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13)
“안녕하십니까, 소공작님. 공녀님. 이렇게 걸음해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솔피시언 공작은 일부러 홀까지 두 사람을 마중 나와 인사했다.
“솔피시언 공작님, 오늘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희 각하께서 대신 안부 전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그달리사 공도 이래저래 바쁘시니까요. 귀한 자제분을 대신 보내 주신 것만 해도 영광이지요. 허름한 저택이라 부끄럽습니다만, 모쪼록 편안한 시간 되셨으면 합니다.”
“역사가 느껴지는 멋진 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후후,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의례적인 덕담이 오가고, 루베인은 티나지 않게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 원래대로라면 안주인인 공작부인이 같이 인사를 하러 오겠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가이 님한테 들은 바로는 도박광이라고 했던가.’
공작부인인 라우라 솔피시언은 공작과 사이가 무척 좋지 않다고 들었다. 그래도 대외적인 활동 정도는 같이 해 준다고 들었는데, 소소한 손님맞이는 예외인 듯했다.
이후 마그달리사 남매는 공작의 안내에 따라 반쯤 유적지를 겸하는 솔피시언 저택의 구석구석을 안내받았다. 솔피시언 가문에 얽힌 역사 강의라도 듣는 기분이었다.
루베인은 애매한 미소를 띠며 격식을 차리고 있었지만, 마음 같아서는 하품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 후에 솔피시언 공작은 딜과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다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루베인은 응접실에 앉아 차를 대접받았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공작부인이 루베인 쪽을 접대할 테지만, 아예 보이지 않았다.
질문 자체가 결례는 아닐 거라고 판단한 루베인은 차를 내주는 하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공작부인과는 인사를 못 했네요. 몸이라도 안 좋으신 건 아닌지……. 그런 거라면 병문안을 하고 싶은데, 어려운가요?”
경험이 많은 사용인이라면 철면피를 깔고 그럴싸한 핑계를 댔겠지만, 하녀는 루베인의 질문을 듣자마자 눈에 띄게 당황했다.
“고, 공작부인께서는 현재 부재중이십니다.”
“어머나, 그렇군요. 솔피시언 공과 다른 일정인가요?”
보통 공표할 만한 다른 스케줄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루베인이나 딜 정도 되는 손님을 남편과 함께 맞이하지 않는 것은 실례였다.
대표적으로 루베인의 모친 역시 심약한 성미 때문에 일절 사교 활동을 하지 않기에, 사실 귀족가의 부인으로서는 실격이라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부인을 아끼는 마그달리사 공이 바깥에 병환 때문이라고 이야기해 두어서 다들 이해해 주는 것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르터바이스 부군도 사교 활동 참석 안 한다 그랬지. 뭔가 이번 대 대귀족들의 반려들이 대부분 그런 거 좀 재미있네.’
그녀는 잡생각을 하며 하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자기 선에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하녀의 얼굴은 새하얘져 있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대답해 줄 수 없는 일인가요?”
루베인이 힘을 주어 다시 묻자, 하녀가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저었다. 대귀족의 딸의 신경을 거슬러 심한 벌이라도 받지 않을지 걱정하는 듯했다.
“자, 잘 모르겠습니다. 벌써 2주 가까이 저택에 안 들어오세요.”
“행사에 참석하시기라도 하나요?”
“죄송합니다,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녜요. 무리하게 물어서 미안해요.”
하녀는 꾸벅 인사하고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는 것처럼 얼른 퇴장했다. 루베인은 턱을 괸 채 잠시 생각했다.
‘도박장에 상주한다고는 했지만, 아예 집에 안 들어오는 수준일 줄은 몰랐네.’
도움이 되는 정보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웠으나, 일단 가이를 통해 이야기는 전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딱히 차를 마실 기분은 들지 않아서 잔의 가장자리를 건드리고 있을 때, 누군가 입구를 노크했다.
“실례합니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허스키한 소년의 목소리였다. 사용인일까 생각하며 루베인은 들어오라고 일렀다.
조심스럽게 응접실로 들어온 것은 소년과 청년의 중간쯤에 걸쳐진 듯한 남성이었다.
키가 컸지만 아직 얼굴에 어린 티가 남아 있었다. 루베인보다 두세 살 정도 연하일 듯했다.
‘트론 전하랑 비슷하거나 어릴 것 같네. 그러고 보면 전하는 얄미울 정도로 빨리 자랐단 말이야.’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루베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림을 보아 하니 귀족으로 보였고, 아마 솔피시언 가문과 관련이 있는 소년일 듯했다.
“안녕하세요. 루베인 마그달리사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소년은 눈을 크게 뜬 채 루베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실례되는 생각이지만, 놀란 강아지 같은 인상이라고 생각했다. 무해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이쪽에서 인사를 했는데 대꾸가 없는 것은 결례였다.
루베인은 부드럽게 돌려서 지적했다.
“어느 댁의 영식인지 이름을 여쭈어도 될까요?”
“아……. 죄송합니다, 놀라서 그만.”
“제가 뭐 실수한 게 있을까요?”
혹시 옷차림이 이상한가 하고 루베인이 자신의 몸을 둘러보자, 소년이 손을 휘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살면서 영애처럼 아름다운 분은 처음 뵈어서 그랬습니다.”
“…….”
루베인은 객관적으로 자신이 그럭저럭 괜찮게 생긴 얼굴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칭찬도 많이 받는 편이었다.
하지만 면전에서 저렇게 직설적으로 외모를 찬양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귀족답지 않은 화법을 구사하는 소년이었다.
“과분한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성함이…….”
그의 과도한 칭찬을 적당히 넘기며 다시 묻자, 그가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채고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답했다.
“죄, 죄송합니다. 솔피시언의 방계인 율페이든 후작가의 삼남, 제시드라고 합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으나, 예상대로 솔피시언과 관계가 있는 가문이었다.
루베인은 생긋 웃으며 답했다.
“그러셨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율페이든 영식.”
“자,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실례가 안 된다면 이름을 불러 주실 수 있을까요?”
첫 만남에 지나치게 거리감이 가까운 소년이었다.
‘그렇게나 내 얼굴이 마음에 들었나.’
어차피 웬만한 귀족 영식이라면, 자신이 얼마나 귀족답지 않은 왈가닥인지 알자마자 나가떨어질 테지만 말이다.
루베인은 속으로 자조하며 대충 답했다.
“음……. 제시드 님이라고 하면 될까요?”
“네!”
제시드는 세상의 모든 행복을 끌어안은 듯한 얼굴을 했다. 통성명을 마치고 루베인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응접실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공작부인이 없는 상황이라고는 하나, 솔피시언 공작은 사전 고지도 없이 루베인이 모르는 가문의 영식과 마주치게 할 정도로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무언가 다른 용건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그렇게 물었다.
“아, 실은. 솔피시언 공께서 명하셨습니다. 영애를 혼자 두게 되어 결례였던 것 같다고요. 마그달리사 소공작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영애를 접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셨군요. 신경 쓰실 건 없었는데.”
애초에 여성인 자신을 상대하게 할 거라면 영식보다는 영애를 붙이는 게 나았을 것이다.
‘솔피시언 공이 굳이 아버님의 딸인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이유는 없을 텐데. 일반적인 영애라면 화를 낼 상황이니까.’
루베인은 귀족의 예의에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라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지만, 순수하게 위화감을 느꼈다.
“제시드 님께서 제 대화 상대가 되어 주시는 건가요?”
“아, 아뇨! 감히 그럴 수는 없지요. 실은 저희 주인니…… 아, 아니. 형님이 주최하는 조촐한 다과회에 초대할까 합니다.”
“갑작스럽군요……?”
“죄송합니다. 준비는 되었으니 바로 모시겠습니다.”
루베인은 거절할까 고민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솔피시언 공작이 일부러 명령을 했을 정도라면 제시드는 그의 수하로 일하는 자일 가능성이 높았고, 무언가 새로운 정보를 캐낼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어디로 가면 되나요? 솔피시언 저택의 정원이라거나?”
“아뇨. 교외입니다만……. 저와 함께 가시면 됩니다.”
제시드가 공중으로 시선을 던지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노란빛의 광선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움직이다가 커다란 문의 크기로 바뀌었다.
“포털이네요. 마법사셨군요.”
“네, 부족한 실력이라 부끄럽지만……. 가, 가시죠.”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루베인이 알기로 포털은 마법사 중에서도 고위의 실력을 가진 자들만 구사할 수 있었다.
이전에 들었던 정보가 머리에 스쳤다.
‘……외부에서 온 마법사. 솔피시언 공이 아끼던 소년.’
가이가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로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라고 했다. 놀라울 정도로 풍기는 분위기가 허술해서 그 정보와 전혀 매치가 되지는 않았으나, 루베인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런 제시드가 굳이 자신을 데려가 만나게 하려는 ‘형님’이라는 사람도 신경 쓰였다.
***
엘피는 가제보 아래에서 트론과 나란히 앉아 바다를 구경했다.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함께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전하는 항상 바쁘시니까…….’
그와 함께 지낼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라는 것이 오히려 진귀했다.
일에 관해 성실한 트론의 자세는 군주로서 칭찬받을 미덕이지만, 한편으로 몸을 상하게 할 정도로 몰두하는 것은 마음이 안 좋았다.
엘피는 트론의 옆모습을 보았다. 이제는 소년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고집스럽고 아름다운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이따금 가제보 안으로 들어오는 바닷바람에 그의 검은 머리칼이 흔들리며 백사장과 대비되었다.
엘피는 그가 여름과 어우러져 보이는 점이 퍽 마음에 들었다.
‘처음 뵈었을 때는 혼자서 여름 밖에 서 계신 것처럼 보였는걸.’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랐다. 여름이든, 혹은 그 어떤 계절이든. 멋진 풍경과 정취가 모두 그의 것인 양 누렸으면 했다. 세상의 모든 행복을 끌어모아, 그의 앞에 선사하고 싶었다.
“……론.”
“응?”
“있잖아, 지금 행복해?”
아직 그가 왕좌에 앉은 것은 아니었다. 헤럴드가 쓰러진 것도 아니었다. 그 외에도 적들은 남아 있으며, 당장 지금도 솔피시언을 상대해야 한다. 한숨을 돌릴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토록 평화로운 시간, 그가 조금이나마 행복을 느끼기를 바랐다. 행복이 거창하다면, 소소한 즐거움이라도.
트론은 뜻밖의 소리를 들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 얼굴에 어딘지 쓸쓸한 기색이 스쳤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응. 누나가 옆에 있으니까.”
“에헤헤! 나도 론의 옆에 있는 게 행복해!”
엘피가 구김살 없이 웃으며 바로 답했다.
트론은 잠시 망설이다가, 바람에 날려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뒤로 넘겨 주었다.
오랜만에 닿는 그의 손길이 반가워서 엘피는 무의식중에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앗, 미…… 미안.”
“아니…….”
사과하면서도 엘피는 손을 떼지 못했다. 자신보다 커진 그의 손을 쓰다듬는 것처럼 더듬었다.
“……있잖아, 론.”
“응.”
“지금 아무도 안 보니까, 잠깐 손잡아도 돼?”
트론이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