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충정과 만년설 호랑이 (6)
엘피가 입을 가리고 작게 “어머.”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트론은 속으로 탄식했다.
썩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했지만 온 세상 즐거움을 만끽하는 듯한 가이의 얼굴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대의 변태 같은 취향을 이런 곳에서 피력할 필요는 없는데.”
“오해라니까요오! 그저 평범하게 아름다운 얼굴을 좋아하는 것뿐이랍니다. 새로 사귄 벗에게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전하.”
“르터바이스의 벗은 되었지만, 그대 개인의 친구가 된 기억은 없다.”
“왜 저만 가문에서 예외인데요!”
“방금 그대가 그 방법을 제안한 이유 중 개인의 재미와 공적인 필요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몇인지 답해 봐.”
팔짱을 끼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가이가 잠시 후 답했다.
“10으로 나누면 재미가 7이고 필요성이 3쯤 되겠네요.”
트론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엘피의 손을 잡았다.
“그럼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히잉, 정말 너무하세요.”
남의 일이라고 희희낙락 여장을 권한 쪽이 더 너무한 것 아닌가 생각하며 트론은 엘피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걸린 표정이 미묘했다.
“왜 그러지?”
“아, 아뇨. 전하께서 불쾌하지 않으시다면 좋은 방법 아닌가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불경한 생각을 해서 죄송합니다.”
“그게 다인가?”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다. 잠시 후 엘피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여장하시면 정말 예쁠 것 같다고 조금 상상했어요.”
“그렇군.”
잡고 있던 엘피의 손을 놓자 그녀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군신 간의 신뢰 관계에 금이 가고 있는 와중, 가이가 헛기침을 하며 본론으로 돌아왔다.
“장난스럽게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진지하게 유효한 위장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하.”
트론은 필요하다면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편이었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무심했다.
다방면으로 계산해 봐도, 약 두 달간의 여장을 참는 것으로 안전하게 모습을 감출 수 있다면 비용과 리스크가 낮은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오히려 얼마 전이라면 별생각 없이 받아들였을 텐데, 왜 이런 거부감이 드는 것인지 잘 알 수 없었다.
“……알고 있다. 딱히 내 개인의 기분이나 고집 때문에 일을 그르칠 생각은 없어. 그러도록 하지.”
“네에, 전하! 두 분을 자매인 것으로 하고 소개장이나 저희 저택에 들어오실 절차를 바로 마련해 두겠습니다.”
목소리가 들뜬 가이를 무시하고 트론은 엘피 쪽을 일별했다.
그녀는 가이와 다른 쪽으로 무척 설레고 즐거워 보였다.
‘……여동생 생겼다는 소리를 들은 손위 누이 같군.’
아까보다 약간 더 기분이 안 좋아졌지만, 역시 어째서인지 트론은 알 수 없었다.
***
“……왕자님, 화나셨나요?”
트론이 여관으로 돌아오는 내내 뚱한 표정이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방에 들어가자마자 엘피가 그의 눈치를 봤다.
침대에 앉으며 그는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트론 앞에 무릎을 꿇은 다음 그를 올려다보았다.
“글쎄, 화가 났다기보다는 그대들의 독특한 취향에 당황했다고 표현하는 게 적합하지 않을까.”
“저어, 르터바이스 소백작하고 저를 같은 취향으로 묶으시는 건 조금…….”
“음, 그건 내 표현이 과했군. 철회하지.”
대체로 가이에 대한 평가가 박한 두 사람이었다.
그렇게 몇 마디 농담을 주고받은 다음 엘피가 공손히 손을 모았다.
“아까는 조금 들떠서 그랬던 것뿐이고, 전하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효율적인 방법이란 것은 나도 인지하고 승인한 바다. 그에 대해서는 마음 쓸 것 없어.”
“그게, 전하께서는 너무 다정하시니까요.”
트론은 말없이 엘피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썹은 축 처져 있었다.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라이샤라는 믿기 어려운 정체를 믿어 주신 것도, 전하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제 너저분함을 용납해 주신 것도…….”
엘피가 말하는 다정함이라거나 정의, 반듯함 같은 고운 단어들은 오히려 자신보다는 그녀에게 어울렸다. 트론은 그녀의 조용한 자기 고백을 들었다.
“주제도 모르고 건방지게 굴어도 항상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니까, 한도 끝도 모르고 전하께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거리감이 과하게 가까울 때가 있다고 트론도 종종 생각한 적이 있었다.
단순히 주군에 대한 경의를 넘어서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게 해 줄 도구를 향한 고마움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비슷하게 종잡을 수 없는 타입이어도 가이즈카 르터바이스는 차라리 선이 명확했다.
하지만 엘피는 선 같은 것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그를 왕으로 만들겠다는 명분 뒤에 숨겨진 진심 또한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제가 무언가 잘못했거나, 전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이 있다면 꼭 말씀해 주세요.”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직 그대는 나에게 잘못한 것이 없으며, 불쾌할 만한 일도 없었으니.”
그제야 엘피가 안심한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아까는, 다른 것보다 큰 고비를 넘기고 나니 안심이 되어서 들떴어요. 으음, 물론 전하를 예쁘게 꾸밀 생각에 설레기도 했지만요.”
“그건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군.”
“죄, 죄송합니다…….”
놀릴 작정으로 던진 가벼운 말에도 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한 표정이었다.
역시 옆에 두는 것만으로 질리지 않고 즐거웠다.
라이샤가 아니었더라도 그녀를 제거하는 건 무척 아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
트론은 자신의 생각에 잠시 놀랐다. 이용 가치가 없는 인간에 대해서 지나치게 후한 평가였다.
그는 애써 위화감을 눌러 버리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엘피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농담이었으니 그만 됐다.”
“그럼 레이스 리본 사도 되나요, 왕자님?”
“……고려해 보도록 하지.”
***
아마도 엘피만 즐거웠을 옷 쇼핑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는 해가 완전히 넘어가 있었다.
과대 포장된 박스와 내용물을 분리하는 작업을 하면서 엘피가 트론에게 물었다.
“저녁은 어떻게 하실까요, 왕자님? 피곤하시면 제가 밖에서 사 와도 됩니다만.”
“아니. 같이 나가도록 하지. 내일부터 한동안 남자 차림으로 밖에 나갈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아하하…….”
옷박스를 구겨서 차곡차곡 쌓은 다음 엘피는 손을 탁탁 털었다.
“뭔가 특별히 드시고 싶은 것이나 보고 싶은 것 있으세요? 앞으로는 자유롭게 외출하시기도 힘들 테니까요.”
조찬이 끝나자마자 일사천리로 제반 업무를 처리한 가이 덕에, 두 사람은 내일 바로 르터바이스 본저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오전에 가이를 ‘달 물결’ 레스토랑에서 만나 사전 브리핑을 한 후, 소개받은 사용인의 신분으로 르터바이스 본저에 방문하기로 했다.
현 변경백인 밀리엔 르터바이스를 정식으로 만나는 것도 그 뒤가 될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트론은 등불이 하나둘 타오르기 시작하는 거리를 창밖으로 내다보았다.
“수상 시장에 가보기로 하지.”
***
수상 시장은 올페마의 명물 중 하나였다. 늦봄부터 초가을까지만 성행하는 이 수상 시장은, 올페마를 가로지르는 좁은 강에 보트를 띄워두고 장사를 하는 형태였다.
초기에는 토지가 척박한 르터바이스령에서 생산하지 못하는 물자를 수입하기 위한 방식으로 보트 위의 거래가 시작되었다.
특히 농수산물이나 축산물 등 신선도가 중요한 물품은 이동과 보관, 거래까지 손실을 줄일 수 있었기에 효율적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성행하던 수상 시장은 이동 수단이 발달한 현재에 이르러서는 다소 쇠퇴했다.
그러나 노점을 즐길 수 있는 명물로서 현재는 그 자체가 관광 요소가 되었다.
해가 지고 나서 마법 등불을 띄워둔 보트가 곳곳에 정박해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저 멀리 옅은 흰색으로 빛나는 만년설 봉우리와 어우러져 현실과 동떨어진, 이를테면 판타지 세계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 소설 세계 자체가 판타지 세계인데, 남의 일처럼.’
이곳에 환생하고 나서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전혀 다른 세상의 일처럼 감각이 멀어지는 때가 있었다.
회귀하여 과거로 돌아온 후, 자주 그런 감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꿈속에 붕 떠 있는 것처럼.
그런 엘피의 생각을 눈치라도 챈 듯 왼손이 따뜻한 온기에 둘러싸였다.
“수상 시장에도 간단한 요깃거리를 판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누나.”
트론이 깍지 끼어 그녀의 손을 잡고 올려다보았다.
엘피는 그 온기에 안심하여 작게 숨을 뱉었다.
“응. 강가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뭐 사 먹을지 정하자!”
저 멀리 판타지 세계가 아닌 현실이 이곳에 펼쳐져 있었다. 그녀가 실감하는 현실은 트론의 옆에 존재했다.
그것만으로도 땅에 발붙이고 서 있는 현재를 자각할 수 있었다.
***
꼬치에 끼운 여름 과일들, 종이로 포장한 미트 파이, 꿀로 졸인 소스를 얹은 푸딩이 오늘의 저녁이었다.
아침에 먹었던 레스토랑의 정찬과 비할 바는 못 되었으나, 외지에서 사 먹는 음식이란 주변의 분위기가 반찬이 되는 법이었다.
“론은, 더 안 먹어?”
입이 짧은 그답게 반절 정도만 먹은 후 더 식욕이 없어 보였다.
“응. 누나 먹는 얼굴이 행복해 보여서 그것만 봐도 배부르네.”
“……그거 뭔가 칭찬이 아니라 식탐 많다고 놀리는 거 같은데.”
“안 그래.”
트론이 손을 뻗어 엘피의 입가에 붙은 파이 부스러기를 털어 주었다.
엘피는 식탐이 많은 것에 더해 칠칠하지 못한 모습까지 보인 건가 싶어 부끄러워졌다.
“쭉 둘러 봤는데, 역시 웬만한 물품은 자급자족이 되고 있더라. 문제가 되는 거라면 소금과 수산물 정도일까.”
강둑 위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의 아래쪽으로 수상 시장은 반짝이는 등불과 함께 성황이었다.
엘피는 푸딩을 마저 삼키며 눈을 깜빡였다.
“그거 확인하러 나온 거였어?”
“겸사겸사.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겠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내전이 일어나서 르터바이스령 자체를 보루로 삼아야 할지도 모르잖아. 다른 체계는 잘 잡혀 있어서 문제 될 것 없지만, 역시 내륙이라서 소금이 없는 건 고려할 사항이야.”
“…….”
“물론, 르터바이스의 괴짜 후계자라면 방안을 다 생각해 뒀을 것 같지만. 내일 소금 축적량이나 물어봐야겠어.”
평민의 말투로 그가 뱉어 내는 내용은 삭막했다.
르터바이스 본저에 들어가기 전날 밤, 가볍게 기분 전환 정도를 생각했던 엘피는 조금 씁쓸해졌다.
“론은 항상, 그런 생각을 해?”
“필요한 일이니까……?”
“아니, 당연히 필요한 일이긴 한데. 항상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너무 피곤하지 않은가 하고.”
“수면은 충분히 취하고 있어.”
“…….”
그러고 보면 회귀 전에도, 트론은 도망 시절 초기에 이런 분위기였다.
물론 신분을 위장하며 도망 생활을 하는 것은 신경이 곤두서고 고민할 것이 많지만, 그래도 지나친 것 같았다.
“하지만…….”
무언가 한마디를 더하려 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외침 때문에 엘피의 말이 가로막혔다.
“평민들인가? 그 자리를 비켜라.”
돌아보니 나이 든 남성이 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히믈 소자작님과 친구분들께서 쓰실 것이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물러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