 연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이라고는 몇 권 읽어 본 로맨스 소설에서 나오는 내용 정도지만,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그 어떤 책에서도 좋아하는 사람과 맺어지지 않고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하는 내용은 없었다.

“난…… 언니 응원할 거야!”

“으응? 나도 루베인을 항상 응원하고 있어.”

“됐어, 나는. 남자도 필요 없고 연애도 필요 없으니까! 내 몫의 연애운도 다 언니 줄게.”

그 말을 하자 엘피의 얼굴이 조금 쓸쓸해 보였다. 엘피가 원작에서 제시드와 맺어졌던 루베인을 떠올리며 씁쓸해 한다는 것을 루베인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가망성 없는 트론과의 관계라도 생각났나 보다 짐작했다.

“그건 그렇고, 언니 며칠 뒤에 오라버니랑 외출할 거잖아. 사양 안 해도 되니까 오라버니한테 비싼 옷 뜯어내서 예쁘게 입어!”

“……그렇잖아도 부담스러우니까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루베인은 까르르 웃으며 엘피를 껴안았다. 가족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엘피가 언니처럼 소중했다.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

딜과 약속했던 도박장 방문일이 다가왔다.

엘피는 아침부터 부산하게 하녀들의 손에 이끌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치장을 했다.

와인색의 드레스에 짙은 붉은빛의 보석으로 장식하고, 입술도 마찬가지로 붉게 강조되도록 화장했다.

어깨와 등이 노출되어 자칫하면 다소 야하게 느껴질 수 있는 차림이었으나, 균형을 잘 잡아서 무척 어른스럽고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마그달리사 별저에서 머물며 노상 맨살을 드러내는 옷을 입고 있어서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엘피는 새삼스럽게 이 대담한 차림이 부끄러웠다.

평소의 자신과 동떨어진 분위기라 위장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참고 있긴 하지만.

“엘레나, 예쁘다! 오늘 정말 멋져.”

“……루베인. 고마워.”

주변에 하녀들이 있기에 부끄럽다는 솔직한 감상은 뱉지 못했다.

루베인은 엘피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전후좌우를 살피고는 만족한 얼굴을 했다.

“내가 남자였으면 첫눈에 반해서 청혼했을 거야!”

“후후. 그럼 난 공자님의 아내가 되는 건가?”

“그렇겠네! 행복하게 해 주겠소, 영애.”

루베인이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일부러 너스레를 떠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엘피는 미소 지으며 마음으로 감사했다.

자연스럽게 웨이브를 만든 머리를 최신 유행에 맞춰 틀어 올려 금장식으로 마무리하고 나니, 투왈렛룸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쿠일로스 영애. 들어가도 될까요?”

“아, 소공작님. 들어오세요.”

엘피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하녀들은 주변을 정리한 후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딜이 들어오자 루베인은 엘피와 팔짱을 낀 후 자기 일처럼 으스댔다.

“어때, 엘레나 정말 예쁘지?”

“……응, 정말로.”

방에 들어온 후 멍하니 엘피를 바라보던 딜이 겨우 대답했다.

“루베인도 참, 부끄럽게 그러지 마. 소공작님과 나란히 서기에는 부족하지만, 모쪼록 결례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천만의 말씀을요. 저는 아름다운 영애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꿈만 같은걸요.”

“남매 두 분께서 자꾸 과장된 말씀을 하시니 제가 부끄러워요…….”

엘피가 얼굴을 붉히자 딜이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예에 맞춰 팔을 내밀었다.

지금까지 트론과 가이 말고는 에스코트를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무척 어색했다.

‘오늘 파트너 건은 왕자님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받아들인 일이잖아. 힘내자.’

엘피는 트론을 떠올리며 불편한 마음을 필사적으로 눌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