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17)
가이가 혀를 차며 손가락으로 공중에 원을 그었다. 그 원을 중심으로 반투명한 구체가 두 사람의 주변에 보호막을 만들었다.
커다란 돌덩어리들이 사방에 흙먼지를 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가이가 만들어 낸 보호막이 그 충격에 금방이라도 깨질 듯 표면이 떨렸으나, 어떻게든 버텨 냈다.
“덕분에 살았다, 소백작.”
“별, 말씀을요.”
가이가 짧게 숨을 뱉어 내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다지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깐만 버텨 줘.”
트론은 그렇게 부탁하고 주술식을 그리기 시작했다. 즉발적으로 발동할 수 있는 마법과 다르게 주술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 흠이었다.
트론은 조바심을 내서 실수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연초록빛 문양을 공중에 그려냈다.
주술식이 완성되는 것과 동시에 부피를 가진 돌덩어리들이 산산이 부서져 먼지로 흩어졌다.
더 이상 위협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가이가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소백작!”
“아, 괜찮아요, 전하. 잠깐 현기증이 난 것뿐입니다.”
가이가 비틀거리면서도 안경을 고쳐 쓰며 활짝 웃었다.
“역시 안 좋은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네요!”
“한가하게 즐거워할 일인가?”
두 사람은 바로 밖으로 달려갔다. 시종과 하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이렇게 무식한 방법을 쓸 줄은 몰랐어요. 설마 마법이랑 주술을 일절 배제하고 물리적으로 벽을 무너뜨릴 줄 누가 알겠나요.”
“됐고, 궁 밖에 있는 수하한테 범인을 색출하라고 일러.”
“알겠습니다아.”
***
“그, 그게.”
엘피의 부탁을 들은 사먼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저는 일단 엘피 님의 부하가 아니라 주군의 부하입니다. 주군께 비밀 엄수를 지시받은 사항도 많습니다.”
“그러실 것 같아요. 그래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사먼밖에 없어요.”
눈을 내리깔며 엘피가 두 손을 깍지 끼웠다.
가이라면 어느 정도 사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진의를 파악하기는 어려웠고, 그가 어디까지 자신에게 진실을 말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먼은 무척 순순히 트론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고, 그의 말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먼도 전하를 걱정하고 있지요?”
“네, 그야…….”
“저도 그래요. 함께 걱정하고 고민해 줄 동지로 저를 받아들여 주실 수는 없을까요?”
앞으로 어떤 가혹한 일들이 생길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트론은 자신의 행복을 우선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엘피만은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무력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울고만 있거나, 손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 마음은 회귀하여 눈을 떴던 처음, 무모하게 라이샤를 자처했을 때와도 같았다.
철저히 과거를 반성하며 트론이 죽지 않는 행복한 미래를 개척하고 싶다는, 그 마음만은.
엘피는 올곧은 시선으로 사먼을 응시했다. 그는 눈알을 굴리며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결국, 사먼은 한숨을 내쉬며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절대 무모한 일은 하시면 안 됩니다. 엘피 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주군 뵐 낯이 없을 겁니다.”
“고마워요, 사먼!”
엘피가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사먼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가, 감사는 됐으니까 약조만 해 주십시오. 무모한 일 하시지 않겠다고.”
“네. 전하께 폐를 끼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사먼이 걱정할 만한 일은 하지 않을게요.”
“휴……. 믿겠습니다.”
“네!”
어떤 때에도 그녀는 앞을 바라보려 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몸을 던지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번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엘피는 트론을 위해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디뎠다.
***
테러 사건 때문에 본회의 시작이 약간 늦춰졌다.
가이와 트론이 대기하던 방의 주변 벽들은 원래 쉽게 무너질 수준으로 금이 가 있었다.
액자가 빽빽하게 걸려 있는 것도 그것을 감추기 위한 일환이었다. 그 벽에 충격을 준 후 도망친 범인들은 본성의 시종들이었다는 모양이다.
다만, 그들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라블미 백작이 이 테러를 꾀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으나, 죽여서 입을 막은 이상 배후를 캐는 것은 어려울 듯했다.
주변의 경계를 강화하고 추가적인 조사 의뢰를 마무리한 후 두 사람은 본회의장으로 향했다.
“트론 스레데니옴 전하, 르터바이스 변경백의 대리인 가이즈카 르터바이스 소백작 납시옵니다.”
시종관의 호명에 따라 트론은 가이와 함께 본회의장으로 들어갔다. 그 얼굴에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미소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숙부님.”
“……흥, 트론이냐.”
헤럴드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트론을 봤다가 시선을 홱 돌렸다. 그 옆에 앉아 있던 데하스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나센 데하스입니다. 트론 전하를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블미의 측근인 그녀의 얼굴에서는 이렇다 할 속내를 포착하기 어려웠다.
데하스 공작이나 헤럴드의 반응이 담백한 것으로 보아, 아마 이번 테러는 라블미가 독자적으로 꾸민 도박성 계책에 가까울 것 같았다. 혹은, 처필 건으로 뒤통수를 맞은 것에 대한 앙갚음일지도 모른다.
트론은 그렇게 속으로만 추측하고 무표정하게 답했다.
“그래. 오늘은 잘 부탁한다, 데하스 공.”
“네, 전하.”
그녀의 건너편에는 짙은 보라색 머리칼을 빈틈없이 뒤로 넘긴 30대 중후반 정도의 남성이 있었다. 처진 눈에 어딘지 금욕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청년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트론 전하. 렌포우 솔피시언입니다. 오시기 전에 사고가 있었다지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래, 그대가 염려해 준 덕이네.”
솔피시언 공작과 알맹이가 없는 덕담을 주고받고 나자, 마그달리사 공작이 인사를 건넸다.
대외적으로 그들이 만난 것은 알려져 있기 않기에, 어디까지나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의 인사였다.
“처필 공은 몸 상태가 무척 좋지 않고, 대리도 보낼 여력이 없다고 하더군요.”
“음, 들었다. 나도 처필 공의 쾌차를 빌고 있다.”
트론은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코웃음이 날 것 같은 대화를 마그달리사 공과 나누었다. 이어서 가이가 변경백의 미참석에 대한 양해 및 대리 참석에 따른 인사를 끝낸 후 착석했다.
시종관이 회의 시작을 알리자, 트론이 포문을 열었다.
“우선, 두 형님과 이 자리를 함께하지 못하게 된 점,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왕실의 웃어른이신 숙부님께서 자리를 빛내 주시니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헤럴드를 ‘웃어른’으로서 회의 당사자에서 밀어 버리는 듯한 발언이었다. 회의장 안의 몇몇은 그 뉘앙스를 알아듣고 속으로 조소했다.
그 뜻을 알지 못한 헤럴드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 아이들의 얼굴을 무사히 보게 될 날을 나도 고대하고 있다. 오늘 첫 번째 안건이 뭐였지?”
“마그달리사와 처필 건이겠군요.”
당사자인 처필이 없는 상태에서 마수 재해로 인한 후처리 건은 일사천리로 결정이 이루어졌다.
처필이 지나치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건은 트론이나 데하스 공작이 먼저 나서서 커버를 했다.
트론의 경우에는 차후의 구설수를 막기 위하여, 데하스 공작의 경우에는 같은 헤럴드파로서 최소한의 도리였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자면 마그달리사의 압승이라고 할 수 있는 결말이었다.
그 외에 왕실이 기능을 멈추는 동안 산적해 있던 굵직한 사안들을 처리하고 난 후,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럼, 다음으로 현재 비어 있는 왕위 문제로 넘어갈까요?”
데하스 공작이 우아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냈다. 가이는 생긋 웃으며 끄덕였다.
“네. 왕좌가 비어 있어 백성들도 많이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마땅히 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의 생각도 같으신지요?”
모두의 동의를 받은 후, 데하스 공작은 트론을 향했다.
“우선, 현재 가장 계승권이 높으신 분은 트론 전하시지요.”
“아니. 이 자리에 계시지는 않으나 엄연히 왕세자이신 말러 형님이 계시지 않은가.”
트론이 함정을 휙 빠져나가자 솔피시언 공작이 흥미로운 듯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현재 말러 전하와 세틱스 전하의 행방은 묘연합니다. 두 분의 안위가 확인될 때까지 왕좌를 비워 두자는 말씀이십니까?”
“어허, 안 될 말이지!”
헤럴드가 바삐 끼어들었다.
“왕실의 위엄에도 문제가 있지 않은가. 나라의 지존이 중심을 잡아야 나라가 바로 서는 것이다.”
“숙부님의 말씀도 모를 바는 아닙니다. 다만, 저는…….”
트론은 시선이 모이는 타이밍을 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종에 대한 사망 선고가 법적으로 인정되는 5년의 유예를 두는 게 어떨까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따지자면 4년 반 정도겠군요. 물론, 그 전에 형님들을 무사히 다시 뵙는다면 그게 가장 기쁜 일입니다만.”
“5년은 너무 길지 않느냐.”
헤럴드가 그렇게 말하며 데하스 공작 쪽으로 눈짓했다. 그녀는 헤럴드의 말을 보충했다.
“저도 공백이 너무 길다고 생각합니다. 트론 전하의 말씀도 모를 바는 아니나, 벌써 반년이나 왕좌가 비어 있습니다. 빠른 결단이 필요하지 않을지요.”
“……그럼 데하스 공의 생각은 어떠하지?”
트론의 질문에 그녀가 생긋 웃었다.
“마땅한 분께서 보위에 오르셔야겠지요. 그러고 보니, 헤럴드 전하.”
“음, 뭐지.”
“얼마 전에 왕실의 미래를 걱정하는 충정 깊은 자가 ‘어떤 물건’을 바쳤다지요.”
“맞다, 그래. 그 이야기를 해야지.”
그는 아랫입술을 핥으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트론. 네가 옥새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만.”
“네, 숙부님. 안 그래도 가져왔습니다.”
“그것 참 이상하구나.”
헤럴드가 입꼬리를 올리며 품에서 꺼낸 나무 상자를 테이블 앞으로 밀었다.
“어떤 자가 얼마 전에 옥새를 찾아 나에게 건네주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혹시, 모조품인 게 아니냐?”
바로 회의장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마그달리사 공작이었다.
“헤럴드 전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저는 지난 북부 귀족 교류 파티 때 직접 트론 전하의 옥새를 확인했습니다. 모조품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머, 그렇군요. 그 말씀인즉슨…….”
데하스 공작의 청순한 얼굴에 독기를 품은 미소가 어렸다. 라블미 백작이 안배한 덫이 발동되었다.
“……스레데니옴의 영광된 옥새를 ‘위조’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위조품이겠군요!”
모두의 시선이 트론에게 쏠렸다. 그는 여느 때처럼 별 표정이 없었다.
헤럴드는 입맛을 다시며 그를 노려보았다. 승리를 확신하는 것처럼 그의 눈이 휘었다.
그러나 트론은 담담하게 옆에 있는 자의 이름을 불렀다.
“르터바이스 소백작.”
“네, 트론 전하.”
“조사 결과를 말해.”
가이는 차갑게 웃으며 끄덕였다.
“그렇잖아도 저희 쪽에서도 옥새가 위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뭣…….”
“물론 그런 소식을 공표했다가는 혼란을 낳을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독자적으로 조사를 진행했답니다. 조사 결과가 더 빨리 나왔다면 헤럴드 전하께 따로 언질 드릴 수 있었을 텐데,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그가 테이블에 서류를 몇 장 내려놓았다.
“데니옴의 장인 거리를 중심으로 일부 가품이나 위조품을 다루는 질 나쁜 가게가 있어서요. 거래 내역을 확인해 보았습니다만……. 실제로 옥새의 틀을 복사한 정황을 찾아냈습니다. 시기는…… 12월 초 정도.”
트론은 가증스럽게 느껴지는 서글픈 미소를 띤 채 자신의 숙부를 보았다.
“……그래서 숙부님, ‘왕실의 미래를 걱정하는 충정 깊은 자’가 옥새를 찾아다 준 것은 12월 이전입니까, 이후입니까?”
“그, 그건……!”
“그리고 그자의 정체는…….”
가이 앞의 문서를 헤럴드 쪽으로 밀어 넣으며 트론이 쐐기를 박았다.
“북부 소속인 브요른 남작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