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2화 (2/132)

2화. 회귀와 거짓 예언자 (2)

간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엘피는 트론의 방으로 향했다.

이미 일어나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왕자님께서 허락하셨다는 말과 함께 그를 깨우고 시중을 들라며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러고는 제 할 일을 하러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보안 수준은 문제가 있었다. 어제 갓 배치된 시녀를 무방비한 상태의 왕자 옆에 바로 갈 수 있게 놔두다니.

‘아니, 어쩌면 이것까지 모두 계획되어 있는 일인가.’

이미 내부까지 헤럴드의 손길이 닿아 있다는 건 그만큼 트론이 만만하고 하찮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실제로 소설에서도 이 시점에서 첫째 왕자인 말러나 둘째 왕자인 세틱스에 대한 암살 시도 묘사는 없었다.

그 생각을 하니 짠해졌다. 이러다가 어제처럼 또 눈물을 흘릴까 싶어 엘피는 마음을 추스른 후 트론의 침대에 다가갔다.

왕자가 자는 곳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투박한 침대 위에 그가 잠들어 있었다.

“……와.”

정말로 천사 같다. 새근새근 바른 자세로 잠든 그 얼굴은 차라리 성스러울 정도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엘피는 고개를 젓고 정신을 다잡았다. 그의 얼굴에 홀려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전하. 트론 전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으음…….”

잠투정 같은 신음을 흘리고 트론이 미간을 찌푸렸다.

허락을 받기 전에는 왕족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주의 사항을 들었기에 엘피는 그가 일어나는 걸 기다리며 바라보았다.

트론이 손등으로 눈을 비비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나…… 몸 일으켜…….”

잠이 덜 깼는지 발음이 어눌했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엘피는 침대 쪽으로 몸을 숙여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주려 했다.

하지만 트론이 손을 뻗는 것이 더 빨랐다.

엘피의 목을 껴안은 트론은 잠이 덜 깬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폭 묻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목을 간질였다.

‘귀, 귀여워…….’

그런 생각을 할 상황이 아닌데도 본능적으로 그 감상이 먼저 튀어나오고 말았다.

잠에 취한 고양이를 품에 안은 듯한 기분이었다.

상대가 왕족만 아니었다면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을 뻔했다.

정신을 가다듬은 엘피는 조심조심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트론 전하. 이만 일어나십시오.”

“우응…….”

트론은 어딘지 불만스러워 보이는 소리를 흘리더니 천천히 몸을 뗐다.

여전히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보니 많이 졸린 듯했다.

이윽고 완전히 정신이 든 것인지, 엘피의 얼굴을 보고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대는…….”

평소에 자신의 잠을 깨우던 사람이 아니라서 상황이 파악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제 처음 뵈었던 엘피 이나드입니다.”

“아. 맞다, 그랬지. 부끄러운 꼴을 보였군.”

“아닙니다. 저야말로 전하의 처소로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숙하여 불편하게 해 드린 것 같습니다.”

“내가 허락한 것이니 그건 신경 쓸 것 없다. 편히 일하도록 해.”

말투는 왕족답게 어딘지 고압적이지만, 담고 있는 말의 내용은 자상했다.

그런 면이 더 귀엽다고 생각하며, 엘피는 밖에서 준비해 준 세숫물을 들여왔다.

그의 세안과 양치를 도운 다음, 몸단장 시중을 들 차례였다.

보통은 각 단계 별로 이런 잡일을 담당하는 하녀들이 여럿 있겠지만, 일손이 부족한 이 궁에서 그런 것을 바라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엘피가 드레스룸에 들어가 옷 갈아입는 것을 도우려 하자, 트론이 약간 곤란한 얼굴을 했다.

“……이건 혼자 할 수 있으니 이만 가 봐도 좋다.”

이성에게 맨살을 드러내는 게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은 아니리라 엘피는 짐작했다.

사생활이라는 게 없는 왕족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애초에 그런 걸 부끄러워했다면 엘피를 아침에 방에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가 실수를 할까 염려되시는 거라면 바로 물러나겠…….”

“아니, 그런 건 아니다. ……그럼, 이후 눈에 들어오는 것에는 일절 신경 쓰지 말도록.”

“……?”

트론은 옷을 벗기기 쉽도록 그녀를 향해 팔을 벌렸다.

엘피는 그의 셔츠 단추를 풀다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벗겨진 옷 사이로 드러난 맨살에 상처 자국이 가득했다.

오래되어 희미하게 남은 자국도 있었고,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 붉게 부어 오른 상처도 있었다.

그녀는 숨을 삼키며 트론의 셔츠를 걷어 냈다.

전부 드러난 트론의 몸은 처참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 일절 신경 쓰지 말라고 한 트론의 명령이 있었기에 엘피는 그에 관해서 한마디도 물을 수 없었다.

‘……소설에서는 과거 묘사가 무척 단편적이었는데.’

그가 어릴 때 학대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지만, 짤막한 문장으로 보는 것과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보는 것은 전혀 달랐다.

아직 열두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한테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이렇게까지 상처를 내놓은 걸까.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잠시…….”

옷을 다 갈아입은 후 그녀를 올려다보던 트론이 손을 내밀어 자세를 낮추라는 듯한 동작을 했다.

순순히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자, 그는 엘피의 미간을 어루만지며 주름을 펴 주었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별것 아니니 정말로 신경 쓸 것 없다.”

그 순간 트론의 표정은 나이 어린 소년이 보일 만한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다 놔 버린 듯한 얼굴.

엘피는 울컥하는 기분에 이를 앙다물었다. 그가 울지 않는데 자신이 우는 것은 실례일 것 같았다.

“식사 전에 잠시 같이 산책이라도 하겠나?”

그녀는 말없이 끄덕였다. 몸이라도 움직여서 이런 마음을 털어 버리고 싶었다.

***

여름에 접어든 정원은 온통 푸른빛이었다.

트론의 궁에 딸린 정원은 최소한의 예산으로 관리하고 있어서인지, 흔히 왕궁이나 귀족의 저택이 그러하듯 정돈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야산 일부를 떼어 늘어놓은 듯한 번잡함이었다.

“곤충을 싫어하면 경계하는 게 좋을 거다. 정원사의 손이 거의 닿지 않아 관리가 안 되고 있으니.”

“네, 네에.”

푸르른 수레국화가 사방에서 청초하게 흔들리는 샛길을 지나자 보랏빛 수국이 달린 나뭇가지가 잔뜩 뻗어 나와 시야를 방해했다.

꽃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헤치며 그사이를 빠져나가니 탁 트인 공간에 다다랐다.

궁성의 홀 정도 되는 크기의 너른 평지에 노란 금계국이 일면을 장식했다.

바닥에는 정돈된 잔디가 아니라 이름 모를 잡초들이 제멋대로 자리를 잡아 초록빛 융단을 형성하고 있다.

말끔하지 못한 화단이었으나, 생기가 도는 그 모습은 여름에 꼭 어울렸다.

바람이 불자 나무의 잎사귀가 서로 부딪치며 일정한 리듬으로 소리를 연주해 냈다. 금계국도 흔들거리며 특유의 향을 실어 보낸다.

그러나 트론은 해를 피하는 것처럼 가장자리에 있는 느티나무에 기대 조용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녹음을 등지고 있는 그는, 총천연색의 여름 가운데에서 홀로 무채색처럼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왜 이런 어린애가…….’

나열된 문자 속에서 그는 폭군이었으며, 주인공의 장애물이었고, 최후에 패배하는 것이 마땅한 악당이었다.

그녀가 읽은 소설은 눈물을 닦아 주는 어린 손의 온기도, 끔찍한 학대의 흔적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엘피는 그를 보며 늦가을 낙엽을 태우기 위해 피우던 화톳불의 잔재를 떠올렸다. 그는 잿더미와 연기를 삼키는 공허한 새벽하늘을 연상시켰다.

활기차며 따사롭고 향기로운 여름 한가운데에서 홀로 유리된 듯 아름다운 아이는 서늘하고 외로워 보였다.

외로움의 끝에 그가 도달하는 미래는 잔혹한 폭군의 왕좌다.

“왕자님.”

엘피는 무의식중에 그를 부르고 있었다.

조각처럼 미동하지 않던 트론이 고개를 틀어 그녀를 올려다봤다.

“……제가, 왕자님을 독살하기 위해 이 궁에 들어온 거라면 믿으시겠나요.”

그의 눈이 흔들리기도 잠시, 이내 평정을 찾은 듯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군. 숙부님인가?”

바로 그 배후가 왕제인 헤럴드라는 걸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엘피는 목이 타는 기분을 느꼈다.

“……네. 헤럴드 스레데니옴은 반역을 꾀하고 있습니다. 방해되는 조카를 먼저 치워 버리려는 거겠지요.”

그녀는 두서없이 설명했다.

전령이 독을 주면서 내일모레까지 트론을 죽이라는 명령을 했다는 것. 안 그러면 가족을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은 것.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그녀의 가족을 이미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과 자신 또한 제거될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신이 품고 있던 이기적인 계획을 고백했다.

“살기 위해…… 저는 도망가려 합니다.”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하지만, 분명 감시가 있을 거다.”

“왕궁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 위기 상황에 쓰라고 왕족에게만 알려진 통로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나 엄청난 정보에도 트론은 동요하는 기색 없이 침착했다.

“그대는 나에게 그 비밀 통로의 위치를 알려 달라고 하고 싶은 건가?”

“……저를 벌하지 않으십니까?”

“그대도 나를 해하라는 협박을 받은 것뿐, 스스로 원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 일의 원인이 된 나를 원망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

“왕자님을 이용해서 혼자만 살려는 자인데요.”

트론은 그저 쓰게 웃을 뿐, 그녀의 말을 책망하지 않았다.

“돌아가자. 떠나려면 준비가 필요하겠구나.”

……어째서 이렇게 어리고 순진하며 착한 것일까.

엘피는 속으로 탄식했다.

“전하. 제가 도망치더라도, 전하는 계속 목숨을 위협받으실 겁니다. 그러니까…… 저와 함께 가시지 않겠어요?”

트론은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도망이라…….”

그녀가 악의에 익숙한 사람이었다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포식자의 살기나 품평하는 자의 냉철함 같은, 삭막한 잔해가 트론의 검고 깊은 눈에 서렸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 기색은 잠시 스쳐 지나가고, 그는 눈을 휘게 만들며 천진한 미소를 보였다.

“그래. 그것도 방법이겠구나.”

“그럼……!”

“바로 돌아가서 준비하도록 하지.”

따스한 여름과 어울리지 않는, 어딘지 서늘한 얼굴로 그가 손을 내밀었다.

엘피는 흥분하여 떨리는 손으로 트론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 손은 따뜻했다.

그렇게 그들은, 소설의 미래와는 다른 하나의 길을 선택했다.

소년과 소녀는 손에 손을 잡고 달려 나갔다.

아직은 아득하게 느껴지는 어떤 미래에, 행복을 손에 쥐기 위하여.

***

둘은 헤럴드가 죽는 날까지 평민을 위장하며 조용히 남매처럼 살아갔다.

왕과 가장 먼 위치에서 정치라느니 귀족이라느니 하는 복잡한 것과 얽히지 않도록.

미래를 알고 있는 소녀는 자신했다.

트론이 폭군이 되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불행한 미래는 사라질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며, 그가 왕자로 복권하는 그날까지 착하고 올곧은 심성을 유지하도록 곱디곱게 키웠다.

그러나 엘피는 트론의 시체를 눈앞에 두고 어린 날의 순진했던 생각을 후회했다.

늦가을에 다 타 버린 화톳불의 잿더미가, 불씨 하나 남기지 않고 바람에 흩어져 새벽하늘에 삼켜지는 모습을 망연자실하여 바라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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