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충정과 만년설 호랑이 (7)
보아하니 저 멀리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시끄러운 무리가 이 근처를 전세 내고 밤놀이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자신들에게 말을 건 중년 남성 외에도 시종이나 하녀들이 바지런히 주변을 정리하며 음식이나 오락 용품을 나르고 있었다.
특히나 상대가 귀족이라면 괜히 얽혔다가 난처해질 것이다.
엘피는 바로 트론의 손을 잡아끌고 일어났다.
“실례하겠습니다.”
밤 나들이의 끝이 축객령이라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으나, 트러블을 피하고 싶었던 엘피는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피하려 했다.
“어이, 거기 평민 계집.”
그때, 시끄럽게 깔깔거리던 무리 중 비싼 옷을 입은 갈색 머리 청년이 무례한 호칭으로 크게 불렀다.
주변에 남아 있는 ‘평민 계집’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엘피 한 사람이니, 그녀를 지칭해서 부르는 것으로 보였다.
되도록 얽히고 싶지 않았지만, 여기서 무시했다가는 더 난처한 상황에 처할 것 같았다.
엘피는 작게 트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먼저 저쪽에 가 계세요, 왕자님. 금방 갈게요.”
트론이 그녀의 손을 꾹 잡으며 놓아주지 않으려 했지만, 엘피는 타이르듯이 다른 손으로 그의 손등을 쓰다듬은 후 손을 뺐다.
빠른 걸음으로 갈색 머리 청년에게 다가간 엘피는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신가요, 나으리.”
“야, 내 말이 맞지? 거봐, 반반하게 생겼다니까.”
그는 주변 친구들을 둘러보며 낄낄거렸다.
다른 청년들이 투덜거리며 금화를 갈색 머리 청년에게 쥐여 주었다. 아마도 자신을 두고 불쾌한 내기를 건 것이리라 짐작한 엘피는 기분이 나빠졌다.
“난 좀 성숙한 게 더 취향인데.”
“경험 많은 이 형님만 믿으라니까. 이런 애들도 나름대로 괜찮아.”
“하긴, 평민 계집이야 얼굴 반반하고 만질 맛만 있으면 됐지.”
도를 넘어선 발언에 엘피는 머리가 띵했다. 회귀 전 도망 시절에도 이렇게 직접 희롱의 대상이 된 적은 없었다.
‘말본새가 지저분한 사람은 종종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은 금세 동네에서 사라져서 별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생각지 못한 모욕에 제대로 된 반응을 하지 못하자, 청년이 다시 무례한 언사를 뱉었다.
“야,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옆에 앉아. 표정은 그게 뭐냐? 좀 사근사근 웃을 줄을 모르고.”
“…….”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대로 남아 있다가는 험한 꼴을 당할 것이라고 본능이 경고를 울리고 있다.
‘하지만 내가 거부해서 일이 커지면 괜히 왕자님한테 피해가 갈 텐데…….’
그 갈등 때문에 도망치지도 가까이 가지도 못하는 와중,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예의 갈색 머리 청년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평민 주제에 도도하게 굴어 봤자지. 내가 누군지 알아? 히믈 영지의 후계…….”
그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빠른 속도로 히믈 소자작의 팔에 타격이 가해졌다.
“……끄, 윽!”
그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엘피를 붙들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엘피가 놀랄 새도 없이 누군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어느샌가 가까이 달려온 트론이 숏소드를 칼집에서 빼지 않고 그대로 둔기 삼아 그의 팔을 내리친 것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놀라서 ‘왕자님!’이라고 부를 뻔한 것을 참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건진 모르겠지만, 억지로 사람을 붙잡는 걸 보면 별 볼 일 없는 이야기 같으니 이만 실례하지.”
심지어 귀족을 상대로 말까지 짧았다.
“이…… 이 쥐방울만 한 놈이……!”
“평민 새끼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귀족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트론은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히믈 소자작의 무릎을 발로 찼다. 그가 휘청이며 쓰러지자, 망설이지 않고 얼굴을 밟았다.
“스레데니옴 왕국의 지엄한 국법은 지키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무, 슨 개소리냐!”
살며시 엘피를 뒤로 물린 다음 트론은 덤벼드는 다른 청년들을 향해 칼집을 휘둘러 급소를 명확하게 찌른 후 쓰러뜨렸다.
“그녀는 내 약혼녀라서 말이야.”
예상치 못한 엄청난 발언에 엘피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트론을 바라보았다.
몸을 일으키려던 청년들도 허가 찔린 표정을 했다.
“국법 제114조 2항에 따르면.”
트론은 청년들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자빠뜨려 팔꿈치를 밟은 채로 가볍게 붙잡아 원래 관절이 돌아가지 않을 방향으로 꺾어 버렸다.
엄청난 비명과 함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성적 욕망을 채울 목적으로 타인과 혼인, 혹은 약혼 관계에 있는 자에게 접촉해서는 아니 된다. 이는 신분이나 성별과도 무관하다.”
그는 청년들의 머리를 붙잡고 한 번씩 목 뒤를 밟았다.
그들이 완전히 기절한 것을 확인한 후 트론이 후드를 쓰고 뒤를 돌았다.
이쪽을 향해 달려오던 시종과 하녀들이 그 기세에 눌려 찔끔했다.
“폭행으로 나를 고소하고 싶겠지만, 히믈 자작가도 후계자가 타인의 약혼녀를 추행했다고 신문에 걸리는 꼴은 보고 싶지 않겠지?”
트론의 차가운 눈빛에 다들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가자.”
트론은 엘피의 손을 쥐고 유유히 걸어갔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하여 반쯤 끌려가듯이 그 뒤를 따랐다.
***
“……저, 저어. 왕자님.”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엘피가 속삭였다.
“그래.”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
트론은 엘피가 사과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미간을 찌푸렸다.
“빠르게 처리하지 못한 나를 원망할 상황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알아서 해결했어야 하는 일을 전하의 손을 빌린 것 같아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오히려.”
트론은 엘피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착한’ 왕자님이 이런 폭력적인 수단을 쓰는 것에 그녀는 위화감을 가지지 않는 것인가?
타인을 상처 입히는 데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자연스러움에 의문이 들지 않는가?
“그대가 놀라거나 나에게 실망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어째서요……?”
“왕이 될 자가 대화 없이 강압적인 수단부터 사용한 부분, 이라거나.”
트론 본인도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희롱당하는 상황을 인지한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본능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애초에 도구에 불과한 그녀가 어떤 취급을 당하든, 분노를 느낄 필요가 있는가?
“왕자님은 얼마든지 더 그러셔도 돼요. 다만, 제가 능력이 부족하여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 분하고 죄송했어요.”
그녀는 그의 모든 면모를 좋게 받아들여 준다. 그 사실에 안심하는 자신의 모순을 트론은 제대로 소화할 수 없었다.
엘피 이나드로 인해 감정이 널뛴다. 이런 충동적인 감정을 그는 알지 못했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해낼 수는 없다.”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모순을 씹어 삼키듯 트론이 내뱉었다.
“나도 그대도 사람이니까. 나 혼자서는 왕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대의 힘을, 르터바이스의 힘을 빌렸다. 그대 역시 마찬가지로…….”
도덕 교과서 같은 허무하고도 예쁜 말들이 어두운 골목에 흩뿌려졌다.
“자신의 부족함이나 할 수 없는 일을 자책하지 말았으면 해. 그 무뢰배를 제압할 힘이 없었다고 해서, 그대가 부족한 사람인 것은 아니야.”
“왕자님…….”
“타인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왕이 될 수 없는 나는 그대에게 부족한 주군인가?”
“아닙니다! 전하만의 저의 유일한 왕입니다.”
아직도 자신이 그녀의 이상향의 틀을 벗어나지 않은 것에 안심했다. 안심하며 다시 그 감정을 짓씹었다.
‘아냐, 그저 라이샤가 필요해서 그런 것뿐이야.’
왕이 되기 위해 그녀가 필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그 말을 되뇌었다.
“그렇다면 그대 역시 부족함 없는 나의 사람이다.”
엘피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쳐 주려다가 주먹을 쥐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엘피는 눈가를 쓱쓱 비비며 고개를 들어 웃어 보였다.
“전하께 그런 말을 들었으니 더 여한 없습니다!”
“여한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내가 왕이 되고, 그대 가족의 핏값도 갚아야 하니.”
“넵! 그러게요.”
엘피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런데 괜찮으시려나요? 귀족 상대로 얼굴까지 보이시고…….”
“……당분간은 마주칠 일이 없을 테니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그게, 저 보고 약혼녀라고 하셨잖아요. 트론 전하의 정체를 알게 된 저들이 떠들어서 오해받지 않을까 염려되었습니다.”
“오해?”
“나중에 전하께서 왕이 되시면 그에 걸맞은 귀한 분을 비로 맞이하셔야 할 테니까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딱히 틀린 말이 아니었는데도 그 소리를 듣자마자 트론은 대단히 기분이 안 좋아졌다.
“아직은 먼 이야기군.”
“그렇긴 하지만요.”
발랄하게 말했지만 엘피 본인도 살짝 기분이 우울했다. 그때쯤이면 가짜 라이샤라는 정체가 탄로 나고, 트론의 곁에 있을 수 없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왕자님의 국혼을 꼭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그녀는 가느다란 희망을 담았다. 행복한 미래를 기원하는 노란 꽃을 신랑신부에게 던지는 그 현장에 참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이야기는 됐고.”
그녀의 말을 자르며 트론이 손을 잡아끌었다.
“법률을 보강할 필요가 있겠군. 혼인이나 약혼 여부를 떠나 상대가 평민일지언정 타인을 함부로 추행하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닌가?”
“맞는 말씀이세요. 과거에 비하면 인식이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평민은 재산권이나 자기보호 권리가 보장이 안 되니까요…….”
인권이 발전했던 전생의 기억이 있는 엘피에게는 트론의 말이 더 와 닿았다.
“그런 마음을 알아주시는 왕자님은, 역시 성군이 되실 거예요.”
“…….”
트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주 잠깐, 그런 미래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자신을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깊은 밤, 엘피가 잠든 것을 확인한 트론은 여관방을 뒤로했다.
후드를 깊이 눌러쓴 그는 소리 없이 건물 바깥으로 나갔다.
으슥한 번화가에는 취객과 밤늦게 장사를 하는 가게의 불빛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신중히 이동했다.
골목과 골목 사이가 교차하여 생긴 텅 빈 공터에 도착한 트론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무언가를 늘어놓았다.
그의 손가락이 허공을 헤집자, 희미한 노란빛 문양이 잔상처럼 흩어졌다.
제법 긴 주술식을 완성했을 때, 공기에 위화감이 감돌았다.
트론은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섰다.
새파란 빛이 공중에 떠올랐다. 처음에는 주먹만 했던 빛이 윙윙 돌며 금세 범위를 넓혀 현관문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이윽고 그 파란 빛 사이에서 인영이 드러났다.
긴장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폴짝’이라는 효과음이 어울릴 듯한 포즈로 누군가가 바닥에 착지했다.
달빛 아래에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칼, 날카로운 눈빛을 가리는 안경.
가이즈카 르터바이스가 트론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좋은 밤, 입니…….”
그리고 느긋한 말투로 그가 밤 인사를 늘어놓기도 전에 트론이 그의 명치를 차서 뒤로 쓰러뜨렸다.
가이가 헉, 소리도 내지 못하고 꿈틀거리는 동안 트론은 그의 안경을 벗겨냈다.
왼손으로 가이의 눈을 가린 채 오른손에 쥔 숏소드로 목을 겨누었다.
“으윽……. 전하도 환대하는 방법이 독특하신데요.”
“…….”
“마법사를 상대할 땐 시력부터 빼앗는 게 유효하다는 걸 알고 계신 걸 보니 전투 훈련은 잘 받으신 것 같고요!”
“……뭐가 목적이지.”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름 끼치는 음색으로 트론이 그를 위협했다.
그에 별반 신경 쓰지도 않는 듯 태평한 목소리로 가이는 대답했다.
“전하가 그만 가식 떨고 제대로 대화하셨으면 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