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충정과 만년설 호랑이 (5)
엘피는 숨을 삼켰다.
역사상 <웬필리와 러트니> 고사를 제외하고 르터바이스가 움직인 것은 그녀가 읽은 원작에서 주인공을 도왔을 때가 유일했다.
그리고 그 결과 스레데니옴 왕국은 멸망했다.
“르터바이스 가문이 스레데니옴 왕실에게 받은 모욕과 핍박이 딱히 그 한 번은 아니었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되었겠지.”
납세 비율의 조정, 아무리 공을 쌓아도 절대로 공후작으로 승격시키지는 않으며 실질적인 권한을 축소한 것, 훈련받은 군대의 차출, 그 외 충신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해 온 많은 봉사와 희생들.
죽음의 땅이라는 최북방에 내몰린 첫걸음부터, 허울 좋은 명예와 설화만을 쌓은 채 르터바이스는 혹사당해 왔다.
“르터바이스 영지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형태로 산업을 발전시켜 왔다지.”
긴장된 식당 안의 분위기와 다르게 트론의 목소리는 사근사근했다.
“변경백이라는 특수한 위치 때문에 사병을 보유할 수 있으니 이도 잘 키워 왔겠고. 내 예상으로는 아마 예비군이나 치안 경찰 등의 형태로 편법을 이용해서 허가된 숫자의 두세 배 정도 덩치를 불리지 않았을까 싶은데.”
“…….”
“영지민의 인식도 수도와 분리되어 있더군. 당장 왕이 죽어 혼란스러운 상황인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영주를 믿고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만큼의 신뢰 자본을 쌓을 정도로 틀이 갖춰진 거겠고.”
르터바이스 영지에 독립적으로 굴러갈 수 있는 체계가 잡혀 있다는 의미였다.
“절대적인 중립을 지키며 중앙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 무척 훌륭한 자세지. 이는 바꿔 말하면…….”
식어 버린 차를 완전히 삼키며 트론은 고했다.
“중앙에서 누가 이 나라를 어떻게 말아먹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이니까.”
그 말이 끝나고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잠깐의 고요는, 폭소와 함께 깨졌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가이가 배를 잡고 웃으며 테이블에 얼굴을 박았다.
“참으로 침착하지 못한 보좌관을 두었군, 변경백도.”
“으하하, 아, 정말 재밌었습니다. 전하.”
“그대의 재미는 내 알 바가 아니다.”
엘피는 당황하여 폭소하고 있는 가이와 새치름한 표정의 트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가이는 웃음을 진정시키고 몸을 일으켰다.
“우선, 무례에 사과드립니다. 트론 전하. 그리고 이나드 영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우아한 자세로 사과했다.
“하지만 정말 웃겼다고요, 전하. 설마 대놓고 너네 가문 역적모의하냐고 말씀하실 줄이야.”
“시체 팔이 운운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적반하장 아닌가.”
“그래서 사과드린 거잖습니까. 도발하다가 배로 돌려받으니 부끄럽네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그녀는 조심스레 말했다.
“그렇다면, 왕자님께서 하신 말씀이 정말로……?”
이 나라를 수호해 온 유서 깊은 가문이 이 나라의 멸망을 바라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진실에 엘피는 뒤통수가 얼얼했다.
원작에서도 르터바이스는 어디까지나 명분을 가지고 주인공을 도왔다.
“표현에 오해의 소지는 있지만요. 딱히 저희 가문이 나라 망하라고 치성을 드린 건 아니랍니다.”
“믿기 어려운 소리군.”
“적어도 저희 선조들은 그랬습니다. 밀리엔 각하도요. ‘망조가 든 스레데니옴 왕실이 나라를 말아먹을 가능성이 크니 자립할 대책은 세우자’ 정도였다고 할까요.”
그의 말을 듣고 엘피는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던 점을 질문했다.
“……저어, 메르윙거 경.”
“네, 이나드 영애.”
“변경백 각하께서 일개 보좌관에게 이 정도로 많은 권한과 정보를 주시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혹시, 당신은…….”
트론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대신 답을 알려 주었다.
“……‘메르윙거’는 르터바이스 변경백의 부군 되는 자의 결혼 전 성이다.”
“아, 역시!”
가이는 그녀의 외침에 장난에 성공한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자기소개를 하겠습니다. 밀리엔 르터바이스 변경백의 외아들이자 부족하나마 정식 후계자인 가이즈카 르터바이스랍니다. 이름은, 가이라고 계속 편하게 불러 주셔도 됩니다.”
엘피는 연속으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이름 장난에 속을 줄은 몰랐다. 여주와 남주, 트론을 빼고는 외견 묘사를 거의 안 하던 그 소설의 작가가 원망스러웠다.
그가 바로 <금빛 날개와 은빛 검>에서 주인공들을 돕는 가이즈카 르터바이스 변경백과 동일 인물이었다.
원작에서 그는 진지하고 냉철한 면모가 두드러졌었는데, 설마 이렇게 나사 빠진 척하는 인간이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럼 본론으로 돌아와서.”
트론이 분위기를 환기하며 말했다.
“그대들의 선조와 밀리엔 르터바이스는 온건했을지 몰라도, 후계자인 그대에게는 헤럴드를 치고 나라를 바로잡자는 허무한 명분이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라 본다.”
“대놓고 선조들보다 인격이 부족한 점을 지적하시니 부끄럽네요.”
“스레데니옴 왕실의 피를 물려받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기껍지 않겠고.”
가이는 딱히 그 말을 부정하지 않고 시종 방글방글 웃었다.
“그러니 나는 거래 조건으로 다른 것을 걸겠다. 다른 왕위 계승권을 가진 자가 아무도 제시하지 않을 조건을.”
“어떤 것입니까?”
“내가 왕좌에 오른다면, 르터바이스 영지가 국가로 독립하는 것을 인정하겠다.”
간결하고도 커다란 조건이 협상 테이블에 올랐다.
“공신인 그대 가문을 대공으로 승격시키고 공국으로 묶는 형태가 되겠군.”
“처음부터 통 크게 나오시는데요?”
“차기 왕위 쟁탈전에서 그대들이 출신과 계승권 순위가 불리한 나를 선택할 만한 메리트는 거의 없다. 그 사실을 숨길 수도 없고, 숨길 생각도 없다. 그러니 최대한의 조건이나마 제시하는 수밖에.”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내뱉고 있음에도 트론은 조금도 긴장되지 않는 듯, 평온한 말투였다.
“……그것으로 ‘높으신 분들’에게 휘둘리는 백성의 고단함이 빠르게 해결된다면 결과적으로 좋은 일 아닌가. 그대 가문도 백성들을 생각했기에 망할지도 모르는 나라 상황에 대비했다고 생각한다.”
과격할 정도로 판을 흔들고 난 후에도 트론이 중심을 잃지 않은 것에 엘피는 감복했다.
르터바이스 가문의 속내는 예상 밖이었지만, 역시 그녀가 아는 왕자님은 올곧은 사람이었다.
그가 지닌 고결한 의지와 품성으로 진솔하게 부딪친다는 예언 아닌 예언은 그대로 실행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가이에게 고정되었다.
“……아하하.”
마치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보이며 가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린 동작으로 트론에게 다가간 가이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후 그의 손을 붙잡았다.
“만년설 호랑이가 당신의 등을 지킬 것입니다. 나의 주군.”
바로 이곳에서 트론 스레데니옴은 왕좌로 향하는 계단에 의미 있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숨이 막혀 오는 듯한 환희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엘피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정식으로 왕위를 계승 받지는 못한 상황이니, 이것으로 대신하지.”
트론은 왕의 홀 대신 숏소드를 꺼내 가이의 손과 어깨에 칼등을 한 번씩 가져다 댔다.
“르터바이스의 신의와 충정을 역사가 증명할 것이다.”
간결한 충의 선서 후 가이가 몸을 일으켰다.
“감사합니다, 전하! 르터바이스의 벗이 되셨으니, 제가 몸과 마음을 다 바칠까 하는데요.”
“딱히 그대 개인과 벗이 된 기억은 없는데.”
“차가운 절세 미남을 친구로 삼게 되어 제가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딱히 친구가 된 기억도 없다.”
“이나드 영애, 저희의 영원한 우정에 증인이 되어 주실 거죠?”
“르터바이스의 핏줄은 남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것이 특징인가?”
엘피는 웃음을 터뜨렸다. 트론 본인은 질색하는 것 같아서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나이 차가 있어도 두 사람은 꽤 궁합이 좋아 보였다.
“이나드 영애에게도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아까 건방진 말로 도발한 것,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가이가 엘피에게 고개를 숙이며 다시 정식으로 사과했다.
“전하께서 문제 삼지 않으신다면 괜찮습니다. 앞으로 한 배를 타게 되었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후후, 이래저래 부족한 몸이지만, 부디 너그럽게 봐주시길.”
“저희 왕자님께서는 착하고 올곧으신 분이시니까요. 르터바이스 소백작이 충정을 다한다면 문제 될 것 없지요.”
그의 미소가 살짝 옅어졌다.
“……네에, 그것참. 기쁜 일이네요.”
가이의 눈이 트론과 마주쳤으나, 트론은 모르는 척 시선을 피할 따름이었다.
***
“바로 밀리엔 각하를 뵈면 좋겠지만, 오늘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일 중으로 자리 마련하겠습니다.”
자리를 파하며 가이가 아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이후 계획이나 자세한 사항은 차차 논의하는 게 좋겠습니다만, 혹시 현재 생각하고 계신 부분 있으실까요?”
“11월 초에 개최되는 북부 귀족 파티에 참석할 생각이다.”
엘피는 손을 꼭 쥐었다. 르터바이스의 협력을 얻어 냈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향할 차례다.
소실된 옥새의 탈환.
또한, 엘피의 기억으로 회귀 전 헤럴드가 왕위에 올랐던 시점이 바로 이 파티가 끝난 후 한 달 이내였다.
“전하와도 이야기했습니다만, 헤럴드가 주변의 항의를 불식시키고 왕위에 오르는 게 그쯤일 것 같아요.”
“이나드 영애의 짐작이 맞을 겁니다. 왕위를 계승할 논거가 되는 법리 검토에 착수했다고 들었거든요. 그에 걸리는 시간이나, 여론을 모으는 타이밍을 생각하자면 그 정도 걸릴 겁니다.”
“그 전에 왕자님께서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야겠지요.”
조카들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숨을 죽이고 있는 사이에 헤럴드는 빠르게 자신의 왕좌를 확정 짓고 싶을 것이다.
르터바이스 가문을 등에 업은 트론은, 이제 목숨 걱정을 하지 않고 그 격전지로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 부분 말인데.”
“네, 전하.”
트론은 슬쩍 엘피를 향해 시선을 주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내 존재를 알리는 것보다는 그 파티에 맞춰 공식적으로 얼굴을 내미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엘피는 그가 던진 말에 옥새의 탈환 여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이 방심하고 있을 때, 옥새라는 강력한 무기를 쥐고 선공하며 나서는 그림이 그려졌다.
옥새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어도, 가이 역시 그 말에 찬성했다.
“2개월 넘게 헤럴드가 공들인 일을 망치는 것이니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목도도 높을 테고요. 다만, 그렇게 하자면 파티 전까지 트론 전하는 철저히 모습을 숨겨야 할 텐데요.”
“그렇겠지.”
“하면, 저희 가문에서 두 분을 손님으로 맞이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입단속을 하고 정보를 교란해도 새어 나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특정 가문에서 보호하며 모시는 귀한 객이란 주목받기 마련이다.
“다른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이럴 때는 위장 신분이죠! 이나드 영애와 트론 전하가 저희 가문의 사용인으로 위장하면 됩니다.”
평민을 위장해 왔기에 그 기간을 연장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엘피는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어서 질문했다.
“하지만 소백작님. 저는 그렇다 쳐도, 트론 전하의 외견은 특징적이라서 위험하지 않을까요? 시종이 계속 얼굴을 감출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경께서도 얼굴만 보고 트론 전하의 정체를 확신하시지 않았습니까.”
엘피의 걱정 어린 물음에도 가이는 어딘지 불길해 보이는 웃음만을 지을 뿐이었다.
이윽고 공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한마디가 가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르터바이스 가문에 새로 들어온 ‘하녀’가 절세 미소녀인 건 별문제 없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