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연모와 소년기의 끝자락 (8)
“오늘 어떠셨습니까? 엘피 님이 많이 좋아하셨어요?”
가이는 집무실로 들어온 트론에게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별로 그런 걸 좋아하는 성미는 아니라서.”
“엘피 님은 예전부터 그러셨죠. 으음, 그나저나 정말 옷만 사고 오신 겁니까? 나간 김에 여기저기 놀다 오시죠.”
“일해야 하는데.”
트론은 짧게 답하며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들었다. 가이는 이마를 짚었다.
“정말 전하의 성장 과정은 문제가 많네요……. 노는 법도 모르시고, 정서 교육도 부족하고.”
“곱게 자란 그대와는 달라서. 그나저나 마그달리사 공에 대한 정보는 안 들어왔나?”
“아. 그렇잖아도 루베인 님이 말씀해 주셨는데요.”
가이는 트론에게 책상을 양보하고 카우치에 털썩 앉으며 설명했다.
“얼마 전에 마그달리사 영지에서 달물결 꽃을 관상용으로 개량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약효는 없다는 뜻이겠군.”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뭐, 꽃 자체가 예쁘니까요. 곧 본격적으로 시판에 들어가는 모양인데, 그 꽃을 홍보할 생각으로 파티에 참석한다는 모양입니다. 마수 토벌 때 달물결 꽃을 같이 캐오니 행사와 관련도 있고, 괜찮은 생각이긴 하네요. 왕자님이 참석하셔서 평소보다 주목도가 높기도 하고요.”
“홍보라…….”
“루베인 님이 저희랑 만날 때는 거의 꾸미지 않지만, 미인이기는 하죠. 딸을 그 꽃으로 장식해서 광고탑으로 쓸 생각 아닐까요.”
“…….”
트론이 어딘지 석연치 않은 얼굴을 했다.
“뭔가 마음에 걸리시나요?”
“마그달리사 공은 기본적으로 다망한 사람이니까. 겨우 신상품 꽃의 광고를 위해 먼 영지까지 이동할 것 같지는 않군.”
“그렇긴 하네요. 비장의 상품이라고 해도……. 어차피 루베인 님을 꾸며서 광고할 거라면 그녀만 저희 영지로 보냈어도 되니까요.”
반항적으로 굴 때가 없는 건 아니지만, 루베인이 그 정도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성미는 아니었다.
“제 생각에는 전하가 목적이 아닐까 싶지만요.”
“그런 것 치고 아직 이쪽에 접촉은 안 해 오고 있는데.”
“곧 움직임이 있지 않을까요?”
가이가 답하는 것과 동시에 마치 타이밍을 잰 것처럼 집무실 문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집사가 송구한 얼굴로 들어왔다.
“전하도 계신데 급히 죄송합니다, 소가주님. 아무래도 빨리 보시는 게 좋을 듯하여.”
“괜찮아요. 무슨 일이죠?”
“마그달리사 공작님이 트론 전하께 마법 전보를 보내셨습니다.”
가이는 피식 웃으며 제 말이 맞지 않냐는 듯 트론과 눈을 마주쳤다.
전보에 쓰여 있는 내용은 가능하다면 내일 오후에 교단에서 만나 환담이라도 나눌 수 없느냐는 이야기였다.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트론은 바로 응낙하는 답신을 보냈다.
***
올페마에 있는 교단은 도시 분위기에 맞춰 크리스털과 대리석이 교차한 웅장한 건물이었다.
시녀장으로서 트론을 보좌하기 위해 따라온 엘피는 주변을 살폈다. 예배가 없는 날이기에 교단은 조용했다.
홀에 들어서자 사제 한 명이 조용히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트론 전하. 마그달리사 공작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긴히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다고 하여, ‘대화의 방’을 준비했습니다.”
트론의 표정이 약간 심각해졌다. ‘대화의 방’이라는 것은 교단이 보증하는 안전하고 중립적이며 비밀스러운 대화 공간이었다.
주로 적대적인 관계의 자들이 외부에 누설하고 싶지 않은 정보를 당사자들끼리 조정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곳이다.
“……그렇군. 알겠다.”
마그달리사 공작의 용건이 심상치 않은 것이리라 생각한 트론은 엘피 쪽을 보았다.
“시녀장. 잠시 예배당 안에 있도록 해. 이야기만 마치고 오겠다.”
“알겠습니다, 전하.”
엘피는 트론이 사제를 따라 나가는 뒷모습을 잠시 눈으로 배웅하다가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예배가 없는 날이라 안에는 사람이 적었다.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만 한두 명 있을 뿐이었다.
엘피는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 앉은 다음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신님. 저는 정말 라이샤가 맞나요? ……그렇다면 왜 계시를 내리시지 않았나요? 전 세계를 구하라느니 누구를 도우라느니 하는 신님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걸요.’
엘피는 가끔 이런 식으로 기도처럼 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때가 있었다.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신님이 대답해 주시고 다른 계시를 내리셔도, 저는 계속 트론 전하를 위해서 힘을 쓸 거지만요. 그냥, 가끔 불안해서 그래요.’
믿고 섬기지도 않는 신을 상대로 허무한 질문을 한 것이 약간 부끄러워져서,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비볐다.
예배당 안에 희미하게 성가가 울리고 있었다. 아마 다른 층에서 성가대가 노래를 연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더 이상 기도를 할 내용도 없어서 트론을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밖에 나가 산책이라도 할까 생각했을 때, 초로의 고위 사제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빛의 날개 아래 신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신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엘피가 의례적인 교단의 인사를 받아주자, 그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무언가 고민이 있으셔서 신께 답을 구하고 싶으신가요?”
“아……. 일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흐음. 그렇지만 영애의 얼굴에는 어쩐지 고민이 느껴집니다.”
나이 든 사람 특유의 통찰력이었다. 엘피가 머뭇거리자, 그가 부드럽게 권했다.
“어차피 일행을 기다리신다면, 시간도 있으실 테니. ‘마음의 방’에서 고민을 풀어놓아 보시는 건 어떨까요?”
“저, 저는 독실한 신자가 아닌데요.”
“괜찮습니다. 신님 아래에서 모두 다 같은 축복을 받은 자식들입니다. 고민은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지요.”
“…….”
“실은, 저희 교단에 잠시 머물며 훈련 중인 견습 사제가 있어서요. 모쪼록 그의 경험을 쌓게 해주는 의미에서도 편하게 고민을 말씀해 주시면 기쁘겠습니다.”
그의 솔직한 말에 엘피는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어느 업계에나 실습 기간은 필요한 모양이다. 어차피 당장 할 일도 없으니 이런 일로 도움이 되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그럼, 잠시 신세 져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마음의 방’을 처음 겪어 보는 것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절대적인 비밀 보장을 바탕으로, 사제들이 신자들의 고민을 듣고 그와 관련된 신의 말씀을 전하거나 위로를 해 주는 공간이었다.
이윽고 엘피는 사제의 안내에 따라 좁고 어두운 복도로 들어갔다. 구조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굽이굽이 이상한 각도로 꼬여 있는 복도를 5분 정도 걸어가자, 작은 문이 나왔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낡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엘피는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앞에는 나무로 된 커다란 칸막이가 있었다. 아마 그 건너편에 견습 사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엘피가 인사하자 건너편에서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돌아 왔다.
“안녕하십니까. 이 공간에서 당신은 위대한 신의 첫 신도 ‘른바우’의 이름을 받습니다. 이후로 저는 당신을 른바우라고 부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사제님.”
대답을 하면서 엘피는 살짝 위화감을 느꼈다.
‘……이상하다.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 같은데.’
하지만 아무리 떠올려도 사제 중에 알고 지내던 사람은 없었다.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과 착각했나 보다 생각하며 그녀는 자세를 바로 했다.
“른바우 님. 어떤 고민 때문에 ‘마음의 방’에 오셨습니까?”
“…….”
엘피는 잠시 생각했다. 고민이야 많지만, 라이샤와 관련해서 직접 털어놓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무척 소중한 사람이 있는데요. 항상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일을 해요. 그러지 말라고 말려도 듣지 않아서……. 항상 고민이에요.”
“그렇군요. 신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근로하는 자에게 축복이 있을지어다, 라고. 분명히 른바우 님의 소중한 사람에게도 축복이 있겠지요.”
이야기의 초점이 그게 아니었기에, 엘피는 잠시 당황했다.
“물론 근로하는 자세는 칭찬받을 일이지만……. 저는 그 사람이 자신을 희생하지 말고 아껴 줬으면 해서요.”
“희생하는 정신 역시 아름다운 법입니다. 른바우 님께서는 달물결 꽃에 얽힌 설화를 아십니까?”
가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설화라는 것만 언뜻 들었기에, 엘피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견습 사제는 억양 없는 어조로 설명했다.
“한 연인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아름다웠으나, 불행히도 여자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온갖 약을 갖다 바쳤지만 소용없었죠. 그러다가 남자는 달물결 꽃에 대해 알게 됩니다.”
어쩐지 이야기의 전개가 예상되었다.
“남자는 그 꽃이라면 여자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용감하게 마수의 서식지에 발을 들입니다.”
“혹시 그 꽃을 얻지 못하나요?”
“아뇨. 꽃은 구합니다만, 남자는 달물결 꽃이 쉽게 시들어 버린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좌절하던 남자는 우연히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견습 사제의 목소리가 어딘지 즐거워 보였다.
“그 꽃이 사람 피를 먹으면 생생해진다는 사실을 말이죠.”
“……!”
“남자는 자신의 피를 양분으로 하여 여자가 있는 집까지 꽃을 가지고 옵니다. 그 대신 남자는 너무 많은 피를 소실하여 목숨이 끊어지고 맙니다. 여자는 남자의 목숨을 희생하여 얻은 그 꽃을 차마 약으로 쓰지 못하고 남자와 함께 죽는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저, 정말 달물결 꽃이 사람의 피를 먹나요?”
“하하, 그럴 리가요. 그냥 옛이야기일 뿐이죠.”
엘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트론이 달물결 꽃을 구해 올 때 그런 문제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말릴 상황이었다.
‘……그나저나 어쩐지, 가이 님이 이 설화를 싫어하는 마음이 이해 가는걸.’
비극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듣는 사람의 기분을 찜찜하게 하는 이야기였다.
그것보다, 종교인이 희생정신 운운하며 예시로 들 만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았다.
“이처럼, 희생정신이란 아름답고도 눈물 나는 것이지요. 른바우 님의 소중한 사람은 본인이 바라서 그 일을 하는 겁니까?”
“그렇긴…… 합니다.”
“그렇다면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게 어떨지요. 신은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존중해야 하노라고.”
“…….”
엘피는 말문이 막혔다. 딱히 큰 기대를 걸고 마음의 방에 들어온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조리 없고 의미 없는 대화가 될 줄은 몰랐다.
‘아직 견습 사제라고 했으니, 상담하거나 고민을 들어주는 방법을 아직 잘 모르는 걸지도.’
희생정신의 이름 아래 장본인이 죽는 이야기를 꺼낸 것은 불쾌하긴 했으나, 견습 사제에게 화를 내는 것도 의미 없이 느껴졌다.
엘피는 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적당히 자리를 파하기로 했다.
“좋은 말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후 사제님의 충고를 참고하겠습니다.”
“다행입니다. 모쪼록 빛의 날개 아래 신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신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엘피가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제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연인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모쪼록 사이 원만하시길 빕니다.”
“…….”
굳이 연인이 나오는 설화를 화제로 꺼낸 이유가 이것이었던가. 요즘 들어 이렇게 오해받는 일이 잦은 것 같았다. 엘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적당히 대답했다.
“……연인은 아닙니다만, 말씀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렇습니까. 살펴 가십시오.”
“네, 사제님께서도 평안하세요.”
엘피는 문을 닫고 다시 어두운 복도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 후, 혼자 남아 있던 사제가 코웃음을 쳤다.
“흥, 별 볼 일 없는 여자잖아. 괜히 기대했네.”
그나마 대화를 할 때는 예의를 차리던 말투가 완전히 바뀌어, 경박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