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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64화 (64/132)

64화. 연모와 소년기의 끝자락 (10)

전야제 당일은 빠르게 돌아왔다.

엘피는 트론이 루베인을 데리러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의상을 점검했다.

그가 입은 의상의 가슴께에는 달물결 꽃으로 만든 코사지가 꽂혀 있었다. 달물결 꽃을 강조하기 위해 원래 입기로 했던 의상은 장식을 덜고 다소 심플하게 조정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단정한 분위기가 시선을 끄는 구석이 있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후후, 전하. 오늘도 정말 멋지세요.”

엘피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 본인도 파티 때문에 꾸미고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수수한 편이었다.

금발은 틀어 올려 에메랄드 머리핀을 꽂아 마무리하고, 예의 부티크에서 골랐던 옅은 옥색의 드레스를 입었다.

“그대도 아름답다.”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트론의 칭찬에 이전보다 면역이 생긴 엘피가 인사치레로 넘겼다.

“진심이야.”

“네, 네. 저보다 몇십 곱절은 아름다운 영애를 맞이하러 가시는 거니까요. 그때까지만이라도 아름답다고 쳐요.”

“…….”

트론은 잠시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그럼 마그달리사 부녀가 머무는 호텔로 가 보겠다. 파티 회장에서 다시 보도록 하지.”

“네, 전하. 이따 뵈어요.”

엘피의 배웅을 받으면서도 트론은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그달리사 공작에 대한 석연찮은 위화감이 풀리지 않은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어느 쪽이 되었든 오늘 결론이 나겠지.’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르터바이스 본저를 뒤로 했다.

트론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 루베인은 막 준비를 끝낸 참이었다. 짧은 머리가 거슬려 보이지 않도록 바싹 올려붙이고 티아라와 달물결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대담하게 어깨와 등, 가슴을 파낸 짙은 푸른색 드레스도 그녀의 중성적인 이미지와 맞물려 외설적이라기보다는 독특한 매력이 풍겨 나왔다.

물론, 정작 그 옷을 입은 장본인은 시큰둥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트론을 보고 예의는 갖추어 인사했으나 의욕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피차 마찬가지였으므로 트론은 딱히 그녀의 태도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잘 오셨습니다, 트론 전하. 전하께서 와 주시니 방이 다 훤해지는 것 같군요.”

루베인보다 늦게 나타난 마그달리사 공작이 덕담을 던지며 트론을 환대했다.

“그래. 바로 출발하면 될까.”

“네. 제 딸과 함께 먼저 출발하시지요. 저도 준비하고 바로 뒤따라가겠습니다.”

그렇게 트론은 루베인과 함께 마차를 타고 다시 르터바이스 본저로 이동했다.

아직 해가 짧은 르터바이스 영지는 벌써 서쪽 하늘이 노을로 물들기 시작했다. 크리스털을 기조로 한 르터바이스 본저는 주홍색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시종관의 안내를 받고 긴 회랑을 따라 회장으로 걸어갔다.

트론의 팔짱을 끼고 있던 루베인이 그에게만 들리게 투덜거렸다.

“각하의 요청 따위 거절하지 그러셨어요, 왕자님.”

“이래저래 거절하기 곤란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대의 에스코트를 거절하고 시녀장과 함께 파티회장에 나타나서야, 마그달리사 공의 체면을 구기게 되는 일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요. 엘피 언니가 실망 안 했나요?”

“글쎄, 시녀장 본인은 내 에스코트를 받을 거라는 생각조차 안 했던 모양이더군.”

“언니도 참……. 더 적극적으로 가지 않고.”

“적극적?”

“아, 아뇨. 이번 행사 때 전하께서 계속 저를 에스코트하시는 거죠?”

“아니. 마그달리사 공은 전야제만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어라?”

루베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각하께서는 왕자님께서 계속 에스코트해 주실 거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이번에는 트론이 의아한 얼굴을 할 차례였다. 역시 이상했다. 무언가 이물질이 껴서 덜그럭거리는 것처럼 위화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뭐, 제가 후야제에 참석 안 하는 걸지도 모르고요. 아무튼 가시죠, 전하.”

“……알았다.”

파티 회장에 들어서자 먼저 회장에 도착해 있던 사람들이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파티의 주최자인 가이가 예의에 맞춰 두 사람을 정중하게 맞이했다.

“전하, 다시 뵙습니다. 루베인 님도 며칠 만이네요.”

“르터바이스 소백작님, 환대 감사합니다. 저희 각하가 억지를 부려 참석한 것 같아 죄송해요.”

“천만의 말씀을요. 조촐한 행사입니다만,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가이의 옆에 있던 엘피도 루베인을 향해 미소했다.

“오늘 파티는 두 분 다 바쁠 테니 이야기는 오래 나누지 못하겠네요. 나중에 따로 자리 만들어요. 마그달리사 영애.”

“알겠습니다. 이나드 영애도 부디 즐거운 파티 되시길.”

대외적인 눈이 있기에 서로의 인사는 정중하고 예의 바른 형태가 되었다.

인사를 나눈 후 엘피는 가이의 팔을 잡은 채 멀어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트론의 얼굴이 뚱해졌지만, 알아보기 힘든 변화였다.

“이제 뭐 할까요, 전하. 주최자한테는 인사했고. 이쪽은 저희 영지 관할이 아니라 제가 인사할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루베인이 팔짱 낀 손에 힘을 주며 트론에게 물었다.

“시장하진 않나?”

“딱히요. 애초에 허리를 얼마나 졸라맸는지, 물만 조금 마셔도 토하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말투가 슬슬 무너지고 있는데.”

“허리를 조인 만큼 인내심이 고갈되고 있거든요.”

루베인이 농담을 섞어 말했다.

“그대는 모레 있을 토벌 행사에는 개회식만 참석한다고 그랬지.”

“네. 재미있는 기회 같아서 검 솜씨를 시험할 겸 참가해 보고 싶긴 한데, 각하께서 허락 안 하실 테니까요. 별수 없죠.”

엘피의 예언 때문에 그녀가 마수 토벌에 참가하리라 생각했지만, 다시 확인해도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당일에 무언가 트러블이 생길 가능성도 적었다. 가이가 계획을 철저하게 다시 확인했고, 별다른 문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생각하고 있으려니, 한발 늦게 출발한 마그달리사 공작이 회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트론을 향해 짧게 눈인사를 하고, 파티의 주최자인 가이에게 인사했다.

“오늘 이렇게 파티에 참석할 기회를 주어서 고맙소, 르터바이스 소백작.”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이렇게 지역 축제나 다름없는 파티에 모시게 되어 부족하지 않나 많이 민망합니다.”

“무슨 말씀을. 훌륭하기만 합니다. 슬슬 손님들은 다 모이신 것인가요?”

“네, 마그달리사 공. 규모가 작은 파티라 그렇게 손님이 많지는 않습니다.”

가이의 대답을 듣고 공작이 은근한 목소리로 청했다.

“괜찮다면 잠시 파티에 참석한 이들에게 한 말씀 올릴 기회를 얻을 수 있겠소? 마수 토벌 행사를 앞두고 여흥이 될 것이오.”

“하하,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감사했을 텐데요.”

“원래 이런 여흥은 즉흥적일수록 자극적인 법이지요.”

엘피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얌전히 가이의 곁을 지키면서도 다소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콕 집어서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마그달리사 공작의 의중이 그렇게 순수한 것이 아니리라는 예감이었다.

“어떤 걸 하시려고 합니까?”

“마수 토벌 행사 때는 달물결 꽃을 따 오는 절차도 있다고 들었소. 트론 전하께서도 참석하신다던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 행사에 소소한 상품을 걸어 분위기를 띄울까 합니다.”

딱히 나쁜 의도는 아니었고, 거절할 만한 이유를 찾기는 어려웠다. 결국 가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편한 대로 하시라고 허락했다. 마그달리사 공작은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윽고 본격적인 전야제 파티가 시작되었다. 주최자인 가이가 매년 이루어지는 형식적인 개회사를 전한 후 공작의 요청대로 그가 이야기할 기회를 주었다.

마그달리사 공작은 온화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특유의 웃음을 얼굴에 올리며 좌중을 돌아보았다.

“갑작스레 자리를 청했으나 너그러이 허락한 르터바이스 소백작에게 우선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칼퍼 마그달리사입니다.”

사람들이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공작은 몇 마디 사교적인 인사를 덧붙인 다음 본론으로 들어갔다.

“실은 저희 영지에서 이번에 달물결 꽃을 개량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아쉽게도 약재로는 쓸 수 없습니다만, 이렇게 장식이나 관상용으로 쓸 수 있지요.”

공작은 자신의 의상에 장식된 달물결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가장 이목을 끌고 있는 트론 왕자와 마그달리사 영애 역시 달물결 꽃으로 옷을 장식하고 있다. 마수 토벌 행사에서도 상징적인 위치의 꽃이다 보니, 다들 흥미로운 기색이었다.

“이 아이의 어머니뻘 되는 꽃이 바로 이번 마수 토벌 행사의 상징이지요. 르터바이스의 용맹한 전사들이 매년 마수들을 물리치고 달물결 꽃을 꺾어 오신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 회장에도 그분들께서 여럿 참석해 주셨다지요. 그런 멋진 자리를 빛내고자, 제가 작은 상품을 더해 여흥을 돋우려 합니다.”

트론은 별다른 표정 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루베인은 장삿속 빠른 자신의 아버지가 여전하다 싶어서 그냥 쓴웃음만 짓고 있었다.

그때, 마그달리사 공작의 의미심장한 시선이 트론을 향했다.

“마수 토벌 행사에서 가장 큰 달물결 꽃을 꺾어 오시는 분께 유서 깊은 하븐 중앙 호텔의 1년 숙박권을 제공해 드릴까 합니다. 또한……. 부족한 아이입니다만, 후야제 파티 때 제 딸 루베인이 토벌 행사의 영웅인 승자의 파트너가 될 것입니다. 부디 그녀에게 아리따운 꽃을 바쳐 주시길.”

엘피는 공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탄식하며 루베인을 보았다.

루베인은 처음에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가 눈에 불꽃이 튀는 게 보일 정도로 소리 없이 화를 냈다. 그녀의 성격에 자신을 상품으로 거는 듯한 이 처사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엘피는 자신이 꿈으로 본 미래가 어쩌다 일어난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루베인은 자기 손으로 가장 큰 꽃을 꺾어 와서 부친이 세팅한 이 상황에 어깃장을 놓기 위해 마수 토벌 행사에 참가할 것이 분명했다.

“진정해, 마그달리사 영애.”

짧은 시간 안에 상황을 파악한 트론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루베인을 말리는 것이었다.

그는 옆에 있는 루베인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부친의 멱살을 잡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3년 전 일로 그대도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소란을 피워 봤자 또 근신 처분 당할 거다.”

“……저는요, 정말 분해요.”

“알아.”

루베인 정도로 화가 난 건 아니었지만, 트론 역시 불쾌했다.

이번 마수 토벌 행사에는 왕자인 트론이 참가한다. 또한, 전야제에서 그가 루베인을 에스코트했다. 이런 상황에서 눈치 없이 승자 자리를 탈취할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트론이 3년 전처럼 눈에 띄지 않는 천출 왕자인 상태였으면 모를까, 그는 현재 국왕 권한 대행이었다.

그렇다면 마그달리사 공작이 바라는 건, 행사에서 트론이 달물결 꽃을 따 와서 자신의 딸에게 바치고, 후야제 때도 계속 에스코트하는 그림일 것이다.

심지어 연인을 위해 바쳤다는 설화가 딸려 있는 꽃을 루베인에게 바치게 하는 퍼포먼스까지.

그 의도는 한 가지밖에 짐작 가지 않았다.

트론은 입을 꾹 다문 채 마그달리사 공작을 노려보았다.

***

파티가 시작되고 나서 트론은 마그달리사 공작과 함께 테라스로 나갔다. 단둘이 되자마자 그는 공격적인 목소리로 공작을 비난했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는데, 마그달리사 공.”

“허허. 소신이 마련한 작은 여흥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모양이군요.”

“말장난은 그만하도록 하지. 본론을 말해.”

마그달리사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

“보위에 오르는 자에게는 마땅한 반려가 필요한 법이지요.”

“…….”

“많이 부족한 녀석이기는 하나, 제 딸이 그럭저럭 그 자리를 감당할 만한 인물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어떠신지요.”

트론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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