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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28화 (28/132)

28화. 대의와 꽃의 공녀 (8)

“하긴, 이번이 데뷔 파티도 겸하니까 자격은 되겠네요. 왕좌가 비어서 교지를 내릴 상황이 아니니 작위랑 영지는 바로 못 받겠지만요.”

가이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하자, 트론은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리고 마그달리사 공작의 자존심상, 자신의 딸에게 줄 토지를 일부 떼어 거래하는 건 꺼릴 것이다.”

“정말이지 대귀족들 자존심은 인생에 도움이 안 돼요. 고아원 건도 그렇고.”

“고아원 쪽은 자존심보다는 이권 문제가 크겠지만. 결과적으로 도움 안 되는 건 사실이긴 하군.”

엘피는 본인은 대귀족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가이를 바라보다가,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물었다.

“남은 방법은 마그달리사 영애를 직접 설득하는 것 정도일까요?”

“그게 가장 빠르지 않을까 싶어요. 마그달리사 공작이 자기 딸한테 끔찍한 거야 잘 알려진 사실이고, 어차피 그녀의 것이 될 영지니까 본인의 의지로 처분하는 것까지 간섭하지는 않겠죠.”

“그럼, 전하께서 그녀를 에스코트할 예정이니까…….”

“그때 이야기하시면 되겠네요. 그쵸, 전하?”

트론의 표정이 다소 애매하게 변했다.

“설득하기 힘들 것 같아서 그러세요? 괜찮아요, 또래 아가씨 상대로 전하 얼굴이면 문제없을 거랍니다.”

“그대는 왜 남의 얼굴로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이는가.”

“에헤헤.”

실없는 가이에게 면박을 준 후 트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더라도 설득은 어렵지 않을 거다. 그 영애라면 고아원 건은 협력할 가능성이 클 테니까.”

“어라,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은 영애라 사람됨이 잘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그건 어떻게 확신하세요?”

“그냥, 어쩌다 보니.”

트론의 말을 듣고 엘피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알고 있는 정보 내에서 트론과 루베인은 전혀 면식이 없는 사이였다.

‘그사이에 둘이 만날 일이 있었나? 아니면 왕자님이 따로 조사라도 하신 건가?’

엘피가 제어할 수 없는 정보가 점점 늘어만 갔다. 그게 좋은 방향일지 나쁜 방향일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아, 혹시 이나드 영애는 라이샤로서 뭔가 알고 계세요? 마그달리사 영애가 어떤 분인지.”

“그게……. 무척 올곧고 정의로운 성격이었어요. 미래에서도 그녀는 대의를 가지고 움직입니다. 분명히 소외된 아이들을 생각해서 고아원 건도 협력해 주지 않을까요.”

소설에서는 묘사되지 않은 공백 기간이었지만, 아마 회귀 전의 고아원 건립에는 그녀의 의지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그녀의 소유가 될 영지에 고아원이 지어져서 마법유전을 발견하게 된 것이리라.

‘그냥 우연히 물려받을 땅에 마법유전이 있다니, 주인공 버프인 걸까.’

소설만 읽어 봐도 알 수 있지만, 그녀는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

당장 그녀에게 힘이 있는 건 아니지만, 루베인이 트론과 좋은 관계를 구축하는 건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전하께서 마그달리사 영애와 땅 거래를 하고 나면 더 화제가 되겠는데요.”

“화제요?”

생각에 빠져 있던 엘피는 가이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 보세요. 유일하게 전하 또래인 공작가의 여식이잖아요. 이 나라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미혼 여성이자 신붓감인 셈이죠.”

“……르터바이스 소백작.”

트론이 다소 불쾌한 듯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가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 사람이 데뷔 파티에서 왕위 계승권자의 에스코트를 받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땅을 거래하다니, 의미심장하잖아요? 다들 알아서 소문을 만들어 퍼뜨려 줄 겁니다.”

“어느 쪽이 되었든 판단하긴 이른 소리 같군.”

“이르기는요. 전면적인 협력은 못 받더라도, 마그달리사 공작가와 약혼 동맹을 맺는 건 큰 메리트인걸요.”

엘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하븐에 오자마자 가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왕자비가 되는 것이 목적이냐고 했던, 실례되는 질문을.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어서 나한테 꿈도 꾸지 말라고 경고하는 의미였던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원작에 의하면 여주인 루베인은 6년 뒤에 재회하게 되는 남주와 사랑에 빠졌다.

그렇지만 자신이 옥새를 탈취하며 그들의 첫 만남을 어그러뜨릴 예정이었다.

애초에, 트론이 성군이 된다면 그녀가 6년 뒤에 굳이 반역할 이유도 사라진다.

‘그러고 보면 원작에서는 서로 거부했지만, 루베인이랑 트론 사이에서 혼담이 오고 가는 에피소드도 있었지.’

어차피 원작의 전개를 비틀고 있었다. 그렇다면 원작과 다르게 우호 관계를 쌓은 트론과 여주인공 루베인이 혼인하는 결말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는 가능성이 가장 커 보였다.

“뭐, 제가 너무 앞서간 거라면. 일단 만나 보시고 좋은 사이가 되시는 건 어때요?”

“서로 필요한 거래만 하면 그만이다. 그쪽이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 알 수 없는 일이고.”

“우리 전하도 참 딱딱하시다니까.”

놀리는 가이의 말을 무시하며 트론은 엘피 쪽을 향했다.

“이나드 영애. 옥새 건은 부탁한다. 마법유전 건은 소백작과 내가 힘써서 성사시킬 것이니, 그대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네, 왕자님.”

어딘지 심란한 마음을 털어내려 노력하며 엘피는 끄덕였다.

***

전야제 날이 밝았다.

엘피는 전야제에 참석하기 전, 치장을 도와줄 하녀들을 불러 두고 양해를 구했다.

“제대로 인사드릴게요. 이나드 자작가의 장녀인 엘피라고 합니다. 그간 의도치 않게 신분을 숨기게 되어 미안해요.”

하녀들은 혹여라도 그녀에게 실수한 건 없는지, 그로 인해 혼나게 되는 건 아닌지 겁을 먹는 기색이었다.

엘피는 차분하게 그간 사정 때문에 신분을 숨겼다는 것, 그리고 오히려 그간 친절하게 대해 줘서 고마웠으니 앞으로도 편하게 대해 달라는 뜻을 전했다.

조곤조곤 상냥하게 말하는 엘피의 분위기에 겁먹은 마음이 누그러진 하녀들은 바로 엘피의 치장을 돕기 시작했다.

옷 시중을 받으면서도 엘피는 무척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타인의 손을 빌려 치장했던 것이 무척 과거의 일로 느껴졌다.

“피부가 정말 하얗고 고우셔서 무엇이든 잘 어울리시겠어요.”

“말만으로도 고마워요.”

“그런데 정말 이 짙은 보라색 드레스로 하실 건가요? 아가씨는 더 밝은색이 어울리실 것 같은데요.”

“네. 오늘은 되도록 튀지 않았으면 해서요. 화장이나 장신구도 수수하게 부탁할게요.”

하녀들은 아쉬운 기색이었다. 르터바이스 가문은 한창 파티에 참석할 만한 나이대의 사람이 가이밖에 없으니, 화려한 드레스나 장신구로 여성을 꾸며 줄 경험 자체가 적었을 것이다.

인형같이 예쁘게 생긴 소녀를 꾸며 줄 귀중한 기회가 이렇게 사라지니 슬픈 모양이었다.

엘피는 쓴웃음을 지으며 하녀들을 달랬다.

“오늘은 그렇지만, 본 파티인 내일은 더 마음껏 치장해도 괜찮아요.”

“네, 아가씨! 내일까지 수도 최신 유행을 모조리 섭렵해 올게요!”

무척 열정적인 것은 좋았지만, 사실 엘피는 그다지 의욕이 없었다. 어차피 파티의 주인공은 그녀가 아니다.

오늘 옥새를 회수한 후 트론에게 건네면 내일 화려한 본 파티의 중심은 그와 루베인이 될 것이다.

“어머, 좋은 날인데 왜 이렇게 안색이 안 좋으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금 피곤한가 봐요.”

“그럼 볼터치에 신경 써서 혈색이 좋아 보이게 할게요.”

하녀들은 짧고 거칠어서 볼품없는 엘피의 머리칼이 튀지 않도록 인두로 지져서 풍성하게 볼륨을 만들었다. 일부러 머리를 틀어 올린 듯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장신구들을 달아 주었다.

피부가 정말 좋다고 몇 번이고 칭찬해 주며 옅게 화장을 해 주고, 짙지 않은 색으로 입술을 마무리했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오히려 차분한 색의 드레스 덕에 우아하고 품위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분명히 영식들이 다들 아가씨에게 반할 거예요.”

이렇게 귀족 영애로서 시중을 받은 것이 까마득하게 옛날이다 보니 엘피는 무척 부끄러웠다.

다른 영애들도 이렇게 과찬을 온몸에 받으며 치장하고 있을까?

‘루베인도 엄청난 미인이라는 설정이었지.’

엘피는 고개를 저었다. 루베인에게 협력을 얻는 것은 트론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하녀들은 뿌듯한 얼굴을 하곤 엘피를 전신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그녀들이 뿌듯해하는 것이 무색하지 않게 몇 시간에 걸친 중노동은 헛되지 않아 보였다.

전반적으로 튀지 않지만, 그래도 엘피 특유의 고아한 분위기가 살아 있는 멋진 차림새였다.

평민을 위장하던 기간이 길어서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어색함이 있었지만, 그래도 예쁘게 꾸민 자신을 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엘피는 수고했다는 의미로 하녀들에게 금화를 나누어 주었다. 다들 꺄꺄 환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의 여동생분도 꾸미셔야 하지 않나요? 아니면, 아직 파티에 가실 연령이 아니신 건가요?”

“그게…….”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난처해하고 있으려니,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다른 하녀가 물었다.

“아, 저 그것도 궁금해요! 본저에 들어오실 때 아가씨한테 약혼자가 있다는 소문 들었는데요. 역시 귀족 도련님이었던 건가요?”

엘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친근하게 대했더니 하녀들의 예의가 느슨해진 모양이었다.

“그건 적절하지 못한 질문인 것 같군요.”

“아…… 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이후로만 주의해 주세요.”

그녀들을 벌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어차피 트론의 정체에 대해 언급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니, 차라리 여기서 대화가 끊긴 게 다행이었다.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준비가 끝나셨으면 티룸으로 모시고 오라는 소가주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엘피는 알겠다고 답한 후 자신을 꾸며 준 하녀들을 돌아보았다.

“그럼 내일도 부탁할게요.”

하녀들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딱히 화가 난 것은 아니었으므로 엘피는 가볍게 끄덕이는 것으로 사과를 받아 주었다.

트론의 정체에 대해서는 나중에 가이가 알아서 전달하겠거니 생각하며 엘피는 방을 나섰다.

***

“어서 오세요, 이나드 영애! 와, 정말 아름다우세요.”

시종의 안내를 받아 티룸에 들어가자, 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벌려 그녀를 환대했다.

엘피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가이는 엘피의 손을 잡고 자리로 에스코트했다. 평소에 가이와 있을 때는 예를 생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약간 적응이 안 되었다.

맞은편에선 트론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피가 고른 은색 재킷과 루비 장식이 어우러진 의상은 역시 그에게 잘 어울렸다.

원래도 휘황했던 그의 외견은 티룸에 잔뜩 들이치는 오후 햇살을 받아 눈부실 정도였다.

“……전하, 정말 멋지세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이나드 영애, 저는요?”

가이 역시 본인에게 얄미울 정도로 잘 어울리는 푸른색 연미복을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었다.

“소백작님도 물론 멋지시고요. 그런데 저희 셋, 이렇게 정장을 차려입고 마주하는 건 처음이라 어색하긴 하네요.”

“후후, 저는 앞으로도 자주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만요. 그리고 그렇게 되겠죠.”

이 나라의 왕위 계승권자, 셋째 왕자 트론 스레데니옴으로서 그가 첫걸음을 뗄 것이기에.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되씹으며 엘피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하, 저는 먼저 출발할까 합니다.”

“……음. 그 전에 잠시. 소백작, 자리를 비워 주겠나.”

맨날 차별당한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가이는 이유를 묻지 않고 티룸에서 나갔다.

엘피는 무언가 따로 지시 받을 것이 있나 싶어서 긴장했다.

그때, 트론이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양손을 잡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대의 야회복 차림은 처음 보지만, 무척 아름답군.”

“……읏.”

가이에게 같은 칭찬을 받았을 때는 쑥스러운 정도였는데, 트론에게 듣자마자 귀 끝까지 빨개지는 것 같았다.

“소백작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 같아 아쉽지만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게, 네……. 과분하신 말씀 더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대는 나를 칭찬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데, 정작 본인이 칭찬받는 것은 어색한 모양이군.”

“송구합니다…….”

“책하려고 한 소리는 아니다. 다만, 아름다운 용모에서 아쉬운 점이 딱 한 가지 있군.”

“어, 어떤 부분일까요?”

눈을 휘게 하며 트론이 드물게 온화한 미소를 보였다.

“그대의 머리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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