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대의와 꽃의 공녀 (9)
트론은 왕자궁의 비밀 통로에서 빠져나온 후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던 그녀의 긴 금발을 기억하고 있었다.
갈색 머리를 한 그녀도 정감 있는 인상이지만, 그때의 그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북부 교류 파티가 끝나면.”
“네.”
“그대도 최대한 빠르게 자작으로 복권하게 해 주겠다.”
현재 이나드 영지는 처분이 공중에 붕 뜬 애매한 상태였다. 후계자인 엘피는 행방불명이고 그 외 식솔들은 다 목숨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원칙대로라면 영지와 작위를 왕실에서 회수해야 했다.
그러나 현재는 왕좌가 공석인 관계로 그런 잡다한 처리를 할 수 없었다.
반대로 엘피가 행방불명 상태를 풀고 모습을 드러내도 복잡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자작 교지를 내려 줄 왕이 존재하지 않으니, 바로 작위를 물려받을 절차가 마련되기는 어려웠다.
“상황이 복잡한 것을 압니다. 서둘러서 그러실 건 없어요.”
그런 상황에서 엘피의 작위 계승을 밀어붙이는 것은 트론에게 정치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회귀 전에 트론이 왕자로 복권했을 때도 비슷했다. 그 당시에 이나드 영지는 이미 왕실이 회수한 상태였다.
트론은 아쉬워했으나 엘피는 그에게 부담이 되기 싫어서 작위를 돌려받지 않고 그의 직속 시녀 자리에 만족했다.
“그리고 작위를 물려받으면 저도 영지 관리를 해야 할 텐데요. 그럼 왕자님을 챙겨드릴 시간이 줄어들잖아요. 그건 싫습니다.”
회귀한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전에 가이의 도발 때문에 ‘백작이나 후작이 되고 싶다고 할까’라는 충동적인 소리를 뱉었지만, 그녀는 작위에 욕심이 없었다.
트론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고향에, 가 보고 싶진 않은가?”
“…….”
회귀한 그녀에게 있어서 가족의 죽음은 벌써 6년 이상 지난 사건이었다.
이제는 그들을 향해 느끼는 애수나 슬픔이 많이 흐려졌다고 생각했는데 트론의 말을 듣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북부 귀족 교류 파티는 원래 엘피의 부모님도 참석하던 곳이었다. 하븐은 이나드 영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이나드 자작가 역시 북부에 속했다.
파티에 대한 화제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엘피는 약한 마음을 눌렀다.
“헤럴드에게 복수를 하고 나면 그때 돌아가겠습니다. 돌아가서…… 제대로 다시 장례를 치르겠습니다.”
다짐처럼 속삭이자 트론이 그녀의 눈 밑을 쓸었다.
엘피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회귀한 이후 쓸데없이 눈물이 많아졌다고 자책했다. 기껏 꾸미고 왔는데, 이래서는 화장을 고쳐야 했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다.”
“……흑.”
기어코 엘피의 입에서 그동안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트론은 달래기라도 하듯 그녀의 눈물을 훔쳐 주었다.
“빨리 이뤄 줄 수 없는 일이라 내가 미안하구나. 언제나 그대가 바라는 보수를 제대로 돌려주지 못하는 것 같다.”
“아, 아닙니다! 훌쩍……. 저는 정말 왕자님이…….”
세상을 떠난 가족들, 또한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트론의 죽음.
괜찮아졌다고 생각해도 상처로 남아 이렇게 다시 쿡쿡 쑤시면 눈물로 흘러나왔다.
“끝까지 살아서, 왕이 되셔서…… 행복하시면, 그걸로 족합니다.”
울음에 섞여 발음은 정확하지 않았지만 트론은 그녀가 웅얼거리듯 뱉은 말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조각들이 모여 한 가지 그림을 맞춰 갔다.
엘피가 보내는 맹목적인 관심, 타인보다 민감하게 그의 상태를 감지하는 시선, 그의 일을 자기 일처럼 마음 아파하는 모습, 조건 없는 헌신.
애정이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너무도 뚜렷한 그림이 완성되어 버렸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두려웠다.
그녀가 자신에게 주는 애정의 원천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
“당연합니다! 전 왕자님만큼 올곧고 다정한 사람을 본 적 없는걸요…….”
그 순간 트론은 날카로운 유리가 심장의 한 부분을 저미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동시에 복잡하던 머리가 잠잠하게 식었다.
정말로 그녀 안에 어떤 형태의 애정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받는 대상은.
“……그래.”
추하게 곪아 썩은 냄새가 나는 불순물이 아니라, 다정하고 상냥하며 따사로운 겉가죽일 것이다.
‘그 간단한 사실을 혼동할 이유는 없었는데.’
자신의 어리석음에 탄식하며 트론은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추스르는 대로 출발하도록 해.”
“흐트러진 모습 보여 죄송합니다.”
엘피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낸 후 훌쩍이는 것을 삼키고 또렷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나아가시는 길이 더욱 빛날 수 있도록 오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겠습니다.”
“그대가 잘 해내리라 믿는다.”
“분에 넘치는 말씀이십니다.”
엘피는 마지막으로 예를 갖춰 절하고 티룸을 나섰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트론은 입술을 짓씹었다.
대의도, 정의도, 선의도, 자신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라이샤인 그녀가 자신에게 예언을 바치는 이유가 겉가죽을 향한 애정이라면, 그 애정에 최대한 부응하는 모습을 연기하면 그뿐이었다.
처음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전에는 그녀가 자신의 본질을 모르면서 속는 모습에 조소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새삼 이제 와서 그 사실에 가슴이 아픈 이유를 트론은 알 수 없었다.
***
실컷 울었더니 엘피는 오히려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트론에게 받은 따스한 말도 격려가 되었다.
그녀는 화장을 고치고 곧바로 파티장으로 이동했다.
마그달리사 공작저에 도착하자 입구에서 초대장을 확인했다.
“위든 자작가의 영애시군요. 가족분들은 같이 오시지 않았나요?”
“네, 이번에 저만 대표로 왔습니다.”
“알겠습니다. 편히 즐기시기 바랍니다.”
공작저답게 입구부터 광활한 거리를 마차로 달려서야 파티가 열리는 별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훈련된 도어맨들이 능숙하게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큰 파티는 처음인 거 같네.’
어릴 적에는 데뷔를 하기 전이라 가족 단위의 작은 모임에 참가한 정도였고, 회귀 전에는 왕자로 복권한 트론의 시중을 드느라 제대로 된 파티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오늘은 전야제이기 때문에 정식 댄스 타임 등은 없는 칵테일 파티 분위기지만, 참석자들이 입고 온 의상부터 전투 의지가 느껴졌다.
오히려 자신의 의상이 너무 수수해서 반대로 눈에 띄는 건 아닌지 염려되었다.
엘피는 혼자서 어색하게 있으면 튀어 보일까 봐,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섞였다.
급사가 술을 권했지만, 그녀는 사양하고 주스를 받았다.
‘우선, 브요른 남작을 찾아야 해.’
그가 테라스로 나가서 옥새를 흘리는 것은 파티가 무르익은 후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소설의 정보만으로는 정확하지 않았다.
그가 밖으로 나가는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서는 그의 얼굴을 확인한 후 마크하는 게 가장 안전했다.
“아름다운 영애, 혼자 왔나요?”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와중,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옷을 입은 청년이 엘피에게 말을 걸었다.
“아, 네. 가족들이 모두 바빠 소자작인 제가 대표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하븐에서는 처음 뵙는 얼굴 같은데요.”
“르터바이스령 구석에 있는 시골 출신입니다. 아는 것이 부족하여 영식께 무례를 저지르지 않을까 두렵군요.”
“천만의 말씀을요. 이렇게 아름다운 영애의 시간을 독차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답니다.”
참으로 부담스러운 사람이라 생각하며 엘피는 위장 신분을 대고 몇 마디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곧 왕제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다는 소리가 있더군요.”
“……어머. 그런 말씀 함부로 하면 안 되지 않나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미 결정 사항 아니겠습니까? 쉬쉬하곤 있지만, 왕자님들도 모두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고요.”
“세상에……. 그건 몰랐습니다.”
순진한 시골 영애를 가장하며 답하자, 그는 신이 나서 더 수작을 부렸다.
“이런, 영애께는 자극이 심한 이야기였군요.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오페라 이야기를 할까요? 뭣하면 함께 관람 약속이라도…….”
“영식의 배려는 감사하나, 일행이 곧 올 것 같아서요. 먼저 실례해도 될까요?”
엘피는 치근덕대는 그를 떼어 내고 다른 테이블로 이동했다.
‘아, 찾았다.’
가이에게 미리 전달받았던 초상화로 파악했던 브요른 남작을 발견했다.
갈색 머리에 보라색 눈을 한, 어딘지 인상이 흐릿한 남성이었다.
엘피는 그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브요른 남작을 주시했다.
시종 거들먹거리며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업이 얼마나 잘 되고 있는지 자랑하는 모양새였다. 자신의 뒷배에 헤럴드가 있으니 알아서 자신에게 복종하라는 속셈이 느껴졌다.
연회장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대화에서도 이미 헤럴드가 왕이 될 것은 기정사실로 느껴졌다.
반대파인 이들도 ‘다소 우려된다’ 정도로 강하게 의견을 표출하지 못한 채 눈치를 보고 있는 낌새였다.
‘왕자님이 없었으면 이대로 헤럴드가 왕이 되었겠지.’
그렇게 만들지 않기 위해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이다. 다시금 각오를 다지는데, 주변에서 다른 의미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분이 마그달리사 공녀님인가 보군!”
“소문대로 아름답네요. 아직 어린데도 저 정도라니, 성인이 되면 정말 엄청난 미인이 되겠어요.”
엘피는 숨을 삼켰다. 원작의 여주인공이자 이번 북부 귀족 교류 파티 주최자의 딸.
그 장본인이 파티장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엘피는 뒤를 돌았다.
루베인은 오빠인 마그달리사 소공작의 손을 잡고 나타나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 주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붉은색의 드레스에는 금실의 자수가 섬세하게 아로새겨져 화려함과 우아함을 더했다.
하지만 차림새보다 이목을 끄는 것은 그녀의 외모였다.
샹들리에 빛에 반사되는 눈부신 금발, 짙푸른 눈동자.
‘저 얼굴, 분명히 어디선가…….’
엘피는 홀린 듯이 그 아름다운 얼굴을 관찰하다가 헉, 하고 깨달았다.
‘……시장에서 날 도와줬던 남자애 아니야?’
그와 동시에 깨달았다. 트론이 성별을 바꿔 위장했던 것처럼, 그녀도 평민인 척 잠행할 때 소년을 위장했던 것이라고.
루베인이 책보다 검을 좋아하는 왈가닥 기질의 소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남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루베인 마그달리사…….’
심장이 요동쳤다. 그저 문장으로만 접했다고 생각했던 그녀와 이미 이야기를 나누었고,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자신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은 꽤 당혹스러웠다.
그 순간, 지루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루베인의 얼굴에 생기가 감돌았다.
엘피는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한 박자 늦게 확인했다.
‘이런, 바로 자리를 피했어야 했는데.’
이목을 끄는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엘피는 어색하게 눈인사를 한 후 홀 옆에 있는 회랑으로 피신했다.
루베인의 표정으로 봐서 자신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싶은 기색이었고, 주변에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나으리라 판단한 것이었다.
예상대로 얼마 안 있어 루베인이 엘피를 찾아왔다.
“역시 전에 봤던 그 아가씨네! 안녕! 루베인 마그달리사라고 해.”
“……아, 안녕하세요. 일전에는 공녀님인 줄 모르고 실례가 많았습니다. 위든 자작가의 장녀, 엘피라고 합니다.”
초대장을 빌린 위장 신분을 대며 엘피는 살짝 머뭇거렸다.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긴 했지만, 그녀의 태도가 지나치게 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