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16)
엘피는 흠칫 몸을 떨며 옆을 보았다. 트론이 자신의 침대맡에 앉아 있었다.
“엇, 앗……. 와, 왕자님. 왜 여기에…….”
잠들기 전 마지막 일이 간신히 떠올랐다.
사먼과 이야기를 나누고 탈수할 정도로 울다가 부축을 받고 간신히 왕자궁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도 다시 울다 지쳐서 침대에 쓰러졌고,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돌아와 보니 그대가 방에서 자고 있더군. 드문 일이라 아픈 것 아닌가 걱정되었다.”
간략하게 답하고 그는 엘피의 양뺨을 쓸었다.
“울었나?”
“아…… 그게…….”
이유를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사먼과 약속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트론의 주술 능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하께서 내 기억을 지울지도 몰라. 그건 싫어.’
혹은, 어쩌면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새에 트론이 지워 버린 기억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직 트론에게 완전한 신뢰를 얻지 못했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았다.
“혼자 있으려니 여러 가지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 가족들을 떠올렸나 보구나.”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트론이 생각한 건 이나드 자작가겠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트론 역시 가족과 마찬가지였다.
“더 빨리 복수해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늦어져서 미안하다.”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도 심려할 것 없다. 오늘 일도 잘 풀렸으니까. 마그달리사 쪽에서도 일시적이지만 협력해 주기로 했다.”
엘피의 얼굴에서 손을 떼며 트론이 위로하듯 말했다.
“앞으로도 힘쓸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해.”
이미 그는 과할 정도로 노력하고 있었다. 이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엘피는, 트론에게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왕좌로 향하는 길은 멈추고 싶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그곳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를 왕으로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게, 정말로 전하가 바란 일이었을까?’
본인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엘피는 질문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트론의 어깨를 안았다. 뺨에 손이 닿을 때도 느꼈지만, 무척 차가웠다.
“몸이 차요, 전하.”
“원래 차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왕자님은 체온 높으시다고요.”
“착각이겠지.”
“억지 부리지 마시고요! 얼마나 이러고 계셨던 거예요?”
“별로 오래되지는 않았어.”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에 가까웠다. 게다가 트론의 옆에는 서류가 가득 쌓여 있었다. 일하면서 자신의 곁을 지킨 모양이었다.
엘피는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프셨으면서 왜 또 몸을 안 아끼세요. 가이 님이 안 말렸어요?”
“좋은 시간 보내라고 하던데.”
“…….”
가이에게 진지함을 바란 게 잘못이었던 모양이다.
“제가 정말 아팠던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아팠다고 해도, 왕자님이 저를 간호할 필요는 없어요.”
“그대는 간호해 줬으면서, 왜 나는 안 되지?”
“그야 저는 전하의 시녀지만, 전하는 왕자님이니까요.”
트론이 살며시 몸을 떼고 나서 엘피의 뺨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잡아당기듯 꼬집었다.
“저, 전하?”
“동생이기도 해. 누나.”
“읏…….”
“아무튼, 알겠어. 걱정 끼치려는 건 아니었어.”
“방에 돌아가서 바로 자야 해!”
그는 끄덕이며 일어나려는 그녀를 자리에 눕혔다.
“아, 옷시중…….”
“됐어.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더 자.”
트론이 눈을 감겨 주려는 것처럼 손으로 시야를 막았다. 엘피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있잖아, 론.”
“응.”
“론은 오래오래 살아서 행복해야 해.”
“…….”
“꼭 그래야 해…….”
그는 대답 없이 손을 떼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지쳐 있던 엘피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얕게 숨소리를 내며 다시 잠이 들었다.
***
데하스 별저의 집무실은 캄캄했다. 방 안에 놓인 붉은색 등불 하나만 겨우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여성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둑어둑한 공간을 갈랐다.
“지금 그 말이 사실이냐?”
“네, 백작님.”
라블미는 잡아먹을 기세로 방금 읽었던 편지를 다시 읽어 내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용은 그녀가 이해한 그대로였다.
머저리 같은 처필이 이쪽과 상의도 하지 않고 마그달리사에게 독을 썼고, 그 사실을 들켰다. 심지어 증거까지 잡혔다.
이 일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지 않는 대신, 처필은 데니옴 회의에 불참하기로 했다. 즉, 이번 회의에 한해 발언권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 멍청한 것이!’
스레데니옴의 역사는 독과 저주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나도 문제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독으로 상대를 음해하는 행위는 국법으로 다스리는 중죄이며, 증거가 잡혀 고발당하면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처필은 그 비난과 책임을 피하기 위해 이번 회의의 발언권을 마그달리사와 거래 조건으로 교환한 모양이었다.
“……알겠다. 처필에게는 데니옴 회의 끝나고 차후 대책 논의할 날을 잡자고 전해.”
“분부 받들겠습니다.”
라블미는 테이블 위의 등불을 집어 던지고 싶은 기분을 진정시켰다. 헤럴드와 똑같은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자세한 내용이 헤럴드 전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해라. 그리고…….”
복잡한 머리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며 그녀는 이를 갈았다.
이 일이 그저 우연히 일어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히 그 배후에 트론이 있었을 것이다. 최대한 경계했건만, 처필 때문에 발목이 잡힐 줄은 몰랐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 ‘제2안’을 실행해.”
“그 방안이라면 리스크가 커서 검토 후 폐기하지 않으셨나요?”
“뭐가 되었든 트론을 물 먹일 방법을 하나라도 더 써야 해. 다만, 증거를 남기지 않도록…….”
라블미는 편지지를 찢어 조각을 공중으로 던져 버렸다.
“관여한 인간들을 모두 처리하도록 하지. 그럼 바로 나가 봐.”
“알겠습니다.”
수하가 나간 후에야 라블미는 욕지거리를 뱉으며 테이블을 발로 찼다. 그 기세에 떨어진 등불의 불씨가 카펫에 붙어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거기에 시선도 주지 않고 방을 나갔다. 뒤처리는 어차피 아랫것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꽉 쥐고 있던 손톱이 파고들어 그녀의 손바닥에 피가 맺히기 시작했다. 스스로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비에르카 라블미는 속으로 칼을 갈았다.
***
데니옴 회의 당일 아침이 찾아왔다.
트론이 입은 옷을 보고 가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역시 왕자님은 검은색이 잘 어울린다니까요! 정복 너무 멋지세요!”
에메럴드 장식과 초록색을 포인트 컬러로 둔 왕자 정복이었다.
왕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금장이 목깃에서 반짝였다.
그렇게 말하는 가이 본인도 르터바이스 가문에 내려진 훈장과 온갖 섬세한 장식이 달린 화려한 남색 정복과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데니옴 회의가 갖는 의미가 워낙 중대하다 보니, 의상부터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듯한 비장함이 감돌았다.
“제가 걱정 안 해도 잘하시겠지만, 두 분 다 힘내세요.”
여느 때처럼 평민 남자 복장을 한 루베인이 응원했다. 그 옆에 서 있던 엘피도 두 손을 모았다.
“저도 무사히 끝나기를 기도할게요. 이렇게 중대한 일에 직접 도움이 되어드릴 수 없어서 송구합니다.”
“그런 일에 마음 쓸 필요는 없다. 그럼 다녀오지.”
“다녀오겠습니다아!”
트론과 가이가 본궁으로 향했다. 회의는 오찬을 겸하기에 점심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두 사람을 눈으로 배웅하던 루베인이 응접실 소파에 풀썩 앉았다.
“우리도 점심 먹자, 언니.”
“아……. 미안. 긴장해서 그런지 식욕이 없어.”
“그래? 나 혼자 아무거나 먹지, 뭐.”
루베인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시종을 불러 식사를 1인분만 요청했다.
“그러고 보니 루베인은, 언제까지 이곳에 있는 거야?”
“일단 데니옴 회의 끝날 때까지? 그 후에는 각하와 오라버니랑 같이 하븐으로 돌아갈까 해.”
“그랬구나. 그럼 이번에만 전하를 돕는 거야?”
“아니. 전하한테 이후 일은 지시받았어. 하븐으로 돌아가서 이것저것 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 물론 가끔 데니옴에는 들를 거고.”
원작의 여주인공인 그녀가 계속 트론을 돕는 것은 마음 든든한 일이었다. 한편으로 자신은 한참 부족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힘내! 르터바이스 소백작도 본인 영지 때문에 돌아가야 할 테고, 앞으로 언니랑 전하랑 단둘이 있을 기회가 많은 거잖아.”
“기회……?”
“아니, 뭐랄까. 음. 전하를 보필하고 신뢰를 쌓을 기회랄까, 그런 거.”
루베인이 얼버무리며 헤헤 웃었다.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으나, 엘피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건 꼭 단둘이 아니더라도 항상 노력하고 있지만…….”
“그랬구나!”
무언가 감복한 듯 그렇게 외치고 루베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를 맞춘 것처럼 시종이 식사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그럼 나는 점심 먹고 올게. 언니도 건강 해치니까 나중에 회의 끝나고 나서라도 식사 챙겨 먹기야?”
“알았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 루베인.”
루베인이 응접실에서 나가자 엘피는 테라스 문을 열었다.
썰렁한 바람이 부는 정원을 향하여 난간을 붙잡은 후, 그녀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사먼, 지금 있죠?”
그녀의 부름에 푸른 머리의 청년이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 엘피 님. 오늘도 호위를 명령받았습니다.”
“…….”
엘피는 트론의 뒷사정을 알게 된 후 며칠간 고민했다. 자신이 트론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어떤 것을 각오해야 할지.
그저 울면서 괴로워하는 건 자기연민에 불과했다. 감정에 휩쓸려 중요한 걸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먼,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네, 말씀만 해 주십쇼!”
“앞으로 전하께서 제게 숨기고 하시는 모든 일을 알려주세요.”
무언가를 결심한 눈빛으로, 엘피는 그 말을 입에 담았다.
***
본궁에는 관계자만이 무장을 해제하고 진입하게 되어 있었다. 트론과 가이는 시종들과 호위에게 주변을 지키게 한 후 몸수색을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시종장이 바로 그들을 대기실로 안내했다. 모든 참석 인원들이 모인 후 대회의실로 한꺼번에 안내하는 절차라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안내받은 방은 벽에 빼곡하게 액자가 들어차 있었다. 흡사 갤러리를 방불케 했다.
“오,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화가 그림이네요. 이런 마이너한 작품을 걸어놓다니 왕실도 제법인데요.”
테이블 앞에 얌전히 앉아 있는 트론과 달리, 가이는 방을 돌아다니며 벽에 걸린 작품들을 살폈다.
“그러고 보면 그대 영지에 있을 때도 르터바이스 부군은 만나지 못했군.”
“사람을 싫어하는 분이라서요. 각하의 병환을 낫게 하는 연구 때문에 바쁘시기도 하고요. 사실 저도 왕자님이 아버님한테 주술 걸었을 때 안부 확인한 이후로는 얼굴 한 번도 못 뵀어요.”
부자치고는 꽤 건조한 교류 관계였다.
“부부 사이는 나쁘지 않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저도 그게 좀 신기하단 말이죠. 각하께서 남자 보는 눈이 없는 것 아닐까요?”
“그대는 부친을 싫어하나?”
“으음, 철들고 나서는 그런 생각은 안 하는데요. 어릴 때는 좀 원망했었죠.”
가이의 시선이 닿은 액자에는 시커먼 마신이 인간들을 짓밟아 눅진한 피가 대지를 적시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다.
“머리색 외에는 조금도 르터바이스다운 면모가 없는 나는, 아버님의 핏줄을 너무 진하게 타고 났나 보다, 하고.”
“…….”
“뭐, 저 같은 인간이 후계자가 된 것도 르터바이스 가문의 숙명 아니겠습니까? 조상들이 참아야죠.”
“괜찮아. 혈육을 죽여서 살아남은 미친 인간들만 대를 이어온 내 핏줄보다는 나을 것이다.”
“아하하,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나저나, 대기 시간이 과하게 긴 감이 있군.”
“회의 5분 전이니 슬슬 데리러 올 법도 한데 말이죠.”
가이가 그림 구경을 마치고 트론 곁으로 돌아왔다.
“나가서 확인해 볼까요, 전하?”
“아니, 그거라면 같이…….”
그 순간, 쾅 하는 소리가 바깥을 울렸다.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였다.
동시에 두 사람은 경계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지금 이건.”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연쇄적으로 무언가가 깨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문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문에 채 닿기 전에 액자가 잔뜩 붙어 있던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벽의 잔해가 두 사람을 덮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