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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30화 (30/132)

30화. 대의와 꽃의 공녀 (10)

“딱딱하게 그러지 마. 어차피 둘이 이야기하는 건데, 전처럼 편하게 말해 줘! 그때는 너도 나처럼 위장했나 보구나. 격식 갖추고 외출하는 거 답답하긴 해, 그치?”

지루한 파티에서 유일한 즐거움을 찾은 양 그녀가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머리 때문에……. 여자분이라고 생각 못 했어요.”

“아, 위로 틀어 올린 다음에 모자를 쓰면 웬만해서는 못 알아보더라고. 사실 나도 아가씨처럼 잘라 버리고 싶은데, 아버님이나 어머님이 잔소리하시니까.”

그러고는 “에이, 편하게 말해달라고 했는데.”라면서 계속 딱딱한 엘피의 존대를 못내 아쉬워했다.

루베인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기세였으나, 공작의 보좌관으로 보이는 이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루베인이 방금까지의 경망스러운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투를 바꿨다.

“아쉽지만, 아직 인사가 남아서 이만 실례해야 할 것 같네요. 나중에 다시 뵈어요, 위든 영애.”

엘피는 그녀의 변모에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할 뻔했다.

엘피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루베인은 보좌관 몰래 윙크를 보냈다.

그녀와 헤어진 후 엘피는 펄떡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아마 루베인은 자신처럼 평민을 위장하던 엘피에게 친근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하지만 원작을 비틀고 있는 엘피로서는 여주인공인 그녀에게 복잡한 심경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냐, 이럴 때가 아니지. 브요른 남작에게 집중하자.’

엘피는 다시금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노력하며 파티장의 구석에 섞여 들어갔다.

***

가이와 트론이 공작저에 도착한 것은 느지막한 시각이었다.

“르터바이스 소백작님, 어서 오십시오.”

입구에서부터 미리 연락된 듯, 마차에서 내리자 집사장이 직접 나와 이들을 맞이했다.

“네, 공작 각하를 바로 뵐 수 있을까요?”

“분부받았습니다.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가이는 생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트론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주변에서 보기에도 확연히 트론을 보좌한다는 것이 느껴지도록 그를 추월하지 않으며 걸어갔다.

연회장 홀 안은 르터바이스 소백작이 곧 도착한다는 이야기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중앙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유명한 그 가문이 이렇게 첨예한 정치 국면에 파티에 참석할 리가 없다는 예측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와중 누군가가 홀의 입구 쪽을 향하며 탄성을 흘렸다. 마치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된 양, 일시에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에 모였다.

샹들리에의 빛을 받으며 트론이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새카만 눈동자와 머리칼이었다. 어딘지 이 세상과 동떨어진 듯한 신비한 분위기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샹들리에의 빛이 그려내는 그의 존재는 실재했다. 사람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그를 주목했다.

트론이 홀을 가로질러 마그달리사 공작 앞에 도달했을 때, 그 뒤를 보좌하여 따라오던 가이가 먼저 인사를 했다.

“마그달리사 공작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금발의 풍채 좋은 중년 남성, 마그달리사 공작이 온화하게 웃으며 그 인사를 받아 주었다.

“오랜만이오, 르터바이스 소백작. 변경백께서는 여전하시고?”

“네, 원체 파티 같은 건 즐기시지 않는 분이라, 대신하여 제가 부족한 몸으로 이 자리에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변경백을 뵙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 소백작만큼 파티를 빛내 줄 손님이 얼마나 있겠소. 우리 아들딸을 불러올 테니, 소개를…….”

“아, 그 이전에.”

가이가 트론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마그달리사 공작의 얼굴에서 긴장하는 기색이 스쳤다. 그는 무언가를 확인하듯 천천히 질문했다.

“같이 오신 손님은, 르터바이스 가문의 방계 영식이시오?”

“그 답변을 듣는 건 각하께서 먼저 자신을 알린 후에 허락될 것 같군요.”

“……!”

대귀족인 마그달리사 공작이 먼저 이름을 대야 하는 존재. 그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보다도 명확했다.

그는 깊이 고개 숙이며 바로 입을 열었다.

“……스레데니옴 왕실의 영광 아래 마그달리사령 이하 데네인, 주테리호, 세반느의 통치권 및 공작 작위를 하사받아 영주로서 기능하고 있는 불초의 신하, 칼퍼 마그달리사가 문안 여쭈옵니다.”

트론의 입꼬리가 비스름하게 올라갔다. 마그달리사 공작이 과장되게 공식 석상에서나 쓰는 부담스러운 수사를 인용한 이유가 뻔했기 때문이었다. 결코, 그를 환영하는 의미 따위는 아니었다.

트론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잡아 한 박자 늦게 입을 뗐다.

“위대한 시초왕이신 세일렌으로부터 시작된 스레데니옴의 천 년을 어깨에 짊어지시어 마그달리사, 처필, 솔피시언, 데하스, 르터바이스를 아우르는 국부이자 국가 원수, 통수권자인 셀딕 스레데니옴 폐하의 삼남, 트론이다.”

소리를 죽인 술렁임이 홀 안에 가득 퍼졌다.

선왕의 삼남이 천출이라는 것은 쉬쉬하며 알려진 상태였으나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다들 아는 이가 없었다.

르터바이스처럼 정보력이 뛰어난 일부 대귀족 가문이라면, 그가 눈에 띄는 외견을 가지고 있지만 특출난 재능이 없다는 이야기 정도만 들었을 것이다.

그런 트론이 대귀족 중의 대귀족인 마그달리사 공작 앞에서 위압되지 않고 공식적인 수사로 자신을 소개하는 모습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마그달리사 공작은 시험해 보려던 자신의 의도를 간파하고 받아친 눈앞의 소년을 향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따사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전하를 처음으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리 언질을 주셨다면 더 융숭하게 대접해 드릴 것을, 부족하게 맞이하게 된 점 송구스럽습니다.”

“스레데니옴 왕실을 향한 마그달리사 가문의 충정은 겨우 그런 것으로 의심될 사항이 아니니 염려하지 말도록.”

‘미리 연락이나 해 주지 갑자기 와서 난장 부리면 곤란한데요’, ‘곧 왕위에 오른다고 기고만장한 숙부 말고 왕실에 충성하는 거라면 불평하지 마라’를 정치적 수사로 읊고 있는 둘을 보며 가이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생글생글 웃었다.

마그달리사 공작은 자신에게 밀리지 않는 검은 눈의 소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전하의 너그러운 마음, 한량없습니다. 모쪼록 부족한 잔치나마 즐겨주신다면 그보다 큰 기쁨이 없겠습니다. 그간은 르터바이스령에 있으셨는지요?”

“그대도 알다시피 불충한 무리가 부왕 폐하를 해하였고, 나 역시 위급한 상황이었다. 국장조차 참석할 경황이 아니었지.”

“이렇게 건강하신 모습을 뵙게 되어 소신도 안심했습니다. 왕자님의 숙부님이신 헤럴드 전하께서도 사태의 수습을 위해 힘쓰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그래. 숙부님의 노고에 감사할 겸 이번 파티가 끝난 후 기회가 닿는 대로 왕성에 갈까 한다.”

날이 선 대화가 오고 간 후, 트론은 의례적인 미소를 얼굴에 붙였다.

“내 안위를 염려해 준 마그달리사 공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지. 주최라 이야기 나눌 이가 많을 터인데, 내가 너무 긴 시간을 빼앗았군.”

“천만의 말씀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 미욱한 자식들도 인사 여쭈어도 될지요?”

“뜻대로 하도록.”

마그달리사 공작이 뒤에 있는 이들에게 눈짓하자,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듯 보좌관이 소공작 딜 마그달리사와 공녀인 루베인 마그달리사를 데려왔다.

‘……?’

트론은 루베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의아함을 느꼈다.

그녀가 영지민 회관의 설명회에서 마주쳤던 소년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어설픈 가명과 외견 특징으로 파악한 바였다. 그래서 차후에 귀찮아지지 않도록 기억을 지웠다.

그런데 그녀는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트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그달리사 공작가의 장남, 딜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동생인 루베인입니다. 부족한 점이 많아 전하께 무례를 끼치지 않을까 염려되나, 이렇게 인사드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과분한 기쁨입니다.”

“나도 마그달리사의 미래를 짊어질 그대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 이후 예의는 신경 쓰지 말고 나를 동생처럼 편히 대하면 좋겠구나.”

트론이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따를 머저리는 이 공간에 없었다. 오로지 가이만이 ‘왜 저한테는 동생처럼 대하라는 소리 안 하셨어요’라고 마음속의 원한을 적립한 후 마그달리사 남매에게 인사했다.

“두 분을 뵙게 되어 저도 반갑습니다. 르터바이스 변경백을 대신하여 참석하게 된, 가이즈카 르터바이스입니다.”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영광입니다.”

두 사람과 인사하며 가볍게 덕담을 나눈 가이는 루베인에게 이어서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영애께서는 오늘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데뷔하신 거죠?”

“네, 그렇습니다. 정식 절차는 내일이긴 합니다만…….”

“마침 트론 전하께서도 영애와 연령이 비슷하고, 또한 처음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추셨으니. 두 분께서 이번 파티 일정 동안 함께하신다면 무척 뜻깊은 일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가이의 제안에 마그달리사 공작이 ‘허허’ 소리를 내며 웃었다.

트론이 구태여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를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중하게 트론을 보았다. 천출인 어린아이라는 소문만 들었을 뿐, 그 됨됨이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직접 만나 보니,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르터바이스 가문에게 끌려다니는 꼭두각시로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이 패에 배팅하기에는 일렀다. 뼛속까지 대귀족인 그에게 있어 평민의 피가 섞인 혼외자가 기껍지 않다는 면도 있었다.

마그달리사 공작이 다시 자상한 미소를 얼굴에 무장하며 거절하려 했을 때, 루베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영광입니다. 오히려 제가 먼저 청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루베인! 점잖지 못하게.”

그녀의 오빠인 딜이 먼저 깜짝 놀라 다소 무례한 그녀의 말을 꾸짖었다.

하지만 트론은 그에 개의치 않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나야말로 마그달리사 공작이 귀애하는 여식과 교류할 기회를 얻게 되어 기쁘군.”

“말씀 감사합니다.”

마그달리사 공작은 말괄량이 딸이 아비의 허락도 맡지 않고 먼저 이야기를 진행해 버린 상황에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므로, 그는 좋게 마무리했다.

“이렇듯 당돌하고 미욱한 딸이지만, 모쪼록 귀엽게 봐주시면 기쁘겠습니다. 그럼 전하께 방해되지 않도록, 저는 잠시 르터바이스 소백작과 환담하도록 하지요. 딜, 너도 전하께 인사드리고 손님들을 맞이하거라.”

가이는 트론에게 살짝 눈인사를 한 후 마그달리사 공작과 자리를 비웠다.

딜 역시 인사하고 다른 테이블로 향했다.

루베인은 자신보다 키가 작은 트론의 팔짱을 낀 후, 몸을 살짝 숙이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전하께서는 저랑 나눌 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은데요.”

“글쎄,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설마 그날 영지민 회관에서 뵈었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트론은 표정을 바꾸지 않으며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분명히 기억을 지우는 주술은 완벽했다.

‘설마 몇십 년에 한 번 나온다는 주술 면역 체질인가.’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틀어진 상황에 맞춰 움직이기로 했다.

“일단 주변에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만큼은 인사하러 돌아다닌 다음 따로 이야기하지.”

“좋습니다.”

일이 귀찮게 되었음을 느끼면서도, 트론은 계산을 늦추지 않으며 이목을 끌듯 홀의 가운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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