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대의와 꽃의 공녀 (13)
다음 날, 엘피는 새벽부터 하녀들의 등쌀에 떠밀려 녹초가 되어 있었다.
목욕하고 향유를 바르는 것부터 시작하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 한 톨의 소홀함도 없었다. 본 파티에 앞서 마치 전쟁에 나갈 준비라도 하는 듯한 기세였다.
어제 하녀들이 실망한 것 같기에 일부러 꾸밀 기회를 준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지치는 일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광을 내 봤자 소용도 없을 텐데.’
오늘 파티 회장에서 단연코 주목을 받을 인물은 트론과 루베인이었다.
오늘 정식 데뷔 절차를 맞이하는 루베인은 트론의 에스코트를 받고 함께 춤출 것이다.
두 사람이 입을 의상도 서로 어울리도록 푸른색으로 합의했다고 전해 들었다.
‘우리 왕자님이라면 무슨 색이든 다 잘 어울리겠지. 루베인 영애도…….’
루베인은 어제 장미를 연상시키는 붉은색의 드레스를 입었지만, 눈 색깔을 생각하면 푸른색이 특히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시장에서 마주쳤을 때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화장하고 꾸민 그녀는 더욱이 눈부신 미모를 자랑했다.
어딘지 중성적인 분위기가 특히 매력적이었다. 과연 소설의 여주인공답다고 할 만했다.
“……그럼 이 드레스로 괜찮을까요, 아가씨?”
“아, 네!”
엘피는 딴생각을 하다가 건성으로 끄덕였다. 하지만 그 후 하녀가 내민 드레스를 보자마자 멈칫하고 말았다.
“역시 하늘색이 가장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아가씨의 눈 색깔도 연상되고요.”
섬세한 레이스와 러플로 몸을 감싸는 풍성한 드레스였다.
고운 하늘색과 하얀색이 교차하여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유치하지 않게 장식된 리본, 반짝이는 진주와 오팔도 사랑스러움을 더했다.
엘피가 보기에도 무척 멋진 드레스였고, 일부러 골라 준 하녀들의 정성을 생각하면 내치기도 힘들었다.
‘괜찮…… 겠지? 같은 푸른색 계통이라도 짙은 색이 아니니까.’
엑스트라 주제에 발돋움하여 여주인공과 비슷한 차림을 하려는 악역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전신 거울에 비친 볼품없는 갈색 머리를 보자마자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자의식 과잉이야. 어차피 비교도 되지 않을 텐데.’
동글동글하고 평범하게 생긴 자신과 다르게 루베인의 미모는 독보적이었다. 괜히 비교하는 생각을 한 게 새삼 부끄러워졌다.
엘피는 하녀들의 손을 빌려 드레스를 입으면서 잡념을 떨쳤다.
***
본파티가 시작되는 저녁 시간에 맞춰 세 사람은 마그달리사 공작저에 도착했다.
그러나 홀에 들어가고 나서 그들은 의아함을 느꼈다. 바로 인사를 하러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루베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주변을 살핀 가이가 추측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이 본격적인 데뷔니까 치장에 힘쓰고 있지 않을까요.”
“……뭐, 그럴 가능성이 크긴 하겠군. 오늘은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 마그달리사 영애 건은 제쳐두기로 하고.”
트론은 엘피 쪽을 돌아보았다.
“이나드 영애. 어제는 수고 많았다.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하지.”
“과찬이십니다! 전하께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요.”
어제보다 화사하게 차려입은 엘피가 살포시 웃었다.
트론은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왕자님?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 오늘 그대는 부디 마음 편히 파티를 즐기도록 해.”
“에헤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왕자님.”
옆에서 가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이나드 영애는 제가 에스코트하기로 했거든요.”
“뭐?”
“오늘 왕자님은 마그달리사 영애와 붙어 계셔야 하잖아요. 그러니 소외당한 저희 둘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죠.”
트론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엘피는 당황하여 말을 보탰다.
“제가 이런 큰 파티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배려해 주셨어요. 혹시 실수해서 왕자님께 폐를 끼치면 큰일이기도 하고, 소백작님이 옆에서 도와주시면 감사하죠.”
그 말에도 트론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뭔가 잘못 말했나 싶어 엘피가 안절부절못하는 사이에 가이는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그럼 왕자님 명대로 마음 편히 파티를 즐기고 오겠습니다!”
“다, 다녀오겠습니다…….”
가이는 엘피를 끌고 홀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흥겨운 왈츠가 홀 안에 울리고 있었다. 이미 몇몇 남녀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춤추실래요?”
“괜찮습니다.”
“파티에서 얻을 수 있는 재미의 1/3이 댄스 타임인데 아쉽지 않나요.”
“그건 가치관의 차이 아닐까요, 소백작님…….”
그는 키들키들 웃으며 곁눈질로 떨어져 있는 트론을 보았다. 아직도 잡아먹을 기세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후환이 살짝 걱정되었지만, 가이는 일단 현재를 즐기기로 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소백작님이라고 부르실 건가요. 저희 벌써 알고 지낸 지 두 달 넘었잖아요.”
“어, 그렇지만……. 소백작님을 함부로 부를 순 없잖아요.”
“어차피 왕자님 밑에서 다 같은 신하 아닙니까.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가, 가이 소백작님?”
“소백작을 떼세요, 소백작을.”
가이가 입을 삐죽대며 항의했다.
“그럼, 가이 님……?”
“으음, 님도 떼 줬으면 좋겠지만, 그걸로 타협하죠. 저도 앞으로 엘피 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얼마든지요.”
엘피가 순순히 대답하자 가이는 만족한 듯한 웃음을 보였다.
“자, 그럼 파티 재미의 다른 1/3을 채우러 가시죠.”
“그건 뭔가요?”
“당연히 먹을 거죠.”
가이가 윙크하며 엘피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엘피는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어찌 되었거나 그의 말대로 즐거운 시간이 될 듯했다.
***
한편, 억지로 엘피와 가이 쪽으로 향한 시선을 떼어 내고 마그달리사 공작을 만난 트론에게는 더 기분 상할 일만 남아 있었다. 이미 파티가 시작된 지 한참 지났는데도, 루베인이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트론 전하, 죄송합니다. 제 아둔한 딸이 준비가 많이 늦는 모양입니다. 이따가 오는 대로 충분히 꾸짖어 주십시오.”
“그래, 사정이 있겠지. 괜찮다.”
급병이라도 앓는 게 아닌 이상 명백한 결례였다.
표정 관리에 능숙한 공작의 얼굴에서는 진심으로 죄송해하는 감정 외에는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천출 왕자에게 딸의 에스코트를 맡기고 싶지는 않다는 의지의 표명인지, 정말로 문제가 생겨서 수습하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루베인을 대동하여 이목을 끌어야 하는 목적은 어제 달성한 상황이었다.
고아원 건도 그녀가 아닌 마그달리사 공작과 마무리 지으면 그만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무시당하는 상황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아직은 숙부의 세가 더 크다고 판단될 테니, 내 쪽을 무시할 만한 상황이긴 하지만.’
그 상황을 뒤집기 위해 트론이 이곳에 있는 것이었다. 사전 준비는 모두 마쳤다. 이제 그가 할 일은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루베인 대신 마그달리사 공작과 소소하고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는 중, 바로 그 기다리던 타이밍이 다가왔다.
“트론 전하, 처음 뵙겠습니다. 세이언 무겔롯입니다.”
‘드디어 왔군.’
트론은 속으로 조소했다. 무겔롯 후작가는 처필 공작가 산하 가문이었다.
북부 소속이 아닌 자의 참석이 금지된 파티는 아니었으나, 원래대로라면 동부 소속인 자가 구태여 이 파티에 참석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목적이 없다면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만나서 반갑군. 트론 스레데니옴이다.”
“이름을 댈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그달리사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평온하던 마그달리사 공작의 얼굴에 약간의 불쾌감이 감돌았다.
“글쎄요, 바로 얼마 전에 본 것 같소만.”
그는 표면적인 예의조차 갖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겔롯 후작 역시 인상을 구기며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언제까지 고집을 피우실 셈입니까? 이번 일은 명백히 마그달리사 공작가의 실책이었습니다. 처필 각하께서는 공의 판단에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계십니다.”
“본인이 직접 와서 따지지 못해 수하를 통해 실례된 말을 전하는 처필 공의 판단력이 더 우려되는군요.”
트론은 탄산수를 마시며 모르는 척 관찰했다. 개싸움이 되면 될수록 좋았기에 트론으로서는 기꺼운 일이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이쪽에 신경을 안 쓰는 척,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처필 쪽에서는 차기 왕위 다툼에서 중립인 척했던 마그달리사가 트론을 몰래 숨겨 놨다가 공개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왕위 계승권자인 그의 발언권을 빌어 마수 재해 사후 처리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들에게 덮어씌울 속셈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다름 아닌 트론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정보를 흘렸다.
마음이 급해진 처필은 이 다툼을 공개적인 석상에 하루 빨리 끌어내어 마그달리사에게 유리한 고지를 넘기지 않으려고 이렇게 대놓고 공격을 해 온 것이다.
쓰고 있는 표현은 점잖지만 요약하자면 ‘네 잘못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돈도 네가 내라’에 불과한 유치한 언쟁을 바라보다가 트론은 적당한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경들이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게, 이번 재해로 인한 고아원 건이 맞는가?”
“아…… 송구합니다. 전하 앞에서 부끄러운 꼴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씻을 수 없는 무례, 사죄드립니다.”
어차피 이쪽을 아직 무시하고 있어서 눈앞에서 이렇게 무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처필 공도, 마그달리사 공도 각자의 사정이 있을 테니 어느 쪽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시비를 가리자면 오랜 기간이 소요될 테지.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도 어린 백성들은 재해에 허덕이고 있을 것 아닌가.”
트론은 이전에 가이가 ‘가증스럽다’라고 표현한 서글퍼 보이는 미소를 얼굴에 올렸다.
“그렇다면…… 고아원 건은 내가 맡도록 하겠다. 르터바이스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니, 건립과 운영 모두 경들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저, 전하!”
진심으로 당혹한 것인지 마그달리사 공작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무겔롯 후작도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트론은 천진무구함을 가장하며 마무리 한 방을 날렸다.
“국왕 폐하께서도 살아 계셨다면 분명히 그리하셨을 것이다. 그러니 폐하의 유지로 옥새를 보호하고 있는 내가, 그 뜻을 온전히 수행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유쾌한 왈츠곡만이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주변에 울리고 있었다.
트론의 발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