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연모와 소년기의 끝자락 (9)
“오랜만이군, 마그달리사 공.”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전하.”
기쁘다는 말과는 달리 마그달리사 공작의 표정은 차분했다.
서로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투명한 막을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일부러 이런 곳까지 불러서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심상찮은 일인 것 같은데.”
“그렇게 긴장하실 것까진 없습니다, 전하. 그저 완전히 은밀한 공간이 필요했을 따름입니다.”
트론은 턱을 괴었다. 그의 말대로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나눈다면 훔쳐 듣는 이가 아무도 없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보안을 중요시한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라는 의미로 느껴졌다.
“근래에도 제 못난 딸과 교류하고 계시다지요.”
“말해 두겠지만, 딱히 내가 강제한 것은 아니다. 그대 딸의 의지야.”
“네, 압니다. 그걸 따지려고 말씀드린 건 아니었습니다.”
마그달리사 공작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요즘 온 나라에서 전하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지요.”
“…….”
“처필은 쇠퇴해 가는 중이고, 데하스도 전하를 능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락에 빠져 있는 헤럴드 대공 전하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겨우 3년 남짓한 시간 안에 이만큼 성과를 올리신 전하의 영민함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트론은 입꼬리를 올렸다. 공작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가지 않도록 오만하게 내뱉었다.
“사탕발림은 그만하고, 용건이나 말해.”
“송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전하께서 이번 마수 토벌 행사에 참석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마그달리사 공작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얼굴에서 지우지 않으며 제안했다.
“그렇다면 전야제 때 제 딸을 에스코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능하면, 달물결 꽃을 장식하신 채로.”
트론은 잠시 맥이 풀렸으나, 그것을 티 내지 않으며 말했다.
“겨우 그런 것을 부탁하자고 이런 곳까지 부른 것인가?”
“예전에 처필 건도 있고, 아무래도 전하와 만날 때는 안전을 신경 쓰게 되어서요.”
“…….”
“아무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전하께 이득이 될 만한 것을 제시하겠습니다. 달물결 꽃의 우선 거래권은 물론, 저희 영지에서 생산되는 다른 물품도 검토하지요.”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트론은 그를 경계했다. 석연치 않은 느낌이 반복되고 있었다. 겨우 달물결 꽃 따위에 마그달리사 공작이 목을 맬 이유는 없었다.
“그 꽃이 그렇게 중요한가.”
“나름대로 큰돈을 들인 연구였으니까요. 그만큼의 이윤을 바랄 수밖에요.”
공작의 얼굴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눈동자 안에서 진심을 읽어내기는 어려웠다. 어떤 의미에서는 라블미 백작보다도 더 까다로운 상대였다.
‘……엘피를 에스코트할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루베인에 대한 에스코트를 거절하고 당일에 엘피를 대동하고 나타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마그달리사 공작이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엘피가 안 좋은 시선을 받을지도 몰랐다.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찝찝한 제안이었다.
“전야제만 에스코트하면 되는 건가?”
“네, 후야제는 괜찮습니다.”
“…….”
그렇다면 후야제 때는 엘피와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전야제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 아쉬웠지만, 트론은 엘피가 구설수에 오르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좋다. 받아들이기로 하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마그달리사 공작에게 빚을 만들어 두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은근슬쩍 자신에게 우호적인 기색을 비추고 있었고, 이런 식으로 교류를 트다 보면 완전히 힘을 실어 줄지도 모른다.
마그달리사 공작이 우아하게 예를 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전하.”
“자세한 내용은 르터바이스의 실무진들에게 전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럼 후일 다시 뵙겠습니다.”
트론은 고개를 끄덕여 공작의 인사를 받아준 후 대화의 방을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남겼다.
***
“엘. 내가 먼저 말을 꺼내 놓고 이런 말 하게 되어서 미안한데……. 전야제 때 내가 에스코트 못 할 것 같아.”
르터바이스 본저로 가는 마차에 오른 후 트론이 어두운 표정으로 사과했다. 엘피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어……. 그것보다, 론이 나를 에스코트할 생각이었어?”
“안 그럴 거면 굳이 파티에 참석하라고 말할 리가 없잖아.”
“전혀 생각도 못 했어. 그것보다, 마그달리사 공이 루베인을 에스코트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신 거야?”
“……응.”
“그랬구나. 오랜만에 선남선녀가 나란히 파티장에 있는 걸 보겠네!”
엘피는 애초에 파티에서 트론과 함께할 거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반응에 그는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
“……론?”
트론의 기분 변화에 민감한 엘피가 뚱해진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트론은 엘피의 손을 잡아 올린 다음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후야제 때는 내가 에스코트할 거야.”
“그, 그렇지만. 후야제도 루베인을 에스코트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무래도 남들 눈도 있고…….”
“싫어.”
그는 단호하게 잘랐다. 엘피는 조금 난처했다. 생각지 못한 파티 참석도 모자라서, 왕위 계승권자라 이목을 한눈에 받을 트론 옆에 있어야 한다니. 그가 어째서 이렇게 자신의 파티 참석이나 에스코트에 힘을 쏟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더 거절했다가는 트론이 완전히 삐쳐 버릴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춤을 춘 지 너무 오래되어서 이제는 정말로 트론의 발을 밟을지도 몰라…….”
“밟히기 전에 내가 누나를 들어 올리면 되지 않을까?”
“무거울 텐데.”
“들어 올리는 데에는 문제없어.”
“그럴 때는 안 무겁다고 해 줘!”
엘피가 불평하자 트론이 그제야 웃으며 그녀의 뺨을 쿡쿡 찔렀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론이 업무 말고 다른 일로 고집을 부리는 경우도 잘 없으니까.’
가능하면 그의 바람은 모두 들어주고 싶었다. 어리광이 되었든, 사소한 고집이 되었든 자기 욕심을 우선해주는 것이 기뻤다.
“……아무튼, 알았어. 론이 바라는 건 뭐든지 해 줄게.”
“뭐든지라는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닌데.”
“론한테만 그래!”
“내가 주군이라서?”
“그것도 그렇지만, 나한테는 유일한 가족이니까.”
엘피는 활짝 웃으며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잠시 트론이 애매한 얼굴을 했지만, 이내 그 표정은 사라졌다.
***
교단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은 후, 트론은 남은 업무를 처리하며 가이에게 마그달리사 공작과의 대화와 결정 사항을 전달했다.
“그런 거라면 전야제 때 엘피 님은 제가 에스코트할게요. 전하도 그러는 편이 안심되시겠죠?”
“음…… 그래. 부탁하지.”
마지못해 수락하는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이 화제를 오래 끌면 트론의 심기를 해칠 것 같아서, 가이는 화제를 바꾸었다.
“마수와 관련된 정보는 정리해서 전하의 방에 놓아두었습니다. 안전 방비도 철저하게 챙기고 있으니, 위험한 일은 없겠지만요. 혹시 모르니, 모쪼록 다치시지 않는 범위에서 잘 부탁드립니다.”
“응. 변경백은 곧 쾌차할 거야. 걱정하지 말도록 해.”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그대는 자신의 모친에 대한 일에는 꽤 진지하군.”
가이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저처럼 진지한 사람이 어디 또 있다고요.”
“…….”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전하. 상처받아요.”
“뭐, 그대에게 있어서 변경백이 각별하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나는 모친에 대한 기억이 적다 보니, 좀 신기하기도 해서.”
트론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여전히 무표정했다. 가이는 조금 눈치를 살피다가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면, 전하의 어머님께서 어떤 분인지는 들어 본 적이 없군요.”
“내가 무척 어릴 때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하는 게 많지는 않다. 그 외에는 웰칸의 장로에게 들은 이야기 정도일까. 먼저 나서서 자식을 복수의 수단으로 쓸 정도로 능동적인 사람이라는 건 틀림없지만.”
“…….”
가이가 드물게 어두운 얼굴을 했다. 트론은 손을 저으며 말을 보충했다.
“딱히 비난하는 의미는 아니야. 그녀 입장에서 보자면 나는 그저 자신을 유린한 자의 핏줄에 불과하지 않은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
“……셀딕 왕이 빌어먹을 인간이었다고 해도, 전하에게 딱히 죄가 있는 건 아닙니다.”
“글쎄, 그렇게 이성적으로 선을 그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을 테니.”
트론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를 내려놓았다. 루베인에게 요청받은 고아원의 예산 증액 건이었다.
그녀가 언급했던 어떤 소녀의 사연을 들으며, 트론은 모친을 떠올렸다.
이 나라의 어딜 가든 권력을 이용하여 타인을 짓밟는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러나 개개인의 사연은 한 문장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고통은 사람을 갉아먹는다.
‘받은 아픔만큼 제대로 돌려주기라도 했다면 어머님의 원통함이 덜 했을까.’
그건 모를 일이었다. 어차피 자신도 모친에게 있어서는 간접적인 가해자나 마찬가지였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녀의 발목을 잡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이제는 기억에도 희미한 모친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은 어려웠다. 딱히 지금 하는 일이 그녀의 복수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아주 어릴 때는 모친에게 애정을 갈구했던 것도 같고, 그녀가 사라진 후에는 보고 싶어서 울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감정은 마모되고 기억은 풍화된다. 이제는 그녀를 떠올려도, 조금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튼, 변경백이 그대에게 훌륭한 부모라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그녀는 르터바이스의 정신적 지주고, 살아 있는 게 나에게도 이득인 상황이다. 서로 이해가 일치해서 돕는 것뿐이야. 나에게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고 할 건 없어.”
“그러니까 전하는…….”
가이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대신 거의 자신의 키를 따라잡은 트론의 머리칼을 헤집듯이 쓰다듬었다.
“됐어요. 다치지나 마세요.”
“응.”
“각하께서 쾌차하시면 같이 실컷 놀아요.”
“……그건 사양하고 싶은데.”
“차가우셔!”
농담처럼 넘기면서도 가이는 역시 마음이 안 좋았다. 신하이자 타인에 불과한 자신이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즐거운 길을 찾으라고 했던 자신의 충언을 잊지 말아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