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15)
“주군의 어머님이 주술사라는 건 알고 계시나요?”
“네. 나중에 헤럴드 때문에 돌아가신 것도 압니다.”
“다만 거기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는데……. 아시겠지만, 이 나라에서 주술사는 불가촉천민입니다.”
“…….”
엘피의 표정이 흐려졌다. 사먼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저희는 저희끼리 살길을 강구해야 했죠. 그래서 비밀리에 주요 주술사 혈족들끼리 웰칸이라는 연합을 이루고 이후의 일을 꾀했습니다. 그러다 웰칸에서 논의 끝에 나온 방안이 높은 권력자를 이용하여 저희의 권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높은 권력자라면……. 국왕 폐하 말씀인가요?”
“네. 마침 주군의 어머님이 왕실 주술사로 발탁되셨죠. 그분은 그 자리를 이용하여 셀딕 왕의 신임을 얻고 저희의 계획을 시행하실 생각이었습니다.”
그녀가 선왕인 셀딕에게 접근한 것이 의도적이라는 것은 엘피로서도 처음 아는 정보였다.
“……다만, 그분이 왕실 주술사로 계시던 시기는 길지 않았습니다. 주군을 임신하셔서.”
“…….”
“웰칸 연합은 그걸 역으로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왕자님인 트론 전하를 왕으로 세우는 방향이었죠.”
엘피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그 끝을 짓씹었다.
“중간 과정은 제가 본 서류에도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주군의 어머님은 헤럴드 때문에 살해당하셨습니다. 그 뒤, 현재 저희 연합의 장로이신 주군의 이모가 대신 보호자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극비 사항이지만요.”
“거기까지는, 이해했습니다. 그 웰칸이라는 연합이 왕자님이 왕이 되도록 돕고 있고, 당신도 그 연합 소속이라는 거죠?”
“맞습니다. 이후 장로님은 주군의 교육을 책임졌고, 연합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 전하를 도와 여러모로 움직였습니다.”
공백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왕궁의 천덕꾸러기였던 트론이 높은 교양 수준을 갖춘 것도, 그녀가 인지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인력을 움직이고 조사를 하는 듯한 낌새도.
오히려, 어째서 그의 배경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인지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소설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으니까.’
그저 소설에서 본 트론의 모습만이 전부인 양 믿고 있었다.
“전하께서 미각이 없는 이유는요? 선천적인 건가요?”
“아뇨. 으음, 어릴 때부터 장로님이 주군에게 독을 주입해서 그렇습니다.”
“네?”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감각이었다. 엘피는 무언가 잘못 들은 것 아닌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 의심을 깨부수는 것처럼 사먼은 성실하게 다시 설명했다.
“아무래도 왕위 계승권자는 독살당할 위험이 크니까요. 독에 대한 저항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셨다나 봐요. 그래서 트론 전하는 죽지 않을 정도로 조절해서 다양한 독을 드셨고, 그 부작용으로 미각 기능이 현저히 떨어졌다고 실험 보고서에 쓰여 있었습니다.”
“…….”
“독을 적응시키는 과정 자체도 가혹하고요. 자주 앓아누우시거나 피를 토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그 외에도 혈액 순환이 좋지 않다거나 습관성 두통, 수면 장애 같은 자잘한 후유증이 있으시긴 한데……. 가장 치명적인 건 미각이겠네요. 예전에 주군께 불편하지 않으시냐고 물었더니, ‘시력이나 청력이 아니니 괜찮다’라고 답하셨지만요.”
엘피는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먼지가 사방으로 퍼졌다. 사먼이 당황한 듯 따라서 몸을 굽혔다가 깜짝 놀랐다.
“우십니까?”
“……흑.”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이 거추장스러웠다. 너한테 울 자격이 있느냐고, 머릿속 어딘가 차가운 자신이 비웃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있었으면서 그의 아픔을 조금도 몰랐다. 이해해 주지도 못했다.
엘피는 눈물을 닦아 내며 어떻게든 울음을 참으려 했다.
“왕자…… 님한테 왜 그런, 심한 짓을 하세요…….”
“히, 힘든 일은 맞긴 합니다만. 안 그러셨으면 이미 돌아가셨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요? 그 덕에 얼마 전에 독을 드셨을 때도 괜찮으셨으니까요.”
“얼마 전……?”
“헤럴드 측에서 암살자를 보냈을 때요. 독살도 여러 번 꾀했는데, 주군께서 독을 확인하려고 드셨었거든요. 하지만 별일 없다고 그러셨어요.”
그녀는 참지 못하고 흐느끼는 소리를 뱉었다.
괜찮지 않았다. 별일 없지도 않았다. 그가 앓았다. 왜 그걸 태평하게 그냥 감기겠거니 넘긴 걸까. 왜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바보같이 헤헤거리고 있었나.
‘내가 정말 라이샤라고 해도, 대체 무슨 소용일까?’
라이샤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력한 바보를 뜻하는 말 아닐까. 엘피는 자조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앗, 엘피 님. 입에서 피가…….”
너무 꽉 물어서 상처가 난 모양이었다. 아픈 감각도 어디론가 날아가 있었다.
갈 곳을 잃은 분노가 온몸을 가득 채웠다. 주로 어리석은 자신에 대해서. 또한, 어린 그에게 강요된 가혹한 환경에 대해서.
“……괜찮아요.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있어요.”
“네, 어떤 것일까요?”
“만약에 전하께서 왕이 되는 걸 포기하면, 그쪽 연합은 어떻게 할 건가요?”
“으음, 저는 그저 말단에 불과해서 결정권이 있지는 않습니다만……. 글쎄요, 그냥 추측해 보자면.”
사먼이 진지하게 고민했다가 고개를 들었다.
“온갖 수를 써서라도 전하를 설득하거나 협박하려 들겠죠?”
“……그게, 안 통하면?”
“전하를 포기하고 적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겠네요. 최악의 경우, 웰칸의 정보를 많이 알고 계신 전하를 죽이려 들지도 모르지요.”
엘피는 그제야 회귀 전에 트론이 죽은 경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왕자로 복권하고 나서도 왕위를 탐내지 않았다. 이미 한참 전에 그는 왕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웰칸 연합과도 손을 끊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술’에서 완벽하게 엘피와 자신을 보호할 방패를 잃고, 그걸 막지 못해서 죽었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엘피는 자기 연민하지 말라고 자신을 꾸짖었다. 하지만 의지와 다르게 오열이 목에서 흘러나왔다.
“죄, 죄송합니다. 역시 말씀 안 드리는 게 나았을까요?”
그녀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머저리로 남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라이샤란 무엇일까. 특별한 힘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신의 계시 따위 없었지만, 그녀가 알 바는 아니었다.
만약 갑자기 나타난 신이 그녀에게 다른 계시를 내린다고 해도, 전력으로 거부할 것이다.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트론이 그 누구보다 행복해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회귀에도, 미래를 읽는 힘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
“엘피, 울었어?”
“어……?”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왕자 정복을 차려입은 트론이 고요히 앉아 있었다.
“……어라? 저, 울었나요?”
“응. 눈물 자국이 있어.”
무언가 굉장히 슬펐던 것 같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이 안 나네요. 별거 아니었겠죠, 뭐. 그것보다 왕자님, 띠가 비뚤어졌어요.”
그녀는 트론에게 다가가 옷매무새를 만져 주었다.
열여덟이 된 그는 고아한 미남이었다. 긴 세월을 평민으로서 거칠고 힘들게 살았는데도, 트론은 언제나 밤하늘처럼 차분하고 품위 있었다. 그런 그가 엘피의 가장 큰 자랑이었다.
“자, 다 됐습니다! 후후. 파티에서 왕자님이 최고 빛나실 거예요.”
“으음, 세틱스 형님의 신경을 거스르고 싶진 않은데.”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이렇게 차려입지 않아도 원래 왕자님이 최고 빛나긴 해요. 그건 세틱스 전하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죠.”
엘피의 너스레를 듣고 트론이 실소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엘피의 뺨을 감쌌다.
“엘피도 내 시녀 같은 거 하지 말고, 역시 자작으로 복권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파티에도 참석 못 하잖아.”
“에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저는 전하를 챙겨드리고 싶은걸요.”
“……언제까지?”
“계속요! 전하의 시녀로서 당연히 할 일이죠.”
그의 얼굴에 약간 서글픈 기색이 섞였다. 그 표정에 대해 생각할 새도 없이, 트론은 뺨에서 손을 떼고 팔을 뻗어 엘피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으왓, 왕자님! 기껏 다듬은 옷 다시 구겨질 거예요.”
“괜찮아.”
트론은 팔을 둘러 엘피를 뒤에서 안은 다음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기운이 없을 때마다 곧잘 이러는 걸 알고 있었기에, 엘피는 손을 올려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파티 가는 거 싫으세요?”
“피곤하긴 해.”
“뭔가……. 죄송해요, 전하. 이렇게 힘드실 줄 알았으면 왕자로 복권 안 하시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대답이 없었다. 숨결만이 엘피의 목을 간질였다.
“계속 예전처럼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전하랑 둘이서 오순도순 그날그날 먹을 것을 고민하고, 가끔은 싸우기도 하고, 그냥 아무 일도 안 하고 둘이 책만 읽기도 하고.”
“음식 고민은 나 혼자 했던 거 같은데.”
“……저, 저도 언젠가 요리 잘할 수 있거든요!”
“그래, 언젠가 말이지.”
그가 키득키득 웃는 진동이 등 뒤에서 전해졌다.
잠시 그렇게 잡담을 나누다가, 트론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엘피. 나는 계승권을 포기하고 왕궁을 떠나려고 해.”
“아…….”
“세틱스 형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릴 거야. 왕자로서 모든 권리를 포기할 거라고.”
“전하…….”
“시골에서 은거하면서 연구나 하고 살까 싶어. 그때는 왕자도, 왕제 전하조차도 아니겠지만……. 혹시 괜찮으면 엘피도 같이 갈래?”
엘피는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에 목이 멨다. 하지만 얼른 답했다.
“다, 당연하죠! 두고 가면 울 거예요!”
“……하하. 하지만 엘피는 이제 결혼할 나이잖아. 나 두고 가는 거 아냐?”
“설마요! 왕자님이야말로 혼인하시면 저 쓸모없다고 버리시는 거 아니에요?”
“안 그래.”
트론은 그녀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어 몸을 밀착했다.
“엘피가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
“저도 전하만 있으면 충분해요.”
“어째서?”
“전하는 제 동생이나 다름없는걸요. 유일한 가족이에요.”
어딘지 힘 빠진 듯 그녀에게 푹 기대며 트론이 속삭였다.
“……고마워. 좋아해, 엘피.”
“저도 왕자님을 정말 좋아해요!”
“응. 엘피가 만족한다면 나도 그걸로 됐어.”
“네?”
“아냐. 이제 슬슬 나가야겠다.”
그는 살며시 안고 있던 팔을 풀며 엘피를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갈게. 다녀와서 보자, 엘피.”
“네, 전하!”
트론이 문을 닫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엘피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붙잡아야 하지 않았을까.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를 놓친 것이 아닐까.
그 순간, 방 안이 흐릿해져 갔다. 온 세상이 흐물거리는 액체로 변한 양 형태가 일그러졌다.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그와 동시에 사방이 새카맣게 전복했다.
“……헉!”
눈을 떴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꿈…….’
그녀가 본 것은 저주로 인해 목숨을 잃기 바로 얼마 전 트론의 모습이었다.
엘피는 다시 목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신음을 삼켰다.
그가 속삭인 작은 소망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하여 존재하는 것인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왕자님은, 사실 왕 같은 거 되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렇다면 트론의 행복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뜻밖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이나드 영애.”
트론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