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대의와 꽃의 공녀 (7)
트론은 미간을 찌푸렸다. 청소 같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믿은 것은 아니었고, 무언가 대단한 걸 그녀가 숨긴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가이와 둘만의 비밀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나드 영애. 그대가 뭔가 숨기고 싶은 거라면 그리해도 상관없다. 난 옷 좀 갈아입고 오도록 하지.”
자신의 거짓말이 탄로 났다는 것을 깨달은 엘피는 얼굴이 새하얘졌다.
잠시 트론의 뒷모습과 사색이 된 엘피를 번갈아 보던 가이가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엘피는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한 트론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옷 시중 들겠습니다.”
“혼자서도 괜찮은데.”
“왕자님 화나셨나요…….”
“아니다.”
본인이 아니라고 해도 엘피의 촉은 그가 화났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저기, 정말 별것 아니에요. 제가 방에서 뭣 좀 하고 있었는데요, 전하께 보이기는 민망해서.”
“그대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으니, 나에게 보여도 상관없는데.”
그의 드레스를 벗기다가 엘피가 화들짝 놀라며 방어했다.
“사생활이라서요!”
“……그대는 사생활을 르터바이스 소백작과는 공유하는 모양이군.”
이야기를 할수록 이상해지는 모양새에 엘피는 당황했다.
“아닙니다, 정말로요. 원래도 혼자서만 했는데, 상황이 마음대로 안 되어서 르터바이스 소백작님도 아시게 된 거예요!”
“알겠다. 그대를 책망하려는 건 아니었어. 좋을 대로 해.”
편한 셔츠로 갈아입은 후 트론은 엘피의 손길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단추를 여몄다.
약 6년간의 동거 경험으로 엘피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100% 삐친 반응이었다.
정작 트론 본인이 삐쳤다는 자각이 없는 데다가 포커페이스인 편이라 마음을 살피는 게 어려웠지만, 삐친 것이 확실했다.
그녀는 고민 끝에 정공법으로 나가기로 했다.
“지금은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파티가 모두 끝나면 아시게 될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엘피는 그의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며 간절한 얼굴을 했다.
트론은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해를 산 것 같구나. 억지로 실토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다.”
“아닙니다, 제가 전하께 무언가 숨기는 게 싫어서 그렇습니다.”
아까보다는 그의 기분이 많이 풀렸다는 것이 느껴졌다.
‘좋아, 이제 예전의 그 방법을 쓰면 완전히 마음 풀리실 거야.’
그의 옷자락에서 손을 뗀 후 엘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전하.”
“응.”
“잠시만 손 잡아도 될까요?”
“손을? 그러…… 도록 해.”
트론은 이유를 묻지 않고 손을 내주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마디가 약간 짧은 그의 손을 쥐었다.
장갑이 잘 맞을지 손의 크기를 다시 한번 가늠하며 엘피는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하 편이니까요. 제가 무언갈 숨긴다고 해도 대단한 건 절대 아니에요. 전하에게 위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믿어 주세요.”
“…….”
“그것만은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트론은 깍지 끼워 잡은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의심하지는 않아. 그대는 때로 지나치게 걱정이 많군.”
‘그렇지만 전하 삐치셨잖아요’라고 직접 말할 수는 없었기에 엘피는 말없이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에 반응하듯 트론도 엄지를 움직여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예전부터 트론은 스킨십을 하면 금세 마음이 풀어지곤 했다. 회귀 후의 지금도 그 성향은 크게 바뀌지 않은 모양이라고 엘피는 안심했다.
“……그런 주제에 경계심은 지나치게 없지.”
“네?”
“아니. 웬만하면 르터바이스 소백작과 사생활을 공유하는 일은 안 하는 게 좋단 의미다.”
삐쳤던 근원이 그쪽인가 생각하며 엘피는 작게 끄덕였다.
잡혀 있던 손이 느슨해졌다. 닿아 있는 온도는 따뜻했다.
“알겠습니다! 그것보다, 오늘 저녁 식사 잔뜩 하실 거죠?”
“……최대한 노력해 보지.”
역시 그녀의 주군은 무른 구석이 있었다. 엘피는 웃으면서 그의 손을 다시 꽉 잡았다.
***
시간은 어느덧 흘러 전야제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파티에 앞서 중대한 의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의상을 정하는 일이었다.
“역시 직접 의상실에서 맞춰 보는 게 좋은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카탈로그만 보고 고른 게 아쉽군요.”
“그러게요. 저희 왕자님이 파티장에서 최고 빛나셔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건 전하의 얼굴만으로 충분하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지 않을까요, 이나드 영애?”
“그건 그렇지만, 전하께서 무엇 하나 남한테 절대 꿀리지 않았으면 하는 제 소망이…….”
장본인이 있었다면 중간에 저지라도 했겠지만, 불행히도 트론은 사먼을 만나기 위해 외출 중이었다.
덕분에 트론의 얼굴에 한해서 이견이 없는 두 명은 팔불출 무한 루프에 빠져 있었다.
“아, 그것보다 이나드 영애도 드레스를 시착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길이나 품에 문제가 있으면 저희 사용인을 시켜서 세세하게 조절할 수 있으니까요.”
“제 옷이야, 뭐…… 별로 중요하지 않죠. 되도록 눈에 안 띄는 옷으로 골랐고, 사이즈만 얼추 비슷하면 움직이기 불편하진 않을 거예요. 시착까진 필요 없을 것 같아요.”
“그래도 모처럼 파티인데요.”
“제 역할은 파티를 즐기는 게 아니라 옥새를 가져오는 거잖아요.”
“으음…….”
이미 결정된 사항이었지만, 가이의 얼굴은 석연찮아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읽은 미래로 보자면 옥새는 정말 쉽게 얻을 수 있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이미 전하께서도 승인해서 결정 난 일이고, 영애를 믿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드레스를 미리 입어보면서 기분 좀 낸다고 죄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랍니다.”
가이는 안타깝다는 듯 말했지만, 엘피는 파티에 대한 기대보다 다른 감정이 컸다.
원작 남주인공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것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었고, 변칙적인 사건이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파티라고 들떠서 화려한 의상에 눈을 빼앗기는 것보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임무가 중요했다.
‘전하를 위한 일이니까.’
생각을 정리하며 엘피는 딱딱해진 얼굴을 풀어 보려 노력했다.
“드레스를 화려하게 입을 기회는 나중에 또 있겠죠.”
가이는 그녀가 긴장했다는 사실을 표정으로 바로 눈치챘지만, 말로 지적하지는 않았다. 대신 평소와 같은 기색으로 생긋 마주 웃었다.
“그러게요, 전야제 다음 날에 있을 본 파티 때 화려하게 입으시면 되겠네요.”
“왜 그렇게 제 의상에 집착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제가 보고 싶으니까요.”
가이가 흘러 내려온 옆머리를 쓸어올리며 한껏 진지하게 말했다.
“그리고 의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이나드 영애를 제가 에스코트하는 거죠.”
“소백작님은 인기 많으시지 않나요? 그런 분의 옆을 차지한다니 너무 분에 넘치는 자리인 것 같아요.”
“과찬의 말씀을. 제가 이나드 영애를 청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랍니다. 당일에 전하께서는 바쁘시잖아요. 소외당하는 저를 구해 주세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가이 정도의 신분과 얼굴이라면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본 파티 날 소외될 가능성이 큰 것은 어중간한 위치의 엘피였다. 가이가 자신을 생각해서 저런 제안을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배려 감사히 받겠습니다.”
덥석 승낙하는 그녀를 보며 가이는 얼굴의 미소를 깊이 했다.
아마 호의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인 모양이지만, 가이의 의도는 반 이상 트론을 놀려먹으려는 수작이었다.
가이가 엘피의 파트너 자리를 채간 것을 알면 트론은 자각 없이 화낼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다른 놈팡이가 에스코트하는 것보다 나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고 가이는 스스로 면책권을 부여했다. 어차피 루베인 마그달리사를 상대해야 하는 트론은 절대 엘피의 파트너가 될 수 없다.
그의 속셈을 모르는 엘피는 카탈로그를 넘기며 역설했다.
“아무튼, 제 의상은 됐고요. 빨리 왕자님 의상을 정해 보시죠.”
후보가 되는 옷들은 카탈로그에서 골라 사이즈를 맞춰 배달받은 상태였다. 중요한 건 그 많은 옷 중 어떤 조합을 골라 트론에게 입혀 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흠. 역시 저는 검정색 계열을 밀고 싶군요. 전하의 악마 같은 매력과 카리스마가 회장을 지배할 겁니다.”
“악마 같다뇨! 전하처럼 천사 같은 분이 또 어디 계시다고요. 역시 제 생각에는 이 은색 재킷과 루비 조합이…….”
얼굴 팔불출끼리 한동안 캐릭터 해석을 통일시키지 못하여 설왕설래만 이어졌다.
그 지루한 말다툼을 유일하게 종결시킬 수 있는 장본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녀왔다.”
트론을 보자마자 엘피는 반색했다.
“전하, 다녀오셨어요!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응, 보고만 받는 거라서. 그런데…… 뭐 하고 있는 거지?”
응접실에는 카탈로그 외에도 배달 온 옷상자가 가득했다. 일부 옷은 상자에서 꺼냈기에 실내 여기저기 상자의 잔해와 옷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트론의 질문에는 제대로 답하지 않고 가이가 목청을 올렸다.
“전하, 대답해 주세요. 역시 검정색이죠? 남자라면 검정 아닙니까?”
“색상에 성별 우선순위가 있다는 건 처음 들었고, 그대가 권하니 사양하고 싶군.”
“너무하세요오……!”
엘피는 작게 주먹을 쥐며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왕자님, 은색! 은색이 좋으시지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대 뜻대로 해. 중요한 일 아니면 이것부터 먼저 처리하고 싶은데.”
신하들의 열의도 허망하게 고민 없이 자기 옷의 색상을 선택한 트론은 헤드 드레스를 풀며 소파에 앉았다.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툴툴거리던 가이가 트론의 손에 들린 서류첩을 보고 표정을 달리했다.
그의 기색에 엘피도 조심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
“나왔나 보군요. 마법유전 확정지가.”
“짐작한 바가 맞다. 관련해서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듣고 싶지?”
“나쁜 소식이요!”
트론은 가이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엘피를 바라보았다.
엘피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듯하니 좋은 소식부터요.”
“그래.”
노골적인 차별 대우에 항의하는 가이의 외침을 묵살하며 트론은 서류첩에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마법유전의 위치 말인데. 르터바이스 남부와 붙어 있는 곳이더군. 마그달리사 공작에게 땅을 팔아 달라고 요청할 때 더 그럴싸해 보이겠지.”
트론이 꺼낸 종이는 지도였다. 르터바이스 남부와 마그달리사 북부가 접해 있는 경계 지형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붉게 표시된 마법유전은 경계선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아, 그러게요. 아무래도 저희 영지에서 떨어진 곳을 고아원 후보지로 사려면 그만한 이유를 만들어 내야 하니까요. 수고를 덜었으니 잘된 일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나쁜 소식이 그만큼 걱정되네요…….”
엘피가 불안한 눈으로 트론을 보았다. 그는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마법유전 주변의 일정 범위를 원으로 그렸다.
“나쁜 소식은, 이 땅이 마그달리사 직속령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아, 저런. 귀찮게 됐네요.”
가이가 트론의 말을 듣자마자 혀를 찼다. 엘피는 그게 왜 나쁜 소식이 되는지 짐작할 수 없어서 질문했다.
“직속령이라면…… 왕실에 환수되지 않고 공작이 직접 관리하는 영지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어차피 산하 가문에 영지 운영을 맡겨서 세금만 받는 게 속 편하니, 보통 중심 도시 말고 직속령을 잘 안 만들지요. 저희 가문도 올페마 외에는 직속령이 없으니까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오히려 직속령이면 토지 거래가 쉽지 않을까 했는데 아닌가 보네요……?”
“네. 구태여 직속령을 남기는 경우는 대부분 한 가지 이유거든요. 후계자가 아닌 자식에게 작위와 함께 영지를 나눠 주기 위해서.”
트론은 가이의 말을 보충하듯 지도에 그려 둔 원 위에 이름을 써 넣었다.
“루베인 마그달리사. 공작이 아끼는 그 둘째가 물려받을 땅에 속한다.”
엘피는 마른 침을 삼켰다.
여기서 갑자기 원작의 주인공인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