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화 (1/132)

프롤로그

소설에는 악당이 있다.

그 악당을 개과천선시키면, 분명히 행복한 결말이 찾아오리라 믿었다.

“……엘피. 액자 뒤에 금고가 있어. 여는 방법은…….”

엘피 이나드는,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청년을 망연자실하여 바라보았다.

그의 파리한 얼굴이 그려 내는 미모는 여전히 찬란했다.

그러나 청년에게서 명백하게 생명의 흔적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쓰러져 있는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붉게 바닥을 적셨다.

그녀가 알고 있는 소설의 전개대로라면 그는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죽을 인물이 아니었다.

“왕자님, 더 이상 말씀하지 마세요. 상처 벌어져요! 제가, 제가 마법사를 불러……!”

“상처가 아니라 저주 때문에 목숨이 끊어지는 거야. 치유 마법은 소용없어.”

“그, 그렇다면 주술사를 불러 저주를 풀어야……!”

“그러지 마, 엘피. 내가 죽어야 네가 살아.”

이제 말하기도 힘든 것인지 단어 하나하나를 끊어 발음하며 그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엘피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피투성이가 된 왕자 궁의 주인을 향해 무릎을 꿇으며 그녀는 몸을 떨었다.

트론 스레데니옴.

어린 시절을 평민으로 자라 오다 왕자로 복권된, 스레데니옴 왕국 셋째 왕자의 이름이다.

“왕자님…… 싫어요. 그런 거, 저는 조금도 바라지 않아요!”

“엘피. 너는 살아 줘. 내가 그걸…….”

‘바라고 있어’라는 말은 미처 소리가 되지 못하고 바람처럼 새어 나왔다.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엘피는 생각했다.

‘왕자님을 착하게만 키운 것? 버리고 가지 않은 것? ……내가 이 소설의 인물로 환생한 것?’

소설의 세계에 들어간 수많은 책 속 주인공을 떠올렸다.

그들은 악당을 착하게 만들고 행복한 결말을 손에 넣는다.

그녀 역시 악당이었던 트론만 착하게 자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 믿었다.

‘……근거도 없이, 순진하게 믿었어.’

눈물로 시야가 흐려졌다.

점점 부정확해지는 발음으로 트론이 성에서 안전하게 빠져나가는 루트를 알려 주고 있었지만, 엘피의 귀는 그 정보를 제대로 담지 못했다.

가슴에 몰려드는 것은 그저 후회뿐이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세 살 아래인 그를 동생이자 가족처럼 생각했던 그녀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엘피, 마지막으로…….”

그 말은 사그라지는 것처럼 공기에 섞여 들어갔다.

“……키스, 해 줄래?”

그녀는 엉엉 울며 몸을 숙였다. 눈물이 흘러 그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살짝 닿은 입술은 젖어 있었다.

입술을 떼자마자 트론이 안심한 듯 숨을 흘려 냈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삶의 기운이 모조리 사라졌다.

몸을 붙잡고 흔들어도, 심장을 압박해도 소용없었다.

트론 스레데니옴은 사망했다.

“으아아아아아아─!”

그녀는 자책하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다 나 때문이야. 내가 괜한 짓을 해서.’

온갖 후회가 눈물이 되어 흘렀다.

‘신이시여, 계신다면 부디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왕자님을, 트론을 살려 주세요. 그가 허무하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겠습니다.’

그와 처음으로 만났던 6년 전 일을 떠올리며 그렇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1화. 회귀와 거짓 예언자 (1)

엘피는 철이 들 무렵, 자신이 환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지어 이 세계는 전생에 읽었던 소설 <금빛 날개와 은빛 검> 속이었다.

이 소설은 공작의 딸인 여주인공이 미래를 읽는 예언자 남주인공을 참모 삼아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로맨스 판타지였다.

처음에는 소설 속의 세계에 환생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지만, 엘피는 점차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했다.

어차피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왕족이니 공작이니 하는 높으신 분들 뿐, 중앙 정치와 멀리 떨어진 시골 자작가에서 태어난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주연들은 소설에서 그랬던 것처럼 장절한 드라마를 써 내려가겠지. 나는 소설의 사건 사고와는 아무 연도 없이 평화롭게 살면 그뿐이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열다섯 살이 된 여름에, 왕실에서 전령이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엘피. 실은 내가 예전에 잠시 셋째 왕자님인 트론 전하의 유모를 한 적이 있었단다. 그 연으로 유모의 딸인 너를 트론 전하의 시녀로 발탁했다고 하는구나. 얼른 짐을 싸자.”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엘피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셋째 왕자, 트론 스레데니옴.

그가 바로 <금빛 날개와 은빛 검>에서 미래의 악당으로 군림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쫓기듯이 짐을 싸면서 남들 눈을 피해 몰래 소설 내용을 적어 둔 수첩을 뒤졌다.

이 세계가 책 속의 세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까먹기 전에 생각나는 내용을 남겨 둔 수첩이었다.

내용을 확인한 엘피는 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소설 속 유모의 딸은 수도로 올라간다는 들뜬 마음으로 셋째 왕자가 있는 왕궁에 가지만, 그것은 역심을 품고 있는 왕제(王弟) 헤럴드 스레데니옴의 음모였다.

자신의 형인 왕을 쓰러뜨리고 나서 방해가 될 조카를 미리 처리하려는 것이다.

헤럴드의 입김이 닿은 전령은 유모의 딸에게 독을 건네며 셋째 왕자 트론을 살해하지 않으면 가족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그리고 그 유모의 딸이 바로 나…….’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곳이 소설 속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설마 등장인물이 자신일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반짝 등장하고 사라지는 엑스트라의 이름까지 기억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현실을 원망했지만, 그녀는 무력했다.

미래를 알고 있어도 시골 자작가의 어린 영애인 엘피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갑작스럽지만 영예로운’ 직무를 받들어 그녀는 전령과 함께 왕궁으로 끌려갔다.

“세상 물정 어두운 계집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걸 품에 지니고 들어가거라. 다른 왕자들의 처소와 달리, 트론 왕자의 처소는 몸수색이 철저하지 않을 것이야.”

처음 엘피를 데려갈 때만 해도 친절했던 전령은 돌연 태도를 바꾸어 차갑게 뱉어 냈다.

“그걸 왕자가 먹는 음식에 타서 내주도록. 모레까지 그가 살아 있다면, 네 가족의 목숨은 없다.”

“…….”

마음 같아서는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소설을 봤기에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엘피가 끌려가듯 왕궁으로 떠나자마자, 이나드 자작가의 식솔들은 정체불명의 무리에 의해 몰살당한다.

물론, 후환을 없애려는 헤럴드의 짓이라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소설 속 가엾은 유모의 딸은 그 사실도 모르고 이미 죽은 가족과 트론의 목숨을 저울질했다.

결국,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그 독을 삼켜 자살하지만 말이다.

현실감이 없어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엘피는 무기력하게 독이 든 병을 받아 품에 넣으며 죄 없이 죽어 갔을 가족을 떠올렸다.

규칙적으로 덜그럭거리는 마차의 창 너머로 스레데니옴 왕국의 수도 데니옴의 웅장한 모습이 보였다.

처음 방문하는 수도에 대한 설렘 따위는 송두리째 빼앗겼다.

눈을 감자 새카맣게 덮이는 시야가 마치 자신의 불운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

전령의 말대로 셋째 왕자인 트론의 처소로 들어가기 전에 받는 몸수색은 형식적이었다.

불친절한 수석 시녀는 몇 가지 주의 사항만 전한 후 귀찮다는 표정으로 잡일을 하는 하녀에게 엘피를 트론 왕자의 처소까지 데려갈 것을 명했다.

‘이래도 되는 건가?’

하녀의 뒤를 따라가면서 엘피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여염집도 아니고 왕이 사는 궁궐인데, 거기서 일하는 시녀의 선출과 배치가 이렇게까지 허술할 줄이야.

그러나 머나먼 서쪽에 자리 잡은 트론의 거처에 들어서자마자, 엘피는 그 허술함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왕궁에 들어와 처음 접했던 곳은, 주로 사용인들이 머무는 공간인데도 나라의 지존을 모시는 거처 특유의 화려함과 웅장함이 공존했다.

하지만 본성에서 벗어나 해자를 건너 어딘지 허름한 서쪽 삼 왕자 궁에 들어서자마자 전혀 딴 세상 같았다.

해가 들지 않아 어둡고 서늘한 이곳은, 차라리 체면을 차린 감옥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듯했다.

이곳저곳이 낡아 있는 회랑을 지나, 그녀는 지긋한 나이의 시종이 대기하고 있는 문 앞에 도달했다.

“트론 전하, 말씀드린 시녀가 당도하였습니다.”

시종은 힘없지만 공손한 말투로 엘피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들어와.”

어린 소년 특유의 맑은 미성으로 허락의 말이 떨어졌다.

미래에 그 누구보다 잔혹한 악당이 될 새싹과의 대면이었다.

***

소설 <금빛 날개와 은빛 검>의 내용은 엘피 안에서 전생의 기억만큼이나 흐릿했다.

수첩에 메모를 남겨 두었기에 주요 사건이나 전체 흐름은 파악하고 있지만, 그것도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강렬해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몇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혈육들의 피를 밟고 왕으로 즉위한 악당 트론 스레데니옴이 저지른 잔혹한 사건에 대한 묘사였다.

스무 살도 채 안 된 트론이 보위에 오르자마자 온 나라에서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가장 말이 많은 건 그가 천출이라는 것과 신체에 장애가 있다는 점이었다.

원인은 알 수 없었으나 트론은 오른팔을 잃었으며 왼발을 절고 있었다.

특히 귀족들은 다들 입을 모아 그를 헐뜯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것은 불안감을 쫓아내려는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새벽을 형상화한 듯한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닌 그의 얼굴은 이 세상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했다.

트론이 만들어 내는 모든 분위기가 마치 사신이라도 마주한 것 같은, 공포를 느끼게 했다.

불행히도 이 공포는 현실이 되었다.

“요즘 내 앞으로 익명의 투서가 많이 오는데, 천출에 팔다리 병신 새끼가 제 주제를 모르고 설친다는 소리더군. 그대들의 왕이 천출에 팔다리가 온전치 못한데, 그 마음을 공감하지 못한다니 무척 안타까운 일 아닌가. 물론 그대들의 피는 나와 다르게 고결한 모양이니 그건 어쩔 수 없네만, 다른 부분이나마 공감할 기회를 마련해 보았네.”

그는 주요 권세가 및 적대 가문들의 수장과 그 후계자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 각 가문의 수장이 보고 있는 앞에서 후계자의 팔과 다리를 단계적으로 해체하는 고문을 행했다.

출혈로는 죽지 않도록 주술까지 걸어서 철저하게.

대부분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본인이 먼저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여 목이 잘려 죽었다.

귀족가의 수장들은 자신의 자식이 비참하게 죽어 나가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어떤가, 충분히 공감할 기회가 되었는가?”

그 질문을 하는 트론의 얼굴에는 마치 천사와 같은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한다.

***

그 강렬한 소설 내용을 되새김질하며 엘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왕자가 머무는 거처라는 사실을 모르고 봤다면 사용인이 쓰는 방이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로 소박했다.

그런 방 안에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는 검은 머리칼의 소년이 앉아 있었다.

‘……소설에서 마르고 닳도록 절세 미남이라고 묘사하더니, 괜히 그런 게 아니었네.’

엘피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릴 뻔했다.

“……크흠.”

그녀가 넋을 놓고 있던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던 탓일까, 뒤에서 보다 못한 시종이 헛기침을 했다.

신분이 낮은 자는 왕족보다 먼저 자신을 밝혀야 한다. 엘피는 화들짝 놀라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예의가 부족하여 인사가 늦은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나드 가문의 장녀, 엘피라고 합니다. 앞으로 전하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개의치 않는다. 트론 스레데니옴이다.”

트론은 눈짓으로 시종을 물렸다.

시종의 발소리가 사라지자, 그렇잖아도 조용한 궁에 정적이 흘렀다.

“적적한 궁에 오게 한 것 같아 미안하구나.”

“아, 아닙니다.”

그의 얼굴에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에게는 여자 형제가 없어 마치 손위 누이를 맞이한 것 같아 기쁘다. 그대에게 형제자매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동생처럼 여겨 주길 바란다.”

“…….”

어린아이다운 철없는 소리라고 엘피는 생각했다. 아무리 트론이 천출이라지만, 왕자를 상대로 남매처럼 지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거기에 더해 자신은 그를 죽이라고 사주를 받은 몸이었다.

그녀가 대답이 없는 것을 다른 방향으로 오해한 것인지, 그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대는 가족들과 떨어져 이곳까지 왔는데 내가 너무 무심한 소리를 했나 보구나.”

그 말을 듣자마자 무언가가 심장을 꾹 옥죄는 듯했다.

소설에는 짧게 묘사되어 있던 가족의 죽음은 어떤 형태였을까. 마지막으로 숨을 거둘 때 고통스럽지는 않았을까.

무시하려 해도 머릿속에서 그 생각이 계속 떠나지 않았다.

그녀에겐 지금 이 세상이 현실이었고 소중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지냈던 전생의 기억은 계속 자신을 이 세계의 이방인처럼 느끼게 하는 벽으로 작용했다.

이나드 자작가의 식솔들은 모두 다정하고 따스했다. 엘피를 사랑해 주었다. 그렇지만 그 벽 때문에 완전히 마음을 열지 못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한 번이라도 더 끌어안고 한 번이라도 더 키스했으면 좋았을 텐데.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들이 운명의 급류에 휩쓸려야 했던 걸까.

소설에 남아 있는 것은 그 착한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얄팍한 문장 한 줄뿐이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사무쳤다.

“……울고 있나?”

“흑…….”

트론의 목소리에 엘피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뺨을 적시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무, 흑, 무례를 용서해…….”

잠시 바라보던 트론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손을 뻗었다.

왕자 궁의 서늘함에 차가워진 그녀의 팔목을 어린아이 특유의 온기가 감쌌다.

그는 엘피를 자기가 앉아 있던 소파에 앉혔다. 그 옆에 앉으며 따뜻한 손으로 눈물을 훔쳐 주었다.

“내 배려가 부족했다. 사과할 필요는 없다.”

“……흑, 우윽…….”

무언가 원망할 것을 찾고 싶었다. 이를테면 먼 훗날 잔혹한 짓을 저지를 미래의 악당, 눈앞의 소년에게 말이다.

어차피 소설처럼 나쁜 놈이 될 거라고, 가족이 죽은 것도 얘가 근본적인 원인이니까 원수나 다름없다고, 그러니까 가지고 있는 독을 써 버리자고, 그렇게 치기 어린 생각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소년은 천진하고 다정했다. 정말로 그녀가 알고 있는 소설 속의 악당과 동일 인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렇다면, 어쩌면. 무언가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이 아이를 독으로 죽이지 않고 살려서 성인으로 만들어도, 폭군이 되지 않을 그런 길이.’

그의 따스한 손 안으로 눈물을 흘려내며 엘피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고작 이틀도 되지 않았다.

***

트론은 엘피의 예의 없는 태도를 꾸짖지 않고 눈물이 그치기를 기다려 준 후, 방으로 돌려보내 쉬게 해 주었다.

잘 넘어가지 않는 저녁을 먹고 침대에 앉아 그녀는 고민했다.

내일 아침 다시 트론을 만날 때까지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해야 했다.

“……도망은, 갈 수 있어.”

닥쳐온 불운에 눈앞이 어두워졌지만, 그녀는 죽을 것을 염려하지는 않았다.

수첩에 적은 소설 내용을 종이가 닳을 정도로 외운 덕에 성 밖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의 위치와 여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트론이 계속 눈에 밟혔다.

그를 죽일 마음 따위는 이미 사라졌다.

소설에서 나오는 미래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의 그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마음씨 따뜻한 열두 살 소년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이대로 그를 두고 도망친다면, 그는 헤럴드 밑에서 살아남는 대신 소설처럼 잔혹한 악당이 되어 버릴 것이다.

“……함께, 도망치자고 해 볼까.”

그는 아직 악당이 되기 전이었다.

직접 만나 본 트론은 어린아이답게 천진하면서도 배려심 깊고 다정했다. 그녀가 하는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을까 기대할 수 있을 만큼.

물론 트론이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이로 인해 그녀가 도망치는 걸 저지하거나 다른 이에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엘피는 그 가능성에 걸어 보고 싶었다.

악당의 싹을 틔우지 않은 착한 소년이, 자신의 말을 듣고 함께 도망쳐 줄 가능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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