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13)
“아니, 뭐. 트론 전하가 객관적으로 잘생긴 건 맞지. 나중에 크면 엄청난 미남이 되지 않을까?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니야.”
“그, 그렇지?”
엘피의 얼굴이 밝아졌지만, 한편으로는 좀 복잡해 보였다.
이게 사랑하는 소녀의 섬세한 마음일까. 좋아하는 사람이 칭찬받기를 바라지만, 누군가 빼앗아 갈까 봐 질투하는 심리인가 보다.
루베인은 짧은 로맨스 소설 지식을 떠올리며 멋대로 납득했다.
‘응원해 주겠다고, 힘내라고 하면 좀 그런가?’
짝사랑이라면 더 그럴 것 같았다. 둘이 신분 차가 꽤 있는 편이니 장벽이 높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둘의 사랑을 응원한다느니 해 봤자 속 편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루베인은 주변 환경상 또래 친구가 없었다. 놀이 상대로 산하 가문의 영애들을 소개받기도 했지만, 다들 공녀인 루베인에게 기가 눌려 마치 자신의 시녀처럼 굴었다. 루베인 본인은 전혀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는데도.
그래서 처음에 편견도 가식도 없는 상태에서 만났던 엘피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언니라고 불러도 된다고 받아 준 것도 기뻤다. 앞으로 더 친해지고 싶은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트론에게 들은 바로는 엘피는 그의 시녀장이라고 했다. 그 외에 자신의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도.
태도로 미루어 보면 업무적으로는 신뢰하는 것 같았지만, 딱히 엘피 개인에게 별 감정은 없어 보였다.
빈틈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왕자가 상대니 정말 엘피의 짝사랑이 이루어질 가망성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모르는 척 조용히 도와야겠다.’
루베인은 그렇게 홀로 결심했다.
엘피는 본인의 질문이 부끄러워졌는지 얼굴을 붉히며 화제를 돌렸다.
“이상한 질문해서 미안. 그럼, 루베인은 이제 어떤 걸 돕는 거야? 가출했다면서. 마그달리사 공작님이 화내지 않을까?”
“아, 그게.”
루베인은 엘피의 팔짱을 다시 꼭 꼈다. 남자들의 에스코트를 받을 때 끼는 팔짱은 귀찮지만, 말랑말랑한 여자애의 팔짱을 끼는 건 기분 좋았다.
“미끼 역할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네.”
“미끼……?”
“아, 진짜로 위험한 일을 하는 건 아니야!”
약혼 같은 것보다는 훨씬 능동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 같아서 루베인은 트론의 그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처필이 독을 쓰는 증거를 포착하려고 해.”
***
“마그달리사 영애를 미끼로요?”
“그래. 영애를 우리 쪽에서 보호해서 독을 피하게 하는 건 간단하지만, 그렇게 되면 마그달리사 공작이나 소공작으로 타깃이 바뀔 우려가 있지.”
트론은 집무실 책상에서 서류를 검토하며 가이에게 전후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처필이 공격하는 타이밍을 우리가 제어하는 게 나으리라 판단했다. 영애도 그 의견에 동의했고.”
“뭐, 공녀가 왕자님처럼 일부러 독을 들이켜진 않을 테니 괜찮겠네요.”
반쯤 비아냥이 섞인 말에 트론이 그를 노려보았다. 가이는 혀를 날름 내밀었다.
“라블미 백작의 손이 닿은 건 아니죠?”
“확인한 바로는 그렇다. 처필은 협력만 하는 관계지, 딱히 헤럴드와 한 몸인 건 아니니까. 자존심이 센 처필 공작이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다는 걸 견딜 리도 없고.”
“역시 대귀족의 자존심은 인생에 도움이 안 되네요.”
“데하스 쪽은?”
“셀토아 남작 통해서 증거 확보해 두고 있습니다. 발뺌 가능한 범위라서 그건 좀 아쉽지만요.”
“건수 하나로 쉽게 무너뜨릴 만한 상대는 아니니까. 어느 정도 타격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지.”
트론은 주술식을 발동하여 읽고 있던 비밀문서를 가루로 만들었다. 창문을 열어 흔적을 날려 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가이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그리고 왕궁 말인데요.”
“응.”
“이건 그냥 감이 안 좋아서 말씀드리는 거니까 들어만 주세요. 왕궁에 남아 있던 흔적을 다 치웠다고 보고 올렸잖습니까.”
“그랬지. 문제 있나?”
“아뇨. ‘지나치게 문제가 없는 게’ 이상합니다. 사먼이 두 번이나 확인했는데 주술 쪽은 완전히 깨끗하고, 마법 쪽은 제가 확인한 바로 조악한 장치만 몇몇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한테 주기적으로 암살자를 보내고 있었으니, 거기까지 힘을 쏟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지.”
“저도 그 가능성을 생각 안 한 건 아니지만요. 그래도 혹시나 해서요.”
“알았다. 유념하겠다.”
이제 데니옴 회의까지 남은 기간은 일주일 남짓이었다.
***
며칠 후, 루베인과 마그달리사 공작의 사이를 중재하는 비밀 회동이 약속되었다.
회동에 참석하기 위해 루베인은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왕자궁의 응접실로 나왔다.
의상과 전반적인 분위기는 차분했으나, 사실 꽤 공을 들인 차림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딸’이라는 역할에 충실한 외견이라 할 수 있었다.
응접실에 있던 트론도 짙은 보라색에 장식이 적은 옷을 입고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전하.”
그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젓고 루베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그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그간 그녀를 보호하고 있던 가문의 책임자로서 가이도 동석하게 되었다. 그 역시 튀지 않는 차분한 의상이었다.
“옷까지 이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나요?”
루베인이 오랜만의 드레스가 불편한 듯 어깨를 움츠리며 묻자 가이가 답했다.
“인간은 시각에 약한 생물이니까요. 그리고 그만큼 성의를 보인다는 게 느껴지면 기분이 누그러지게 마련이죠.”
“약간의 성의로 분위기를 원만하게 만들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 그럼 출발하지.”
사적인 비밀 회동이기에 엘피가 따라갈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세 사람을 배웅했다.
트론은 잠시 인사하는 엘피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녀가 생긋 웃자 그는 작게 끄덕이고 몸을 돌려 마차에 올랐다.
세 사람이 떠난 후 엘피는 눈에 띄지 않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기회가 생긴 김에 왕궁의 서고에 들어가 라이샤에 대한 문헌을 조사할 셈이었다.
자신이 꾼 것이 그저 헛꿈이면 어쩌나 했는데, 트론의 말에 의하면 실제로 처필 쪽에서 독을 사용해 마그달리사 가문을 해하려고 계획한 정황이 드러났다고 했다.
‘우연일까? 아니면 정말로 내가 라이샤가 된 거야……?’
신의 목소리 같은 건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만약 정말로 자신이 라이샤라고 해도, 걱정되는 점이 많았다.
‘이전 라이샤인 제시드는 완전히 존재가 소멸했어. 소설에서도 자기 힘을 다 쓰고 사라졌었고. ……그렇다면 나도,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트론을 왕좌에 앉히고 그가 행복해지는 걸 본 다음에 사라지는 건 괜찮았다. 이미 한 번 구원받은 목숨을 그에게 바치는 건 상관없으니까.
그렇지만 트론에게 예언이 필요할 때 자신이 사라지는 건 피하고 싶었다.
모든 것은 가정에 불과했고,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르터바이스 본저에서 찾은 서적들은 역대 라이샤들의 예언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만 남아 있을 뿐, 더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왕궁에 있는 서고라면 더 방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을 테니, 어쩌면 자신에게 도움이 될 내용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엘피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서고로 향했다.
주인이 사라진 왕궁은 전반적으로 썰렁했다. 며칠 뒤에 있을 데니옴 회의에 대비하여 대회의실이 있는 본궁 쪽은 청소나 준비 때문에 사람이 많은 편이었지만, 그 외의 궁은 거의 사람이 없었다.
서고가 있는 남서궁 역시 그랬다.
문을 열고 서고로 들어가 보니, 한동안 사람 손을 타지 않아서인지 그 안에는 먼지 냄새가 가득했다.
거대한 기둥을 사이에 두고 눈이 돌아갈 정도로 거대한 책장들이 줄을 지어 공간을 둘러싸고 있었다.
엘피는 압도적인 광경에 입을 헤벌리면서도, 한편으로 이 엄청난 책의 바다에서 과연 자신이 원하는 걸 찾아낼 수 있을지 아득해졌다.
‘……괜찮아, 앞으로는 왕자궁에 머무를 테니까 시간 날 때마다 뒤지도록 하자.’
엘피는 걸음을 떼어 역사 서적이 모여 있는 책장을 찾았다. 물론 역사 서적만으로 한정해도 양은 만만치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무릎을 굽히고 가장 아래쪽 칸부터 책을 하나씩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
바람 때문에 저절로 문이 닫힌 것일까, 누가 들어온 것일까. 엘피는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거기, 누구 들어오셨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쳤지만 대답은 없었다. 문 쪽을 돌아보아도 역시 인기척은 없었다.
자신이 예민했나 보다고 생각하며 엘피는 다시 책을 하나둘 펼쳐보기 시작했다.
몇 권을 살펴보니 아무래도 아래 칸에 있는 책들은 자신이 원하는 시대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엘피는 두리번거리다가 사다리가 옆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낑낑거리며 그 사다리를 책장으로 끌고 왔다.
“휴, 생각지도 못한 중노동을 하네.”
자신을 격려하듯 실없는 소리를 뱉은 그녀는 사다리를 한 칸씩 밟고 위로 올라갔다.
중간 정도 높이까지 올라갔을 때, 사다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엘피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위험하니까 내려가자.’
엘피가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그 순간, 사다리가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꺄악!”
사다리가 쓰러지며 엘피를 덮쳐 왔다.
자신을 향해 무너지는 사다리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움직여서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몸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했다.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움츠리려 했을 때, 갑자기 그녀의 팔을 붙잡는 이가 있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소스라치게 놀랄 새도 없이, 그는 엘피를 자신 쪽으로 홱 끌어당겼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트론 전하. 이런 일로 만나게 되어 송구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마그달리사 공작은 무척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트론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받았다.
그들이 모인 곳은 마그달리사 별저가 아닌 고급 레스토랑의 개별실이었다. 원형 테이블에 마주 앉은 이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먼저, 루베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였다.
“멋대로 근신 명령을 어기고 데니옴까지 온 것,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습니다. 각하.”
“…….”
마그달리사 공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큰 소리를 내고 싶지만 다른 이들이 있기에 그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화를 참는 듯 공작의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그런 부친을 대신하여 소공작인 딜이 입을 열었다.
“전하, 잠시 루베인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나나 소백작은 신경 쓰지 말고 편한 대로 하도록.”
“감사합니다. ……루베인. 어머님이 앓아누우셨어. 나도 각하도 더 추궁하진 않을 테니, 하븐으로 돌아가렴. 어머님을 안심시켜 드려.”
“…….”
루베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잠시 그녀의 얼굴을 보던 트론이 말했다.
“우선 영애의 말을 들어주는 게 어떻겠나. 그녀가 이렇게 행동에 나선 것에는 이유가 있다.”
“……전하께서는.”
마그달리사 공작이 화를 겨우 삭였는지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제 순진한 딸을 꼬여 내어 무슨 일을 시키고 싶으신 겁니까?”
“각하!”
딜이 당황하여 자신의 아버지의 어깨를 잡았다. 루베인도 놀란 기색이었다. 가이는 흥미로운 얼굴로 상황을 관찰만 하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 후, 트론은 여느 때처럼 표정 없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대의 딸을 과소평가하지 말게. 그녀는 마그달리사 공의 소유물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가 있는 인격체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