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14)
엘피는 눈을 크게 뜨고 눈앞의 청년을 보았다.
뒤에서 사다리가 와르르 무너져 소음이 사방으로 울렸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맥이 풀려 저도 모르게 주르륵 주저앉았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주저앉은 엘피를 보고 당황하여 무릎을 꿇었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사다리 때문에 다치실 것 같아서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그런데…….”
푸른 머리칼을 한 그 청년은 엘피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의복이나 분위기가 왕궁의 사용인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누, 누구시길래 갑자기 나타나셨나요…….”
엘피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간신히 묻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저기, 제가 존재를 밝혔다는 건 주군…… 아니, 트론 전하께 비밀로 해 주시겠어요?”
“……?”
여기서 갑자기 트론의 이름이 나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엘피가 얼떨떨하여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가 이름을 댔다.
“사먼이라고 합니다. 전하의 명으로 왕궁에 혼자 남은 영애를 몰래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아…….”
“가능하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처리하고 싶었는데, 방금은 주술식을 맺을 시간이 없어서요. 그래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주, 주술사이신가요?”
“아차.”
사먼은 허둥지둥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쩔쩔매는 얼굴로 다시 부탁했다.
“주술사라는 걸 밝혔다는 것도 전하께 알리지 말아 주세요…….”
“솔직히 너무 혼란스러워서……. 저는 왕자님께 호위와 관련해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어요. 정말 전하의 명을 받은 사람인지 믿기 어렵습니다.”
엘피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왕자님께 말씀드리는 수밖에는…….”
“으와아, 잠깐, 잠깐만요! 그럼 제가 정말 전하의 직속 부하라는 증거를, 으음, 으으음!”
그는 엘피를 따라 일어나면서도 최대한 무해하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서인지 손을 어깨 위로 든 채 뒤로 물러났다.
사먼은 끙끙거리다가 겨우 떠오른 듯 외쳤다.
“전하에 대해서 질문해 주십시오! 뭐든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그건 부하가 아니라 적이라도 조사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윽……. 그, 그럼 적이 절대로 모를 정보라도요!”
“…….”
잘은 모르겠지만, 설사 그가 나쁜 마음을 먹은 적이라고 해도 분위기가 놀라울 정도로 허술했다.
엘피는 조금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반대로 저 사람이 정말 왕자님의 부하라면, 저렇게 나사 빠진 사람을 밑에 두셔도 괜찮은 걸까?’
현실적인 걱정을 하던 엘피가 잠시 궁리하다가 물었다.
“그럼, 전하께서 좋아하는 음식 아세요?”
물론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서 질문한 것은 아니었다.
엘피는 적당히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거나 물은 후 얼른 왕자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트론의 부하가 맞든 아니든 본인에게 확인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전하께서는 좋아하는 음식이 존재할 수가 없는데요?”
“……네?”
사먼은 진지해 보이는 눈으로 엘피를 응시했다.
“미각이 거의 없으시니까요. 맛을 못 느끼시니, 좋아하는 음식이 생길 수가 없잖습니까.”
***
루베인은 트론을 돌아보았다. 그가 아버지에게 딸을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동시에 무척 안심되었다. 역시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근본적인 면에서 타인을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마그달리사 공작이 허를 찔린 듯 말을 더듬었다.
“그, 그 말씀은…….”
“딱히 내가 마그달리사 영애에게 무언가를 먼저 제안한 것은 아니야. 그녀는 본인의 의지로 본저에서 탈출했고, 또한 본인의 의지로 이곳까지 왔네. 그러니 그대도 아비 된 자로서 그녀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게 어떤가 싶은데.”
“…….”
공작이 아까보다는 냉정해진 얼굴로 자세를 바로 하고 루베인을 돌아보았다.
“루베인. 그럼 설명해다오. 너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철없는 짓을 벌인 것이냐?”
“각하와 오라버니를 생각해서 한 일입니다.”
“뭐라고……?”
루베인은 품에 넣어 두었던 편지 봉투를 마그달리사 공작과 딜을 향해 밀었다. 그리고 입가에 검지를 대어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공작은 바로 그 뉘앙스를 눈치채고 소리 없이 봉투에서 편지지를 꺼내 읽어 내렸다.
「처필이 저희에게 독을 쓰려 획책하는 정황을 알아냈습니다. 그들을 잡아내기 위해 오늘, 이 레스토랑에서 만난다는 정보를 흘려두었습니다.」
마그달리사 공작과 딜이 소리를 내지 않고 경악했다.
가이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느슨하게 턱을 괴고 말했다.
“영애의 마음이 기특하지 않습니까. 두 분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지요. 오늘 이 만남을 주선한 것 역시 ‘그것’을 위해서입니다. 마그달리사 별저가 아니라 이곳으로 약속을 잡은 것도 전하께서 다 생각이 있으셔서 그런 것이었고요.”
공작은 그 말이 ‘일부러 마그달리사 별저가 아닌 곳으로 약속을 잡아 처필에게 독을 탈 기회를 제공했다’라는 의미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데니옴은 여러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오. 내 딸을 이런 곳에 오래 두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지 않소이까.”
“그대가 안전을 제일로 여긴다는 것은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나 역시 영애를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근원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똑같은 위험이 반복될 텐데.”
트론은 처필이 어떤 식으로든 독을 이용해 공격해 오리라 판단했다. 다만, 완전히 처필의 내부 사정을 꿰뚫지 못하는 이상 그 타이밍을 잡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역으로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마그달리사 공작과 트론 일행이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한 레스토랑에 모이는 바로 이 기회를.
비밀 회동을 마그달리사에 제안하며, 한편으로 귀중한 정보인 양 처필 쪽으로 이 회동 장소와 날짜를 흘리는 것은 간단했다.
가이는 마법을 이용하여 공작 쪽으로 공중에 글씨를 만들어 냈다.
「처필이 움직였다는 증거를 이용하고 싶으시겠죠? 마수 재해 책임 공방도 마그달리사 쪽이 승소하길 바라실 거고요.」
마그달리사 공작은 소름이 돋았다. 지금 이 자리도, 또한 처필의 움직임도, 트론에 의해 제어되고 있었다.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남의 장기 말이 되는 듯한 기분을 맛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기로 했다.
“……뜻은 알겠습니다.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딱히, 나는 아무것도. 그대의 딸의 일신상의 자유를 허락해 주었으면 하는 것 정도겠군.”
애초에 트론은 루베인에게 협력을 받는 조건으로 그녀와 가족의 안전을 보장했다. 이번 일로 처필을 눌러놓는 것만으로도 수확은 충분했다. 마그달리사 가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때, 급사가 노크했다. 트레이에 담긴 식전 차가 모두의 앞에 놓였다.
트론은 가이 쪽을 향해 손짓했다. 가이가 테이블 가운데 꽂힌 백합을 그에게 건넸다.
트론은 백합을 자신 앞에 내려놓은 채, 잔에 스푼을 넣어 찻물을 떴다. 우아한 동작으로 스푼을 기울이자 물방울이 백합 위로 뚝뚝 떨어졌다.
동시에 꽃잎이 갈색으로 우그러들기 시작했다.
“감히 이 자리를 망치기 위해 독을 넣은 자가 존재하는군.”
트론이 노한 목소리로 급사에게 말했다. 급사는 떨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백작, 뒤처리는 맡기겠다.”
그의 말을 듣고 가이가 생긋 웃었다. 이미 수하들이 범인과 증거를 확보하고 있을 것이다.
가이는 곧바로 급사를 포박하고 뒷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개별실을 나섰다.
트론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마그달리사 공작 쪽을 돌아보았다.
“증거는 바로 넘기기로 하지. 처필이 뭉개기 전에 공격하는 건 그대 맘대로 해.”
“……허허.”
공작은 어이가 없는 듯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딜을 돌아보았다.
“딜.”
“네, 각하.”
“처필은 내가 상대할 테니, 너는 먼저 별저로 돌아가. 그리고 보좌관들에게 전해라.”
마그달리사 공작의 시선이 똑바로 트론에게 꽂혔다.
“이번 데니옴 회의에서 마그달리사는 트론 전하의 뜻을 지지할 테니, 서류 검토를 다시 하라고.”
“……!”
딜이 놀란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와 트론을 번갈아 보았다. 트론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무리할 건 없는데.”
“전면적인 협력은 아닙니다, 전하. 이번 회의에 한해서입니다. 그 정도 성의는 보이는 게 도리일 것 같군요.”
“정 뜻이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도록 하지.”
가볍게 끄덕인 후 트론은 루베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트론에게 팔짱을 끼며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꾸벅 인사했다.
“당분간은 왕자님께 신세 지고 있겠습니다, 각하. 저는 이 자리를 만들어 두 분의 안전을 확보하는 대신 트론 전하를 돕기로 약조했습니다.”
“……그러냐. 그래도 네 어머니에게는 연락하거라.”
마그달리사 공작이 작은 목소리로 허락했다. 루베인은 잠시 서글픈 얼굴을 했다가 알겠다고 답했다.
그녀는 트론과 함께 바로 개별실을 나섰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그달리사 공작이 피곤한 듯 풀썩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딜이 그를 부축하며 걱정하는 얼굴을 했다.
“루베인을 저대로 둬도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다. 아니,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군.”
“잘된 일이라뇨?”
공작의 얼굴에 노회한 정치인 특유의 깊이 있는 웃음이 서렸다.
“트론 전하는 이제 무척 의미 있는 패가 되었으니까.”
“그 말씀은…….”
“차기 왕에게 내 딸 이상으로 어울리는 배필은 없을 거다.”
속내를 드러내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딸은 소유물이 아니며, 그녀 개인의 의지가 있다는 트론의 말을 전혀 새기지 않은 듯한 한마디였다.
***
엘피는 손을 떨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제대로 머리에서 소화해 낼 수 없었다.
사먼은 그녀의 창백해진 안색을 보고 걱정했다.
“괜찮으신가요? 혹시, 제가 뭔가 말실수라도…….”
숨을 삼키며 엘피는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침착해야 했다.
지금까지 그녀는 그저 트론의 식욕이 희박한 줄만 알았다. 입맛이 까다롭다거나, 식사를 즐기지 않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렴풋한 위화감은 있었다.
‘전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보통’이라거나 ‘평범했다’ 말고는 구체적으로 무언가 맛을 표현하신 적이 없었어.’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자신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을 때 트론의 반응을 기억하고 있다.
어딘지 난처한 듯, 미안한 듯한 얼굴을 했다.
‘……정말, 맛을 못 느끼셨던 거야.’
엘피는 잡아먹을 기세로 사먼에게 다가가 그의 양팔을 잡았다.
“당신은 어째서 그런 정보를 알고 계시는 거죠?”
“그야, 말씀드린 대로 저는 주군…… 전하의 부하니까요.”
“저도 전하의 신하예요! 그렇지만 전 몰랐어요. 전하께서 좋아하는 음식이 없으신 게 맛을 못 느끼셔서 그렇다는 걸…….”
“아…….”
사먼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어렸다. 그는 엘피에게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전하가 따로 부하로 삼은 당신의 정체는 뭔가요? 전하는 왜 미각이 없으신 거죠? 전하한테 제가 모르는 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가르쳐 주세요. 제발요…….”
위화감은 계속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회귀 전의 트론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면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도 했다. 손에 잡히지 않던 그 실체를 이제야 포착할 기회를 잡은 것 같았다.
우물쭈물하던 사먼은 결심한 듯 길게 숨을 뱉었다. 그리고 비장한 얼굴로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알겠습니다. 엘피 님은 주군에게 중요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알아 두시는 게 좋겠죠.”
“……고맙, 습니다.”
“대신 말씀드린 것처럼, 이야기를 들었다는 건 비밀로 해 주세요. 주군께도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으신 것 같으니까요.”
‘비밀을 엄수하라고 명령받은 제 입장도 곤란해지고요’라고 덧붙이는 사먼을 향해 엘피는 굳게 끄덕였다.
그는 조심스레 자신을 붙잡고 있는 엘피의 손을 뗀 다음 입을 열었다.
“저도 주군을 모시기 시작한 것은 2년 전쯤이라서, 과거의 일은 이관받은 문서로만 읽었다는 부분은 양해해 주세요. 전해 들은 이야기라 부정확한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까요……. 으음, 거슬러 올라가면 주군의 어머님에 대한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네요.”
먼지 냄새 가득한 서적 무더기 안에서, 그는 어떤 소년의 과거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