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대의와 꽃의 공녀 (15)
“으음, 어려운 질문이네요……. 그게,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
엘피는 회귀 전, 트론과 도망 다니던 시절에 살았던 한 영지의 일을 떠올렸다.
“저희 가문은 아니고, 작은 규모의 영지를 가진 어떤 영주님의 이야기입니다만. 그분은 형편이 어려운 영지민들의 생활에 관심이 많은 훌륭한 분이었어요. 그래서 제도를 고안해 내셨는데, 세금을 아주 약간 올리는 대신 그 돈으로 생활 구제 기금을 운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기금?”
“네. 당장 굶어 죽을 정도로 상황이 어려운 영지민이 절차에 맞춰 생활 보호를 요청하면 그 기금을 가지고 구제를 하자는 의도였는데……. 끝이 좋지 않았어요.”
트론은 그도 그렇겠다고 생각했다. 절차를 여간 잘 구비해 놓지 않는 이상 좋은 제도를 악용하여 부당 이득을 취하는 이가 나오거나, 혜택을 볼 수 없는 층에서 왜 내가 남이 쓸 돈을 더 내야 하냐고 불평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불만의 소리가 커져서 그 제도는 폐지되었는데, 그랬더니 이전에 가져간 돈을 돌려달라고 또 난리가 났어요. 그분은 정말 훌륭한 분이었지만, 좋은 마음으로 한 일 때문에 오히려 영지민들에게 욕을 먹는 영주가 되고 만 거죠.”
“……그래, 정치란 어려운 일이지.”
엘피는 빙글 몸을 돌려 트론을 향했다. 그도 정원에서 눈을 떼고 엘피를 올려다보았다.
달빛 아래에서도 호수처럼 맑은 푸른색으로 빛나는 엘피의 눈동자가 트론을 직시했다.
“저는 왕자님이 같은 상황에서 영리한 수로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낼 수 있는 분이라는 걸 압니다.”
실제로 당시에 일련의 상황을 목격했던 트론은 해당 제도의 문제점과 보충할 방법을 줄줄 읊었다.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감탄했던 기억은 남아 있었다.
“당연하지만, 모든 백성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생각해요.”
어리석은 함정에 빠지지 않고, 푸른 눈의 라이샤는 그렇게 고했다.
“그래도 부당한 일은 올바르게 바꿀 수 있고, 현재가 힘들더라도 노력 여하로 좋아질 수 있는 절차가 마련되는 것. ……또한, 백성들이 이 나라가 그런 곳이라고 믿게 하는 것. 그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녀가 말하는 이상은 무척 아름답고도 눈부셨으며, 또한 무엇보다 어려운 길이었다.
“……스레데니옴 왕국 천 년의 기간을 통틀어도 가장 어려운 정치 과제로군.”
“그, 그런가요? 하지만 저는 왕자님이라면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깨끗한 수만으로는 이룰 수 없을 텐데.”
“그야, 왕자님이 독해지셔야죠. 적을 상대로 페어 플레이를 할 필요는 없어요. 더 비열하고 이기적이어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종국에는 한없는 선의로 이상을 그리는 그녀는 기이한 존재였다.
트론은 이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다. 백성을 위하는 따스한 마음 따위도 갖추지 못했다. 합리와 효율 외에는 무엇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엘피 이나드가 말하는 그 이상향이라면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적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도, 기계적으로 선을 그어 공정하게 각자의 몫을 배분하고 시비를 가리는 것도, 지금까지 그가 해 왔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튼, 그래서 저에게는 전하만이 유일한 왕입니다. ……이걸로, 대답이 되었을까요?”
“……그래.”
여전히 확신은 없었다. 왕이 된 ‘그다음’을 그리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엘피의 대답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
몰아치는 이틀의 마무리는 트론의 생일 축하였다.
일정에 치여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야 세 사람은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탓에 제대로 된 자리를 준비하지는 못했으나, 사전에 약속한 대로 엘피와 가이는 크게 축하 인사를 외쳤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왕자님!”
“……음, 그래. 고맙군.”
“더 크게 감동해 주세요!”
트론의 담백한 반응에 실망한 듯 가이가 항의했다.
하지만 엘피는 트론이 쑥스러워서 더 무뚝뚝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우리 왕자님 너무 귀엽다니까.’
그녀는 홀로 흐뭇해하며 말을 보탰다.
“올해는 어쩔 수 없었지만, 다음에는 꼭 전하만을 위한 파티를 열었으면 좋겠어요. 축하도 더 많이 받으셨으면 좋겠고요.”
“맞아요, 왕자님! 저희 가문의 전력을 다해서 축하해 드리겠습니다.”
그것까지는 부담스러웠는지 트론이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에게 축하받은 것으로 충분하다.”
“과분한 말씀이지만, 일단 제가 안 충분하니까 꼭! 잔뜩! 축하받으셔야 해요.”
엘피가 힘을 주어 역설했다. 가이 역시 끄덕이며 그에 동의하고는 큰 꾸러미 두 개를 트론 앞에 놓았다.
“그런 의미에서 자, 왕자님. 선물이랍니다! 하나만 드리기에는 정 없어서 두 개를 준비해 봤어요! 풀어 보세요.”
“……으음.”
트론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먼저 왼쪽에 있는 꾸러미를 풀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잘 벼려진 롱소드였다.
“전하는 주로 숏소드를 쓰시는 것 같지만, 이제 슬슬 그쪽도 연마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필요하시면 무예 스승님도 붙여 드릴게요.”
“그렇군. 일부러 생각해 줘서 고맙다.”
“와, 저 처음 만나고 나서 이때까지 왕자님한테 순수하게 칭찬받은 거 처음인 거 같아요! 기념일로 삼을래요!”
가이가 감동한 얼굴로 두 손을 모았다. 그 과장된 발언을 지적하지 않는 점에서도 트론이 그 선물을 꽤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게 드러났다.
이어서 트론은 오른쪽 꾸러미를 풀었다. 그리고 상자의 뚜껑을 열자마자 다시 닫았다.
“……뭐지, 이건?”
“드레스입니다.”
“왜 나에게 이걸?”
“혹시 여장 생활 청산하시고 나서도 그리워지시면 몰래 입으시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트론은 꾸러미째로 가이에게 드레스를 던졌다. 그걸 홱 피하면서 가이는 혀를 내밀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엘피 님도 숨기지 말고 왕자님한테 선물 꼭 전하시고요!”
가이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한 후 자신의 방으로 피난했다.
“아, 아하하. 역시 가이 님은 그냥은 안 넘어가네요.”
“후우.”
“어제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전하. 푹 쉬세요.”
“…….”
트론이 지그시 엘피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속으로 가이를 원망했다.
“그, 그게. 선물, 며칠 후에 드려도 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건 전하한테 드릴 만한 물건이 아니라서, 새로 사 올까 하고…….”
“그건 내가 판단할 테니 보여 줬으면 하는데.”
엘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양손으로 뺨을 가리며 “어쩌지…….” 하고 중얼거리더니, 포기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나도 같이 가지.”
도망칠 구석을 완전히 차단당한 엘피는 풀죽은 얼굴로 간신히 끄덕였다.
***
“화, 화내시면 안 돼요?”
침대 옆의 서랍에서 꾸러미를 꺼낸 엘피가 확인하듯 물었다. 카우치에 앉아 있던 트론은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엇에 화낼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화내지 않겠다.”
“소소한 선물입니다……. 다시 한번 생일 축하드려요…….”
엘피는 그 꾸러미를 트론에게 내밀며 조심스럽게 그의 옆에 앉았다. 트론은 바로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확인했다.
짙은 남색의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통장갑이었다. 손을 넣는 안쪽에는 부드러운 털이 덧대어져 있었다.
그러나 척 보기에도 훌륭해 보이는 재료에 반해 재봉 상태는 엉망이었다. 삐뚤빼뚤한 실 자국이 그대로 보이고, 장갑 양쪽의 크기는 제각각이었다. 빈말로도 완성도가 높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직접 만든 건가?”
“……네.”
엘피는 고개를 숙인 채 트론 쪽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고맙다. 잘 쓰도록 하지.”
하지만 돌아온 것은 무척 따뜻한 목소리였다.
엘피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가 저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양손에 못난 장갑을 낀 채 그 손을 바라보며 트론이 활짝 웃고 있었다.
어딘지 미약하거나, 혹은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만든 듯한 지금까지의 웃음과는 달랐다.
엘피는 트론의 그런 얼굴을 알고 있었다.
회귀 전 언제나 엘피를 향해 보여 주던 미소였다.
“……울고 있나?”
“아…….”
참을 줄을 모르는 눈물샘이 또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엘피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께서 부족한 물건을 좋게 받아 주시니 기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대는 참으로 눈물이 많았지.”
트론은 장갑을 벗어 다시 꾸러미에 넣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 자국을 눌러 주었다.
처음부터 엘피의 존재는 의문투성이였다. 그리고 어느새 스며들듯이 그에게 다가와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았다.
트론은 이제 인정하기로 했다.
그녀가 주는 애정이 가짜라 해도, 그것만으로 족했다. 그녀가 바치는 충정이 허상이라 해도, 그것만으로 기꺼웠다.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수없이 쌓아 올린 지식도 그에게 답을 돌려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가 자신의 옆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런 이상도 욕망도 없으면서 왕이 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듯이.
트론은 자신의 감정의 원천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 채, 엘피 이나드를 묶어두기 위한 모든 수단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그때 내가 그랬잖아. 나를 동생처럼 여겨 줬으면 좋겠다고.”
“……저, 전하?”
은근하게 바뀐 그의 말투에 엘피가 우는 것도 잊고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얼마 전에 ‘누나’가 그랬지. 동생 빼앗기는 기분이라고.”
“그건…….”
“그러니까, 앞으로도 둘만 있을 때는 계속 동생처럼 대해 줘. 그러면 안 될까, 엘?”
질문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알았어, 론.”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품 안의 빛을 놓치지 않을 기세로 끌어안았다.
***
마그달리사 공작과 토지 매매 건까지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세 사람은 올페마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이제 세부적인 고아원 건립 및 운영안, 마법유전이 발견된 후의 계획을 확정하여 르터바이스의 가신들에게 위임하고 세 사람은 새로운 목표를 향해 발을 내디뎌야 했다.
그것은 바로 수도의 왕궁을 불법 점거하고 있는 헤럴드와 대면하는 일이었다.
또 한동안 바빠지겠다고 생각하며 엘피는 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결국 식물원 구경은 못 했네요. 그건 조금 아쉬워요.”
“엘피 님이 꽃만큼 아름다웠으니 괜찮아요.”
“……정말 아무 말이나 하시네요.”
“진심인데요오.”
“그리고 꽃의 공녀는 루베인 마그달리사 영애잖아요. 그런 비유는 그분한테나 어울려요.”
턱을 괴고 책을 읽고 있던 트론은 흘끗 저 멀리 스쳐 지나가는 하븐을 보며 중얼거렸다.
“글쎄, 꽃보다는 그 도시의 명물인 곰이 어울리는 맹수 아닐까 싶은데.”
“아하하, 마지막이 강렬하긴 했죠.”
가이가 웃으면서 동의했다. 엘피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만큼 멋진 분이셨어요.”
루베인을 떠올리며 엘피는 왠지 모를 예감에 사로잡혔다.
머지않은 미래에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그녀가 향하는 길이 트론과 같은 방향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시드는 마지막으로 루베인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소설을 읽었던 엘피는 남주인공이었던 그가 남긴 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 심정을 생각하면, 루베인의 미래도 행복하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제시드를 대신하여 가짜 라이샤가 된 자신의 사명처럼 느껴졌다.
‘라이샤에 대해서 조사를 해 봐야겠어. 자료가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시드에게 있었던 제약이나 마지막 소멸을 완전히 남의 일로 여길 수는 없었다. 그가 소설과 다른 결말을 맞이하게 된 원인을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처음 그 마음을 잊지 마. 모쪼록 빛이 너를 이끌기를 빌게.”
라이샤였던 그가 남긴 말을 떠올리며 엘피는 두 손을 꼭 모았다.
만약 정말로 신이 내려주는 빛이 존재한다면, 자신보다는 무엇보다 소중한 자신의 주군을 이끌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