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회귀와 거짓 예언자 (3)
엘피 이나드는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자아를 인식했다.
트론의 시체 앞에서 울고 또 울던 그녀는 어느 순간 단절된 어둠 속에 고립되어 있었다.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팔을 뻗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도 인식할 수 없는 공포 속에 그녀는 트론을 생각했다.
‘나도 왕자님과 함께 죽은 것일까. 이 삭막한 어둠이 죽음의 감각인가.’
이런 아득한 외로움 안에 그가 조용히 안치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눈물을 채 닦아 낼 새도 없이, 공간에 이변이 찾아왔다.
새하얀 빛이 그녀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
“……어, 라?”
뒤통수가 욱신욱신 쑤셔 왔다.
엘피는 순간, 너무 울어서 머리가 아픈 것일까 생각했다.
울고 또 울다가 잠시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왕자님의 유해를 다시 확인하고, 그다음에 할 일을…….’
냉정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얼굴을 쓸어내린 그녀는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 눈물을 훔치는 자신의 손이 기묘하게 작게 느껴진 탓이었다.
게다가 정신을 잃기 전에 엎드려 쓰러졌을 터인데 자신은 지금 어딘가에 서 있었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하지만 뺨에서 느껴지는 눈물의 흔적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당황하여 주변을 살피려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마자 숨이 멎을 듯한 충격을 받았다.
흑단을 곱게 다듬어 놓은 듯 찰랑찰랑한 검은 머리칼, 별빛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닮아 반짝거리는 눈동자.
“……울고 있나?”
투명하고 청아한, 어린 소년 특유의 목소리.
자신의 마지막 기억 속에, 피투성이로 죽어 가던 트론이 눈앞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자그마하고 사랑스러운 열두 살 남짓한 모습으로.
‘이게, 무슨…….’
엘피의 머리를 채우는 것은 물음표뿐이었다.
그의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다. 이렇게 깜찍한 외모는 먼 옛날에 졸업했다.
‘왕자님에게 어린 친척이 있었나? 친척이 이렇게까지 쌍둥이처럼 같은 얼굴일 수가 있나?’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던 그녀는, 가장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확실한 결론에 도달했다.
‘정말로…… 본인?’
엘피는 반신반의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트론 왕자님?”
그가 천천히 일어나 엘피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이 앉아 있던 소파에 앉혔다.
“그래. 가족과 떨어져 혼란스러운가 보구나. 내 배려가 부족했다.”
이 일련의 상황에, 강렬한 기시감이 들었다.
‘왕자님이랑 처음으로 대면했을 때?’
열여덟 살로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외견의 트론.
눈에 익은 낡은 궁전의 실내.
과거의 한 시점과 꼭 닮아 있는 상황.
엘피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회귀.’
소설 속의 세계에 환생도 한 마당이니, 회귀 역시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설마, 신이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한 걸까?’
걱정되는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열두 살 트론의 얼굴 위로,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던 열여덟 살 트론의 모습이 겹쳐졌다.
정말로 트론 스레데니옴이, 이곳에 살아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와 함께 지내 온 6년의 세월이 단번에 밀려 들어오는 듯했다.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 평민으로 살면서 가난해도 즐거웠던 생활, 그가 왕자로 복권한다는 사실을 순수하게 기뻐했던 철없는 자신.
어떤 것은 후회라는 색으로, 또 어떤 것은 환희라는 색으로, 온갖 감정이 기억에 덧칠되었다.
그 모든 것을 암흑에 처박아 버린 그의 죽음이라는 명제가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그를 불렀다.
“……왕, 자님.”
감촉을 확인하고 싶다. 그가 살아 있다는 실감을 하고 싶다.
그녀는 흐느끼듯이 흘러나오는 오열을 막지도 않고 그의 목에 팔을 둘러 꽉 안았다.
어린아이 특유의 높은 체온, 달콤한 체향.
엘피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그가 품 안에 존재했다.
눈물에 젖은 입술이 트론의 뺨에 닿는다.
피투성이의 그에게 키스하며 마지막 인사를 남겼던 기억을 덮어씌우듯, 엘피는 무의식중에 그의 뺨에 입맞춤했다.
“읏…….”
그가 품 안에서 흠칫 놀라는 기색이 전해져 왔다.
“아, 죄송합, 우윽…… 훌쩍.”
엘피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울음에 목이 막힌 탓이었다.
트론에게는 이제 겨우 첫 만남이었다. 갑자기 울며 매달리는 시녀라니 수상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엘피는 그에게서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를 놓고 싶지 않았다.
그의 호흡을 느끼고 싶었다. 그의 심장 고동을 듣고 싶었다.
트론의 몸에 온전히 자리 잡은 삶의 증거를 오래도록 품에 두고 싶었다.
“죄송해요…….”
“괜찮다. 억지로 눈물을 참을 것은 없다.”
트론이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자신보다 키가 작은 그의 어깨에 엘피의 얼굴이 파묻혔다.
셔츠 어깨가 눈물에 젖었지만, 트론은 신경 쓰지 않았다.
“흐으윽!”
결국, 엘피는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조용한 궁 안에 그녀의 오열만이 메아리쳤다.
***
“이제 좀 진정되었나?”
울음소리가 잦아든 엘피를 향해 트론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끄덕이며 트론을 안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죄, 송합니다……. 허락도 없이 왕족에게 접촉한 죄, 용서받기 어려울 것을 압니다.”
“괜찮다. 그대의 모친의 버릇인 것을 안다.”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는 손동작은 느리고 부드러웠다.
“어린 시절, 유모가 나를 안고 그렇게 해 주었지. 그대도 가족이 떠올라서 적적했나 보구나.”
그의 말대로 어머니인 이나드 자작부인은 엘피가 울 때면 품에 안아 뺨에 입 맞춰 주었다.
트론과 만난 적도 없었던 어린 시절인데, 같은 추억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따뜻하고도 신기했다. 회귀 전의 트론에게는 들어 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나중에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휴가를 줄 테니, 너무 우울해할 것 없다.”
“아…….”
엘피는 숨을 크게 뱉었다.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머리를 가득 채워,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이미 목숨을 잃었을 가족들이 떠올랐다. 그들을 죽인 헤럴드 스레데니옴이 떠올랐다. 오늘부터 급격하게 바뀌어 갈 이 나라의 정세 또한.
그랬다. 트론을 다시 만난 기쁨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미래를 바꿀 기회가.
엘피는 온기가 멀어지는 것을 아쉽게 여기며 그의 품에서 몸을 떼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쳐 냈다.
잠시의 시간 낭비도 아까웠다.
“……전하. 슬픈 일이오나, 제 가족은 다시 볼 수 없습니다.”
“그건 무슨 말이지?”
엘피는 소년의 검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신은 과거에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고작 생각한 방법이라고는 멀리 도망가 평민으로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숨을 죽이고 조용히 사는 것이 최선일 줄 알았다.
그게 실수였다. 정치적인 세력이 없는 왕위 계승권자가 마주할 현실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정적에게 당하여 하루아침에 목이 날아가는 그 무서운 현실을.
“전하께서는 어머니를 잃으셨지요.”
“…….”
트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에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터부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그분을 해한 자가, 제 가족들을 살해했습니다.”
“뭣…….”
“그리고 그자는 며칠 내로 역모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할 것입니다.”
시간이 없다. 설득할 요소도 부족했다. 이제 겨우 시녀가 된 열다섯 살 귀족 영애의 말이 신뢰를 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자, 헤럴드 스레데니옴이 왕위에 오르고 피바람이 몰아치는 난세가 시작됩니다. 저는 트론 전하가 그 난세에서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그대는.”
치맛자락을 꾹 쥐었다. 짧은 시간 안에 그녀가 생각한 결론은 단 한 가지였다.
“제가 가족의 복수를 위해 왕자님을 이용한다고 생각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까 왕자님…….”
어쩌면 이건 다 꿈일지도 모른다. 내일 깨어나고 나면, 트론이 사라진 현실에 절망하며 다시 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달콤한 꿈속에서, 그녀는 철저히 과거를 반성하며 그가 죽지 않는 미래를 개척하고 싶었다.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 한, 이곳이 엘피 이나드의 현실이니까.
“당신은 반드시 이 나라의 왕이 되어야 합니다.”
그가 살아난다면 가장 해 주고 싶었던 그 말을 건넸다.
***
실내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엘피는 고개를 꼿꼿하게 든 채 똑바로 트론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건넨 말들이 얼마나 신빙성 없이 느껴질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그의 눈을 응시했다.
“……무척.”
“…….”
“불경한 말이로군.”
현왕인 셀딕 스레데니옴은 엄연히 살아 있었고, 헤럴드가 역모를 꾸민다는 것을 증명할 방도가 없는 이상, 방금 뱉어 낸 말은 허무맹랑한 광언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들릴 것을 압니다.”
“알면서 그런 허언을 뱉은 이유는 무엇이지? 대답 여하에 따라 나는 그대를 위병에게 넘기는 수밖에 없다.”
엘피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자신이 선택한 이 수가 옳은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광언으로 들릴 자신의 말을 무마할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녀는 굳게 각오하고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그것은 제가 가능성의 기억을 읽는 자. ‘라이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에서는 예언자를 ‘라이샤’라고 표현했다.
원작 <금빛 날개와 은빛 검>의 남주가 바로 그 ‘라이샤’로서 여주를 새로운 나라의 왕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원작의 내용을 역으로 이용해 주겠어.’
남자 주인공 대신, 엑스트라에 불과한 엘피 이나드가 예언자를 자처하며.
여자 주인공 대신, 악당이 될 트론 스레데니옴을 유일하고 절대적인 군주로 만들기 위해.
주인공들이 얻어 나갈 이득도, 아군도, 정답도, 독차지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