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대의와 꽃의 공녀 (14)
“그,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트론 전하.”
먼저 그에게 질문한 것은 무겔롯 후작 쪽이었다. 트론은 가볍게 끄덕였다.
“그렇다. 아마 마그달리사 공이라면 실물을 본 적 있을 텐데.”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천천히 나무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정말로 확인을 바란다기보다는 일종의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그 안에 든 반지 모양의 옥새를 본 마그달리사 공작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 맞습니다.”
주변에서 삽시간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트론이 처음 나타난 것도 물론 파장이 있는 사건이기는 했으나, 대다수는 헤럴드가 왕위에 오를 대세에는 영향이 없을 것이라 점쳤다.
경박한 이들은 며칠 내에 트론이 암살당할지 내기를 걸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헤럴드가 옥새를 갖고 있지 않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몇몇 귀족들은 이 엄청난 사건을 밖에 알리기 위해 분주히 홀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트론은 소리를 내어 나무 상자의 뚜껑을 닫은 후 다시 그것을 품에 넣었다. 그 동작 하나하나도 계산된 듯 우아했다.
“고아원 건도 아까 내 제안에 딱히 불만은 없을 것으로 알겠네. 처필과 마그달리사의 시비는 꼭 가릴 수 있도록 내가 힘쓸 것이니 걱정하지 말도록.”
찍 소리도 내지 못하는 공작과 후작을 바라보며 트론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견 있는가?”
그때, 마그달리사 공작의 뒤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붙잡아!’, ‘저기다!’ 따위의 소리가 멀리 울리는 와중 벌컥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홀 안에 뛰어들었다.
천하의 트론도 이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숨을 삼키고 말았다.
긴 금발을 쥐 파먹은 것처럼 짧게 잘라 버린 루베인 마그달리사가, 여기저기 찢어진 드레스를 걸치고 홀에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치맛자락 사이로 맨발이 보였다.
그에 놀랄 새도 없이 트론의 발언에 버금가는 그녀의 충격적인 선언이 이어졌다.
“마그달리사 공작 각하.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물려받을 작위를 포기할 겁니다. 대신 제 유류분에 해당하는 유산으로 제가 고아원을 짓고 운영하게 해 주십시오.”
심상치 않은 상황을 감지한 사중주단이 바로 왈츠 연주를 중단했다. 멀리 있던 손님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정적 속에서 트론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바로 마그달리사 영애가 준비가 늦어진 사정이었나 보군.”
“소, 송구합니다. 전하. 여봐라, 당장 루베인을 끌고 나가!”
루베인이 무언가를 외치려 했지만, 그것보다 먼저 달려온 집사와 보좌관들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결국, 그녀는 몸부림을 치면서 끌려 나갔다.
‘……정말 행동력 하나는 인정할 만하군.’
자신과 나누었던 대화가 그녀 안에서 무언가 촉발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 그녀가 내뱉은 말은 파장이 컸다.
예상대로, 무겔롯 후작이 땀을 닦아 내며 제 실속을 챙겼다.
“그, 그거 보십시오. 각하의 따님조차 양심의 가책으로 저런 발언을 할 정도 아닙니까? 역시 트론 전하에게 폐를 끼칠 것 없이, 마그달리사 공작가에서 책임질 일입니다.”
트론은 속으로 혀를 찼다. 마그달리사 공작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 있었다.
물론 이런 상황을 그대로 봐 넘길 이유는 없었다. 트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 개인의 고귀한 의지를 그런 식으로 폄하할 것은 없다. 무겔롯 후작.”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의지와 압박이 느껴졌다.
무겔롯 후작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찔했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마수 재해의 사후 처리 건은 시비를 가리겠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뜻깊은 북부 교류의 장에서 다소 그대의 무례가 지나쳤던 것 같군.”
옥새를 공개한 이상 트론의 발언은 별 볼 일 없이 무시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날카로운 칼이 목에 다가온 듯한 오싹함에 후작이 고개를 숙였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고아원에 대한 일은 앞서 말한 대로 내가 처리하고 진행할 것이다. 그것이 루베인 마그달리사의 결단과 선의를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겠지. 안 그런가, 공작?”
“……전하의 한량없는 은혜와 영민하심에 감복할 따름입니다.”
“그래. 그럼 이 건은 해결된 것으로 알고, 그대도 걱정하지 말고 영애에게 가 보도록. 무겔롯 후작도 처필 공작에게 내 뜻을 잘 전달해 주리라 믿겠다.”
“아, 알겠습니다!”
싸움의 핵인 두 사람이 퇴장하고, 홀에는 다시 경쾌한 왈츠가 흐르기 시작했다.
트론은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베인의 난입은 뜻밖이었지만, 오히려 그 덕에 뒷일이 쉬워졌다.
마그달리사 공작을 돕는 것으로 빚을 만들었으니, 토지를 매각하라는 이쪽의 요청을 거절하기는 힘들 것이다.
특히 그것이 빚을 지게 한 당사자인 루베인이 가질 예정인 토지라면 더더욱.
이제 귀 달린 모든 이들이 오늘 일을 사방에 퍼트릴 것이다.
사먼의 보고에 의하면 트론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만으로 어제 헤럴드가 길길이 날뛰었다는 것 같은데, 옥새 이야기까지 들어가면 얼마나 난동을 부릴지 그 모습을 직접 눈으로 못 보는 건 퍽 아쉬웠다.
가장 큰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 이제 에스코트할 파트너도 없는 그가 할 일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
“……전하는 역시 대단하세요.”
약간 떨어진 곳에서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던 엘피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상황이 악화되면 저도 끼어들까 했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마무리하셨네요.”
“네……. 그리고 마그달리사 영애도 굉장하고요.”
주변의 눈도 명예도 신경 쓰지 않고 올곧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루베인의 모습은 감명 깊었다.
볼품없이 짧아진 머리칼도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반짝이고 있었다.
똑같이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지고 있어도, 그녀와 자신은 근본적으로 격이 다른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레스를 입으며 괜히 비교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 하찮게 느껴졌다.
이것이 주연과 엑스트라의 차이일까. 엘피는 살짝 기가 죽었다.
“으음, 객관적으로 보자면 꽤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만, 관점에 따라서 굉장하다고 볼 수는 있겠네요.”
가이가 안경을 고쳐 쓰며 신랄한 평가를 내렸다.
“어리석은 일인가요?”
“체면을 생각해도 마그달리사 공이 저런 조건을 들어줄 리 없잖습니까. 아마 영애는 본인의 작위와 재산을 포기하는 대신 그 돈을 미리 쓰게 해달라는 의도였던 모양입니다만.”
“하긴, 이번 고아원 건은 단순히 돈이 아까워서 그런 건 아니니까, 마그달리사 공에게는 별로 기꺼운 조건이 아니었겠네요.”
“그런 거죠. 협상이라는 게 원래 어렵긴 하지만요.”
가이는 그렇게 설명을 마치고 혀를 찼다.
“그것보다 이런, 왕자님이 이쪽으로 오시는데요.”
“어……? 아, 마그달리사 영애가 그렇게 퇴장했으니 왕자님도 혼자 계시긴 애매하겠네요.”
“모쪼록 제가 욕을 덜 얻어먹도록 엘피 님이 방어해 주셔야 해요?”
“뭔진 모르겠지만 가이 님이 잘못하셨다면 왕자님께 혼나셔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요?”
“두 분은 왜 그렇게 저한테 박한 겁니까!”
가이가 볼을 부풀리며 항의하자, 빠르게 다가온 트론이 한 문장으로 잘랐다.
“그대의 평소 행실을 돌아보면 되지 않을까.”
“납세도 꼬박꼬박하는 준법 귀족인데요.”
“르터바이스령의 납세 기록은 나중에 확인할 테니 이만 비켜 줬으면 하는데. 이나드 영애에게 용건이 있다.”
“네이, 네이. 방해꾼은 퇴장하겠습니다아. 그럼 나중에 뵈어요. 엘피 님.”
“앗, 네. 이따 뵈어요, 가이 님.”
둘 사이에서 바뀐 호칭을 듣고 트론의 표정이 일시에 뚱해졌다.
가이는 속으로 히죽히죽 웃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르터바이스 소백작과는 뭘 하고 있었지?”
“그냥, 이야기요? 그러고는 테이블에서 이것저것 집어먹고……. 아무래도 대량으로 만든 음식이라 맛이 썩 좋진 않더라고요.”
“마그달리사 공작이 들으면 슬퍼하겠는데.”
농담을 듣고 엘피는 후후 웃었다.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트론이 팔을 내밀었다.
무슨 뜻인지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엘피가 눈만 깜빡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이후로는 내가 그대를 에스코트하겠다.”
“네……. 네? 아니, 왕자님? 무슨 말씀을…….”
“계속 내 팔이 비어 있게 만들 셈인가?”
“그, 그렇지만 저는 이름 없는 자작가의 여식인데요. 전하에게 폐가 될까 두렵…….”
“그래서?”
표정은 바뀌지 않았지만 트론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여기서 더 뺐다가는 그가 완전히 삐칠 것 같았다.
엘피는 자신보다 약간 낮은 위치에 있는 트론의 팔에 손을 둘렀다.
“……응.”
그제야 만족한 듯 트론이 옅게 웃었다. 새삼 어딜 봐도 천사 같았다. 엘피는 역시 악마의 카리스마 운운한 가이의 의견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느릿한 왈츠가 한 차례 마무리되고 곡이 바뀌는 타이밍이었다. 홀 가운데를 일별한 트론이 엘피에게 물었다.
“한 곡 추겠나?”
“저, 춤 연습을 안 해서요…….”
“상대방의 움직임에 맞춰서 적당히 돌면 그만이다.”
“분명히 전하 발을 밟게 될 겁니다.”
“……싫은가?”
엘피는 실망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트론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저런 얼굴을 하면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고 싶어졌다.
“나중에 후회하시기 없기에요…….”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다.”
트론은 한 발자국 물러나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한 손을 깍지 끼워 잡고 트론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가 엘피가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아, 전하 처음 뵈었을 때보다 키가 크셨나 봐요.”
“그래?”
“네! 후후, 제 키 정도는 금세 따라잡으시겠어요.”
그는 자신보다 살짝 위쪽에 있는 엘피의 눈에 시선을 맞추었다. 언젠가 그녀를 내려다볼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니, 묘하게 고양되는 기분이었다.
“하긴, 성장기시니까요. 식사 더 든든히 하셔야 해요? 그래야 더 빨리 크시죠.”
“……생각해 보지.”
만족한 듯 엘피가 웃음을 흘렸다. 한 발자국을 떼어 홀 안에서 돌기 시작하며, 트론은 쭉 그녀의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계산도 고민도 내려놓고 그저 엘피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
엘피의 예상과 달리, 한 번도 발을 밟는 일 없이 댄스 타임은 완벽하게 끝났다. 무슨 일을 하든 대충하는 법이 없는 트론다웠다.
두 사람은 그 후 사람들 눈을 피해 테라스로 자리를 옮겨 몇 마디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던 중, 엘피는 아까 일이 걱정이 되어 트론에게 물었다.
“마그달리사 영애는 어떻게 될까요?”
“글쎄……. 공작이 물려받을 작위를 포기하겠다는 딸의 말을 들어줄 리도 없으니, 당분간 근신시키다가 사람들 수군거림이 잠잠해지면 다시 사교계로 보내겠지.”
“으음, 영애도 나름대로 본인의 의지가 있었던 건데, 좌절된 건 안타깝네요.”
“…….”
그녀를 좋게 평가하는 듯한 엘피의 말에 트론의 마음이 다시 어수선해졌다.
“……그대가 본 미래에서.”
결국, 위화감과 의문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그는 입을 열었다.
“나는 폭군이 되어 목숨을 떨군다고 했지. 르터바이스도 그에 한 축을 했고.”
엘피는 그의 말에 숨을 들이켰다.
“혹시 그때 르터바이스는 마그달리사 가문을 도운 것 아닌가? 정확히는…… 루베인 마그달리사를.”
“……!”
엘피가 당혹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홉떴다. 그녀의 표정이 다른 무엇보다 답이 되었다.
“그랬군. 그 미래에서는 그녀가 새로운 왕이 되는가.”
예상했던 바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트론은 고개를 돌려 테라스 난간 저편의 정원을 보았다.
“가, 갑자기 그런 말씀은 왜…….”
“그런 미래를 알고 있다면, 그대가 굳이 나를 택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역시, ‘신의 계시’가 나를 택해서인가?”
그렇게 물으면서도 트론은 조금도 그 이유를 믿을 수 없었다.
라이샤의 힘을 몇 번이고 확인했으면서도 신이라는 불확정한 요소의 개입을 신뢰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옆에 있는 것이 그런 연약한 이유뿐이라면, 그녀가 떠날 이유 역시 쉽게 마련될 것 같았다.
“……그것보다는, 제가 왕자님이 성군이 되어 행복해질 미래를 무엇보다 바라기 때문입니다.”
“…….”
역시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거는 기대는 허망하고도 의미가 없었다.
트론은 루베인이 아니었다. 엘피가 바라는 선의와 대의는 그쪽에 가까웠다.
“그대는, 내가 왕이 되면 무엇을 하길 바라는가?”
“네……?”
“성군이 되길 바란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 성군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백성들을 모두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
그토록 머저리 같은 질문도 없다고 생각했다. 만인이 행복한 나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불행은 누군가의 행복이 되며, 누군가의 손해는 누군가의 이득이 된다.
딱히 무언가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기에 트론이 말을 돌리려 했을 때, 고민하던 엘피가 입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