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대의와 꽃의 공녀 (5)
다음 날 아침, 까칠해 보이는 트론의 얼굴을 보고 엘피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왕자님……. 설마 밤새 일하신 거예요?”
트론은 찡그린 그녀의 이마를 꾹꾹 눌러 주름을 펴주며 답했다.
“잠깐 눈은 붙였으니 괜찮다.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니 소백작을 불러와 주겠나.”
“……네.”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엘피가 가이를 불러왔다.
“전하, 철야하셨다면서요! 아름다운 얼굴이 상하면 제가 가슴 아파요!”
“자료. 오늘 중으로 끝내야 해.”
아침 인사조차 하지 않고 트론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제 저보고 먼저 쉬라 그러시고는, 전하 혼자 무리하시면 제가 뭐가 되나요.”
“먼저 쉬든 안 쉬든 그대가 이상한 인간이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 걱정할 것 없다.”
“전하도 참…….”
트론의 일중독 상태에는 가이조차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상세 내용을 검토하고 엘피는 정리를 돕는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한참 서류에 파묻혀 있던 그들이 검토를 완전히 끝낸 것은 오후 3시쯤의 일이었다.
트론은 엘피에게 외출용 드레스를 가져오라고 지시하고는 가이와 마무리 확인을 했다.
“합치면 총 일곱 곳이군.”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전하 쪽 수하 만나러 가시는 거죠?”
“그래.”
“그런데 드레스 입고 나가시려고요?”
트론은 무심하게 엘피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여장을 제안한 자가 할 질문은 아닐 것 같군.”
“저야 상관없지만, 웰칸 연합에서의 전하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 아닌지 걱정되잖습니까.”
“글쎄. 오늘 할 일은 끝났으니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돌아가서 쉬도록.”
“그렇게 말하고 또 혼자 일하시기 없기예요?”
“선처하지.”
가이는 “꼭이에요!”라고 덧붙이고 방을 나갔다.
이윽고 엘피가 옷을 들고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불만에 가득 찬 얼굴이었지만, 그의 요청대로 검은색의 차분한 드레스를 입혀 주고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안 쉬고 바로 나가세요?”
“그래. 약속이 되어 있어서.”
엘피는 웰칸 연합에 대한 것을 모르는 듯했다.
라이샤인 그녀가 아직 읽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미래에서 자신이 웰칸 연합과 갈라서서인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이상향과 동떨어진, 비열한 수단을 쓰는 집단과 협력한다는 사실을 나서서 밝힐 필요는 없었다. 언젠가 그녀가 눈치채면 그때 가서 설명할 생각이었다.
“건방진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전하께서 푹 쉬시면 좋겠어요.”
“이번에는 일정이 빠듯해서 그런 거다. 이후에는 무리하지 않을 테니, 걱정 안 해도 돼.”
그렇게 말해도 엘피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이윽고 그녀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렇게 왕자님 옷 시중 들면서 건방진 소리 할 날도 얼마 안 남았는걸요.”
“그런가?”
“네. 며칠만 지나면 정체를 숨기실 필요가 없잖아요. 한동안 르터바이스 본저에서 지낸다고 해도, 그쪽 하녀들이 도울 테고요.”
“…….”
“좋은, 일이긴 한데…….”
엘피가 살짝 얼굴을 흐렸다.
“왜 그러지?”
“……화내지 않으실 거예요?”
“그래.”
“뭔가, 여동생이랑 남동생을 동시에 빼앗기는 기분이 들어서요.”
기가 죽은 그녀의 얼굴을 어이없이 바라보던 트론은 실소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다. 옷 시중은 앞으로도 그대가 들어주었으면 좋겠군.”
“그, 그래도 될까요?”
“번거롭다면 억지로 할 건 없어. 오히려 왕자궁에서 시녀인 그대가 잡일까지 맡은 게 이상했던 것 아닌가.”
“아녜요! 제가 꼭 하고 싶습니다.”
조금 전까지 트론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찼던 그녀의 얼굴에 다시 밝은 미소가 감돌았다.
‘표정이 참으로 휙휙 바뀌는군.’
하지만 그런 엘피를 관찰하는 것은 싫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트론은 보닛을 씌워 주는 엘피를 계속 바라보았다.
***
트론은 마지막으로 정리한 문서를 서류첩에 넣어 챙긴 후 빠르게 호텔을 빠져나갔다.
이후 모노레일을 타고 그가 도착한 곳은 도시 외곽의 한적한 묘지였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트론의 차림새는 묘지 내에 위화감 없이 섞였다.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이동하며 무덤들을 눈으로 훑었다. 각자의 사연이 딱딱한 사각형 안에 갇혀 있는 모양새가 기묘했다.
트론은 묘지에서 눈을 떼고 그 옆에 딸린 공원으로 걸어갔다.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으려니, 순박하게 생긴 푸른색 머리의 청년이 다가왔다.
“직접 뵙는 건 오랜만입니다, 주군.”
“……그래. 오랜만이구나.”
그간 트론과 주술사 집단인 웰칸 연합의 연락책 노릇을 하던 주술사 사먼이었다.
“그런데 주군, 실은 여성이었나요? 드레스 입고 나오신다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트론은 사먼의 그 말이 비꼬는 의미가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런 것임을 알았다.
그는 뛰어난 주술사이며 연락책으로서의 실력도 나쁘지 않지만, 가이즈카 르터바이스와 정반대의 의미로 나사가 풀린 구석이 있었다.
“위장을 위해서다.”
“아하! 하긴 저도 미리 언질이 없으셨으면 못 알아봤을 것 같습니다. 좋은 방법이네요.”
“그렇다니 다행이군.”
“오랜만에 건강한 모습 뵈어서 기쁩니다. 장로님께서도 주군의 영민하고 건강한 모습을 보시면 기뻐하실 거예요.”
트론은 속으로 ‘글쎄’라고 생각했다. 당장 엘피는 그의 안색이 나쁜 것을 눈치챘지만, 사먼은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은 그뿐인 존재였다.
오히려 이쪽이 익숙한 감각이었다. 그들이 바라는 숙원은 트론이 왕위에 올라 한시라도 빨리 이 나라를 조각내 놓는 것뿐이었다. 트론 개인이 어떻든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하긴, 도구가 망가져서 제구실을 못 하게 되는 건 피하고 싶겠군.’
그는 쓸데없는 생각을 갈무리하고 지시했던 몇 가지 안건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별문제는 없었기에 가볍게 끄덕이고 들고 온 서류첩을 사먼에게 넘겼다.
“이번에 조사해야 할 안건은 이쪽이다. 되도록 빠르게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별로 중요한 건 아니라서 보고에는 빼 두었는데요.”
“뭐지.”
“하븐의 영지민 단체 하나가 고아원과 관련해서 작은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전단을 뿌리고 설명회를 개최하는 정도네요.”
사먼은 전단지 한 장을 트론에게 넘겼다.
「고아원 건립은 우리 이웃을 감싸 안는 일입니다.」
그런 표제 밑에 마그달리사 영지 내에 고아원을 건립하도록 감성적으로 설득하는 문자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으음. 알았다. 그럼 이어서 수고하도록 해.”
“네, 주군! 계획의 성공을 빌고 있겠습니다.”
사먼은 재빠르게 묘지 뒤의 산 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트론은 전단지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사먼의 말대로 딱히 유념할 만한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기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계획은 문제없이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대립하는 두 공작가 사이에서 르터바이스 변경백을 통해 트론이 고아원 건립과 운영을 도맡아 그 싸움을 훈훈하게 말린다는 보기 좋은 그림이 착착 그려지고 있었다.
눈치 싸움을 자극적인 개싸움으로 만들기 위한 준비도 차질 없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사먼을 비롯한 웰칸 연합의 수하들이 직접 그 땅들을 조사하여 어디에 마법유전이 있는지 알아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로운데도, 트론은 사먼에게 건네받은 전단지가 마음에 걸렸다.
전단지의 문구는 대의를 생각하여 마그달리사 영지에 고아원을 설치해야 한다는 순박한 주장이었다.
‘대의라…….’
전단지 끝부분에 쓰여 있는 설명회 날짜는 오늘 오후 4시였다.
손가락으로 전단지를 더듬던 트론은 결심하고 다시 모노레일을 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트론이 외출한 틈을 타서 엘피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트론의 생일 선물 만들기에 착수했다.
그녀가 만들려는 것은 가죽 장갑이었다.
곧 겨울이기도 하고, 특히 르터바이스 영지에서 지내면 엄청난 추위를 견뎌야 하니 필요한 물건 같았다.
가지고 있던 돈의 대부분을 투자하여 질 좋은 소가죽과 안감으로 댈 토끼털도 사 왔다. 벌써부터 완성이라도 한 양 엘피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이었다.
“……손가락 장갑, 포기하는 게 좋겠지.”
귀한 가죽을 쥐가 뜯어놓은 모양새로 만든 엘피는 마른세수를 했다. 가죽을 하도 만져서 손에서 특유의 기름 냄새가 났다.
요리 솜씨 정도로 파멸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엘피는 손재주가 없었다.
회귀 전에 도피 생활을 하며 필요할 때 바느질을 하긴 했으나, 단추를 달거나 구멍을 때우는 정도였기에 자신의 실력을 정확하게 가늠할 기회가 없었다. 그것이 이런 비극을 낳았다.
‘통장갑으로 만든다고 해도 이거, 전하가 끼기에는 너무 볼품이 없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자신의 바느질 실력을 과신하지 말고 기성품을 사 오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고급 소가죽과 토끼털을 여유 있게 사 오느라 그녀가 운용할 수 있는 예산은 바닥이 났다. 남은 돈을 긁어모아 봤자 형편없는 가죽을 쓴 싸구려 물건밖에 살 수 없을 것이다.
옥새 탈환과 마법유전 외에도 엘피에게 큰 과제였던 트론의 생일 선물 마련에 큰 위기가 닥쳤다.
***
트론이 설명회 장소인 영지민 회관에 도착했을 때, 예상대로 설명회를 들으러 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해야 하는 평일 오후 시각에 설명회를 잡은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머릿수를 채운 것은 거의 노인이었다.
트론은 밖에서 내부를 훑어본 다음 천천히 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사람들을 안내하던 베레모를 쓴 소년이 트론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꼬마야! 혹시 잘못 온 거니? 이제부터 여기서 어른들이 설명회를 할 거야. 놀러 온 거면 어디 가야 하는지 가르쳐 줄게.”
엘피에게 도움을 주었던, 금발에 짙은 푸른 눈을 한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그의 노골적인 애 취급에 트론은 얼굴을 찌푸렸다.
“설명회 들으러 온 거 맞아. 그리고 그쪽도 나랑 나이 차이 얼마 안 날 것 같은데?”
“어, 그랬어? 몇 살인데? 난 열네 살이야.”
“……열세 살.”
아직 엘피와 함께 정한 생일인 11월 1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열두 살이 맞겠지만, 트론은 며칠 차이를 건너뛰었다.
“그랬구나? 하긴, 고아원에는 우리 또래 애들도 있으니까 관심을 가지는 건 좋은 일이지. 들어와.”
그는 비어 있는 자리에 트론을 앉히고 소책자를 건넸다. 잠시 입구 근처를 두리번거리던 소년은 트론의 옆에 앉았다.
“안내역 아니야?”
“그냥 돕는 정도거든. 슬슬 시작할 시간이라서 나도 설명회 들으려고.”
“흐응.”
“아, 난 베인이라고 해. 넌 이름이 뭐야?”
“……로나.”
“그렇구나. 반가워, 로나.”
베인은 친근한 태도였지만, 트론은 쌀쌀맞게 앞을 돌아보며 질문했다.
“이런 설명회를 여는 이유가 뭐야?”
“영지민들의 의견을 모아서 영주님한테 가져가는 거야. 영주님도 사람이니까, 모든 정치를 잘할 수는 없어. 이런 의견들을 참고해 주십사 하는 거지.”
“강제력이 없는데 의미가 있나. 영주가 묵살하면 그만일 텐데?”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잖아.”
트론은 손가락으로 툭툭 종이를 쳤다.
“승리하지 못한 고결함이란, 허무한 자기 위안이라고 했던가.”
“뭐?”
“아니, 알고 지내는 어떤 괴짜가 그런 소리를 했는데. 지금 이 설명회도 끝이 좋을 것 같진 않아서.”
베인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 전에 단상에 선 중년 여성이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이웃과 함께하는 하븐 만들기 협회’에서 진행하는 설명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사람이 없어 마른 박수는 초라하게 울려 퍼졌다. 여성은 확성기에 대고 더듬더듬 설명을 시작했다.
2개월가량 고아원 건립 문제가 붕 떠 있는 탓에 많은 아이가 고통받아 죽거나 걸인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그들을 감싸 안는 것이 참된 인간으로서 바람직한 자세라는 것을 설파하는 이야기였다.
베인은 열심히 끄덕이며 그 이야기를 경청했고, 트론은 소책자를 몇 번 뒤적인 후 무심한 얼굴로 단상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도덕 수업 시간보다 지루한 설파가 끝나고 여성은 고개를 들었다.
“그럼, 귀중한 뜻을 모아주시리라 믿으며 나가실 때 회람에 서명 부탁드립니다. 추가로 질문 있습니까?”
앞쪽에서 무언가를 질겅질겅 씹으며 듣고 있던 노인이 손을 들었다.
“거, 그 동네 애새끼들은 병을 달고 산다던데. 마수가 역병신이라서. 고아원 지었다가 우리 동네 근처에 병을 옮기면 어쩌지?”
“네? 아, 아니. 그런 건 그냥 편견이고요…….”
“편견이겠냐! 우리 삼촌의 친구가 그 마수 재해 일어난 지역 근처에 사는데, 거기도 병 때문에 난리라더만! 빌어먹을 주술사의 힘까지 빌려야 하고 말이야.”
듣고 있던 베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일부 고아들을 수용한 다른 지역에서 전염병이 돌았다는 통계 자료는 없습니다.”
“웃기는 소리! 그 동네에 주술사가 왔다잖아! 그 새끼들의 힘을 빌릴 정도면 안 봐도 뻔해!”
트론은 눈을 깜빡이며 흥미롭게 관찰만 했다.
베인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답답한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이번에는 반대편에 앉아 있던 노파가 우물쭈물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솔직히 부모 없는 애들 다 뻔하잖아. 고아원 근처가 얼마나 치안 안 좋은지 알아? 다 손버릇 나쁘고…….”
“역시 편견입니다! 고아원 때문에 치안이 안 좋은 게 아니라, 다들 고아원이 지어지는 걸 기피하니까 치안이 안 좋은 외곽 지역에 고아원이 지어질 수밖에 없다고요!”
“애새끼는 닥치고 있어!”
취해 있던 노인이 뒤에서 술병을 던졌다.
다행히 베인이 맞지는 않았으나, 이후 고함치는 소리와 몸싸움으로 회관 안은 난장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