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화
검으로 바치는 경애 (9)
“그림자라. ‘빙의’되었다고 하셨는데 근거는 무엇이고, 그가 여러분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이려 들었다는 거요? 거기에 치유의 기적을 썼다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군. 제대로 보신 것 맞소?”
말라키아가 의심스럽다는 듯 카인을 곁눈질했다. 마치 ‘진위는 내가 판단할 테니, 너는 정보나 내놓아라.’라는 투였다.
카인은 결정을 내렸다. 경고는 한 번으로 족하다. 내놓으라는 대로 넙죽넙죽 줄 이유도, 여유도 없다. 이런 식의 장단에 맞춰주기도 싫었다. 카인은 릴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판관님께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시겠다는군요. 마치 우리가 잘못 본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더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눈속임이었다. 마치 릴리가 자신보다 상급자라는 것처럼. ‘나에게 모든 권한이 있는 게 아니다.’ 는 뉘앙스도 주면서, 카인과 릴리의 정체를 더욱 알기 어렵게 하려는 의도다. 턱을 매만지는 척하며 ‘부정’을 뜻하는 손동작을 지어 보인 건 덤이다.
릴리는 고개를 천천히, 분명하게 가로젓는 것으로 합을 맞춰주었다. 이단심문관들은 당혹해했다. 릴리를 채근했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과 응시뿐.
“왜 이러는 거요?”
말라키아가 팔짱을 끼었다. 카인은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해는 합니다.”
“무엇을?”
“판관 생활을 오래 하셔서 그렇겠지만, 눈앞의 사람을 범죄자처럼 대하는 모습 말입니다. 의사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잠재적 환자로 생각한다던가요? 그건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런 습관이 몸에 익어버려서일 겁니다. 그 점은 이해하겠다. 그 뜻입니다.
저희가 정말 수도원에서 왔는지 알고 싶다고 하셨는데, 역시 이해합니다. 확인이 필요하겠지요. 저도 그 점을 염려하여, 불타버린 수도원에서 이런저런 증거가 될 만한 유품들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니 신중한 확인 절차까지도 양해하겠습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요?"
"난 이해한다고 했지, 용납한다고는 안 했습니다."
카인은 말라키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믿기 어렵다는 둥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는 둥…나와 내 동료 요원은 여기 이단심판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취조받으러 온 것도 아니며, 보고를 올리러 온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제국의 공무를 수행 중이지, 교단의 아랫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오.
그러니 이젠 내가 물어야겠소. 일곱 영웅과 그림자, 마왕과 검집의 기사에 대해, 그리고 순결의 성기사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하시오."
말라키아의 얼굴이 확 굳었다.
“무례하군. 버릇없는 공무원에게 내가 왜 친절하게 대해야 하지?”
말라키아는 대놓고 이죽거렸다. 카인은 화내지 않았다. 화낼 필요가 없다.
"그러면 가서 책임자나 불러오시오."
카인의 말을 들은 판관이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궁금해지는데. 종교재판소 판관 자리는 교단을 대표해 제국의 수사 협조에 응할 수 있는 '위치'와 '급'이 되는 자리인지. 아니라면 내 '급'에 맞는 사람을 데려오시고, 당신 '윗사람'에게 보고서나 잘 써서 올리시오."
"말이 너무 지나치지 않소!"
말라키아가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급도 안 되는 사람 붙잡고 있었던 모양이로군."
“그만!”
하인리히 신부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꽤 오래 참은 모양이다. 릴리는 몸을 뒤로 젖히고 다리를 꼰 채로, 카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었다. ‘너무 과했어.’라는 의미로 모두가 이해할 정도로.
카인은 일단 자리에 도로 앉았다. 하지만 사과하지는 않았다. 하인리히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림자는 마왕이 가장 깊게 이해하고 활용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말투는 법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더없이 차분하다. 창가 너머로 비치는 햇살에 십자군 종군 휘장이 빛났다. 말라키아가 언짢은 듯 잇소리를 내었지만, 하인리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왕은 세상 모든 것을 자기 의도대로 뒤틀어 활용합니다. 사람도, 빛도 심지어 신성한 빛마저도 예외가 아니죠. 그러나 그가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잘 다루는 것은 그림자입니다.
5차 십자군에 대해 얼마나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초창기에는 부대가 와해될 뻔했습니다. 창고의 외진 곳이나 햇살 쏟아지는 창가 아래쪽 같은, 그늘진 곳에서 칼과 창을 거머쥔 손목이 튀어나오곤 했으니까요.
뿐입니까? 현장 지휘관을 암살하고, 무기를 불태웠으며, 군량을 오염시켰습니다. 그림자를 통해 기괴한 살덩어리들을 내보내는가 하면, 후퇴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어둠에 대한 공포. 그림자에 대한 두려움. 언제 어디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피로감은 병사들의 발을 늦추게 했고 지휘관의 머리를 아프게 하였지요.”
카인은 혀의 덩굴을 떠올렸다. 뭉쳐진 살덩어리로 빚어진 괴수가 북동쪽으로 날아가던 장면이 기억났다. 덩굴의 희롱에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던 릴리도, 틈이 날 때마다 혀가 닿았던 곳을 아프도록, 살이 부르트도록 닦아내던 모습도.
그리고 그날 이후 자신에게 틈이 날 때마다 말을 걸어오던 죽은 약혼녀의 그림자도.
“인정하기는 싫지만, 당시 이교도의 빛과 시야에 대한 지식은 우리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광활하고 탁 트인 대지에 살다 보니 광학이 발전하게 된 것이겠지요.
그들은 최대한 빛을 밝혀 그림자를 몰아내자는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은총 받은 성기사와 성직자들은 빛의 기적에 대해 탐구했습니다. 성화를 불빛처럼 사용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지요.
빛의 기적을 쓸 수 없는 병사들에게는 촛불과 횃불, 그리고 방패 뒷면이나 거울을 사용하라고 하였습니다. 반질반질한 표면으로 빛을 반사하면 그림자를 몰아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믐밤에는, 그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갔지요. 천체조차 장막에 가려지는 그믐밤에는, 마왕의 기세가 가장 강했습니다. 끔찍하고도 끔찍했습니다.”
종군 휘장이 있는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왕의 가장 두려운 능력은 그게 아닙니다. 요원 여러분, 감히 말씀드리지만, 우리 중 많은 이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하스펠도 거기에 있었지요. 우리가 이렇게, 날선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진정 '그림자'를 목도한 이는 다시는 예전으로, 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정말 그것을 보았습니까?"
- 카이로스…
카인의 귀에 또다시 환청이 들렸다. 사람 숨을 만한 곳은 없는 방인데도 목소리는 또렷했다. 하지만 이내 맑고도 분명한 음성이 들렸다.
“보았습니다.”
모두가 릴리를 바라보았다.
“네. 보았습니다. 두려워하는 것. 지금도 두려워하지만, 오트란토 봉쇄수도원에는 절대 나타날 수 없는 사람이 그림자의 형태를 빌려 거기 있었습니다.”
릴리는 그 모든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내었다.
“그런데도 멀쩡하게 앉아 계시는군요. 아니. 아니. 못 믿는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한 번 보면, 그것은 죽을 때까지도 눈동자에 박혀 사라지지 않습니다.
5차 십자군의 군세가 절대 적지 않았음에도, 마왕의 앞에 7명의 영웅밖에 나아갈 수 없었던 이유가 이것입니다. 마음속의 두려움, 죄책감, 짐, 후회…그것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렸지요.
네. 저도 그랬습니다. 하스펠 그 친구는 저보다 좀 더 앞서가기는 했지만 결국 무릎을 꿇었고요. 그래서 어떻게 극복하셨는지를 알고 싶어 묻는 겁니다.”
하인리히가 무거운 돌을 내려놓는 것처럼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래야만 하는 일이었고. 그뿐입니다.”
릴리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해가 동쪽에서 떴다는 것처럼이나 무미건조했다.
“강인한 분이로군요.”
이단심문관 가운데 누군가가 감탄했다. 듣고 있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판관 말라키아가 앓는 소리를 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팔걸이를 두어 번 내리쳤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도 입을 열었다.
“…마왕은 사람 안에 없는 것을 끄집어내지 않소. 터무니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오. 대신, 마음속에 들어앉은 것을 과장하고, 부풀리며, 그것에만 매몰되게 하지. 그런 식으로 절망에 빠트린다오.
교단이 일곱 용사에 대해 숨기고 가리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는데. 그 부분은 내가 답해드리리다. 일곱 용사는. 그래.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었소. 평판이 아주 좋지 않았소.”
카인과 릴리는 동시에 윌리엄 대주교를 떠올렸다.
“통제는 어려웠고 제멋대로였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도 있었고 도저히 참고 지켜보기 어려운 이도 있었소. 안하무인은 기본인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정반대로 모든 것에 끈을 놓아버린, 내면이 텅 비어버린 사람도 있었지.
그 일곱 명은 사람이 가져야 하는 어떤 면이 없거나, 아니면 평생을 두려움과 공포와 허무에 사로잡혀 살았기에 마왕조차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거나였소. 어느 쪽이든, 마왕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통하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지…
마왕이 쓰러진 그곳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오. 그들은 그저 모두 힘을 합쳐 마왕을 무찔렀다고만 말했으니까. 다른 이들은, 물론 나도 말하는 거요. 마왕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소. 아직도 그 어둠이 나에게 보여준 것을 떠올리면…”
갑작스럽게 방에 어둠이 내렸다. 햇살이 구름에 가려진 탓이다. 말라키아의 말은 어두운 그늘의 덩굴처럼 질기고도 음험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추문이 끊이지를 않았소. 하지만 그들이 마왕을 무찔렀던 것만은 확실하였기에, 성하께서는 그들의 영예를 추락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곳으로 들어 올리기로 하신 거요. 누구도 파헤칠 수 없을 만큼 높이, 높이 들어 올려서, 찬란함으로 어둠이 가려지게끔.
공은 공이고. 사는 사…나도 아오. 어떤 수술은, 후유증을 남기지 않고서는 시도조차도 할 수 없다는 것 말이오. 가끔, 아니 자주…특히 판관의 자리에 앉아 있다 보면 자주 느끼는 거지만, 선행조차도 가끔은 큰 대가를 치러야만 하오.
그들이 인간 같지 않았기에, 오히려 마왕을 꺾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리하여 짐승 같은 사람이라도 신의 도구로 쓰여 그 영광을 드높일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오히려 복되고도 복된 일일거요.
검의 경애 공원, 가 보셨소?”
“가 보았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위로와 위안과 희망을 얻고 가는지도 보았겠구려.”
옷을 찢고 자신의 죄를 고하던 사람들. 엎드려 울며 땅에 입을 맞추던 사람들.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치 천사와 같이 맑은 얼굴로 돌아가던 사람들.
"일곱 영웅은 그런 존재가 되었소. 그들이 얼마나 비루한 인간이든 어둠을 뚫고 마왕을 없앴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소.
교단은 안정을 얻었고 제국은 부를 얻었지. 전 세계의 모든 이가, 하나의 공적에 대항하여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한 동질감은, 잊히지 않을 거요. 한때, 우리가 함께했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큰 자산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지.
검의 경애 공원을 성지로 지정한 이유는 그 때문이라오. 그런데... 그 뿌리부터 부정당하고 있으니. 상상해보시오. 모든 이가 그곳에서 위안받았소. 모든 세상의 이가 그곳에서 희망을 얻소."
뿌드득, 하며 팔걸이 나무 부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림자를 이용한 수법이 마왕이 주로 구사하는 주술임에는 틀림이 없고, 여러분의 반응을 보면 마음속의 악몽을 끌어낸다는 공통점도 보이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마왕이 돌아왔다는 신호는 아닐 것이오. 일곱 용사가 제 임무를 다하지 못하였다는 뜻도 아닐 것이고."
카인은 안나의 답장을 떠올렸다. 마그데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은밀히 전달받은 편지다.
답장에 따르면 제국이 접촉할 수 있는 용사들은, 우리는 그저 할 일을 다 하였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했다. 마왕을 무찔렀고 그의 유해를 봉인했다는 말. 그는 다시 일어서지 못할 거라는 그 말.
물론 그게 답장의 전부는 아니었다. 카인은 하스펠의 은밀한 조사에 대해서도 적어 보냈고, 안나는 가능하다면 그 자료를 모아 보라고 충고했다. '카인. 교단은 협조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그것이 그녀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카인은 그녀가 왜 그런 결론을 얻었는지 알 것 같았다.
"교황 성하께서는 이런 불안한 평화가 진상보다 낫다고 보시는 거요?"
"진상이라. 무엇이 진상이오?" 말라키아가 힐난했다.
"일곱 용사가 인격적으로 그릇되었다는 것? 그렇다고 그들이 마왕을 무찌른 것까지 무효가 되오? 용사라는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한점 결점 없이 깨끗한 이여야 하던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시끄러웠다는 건 인정하겠소.
하지만 누군가를 악의적으로 죽이려 든다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악마를 빚어낼 수 있는 법이오! 잘못한 것이 없는데 굽힐 것이 뭐가 있냐고 말하는 사람은 무지한 이오! 자신의 모든 행위 하나하나를 설명하고, 자신의 의도 하나하나를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는 것의 두려움을 모르는 자!"
하마터면 카인은, 증거가 있다고 말할 뻔했다. 하스펠이 수집했다던 추잡한 일기장이 자기 손에 없다는 것을 가까스로 떠올리는 것으로 참아냈다.
만에 하나, 일기장의 확보에 실패할 경우, 카인은 하스펠의 명예까지도 더럽힌 셈이 된다. 더구나 하스펠은 일기장이 서재에 있다고는 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단심문관들이 그의 방에 들어가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카인은 릴리를 쳐다보았다. 릴리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수신호 같은 것이 없는, 말 그대로 바라봄이었기에 그녀는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카인이라면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으리라 믿었다. 카인은 그 믿음에서 용기를 얻었다.
"내가 본 진상은, 하스펠 신부가 그림자를 없애기 위해 자기 몸을 불살랐다는 것이오."
다리에 힘이 풀린 하인리히 신부가 주저앉았다. 놀란 이단심문관들이 그를 부축하러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