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대의와 꽃의 공녀 (11)
트론과 가이가 홀에 도착하기 얼마 전, 엘피는 브요른 남작이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것을 확인했다. 슬슬 홀에서 나가려는 낌새였다.
한창 파티가 무르익을 즈음 나갈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가 나가는 타이밍이 더 빠른 모양이었다.
엘피는 서둘러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동했다. 테라스의 위치와 숨을 곳은 미리 파악해 두었기에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었다.
회랑 너머에 있는 으슥한 테라스에 한 발 먼저 도착했다.
그녀는 발소리를 죽이고 테라스의 석상 그늘에 숨어 쭈그려 앉았다.
이윽고 엘피가 들어온 반대 방향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예상대로 브요른 남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한 여성과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
“일전에는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셀토아 남작. 덕분에 저도 수확이 컸습니다.”
“별말씀을요. 거사 때문에 투자하신 금액도 많을 텐데, 자금 사정에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어휴, 말도 마십시오. 정말 도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도 곧 헤럴드 전하의 치세 아닙니까. 그 도박이 투자하신 금액의 100배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지요.”
“하하, 100배까지는 아닙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는 브요른 남작의 사업 파트너인 듯했다.
셀토아 남작은 의미심장한 투로 그에게 물었다.
“곧 전하께서 왕좌에 오르시는 게 확실하지요?”
“물론입니다. 남작께만 말씀드리는 거지만 아마 2주 내로 공표될 겁니다.”
엘피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곧 트론이 나타나면 헤럴드를 비롯한 저들의 망상은 물거품처럼 꺼지게 될 것이다.
이어서 엘피가 알아듣기 어려운 사업 이야기가 이어졌다. 혹시 트론에게 필요한 정보가 없을까 싶어 촉각을 곤두세우는 와중, 뜻밖의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하면, ‘멜시아 꽃’을 정말로?”
“네. 브요른 남작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제게 큰 이득을 안겨 주었으니 저도 당연히 보답해야지요. 이만한 상품이 없는 건 남작께서 가장 잘 아실 텐데요.”
“흠, 그렇긴 합니다만……. 일단은 위법 아닙니까.”
엘피는 긴장하며 숨소리를 죽였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시끄러워서 밖에 들리는 것 아닌지 염려될 정도였다.
‘멜시아 꽃’이란 마약의 한 종류였다. 당연하지만 국법으로 재배와 유통이 전면 금지된 작물이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면 그것을 ‘눈 감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
“물론 당장 결정하시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시지요.”
원작에서 멜시아 꽃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스치듯 지나간 정도였다.
원래 불법인 그 작물이 어느 시점부터 성행하였고, 트론은 왕위에 오르고 나서 그와 관련된 자들을 마약 농장과 함께 통째로 불태워 버렸다.
마약보다는 냉혹하고 가차 없는 트론의 면모에 포커스를 맞춘 장면이었다.
‘……마약이 퍼진 근원이 이 사람들이었나? 게다가 말하는 분위기로 봐서는 이미 몰래 키우고 있는 것 같은데?’
나중에 가이와 트론에게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엘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셀토아 남작이 은근한 뉘앙스로 말을 이었다.
“브요른 남작께서 자주 다루시는 ‘위작’도 그리 깨끗한 일은 아닐 텐데요.”
“어허, 위작이라니요. 재주 있는 장인들에게 대용품을 만들 기회를 제공하는 것뿐입니다.”
“……후후. 그런 것으로 치지요. 그나저나 어쩐지 밖이 소란스러운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무슨 일일까요?”
그 순간, 테라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들어온 방향의 문이었기에 엘피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남작님. 나와서 급히 확인하실 일이 있습니다.”
브요른 남작의 보좌관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급하게 말했다.
“웬 소란이냐.”
“……선왕의 셋째 왕자가 르터바이스 소백작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뭣…….”
브요른 남작과 셀토아 남작은 둘 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듯했다. 그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가 보지요.”
“……셀토아 남작. 우리가 한배를 탔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바쁜 발소리와 함께 테라스 문이 닫히고 사방이 조용해졌다.
엘피는 잠시 숨을 죽이고 주변을 돌아본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들이 앉아 있던 의자에 다가갔다.
어른 주먹의 반 정도 되는 크기의 나무 상자가 의자 아래에 떨어져 있었다. 엘피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주워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반지였다. 정확히는, 반지의 형태로 만들어진 옥새였다.
엘피는 뚜껑을 닫은 후 나무 상자를 꼭 쥔 채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다행이다…….”
혹시 무언가 잘못되어서 옥새를 얻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손에 넣었다. 지금까지 했던 모든 일 중에 가장 트론에게 도움이 되는 업적을 달성한 것만 같았다.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감격의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엘피는 몸을 돌렸다.
‘이제 사람들 틈에 섞여서 눈에 안 띄게 호텔로 돌아가면 끝이야.’
마약에 대한 뜻밖의 정보와 옥새를 손에 넣었다는 안도감으로 머리가 꽉 찼던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안녕, 아가씨.”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엘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심장 소리가 거세게 울렸다.
엘피는 나무 상자를 더 품에 꽉 안으며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
반투명한 모습을 한 청년이 공중에 떠 있었다.
보통은 유령이라고 생각하여 비명을 지를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엘피의 마음속을 지배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공포였다.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그 청년은, <금빛 날개와 은빛 검>의 남주인공이자 진짜 라이샤인 ‘제시드’였다.
***
트론은 루베인과 테이블을 돌며 유력 귀족들 몇몇과 인사를 나눴다. 반헤럴드파도 포함하여 대부분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예상했던 일이기에 그건 신경 쓰이지 않았으나, 트론이 오히려 뜻밖으로 생각한 건 루베인 쪽이었다.
다소 반항적인 그녀의 첫인상을 생각하면 신기할 정도로 완벽하게 대귀족 영애 행세를 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가 볼까요?”
루베인이 홀을 한 바퀴 돌고 나서 트론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왕자님께 저희 저택의 정원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각하께 허락을 받고 나가지요.”
“……그러지.”
어차피 고아원 부지 건을 생각하면 그녀와 대화는 불가피했으므로, 트론은 별말 없이 루베인의 제안에 따랐다.
마그달리사 공작은 보좌관을 대동하는 조건 하에 밤 산책을 허락해 주었다.
두 사람은 홀을 빠져나와 회랑 뒷문을 통해 정원으로 향했다. 보좌관에게 이야기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떨어져서 따라올 것을 명한 후 루베인은 트론의 팔에서 손을 떼었다.
“불편해서 오라버니한테도 팔짱 잘 안 끼는데, 정말 힘드네요. 이거.”
“그런 것 치고는 숙녀 행세에 익숙해 보이던데.”
“훈련이죠, 훈련. 완벽하게 해내지 않으면 트집 잡혀서 밖에 못 나갈지도 모르잖아요. 나름의 처세술이에요.”
그녀는 콧잔등을 찡그렸다가 쾌활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정체를 들킨 적이 없었는데, 하루 만에 두 사람한테나 들키다니 신기하긴 하네요.”
“두 사람?”
“아, 일주일 전쯤 시장에서 만났던 아가씨를 오늘 파티에서 다시 만났거든요. 보통 귀족가 아가씨가 평민 차림을 하고 혼자 돌아다니는 일은 잘 없잖아요? 동질감이 들어서 반가웠어요.”
트론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혹시,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한 그대 또래의 여성인가?”
“어, 그걸 어떻게 아세요?”
루베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일주일 전쯤에, 그녀가 시장을 돌아다녔다고 들었다. 마주쳤을 가능성도 있을 듯해서.”
“제가 만난 건 엘피라는 아가씨였는데, 그 사람 맞나요?”
“……그래.”
“왕자님 일행이었군요! 이런 우연도 다 있네요.”
예상한 대로 하븐에 온 첫날 엘피가 혼자 돌아다니다가 루베인을 만났던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트론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자신이 제어하지 못하는 곳에서 엘피가 그녀와 만났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불쾌했다.
“그 아가씨, 뭔가 선물을 사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왕자님 드리려는 거 아닌가 싶네요! 받으셨어요?”
“……그대는 잡담이나 나누려고 따로 자리를 만들었나?”
트론은 혼자 들떠 보이는 루베인의 수다를 차갑게 끊어 냈다. 그녀는 잠시 머쓱한 얼굴을 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솔직히 좀 놀라서요. 트론 전하일 거라고 짐작은 했는데, 설마 당당하게 파티에 나타나실 줄은 몰랐거든요.”
“글쎄, 마그달리사 공작 입장에서는 딸이 자기 정책에 반대해서 영지민 단체 지원에 용돈을 쏟아붓고 있다는 소식이 더 놀랍지 않을까 싶은데.”
“……조사하셨나요?”
“익명의 자선가가 정기적으로 거금을 기부해서 돌아가는 단체라는 것 정도는.”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각하께 고자질하고 싶으시면 마음대로 하세요. 피차 시간 낭비하지 말죠. 자 그럼, 베인으로서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짙은 푸른색 눈으로 트론을 응시하며 루베인이 입을 뗐다.
“전하 너는 왕이 될 생각이지?”
***
“이런, 놀라게 했나?”
붉은 머리의 청년이 얼어붙어 있는 엘피를 보고 미안한 얼굴을 했다.
“유령처럼 나타났으니 놀랄 수밖에 없긴 하지만. 인사를 하고 싶었거든. 안녕, 엘피 양. 나는 제시드라고 해.”
역시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엘피는 어깨를 움츠렸다.
“미, 미안해요!”
“응?”
“당신은 라이샤니까 다 알고 있는 거죠? 제가 거짓말 한 것도, 지금 옥새를 가져가려 한 것도…….”
그와 만날 것을 예상했고, 할 말도 생각해 두었다. 그렇지만 회귀한 후 지금까지 원작을 거스르던 순간 중 지금이 제일 떨렸다.
엘피는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매, 맹세할게요. 당신이나 루베인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 같은 건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이런, 오해했나 보구나.”
제시드는 난처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딱히 너를 책망하려고 나타난 게 아니야. 음, 짐작해 보자면 내가 혹시 트론이나 가이즈카한테 네가 거짓 라이샤라느니 고해바칠까 봐 무서워하는 거려나?”
엘피는 대답 없이 눈알을 굴렸다.
“걱정하지 마. 그럴 생각도 없고, 애초에 그럴 능력도 없어. 지금 나는 잔류 사념 같은 거니까. 루베인을 못 보고 영원히 사라지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네……?”
그가 한 말을 순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영원히 사라진다니, 그건 원작과 달랐다. 제시드는 6년 뒤 루베인의 앞에 다시 나타날 예정일 터였다.
“나의 이야기는 실패로 끝났어. 그러니까 너에게 기대할게. 엘피 양.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행하도록 해. 물론 힘들 때도 있을 거고, 네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가려진 진실이 있겠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미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환한 미소와 함께 그가 고했다.
“네가 라이샤가 되려고 한, 처음 그 마음을 잊지 마. 모쪼록 빛이 너를 이끌기를 빌게.”
“자, 잠깐만요……!”
제시드의 모습이 달빛에 녹는 것처럼 흐릿하게 사라져 갔다.
엘피는 그를 향해 다가가며 팔을 뻗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루베인을 부탁…….”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 그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엘피는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진짜 라이샤라고 생각했던 제시드가 영원히 사라진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제시드.”
그가 사라져 버린 허공을 향해 엘피는 중얼거렸다.
자신이 ‘원작’에 개입하여 무언가 틀어진 것인지, 실패로 끝났다는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하나도 실감이 안 나…….’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제시드가 남긴 말들과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정보가 뒤섞여 아무런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엘피는 자신이 으스러질 정도로 나무 상자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래, 이럴 때가 아니야.”
일단은 자신이 할 일에 집중해야 했다.
엘피는 복잡한 생각들을 밀어내며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