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12)
마그달리사 남매가 솔피시언 본저로 떠난 사이, 엘피는 아일란을 불러내서 뺨을 비볐다. 물론 매정한 아일란은 그녀의 외로움에 호응해 주지 않으며 몸부림을 쳤다.
엘피는 시무룩하여 아일란을 놓아주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가출한 설정이니 외출을 할 수도 없었다. 루베인도 없이 남의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무료한 일이었다.
“전하, 바쁘시겠지?”
이전에는 갑자기 자신이 트론의 곁을 비우게 되었다는 핑계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마땅히 연락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낮이니 트론은 분명히 일하고 있을 것이다.
‘……아, 그렇지만 어차피 마그달리사 소공작의 파트너로 도박장에 방문한다는 이야기는 전해야겠구나.’
엘피는 아일란에게 부탁하여 가이를 불렀다.
[네네, 엘피 님. 정기 연락이신가요?]
여느 때처럼 쾌활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엘피는 짧게 인사한 후 도박장에 딜의 파트너로 참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엘피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가이가 잠시 침묵했다.
“가이 님?”
[……으음. 이건 제가 전달하는 것보다는 엘피 님께서 전하께 직접 말씀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네요.]
“그렇지만 왕자님께서 바쁘지 않으신가 하고…….”
[뭐, 엘피 님 일이라면야 없는 시간도 내실 테니. 어디 보자, 오늘 루베인 님이랑 소공작이 솔피시언 본저에 방문한다고 했죠? 언제쯤 돌아오는지 아시나요?]
“석찬까지 함께하고 온다고 들었어요.”
[그럼 시간은 충분하군요. 그 집 사용인들에게 방에서 쉴 테니 방해하지 말라고 전달해 놓으실래요?]
“……?”
엘피는 의아해하면서도 가이의 말에 따랐다. 잠시 후, 엘피의 방 안으로 푸른 포털이 생성되었다. 가이가 사뿐히 방 안에 착지했다.
“가, 가이 님! 이렇게 오셔도 괜찮은 건가요?”
“마그달리사 별저의 보안은 모두 제 손아귀에 있으니 괜찮습니다. 아무튼, 가시죠.”
“어, 어디를…….”
“그야 왕자님 뵈러요.”
깜짝 놀랄 일이었지만, 며칠 만에 트론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순수하게 기뻤다.
엘피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이의 재촉에 따라 포털 안으로 들어갔다.
엘피가 포털을 통해 도착한 곳은 별채의 후원이었다. 가이는 손부채질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 북방 출신이라 역시 치롤헷의 더위는 견디기 힘들군요. 시원한 본채에서 쉬어야겠어요. 그럼 엘피 님, 이따 오후 7시쯤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 말씀은…….”
“왕자님은 별채 서재에서 일하고 계세요. 얼른 가 보세요.”
엘피는 우물쭈물하다가 꾸벅 인사하고 별채 쪽으로 달려갔다.
가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 뒷모습을 배웅한 후, 본채 쪽으로 마차를 내달라고 연락했다.
이로써 엘피의 소식을 직접 전했다가 트론에게 화풀이 당하는 상황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까다로운 상사를 모시는 죄겠죠, 이것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
엘피는 조심스럽게 별채를 둘러보았다. 실내는 조용했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중드는 사람이 없는 건가?’
트론이 별채에 가이 외에는 아무도 상주하지 말라고 명해 놨다는 사실을 모르는 엘피는, 그가 불편하게 지내는 것이 아닌가 싶어 영 마땅찮았다.
마그달리사 별저로 돌아가기 전에 트론에게 불편한 점이 없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서재 문을 노크했다.
“……소백작인가? 들어와.”
“저예요, 전하.”
그녀가 답하자 한동안 서재 안에서 답이 없었다. 잠시 후 놀란 목소리가 돌아왔다.
“엘피?”
“네, 왕자님.”
엘피는 문을 열고 서재로 들어갔다. 당황한 듯 책상에서 엉거주춤 일어나고 있는 트론의 모습이 먼저 보였다.
“어째서 그대가 여기에 있는 거지……?”
“어, 가이 님이 저 온다는 말씀 안 하셨어요?”
“……일부러 말을 안 했나 보군.”
트론이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보며 엘피는 후후 웃었다. 장난기 많은 가이가 트론을 놀라게 하려고 엘피가 온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늘 소공작님하고 루베인이 솔피시언 본저에 방문한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가이 님이 잠깐 오는 건 괜찮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포털로 데려와 주셨어요.”
“그랬군.”
트론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엘피 쪽을 다시 보았다. 그의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서, 엘피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나 싶어 가슴이 덜컥했다.
“……제, 제가 괜히 온 걸까요?”
“아니야, 그런 거.”
“왕자님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셔서…….”
“…….”
그는 눈을 크게 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 같더니, 결국 엘피의 불안을 덜어 주려는 것인지 솔직하게 말했다.
“……그 옷. 마그달리사 별저에서 계속 그렇게 입고 다니나?”
“아…….”
엘피는 자신의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평소보다 노출이 심한 옷이었다. 여름이라 시원하다는 장점은 있지만, 트론에게 지적받으니 어쩐지 부끄러웠다.
엘피는 몸을 움츠리며 답했다.
“그게, 처음에 입고 간 드레스가 이런 스타일이었잖아요. 그것 때문인지 제 취향이라고 오해한 모양이에요.”
“마그달리사 소공작이 계속 그런 옷을 보내나?”
“소공작님이라기보다는……. 그냥 실무진들이 마련해 주는 옷 같지만요.”
“아무튼, 그자 앞에서 항상 그렇게 차려입는다는 거로군.”
“일단은 그렇죠……?”
트론의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처음 이런 드레스를 입었을 때도 반응이 딱딱하더니, 역시 론은 이런 옷차림이 싫은 걸까?’
지금은 위장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는 목까지 단단히 여민 수수한 드레스를 입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제, 제 방에 숄이 있을 테니 두르고 오겠습니다.”
“아니. 지금은 괜찮아.”
트론은 고개를 젓고 엘피가 소파에 앉도록 손짓했다.
“별일은 없었나? 소공작과 트러블은 없었고?”
“네, 루베인도 그렇지만 소공작님도 자상하게 대해 주셔서요. 무척 잘 지내고 있어요.”
트론이 걱정할까 봐 한 소리였는데, 어째서인지 엘피의 의도와 다르게 그의 뚱해진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별일…… 없다면 됐다.”
“네. 전하야말로 괜찮으신 거예요? 별채에 시중드는 사람도 없어 보이는데.”
“난 괜찮아.”
“무리해서 일하시지 말고요.”
엘피는 거기까지 말하고 아차 싶었다. 일도 없는데 트론을 방해하러 온 사람 같았다. 그녀는 얼른 용건을 덧붙였다.
“아, 별일은 아니지만 보고할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음, 그래. 소백작을 통해도 됐을 텐데 직접 온 걸 보니 중요한 일인 모양이군.”
트론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엘피는 그가 기대할 만한 내용은 아니지 않나 싶어 손을 저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요, 가이 님이 전하께 직접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요.”
“……?”
“다름이 아니라 전하랑 가이 님이 조사하고 계시는 도박장이요.”
“응.”
“솔피시언 공작에게 초청을 받았는지, 소공작님도 한 번 보러 간다는 모양이에요.”
“……있을 법한 일이군. 마그달리사와 솔피시언은 이제 동맹 관계이니, 서로의 돈줄을 보여 주며 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의미도 있을 테고.”
“네. 그런데 그곳도 일종의 사교의 장이니까, 소공작님이 파트너가 필요하다고 해서요. 저를 청해 주셨어요.”
“…….”
오늘 본 중 트론의 얼굴이 가장 심각하게 굳어졌다.
“저, 전하……?”
“설마, 받아들였나?”
“네, 전하나 가이 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을지도 모르니까요. 그것도 그렇고, 전에 자선 파티에도 파트너로 청해 주셨는데 거절했거든요. 이것까지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요.”
“…….”
트론이 꿰뚫을 듯한 기세로 엘피를 빤히 바라보았다.
엘피는 자신의 선택이 무언가 잘못되었나 걱정되었다.
“제가 괜한 짓을 한 걸까요……?”
“……괜한 짓이라기보다는.”
그는 시선을 돌리며 무언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역시 실수를 한 게 아닐까 엘피가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트론이 입을 열었다.
“소공작이 그대에게 마음이 있는 것 아닌가 싶은데.”
“네?”
상상하지도 못한 엉뚱한 말에 엘피는 눈을 깜빡였다.
“와, 왕자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비약이 너무 심한 것 아닐까요?”
그녀는 당황하여 손을 저었다. 루베인도 자신을 놀리느라 비슷한 소리를 했지만, 설마 트론의 입에서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글쎄. 소공작 정도 되는 자가 친절을 베풀고자 하는 의도만으로 그렇게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군.”
“말도 안 돼요! 소공작님의 동생이 바로 그 루베인이잖아요. 그렇게나 미인이 가족인데, 제가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어요?”
“누나도 미인이야. 자기를 깎아내리지 마.”
트론이 직설적으로 받아쳤다. 이제는 그의 칭찬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그런 소리를 들으니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그렇지만……. 나, 나는 인기 같은 거 없어. 론. 괜히 그런 식으로 지레짐작하는 건 소공작님께도 실례 아닐까.”
“……그럼 만에 하나 소공작에게는 별 마음이 없다 치고.”
트론의 새카만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했다. 손끝 하나 닿아 있지 않은데도, 엘피는 어쩐지 그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다.
“누나는? 혹시 마음 있는 거 아냐?”
“어어……?”
“신분도 높고, 외견도 그만하면 준수하니까.”
“그렇게 따지면 우리 론이 훨씬 신분 높고,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는걸.”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즉답이 돌아왔다. 트론은 보통 자신에 대한 칭찬을 그냥 흘려듣는 편이었으나, 그녀가 소공작과 비교하며 말하니 몹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마치, 그녀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달라고 조르기라도 한 것처럼.
“……놀리지 말고.”
“사실이잖아. 소공작님도 루베인 때문에 눈이 높을 테지만 말이야. 생각해 보니, 나도 론 때문에 웬만한 남자는 눈에 차지도 않을 것 같아!”
트론은 자신이 그 정도로 대단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엘피가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은 조금 기뻤다.
‘엘피가,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자식을 낳고 사이좋게 평생을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 트론으로서는 알 수 없는 그런 추상적인 행복이 엘피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특정한 남성을 만나 마음을 주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그녀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좋은 남동생’이라면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데도.
무척 이기적이었다.
그렇다면, 좋은 남동생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 허락되는 걸까. 용납되는 걸까.
“……소공작이 아니어도, 혹시 누군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나한테 가장 먼저 말해 줘.”
이 정도쯤은 욕심내도 되는 걸까.
트론이 조심스럽게 입에 담은 부탁을 듣고 엘피는 쓴웃음을 지었다.
“에이, 그냥 농담 삼아 한 소리야. 어차피 난 결혼 생각 같은 거 없어.”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니까.”
“으음……. 알았어! 그럼 론도 누나한테 말해 줄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
트론은 엘피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를 향한 이 마음을 어떤 식으로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하는 예쁘고 고운 감정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저 그녀를 소유하고, 멋대로 휘젓고 싶을 뿐인 탁한 감정이었다.
그런 마음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를 존중하고 아끼고 싶었다.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글쎄, 나는 아무도 좋아하게 될 것 같지 않아.”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라며! 나야 그렇다 쳐도, 론은 왕비님을 맞이해야 하잖아.”
“……뭐, 그런 건 됐고.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지.”
트론은 자신이 먼저 꺼낸 화제를 말끔하게 덮어 버리며 말투를 바꿨다.
“이미 받아들인 이상, 잘 다녀오도록 해. 마그달리사 소공작과 같이 가는 거니까 별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고.”
“네, 왕자님. 제가 유의해서 가져올 정보가 있을까요?”
“‘특별 도박장’으로 가는 암구호가 필요하다. 나와 르터바이스 소백작도 조사하고 있긴 하나……. 본인들끼리 검증된 인맥으로만 뚫을 수 있는 루트로 보이는군. 그쪽도 제법 경계를 하는 상황이라 기한 내에 암구호를 얻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런 거라면……. 네엡! 혹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유념하겠습니다.”
“응. 저쪽에서 수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 절대 무리하지는 말고.”
“네!”
그녀는 무엇 하나라도 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기뻐 활짝 웃었다.
트론은 그녀의 해맑은 미소를 무척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따라서 미소 지었다.
“……아, 제 용건은 이상입니다. 왕자님 일하시는 데에 방해되니까 바로 돌아가는 게 좋을까요?”
엘피가 이어서 트론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말은 그랬지만, 정말로 바로 돌아가라고 하면 금방이라도 울지 않을까 싶은 얼굴이었다. 뺨을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무엇보다, 트론도 되도록 오래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아니. 내 일도 슬슬 일단락되어 가던 참이다. 같이 차라도 하지.”
“네! 얼른 타 올게요!”
“아니. 이곳에 있어. 본채에 연락해서 티세트를 준비시킬 테니까.”
아직 검토해야 할 서류가 한참 쌓여 있었지만, 오랜만에 그녀와 함께 보낼 수 있는 귀중한 시간과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엘피가 돌아가고 나서 새벽에 확인하면 그뿐인 일이었다.
하얀 천을 드리운 이동식 가제보를 해안에 설치하고, 햇살을 피해 그녀와 함께 느긋하게 함께 차를 마시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