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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26화 (26/132)

26화. 대의와 꽃의 공녀 (6)

회장에 자리한 청취 인원들은 대부분 심심풀이로 설명회에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눈살을 찌푸리며 밖으로 나갔고, 일부는 반대 의견에 휩쓸려 같이 물건을 던지고 싸우기 시작했다.

설명회의 목적은 어느샌가 이 공간에서 소실되었다.

트론은 그걸 말리려고 씩씩대는 베인을 붙잡고 끌어내는 척하면서 머리칼을 뽑았다.

“아야…… 뭐야?”

“아, 실수. 흥분한 사람들 근처에 가면 위험할 거야. 말리는 건 좋지만 조심해. 그럼 난 이만.”

황당해하는 얼굴의 그를 무시하고 트론은 회관 밖으로 빠져나갔다.

어느새 기울기 시작한 가을의 햇살이 그의 눈을 찔렀다.

보닛을 눌러 쓰며 태양을 피하는 트론의 뒤로 베인이 달려왔다.

“야, 로나!”

기껍지 않은 이름에 트론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뭔데.”

“아까 했던 말 설명해. 승리하지 못하는 고결함이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이 설명회 끝이 안 좋을 거라고 단언했잖아.”

“…….”

“너, 그냥 평민 꼬맹이 아니지?”

“그러는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건.”

“뭐, 됐어. 웃기는 걸 구경시켜 준 보답으로 잠깐 설명 정도는 해 주지.”

금발에 푸른 눈을 한 눈에 띄는 외모, 평민으로는 보이지 않는 분위기와 언동. 거기에 베인이라는 성의 없는 가명을 듣고 트론은 그의, 정확히는 그녀의 정체를 확신했다.

루베인 마그달리사. 공작이 귀애하는 꽃의 공녀였다.

‘설마 이런 곳에서 부모 몰래 엉뚱한 짓을 하는 인물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지만.’

그런 자에게 얼굴을 보인 이상, 기억을 지우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어차피 지울 기억이니 설명해 주는 것도 상관없겠다 싶어서 그는 회관 옆의 사람 없는 공터로 발을 옮겼다.

루베인은 굳은 얼굴을 하며 트론에게 물었다.

“혹시 이 설명회의 취지가 나빴다는 소리를 하려는 거야?”

“취지야 좋았겠지. 내가 지적하고 싶은 건 이 설명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뭐냐는 거야.”

“고아원을 짓자는 의견에 찬성하는 영지민들의 서명을 받고, 그 결과물을 영주님한테 전달하는 거.”

“백번 양보해서 의견을 영주한테 전달하는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치고. 보다시피 결과는 서명조차 못 모을 것 같은데.”

“……설명하는 방식이 잘못된 걸까?”

“그것보다는, 사람마다 도덕심으로 수용할 수 있는 선이 다르다는 걸 생각 못 한 게 문제겠지. 예전에 수도 데니옴에서 있었던 일인데. 거기도 꽤 강행해서 고아원이 지어졌고, 결론적으로 그 근처 집값이 30%쯤 떨어졌어.”

트론은 고아원 운영과 관련한 내용을 조사하다가 읽었던 케이스를 설명했다.

“…….”

“만약 빚을 내서 그 근처 집을 산 사람이 있었다면 분하지 않았을까? 머릿속으로 아무리 고아원을 짓는 게 도덕적으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도, 30% 떨어진 집값과 비교해서 저울질했을 때 전자의 가치를 우선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걸.”

“……그건.”

루베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슬슬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트론은 옷자락을 털었다.

“아까 그 시민 회관에서 사람들이 고아에 대해 꺼냈던 말들은 물론 편견이긴 하지. 하지만 정말 서명을 받고 싶었다면, 그걸 메울 만큼의 무언가를 제시해야 했다는 거야. 고아원을 유치하는 대신 치안 시설을 강화해 달라고 영주님께 건의하겠습니다, 라거나. 고아원 보건 문제에 대해서도 힘쓰도록 하겠습니다, 라거나.”

“그건 편견을 긍정하는 거 아니야?”

“편견을 없앨 다른 의제는 또 열심히 고민해 보도록 해. 나는 고아원이 지어지길 바란다는 의견을 모으기 위해 뭐가 부족했는지 지적했던 것뿐이니까. 효율적인 방법과 옳은 방법은 동의어가 아니야.”

“……그렇지만, 다들 효율을 추구하다가 비열한 방법만 쓰는 괴물이 되어 버리잖아. 정치판에 있는 인간들 모두.”

루베인이 푸른 눈을 들어 트론을 바라보았다. 트론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응시했다.

전단지를 읽었을 때부터 지나치게 순박하고 꽃밭이 펼쳐진 듯한 대의가 마음에 걸렸다.

그것을 축약해 놓은 듯한 인간을 눈앞에 두는 것은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내가 저렇게 대의를 진심으로 주장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면, 무언가 달랐을까?’

루베인의 금발과 푸른 눈을 보며 트론은 다른 이를 떠올렸다.

그의 라이샤. 그녀가 트론에게 꿈꾸는 이상향이야말로 저런 순박한 형태가 아닐까.

깨달았을 때 트론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뭐?”

완전히 바뀐 트론의 말투에 루베인이 허를 찔린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대가 정말 평민이었다면, 그래, 유효한 방법이 얼마 없으니 이런 방식도 의미가 있었을지 모르지. 하지만 귀족인 그대라면 쓸 수 있는 수단이 훨씬 많을 것 아닌가?”

루베인이 눈을 크게 떴다. 트론은 최대한 감정을 빼고 말을 이었다.

“매수를 하든, 협박을 하든, 혹은…… 거래를 하든.”

“그런 방법은…….”

“비열하다고? 글쎄, 나로서는 고아들이 굶어 죽기 전에 그 비열한 방법이라도 써서 하루라도 빨리 그들을 수용할 건물을 짓는 것이 대의에 가깝다고 보는데.”

“…….”

“정치판에 있는 인간이 모두 괴물이 된 것이 아니다. 대의를 가진 인간이 버티지 못해서 모두 괴물에게 잡아먹힌 거지. 그게 스레데니옴 왕국의 현실이다.”

“당신은…….”

트론은 다시 보닛을 깊게 눌러 쓰고 고개를 돌렸다.

“구경거리에 대한 보답이 될 만큼은 떠든 것 같으니 그럼 이만.”

“아, 잠깐!”

루베인이 만류했지만, 그는 빠른 속도로 공터에서 모습을 감췄다.

루베인은 뛰어서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트론의 모습은 눈 깜짝할 새에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소녀의 말투, 그리고 말하는 내용에서 정체를 짐작해 보았지만 혼란스러웠다.

“……선왕은 슬하에 아들만 있지 않았나?”

루베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깨달음을 얻고 고개를 들었다.

“아, 설마. 나처럼……?”

***

“이나드 영애, 잠깐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슬슬 저녁 시간이라서요.”

가죽을 앞에 두고 고뇌하고 있던 엘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넋을 놓다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흐른 모양이었다.

그녀는 허둥지둥 테이블 위의 난잡한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앗, 어, 넵! 잠시만요! 저, 전하는요?”

“아직 안 오셨지만, 미리 아래층에 준비시켜 둘까 하고요.”

“아…….”

“쉬고 계셨나요? 그럼 저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 편히 계세요.”

선물은 트론만 보지 않는다면 괜찮긴 했다. 엘피는 숨기려던 가죽 조각을 놓았다가, 한 가지 생각에 미쳐 고개를 들었다.

“저기, 소백작님! 들어오셔도 돼요. 실은…… 상의할 것이 있어요.”

“네네.”

엘피의 방으로 들어온 가이는 가죽과 털이 날려 너저분한 테이블을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수공예 시작하셨어요?”

“그게, 저기……. 자신의 한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작업이었다고 할까요.”

“뭔지는 몰라도 철학적인 시간을 보내셨나 보군요. 상담하실 내용이 그건가요?”

“그건 아니고요,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립니다만.”

엘피는 염치를 버리고 외쳤다.

“저, 돈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난데없는 은행 취급에 가이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흩날린 가죽 조각을 치우고 엘피의 건너편에 마주 앉았다.

“흐음.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저희 가문의 유동 자금은 그럭저럭 넉넉한 편입니다만, 이번에 고아원 땅 매입 건이 있어서 바로 환금할 수 있는 자본을 고려…….”

“그, 그렇게 큰 금액까진 필요 없어요!”

엘피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사정을 설명했다.

곧 트론의 생일이고, 몰래 생일 선물을 줄 생각이었다는 것.

의욕만 앞서 손수 장갑을 만들려다가 실패하곤 기성품을 사려는데 돈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야기를 다 들은 가이가 폭소했다.

엘피의 얼굴은 점점 더 빨개졌다.

“아, 죄송합니다. 놀리려는 의미로 웃은 건 아니었어요. 순수하게 영애가 너무 귀여워서.”

“……놀리시는 거 맞네요.”

“진심인데……. 아무튼, 그거라면 저도 선물을 준비하는 게 좋겠군요.”

“그래 주시면 왕자님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하하.”

가이는 자신의 선물 따위 조금도 기꺼워하지 않을 트론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른 웃음을 내뱉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 이유라면 저한테 굳이 돈을 빌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어째서요?”

“서투르더라도 영애가 직접 만든 물건을 받는 게 왕자님께서는 더 기쁠 테니까요.”

“결과물 나름 아닐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만든 건 초라할 것 같아요. 전하가 직접 쓰시기에는 볼품도 없고…….”

“공식 행사에 착용하는 것까지야 무리겠습니다만, 그래도 사적으로는 얼마든지 쓰실 수 있지 않겠어요?”

엘피는 그제야 조금 붉은 기가 가신 양 뺨을 눌렀다.

“전하께선 제 성의를 생각해 착용해 주실 것 같지만, 제 마음이 안 좋아서요.”

“내기하실래요? 이길 자신 있답니다. 왕자님께선 분명 좋아해 주실 거예요. 결과물의 질이 아니라, 그 선물에 담긴 시간과 마음이 중요하니까요.”

“소백작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으음…… 조금 더 힘내 볼게요.”

“네엡. 아, 그거랑 별개로 품위 유지비는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왕자님을 보좌하시는 분이 당장 쓸 현금이 없어서야.”

“……면목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니 영애는 당장 본인 영지 사정이 복잡했죠. 제가 배려가 부족했습니다.”

“사실 도망 나오면서 챙겨 온 돈도 있고 저택에서 봉급으로 주신 돈으로 당분간 문제없었거든요. 가죽으로 과소비만 안 했으면 괜찮았을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귀족 영애신데 과하게 검소한 것 아닙니까.”

회귀 전의 가난뱅이 생활이 몸에 배서 그렇다는 말은 할 수 없었기에 엘피는 멋쩍게 웃었다.

가이는 그런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순박하고 귀여운 사람이야.’

그녀의 성향이 트론에게 독으로 작용할지 약으로 작용할지는 그로서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분명히 예측하기 어려운 만큼 앞으로도 흥미로운 일들이 가득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역시 자신의 주군 고르는 감은 정확했다고 생각하며 가이는 생글생글 웃었다.

***

느지막한 저녁, 트론은 루베인의 기억을 지우는 주술까지 마무리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런 그를 가이가 과장되게 맞이했다.

“왕자님 오셨군요! 보고 싶었어요!”

“……이나드 영애는?”

“히잉, 차별하신다. 방 안에 있어요.”

밖에서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렸던 것인지 엘피의 방에서 우당탕, 쿵탕, 요란하게 물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

트론은 보닛을 벗고 의문에 찬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피가 허둥지둥 문을 열고 응접실로 나왔다.

“전하, 다녀오셨어요!”

“그래. 바쁜 일 있으면 무리해서 마중 나올 건 없는데.”

엘피는 서둘러 소파에 앉아 있는 트론 쪽으로 다가갔다.

“그, 그런 거 없습니다! 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는 노골적으로 눈을 피하는 엘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번거로우니 안에서 먹도록 하지.”

“지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엘피가 트론의 헤드 드레스를 벗겨주기 위해 팔을 뻗자, 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나저나 뭔가……. 그대에게서 기름 냄새 같은 게 나는 것 같은데?”

그 말을 듣자마자 엘피가 찔끔하여 고개를 푹 숙였다. 뒤에서는 가이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 그게. 처, 청소했거든요! 여기저기 상하지 않게 닦느라고! 그래서 냄새가 옮겨 묻었나 봐요!”

“……왜 이나드 영애가 직접 청소를?”

책망하는 눈길은 가이에게 꽂혔다.

“오해하시면 섭섭한데요, 전하. 제가 시킨 적 없답니다.”

“맞아요, 왕자님. 제가 그냥 몸을 움직이고 싶어서 그랬어요.”

“그런 건 다른 이에게 맡기면 그만 아닌가. 소백작 그대는 말리지 않고 뭘 한 거지?”

“그러게요, 누구 잘못이든 제가 욕먹을 텐데 무슨 부귀영화를 보자고 안 말린 걸까요.”

가이가 과장해서 투덜대자 엘피가 울상이 되어 그를 돌아보았다. 여느 때처럼 가이의 얼굴에는 놀리고 싶어 하는 기색이 한가득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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