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몰락 보고서-35화 (36/47)

제 35화

검으로 바치는 경애 (10)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카인은 말라키아만을 바라보았다. 판관 말라키아의 얼굴은 허옇게 질렸고, 팔걸이 쪽에서는 나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이단심문관들이 고개를 숙여 애도의 기도를 외우고, 하인리히가 조금 진정된 이후에야 카인은 입을 열었다.

“마왕은 자기 안에 없는 것을 끌어내지는 못한다고 하셨지요. 내가 본 것은 이렇습니다…”

허망해하는 이들도, 미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도, 판관 말라키아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카인을 바라보는 이들도 모두 그의 말을 경청했다. 카인은 최대한 담담하게 죽은 이의 마지막 행적에 대해 들려주었다. 혀의 덩굴, 닫힌 수도원 문, 자비기사단의 교착과 비웃음의 저주에 대해서도.

“하스펠 신부님은 순결의 윌리엄이 비웃음의 저주에 걸렸다고 하였습니다. 허물을 벗은 윌리엄이 보여준 동작, 그가 했던 짓 역시도 음란하고 기괴한데다 과장된 것이었고요.

신부님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윌리엄을 일깨우려 하였지만, 결국 그 기괴한 생물은 신부님의 몸을 꿰뚫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몰락에는 죄가 없다. 전부 다른 것들이 나를 유혹한 것이라고 발광하였고, 신부님은 정녕 그리한다면 신께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는 성스러운 불로 모든 것을 태우셨습니다.”

카인은 침묵했다. 그 끔찍한 광경들이 다시 뇌리를 스쳤다. 마침내 길고 끔찍한 고통이 끝났음에 안도하던, 돌벽에 박혔던 얼굴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릴리가 그의 팔을 가만히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카인은 다시 숨을 골랐다.

“네. 그게 우리가 본 것이었습니다.”

“…하스펠을 그곳에 보낸 건 나였소.” 판관의 목소리가 말라 죽은 나뭇가지처럼 갈라졌다.

“대주교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성하께서는 즉각 조사를 명하셨소. 습격당한 이들을 봉쇄수도원으로 옮기라 직접 명하셨고, 자비기사단과 다른 이들에게도 출동 명령을 내리셨지.

나는 대주교의 교구로 하스펠을 보냈소. 그러나 그의 보고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는데, 만일 보고를 올린 이가 하스펠이 아니었다면 진작 찢어버렸을 거요.”

건물부터가 평범한 대주교의 것이 아니었다. 대주교의 거처라기 보다는 작은 요새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경계였다. 대주교 그 자신에게 단련된 경비원들. 모든 문은 성채에나 쓸 법한 규격과 잠금장치로 되어 있고. 광적일 정도로 빛에 집착했다.

대주교 본인의 방은 어지러웠다. 바닥에는 녹은 초와 깨진 거울이 잔뜩이었다. 벽에 멋지게 장식되어 있어야 했던 윌리엄의 대형 망치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십자군이었던 하스펠은, 이것이 5차 십자군 당시 마왕의 그림자를 상대했던 방법임을 알아보았다.

“마왕의 그림자라니. 믿을 수가 없었소.

일곱 영웅이 마왕을 물리쳤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 그때 당시, 십자군들의 눈을 가리고 마음을 꺾었던 악몽의 그림자들이 사라졌으니까.

그 햇빛의 찬란함에 대해서는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소. 이교도까지도 검을 바닥에 내리꽂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을 정도니.

그런데, 10년이나 더 지난 지금, 7인의 영웅 중 한 명을 누군가가 피습했고, 영웅은 그를 ‘마왕의 그림자’처럼 상대하였다니. 믿기지 않았소.

누군가가 마왕의 주술을 흉내 냈거나. 생각하기 싫지만, 마왕이 다시 부활하였거나겠지. 일단 나는 그 보고서를 교황청에 보냈소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황 성하께서 일곱 영웅 모두를 성인품에 올리겠다고 발표하셨소.”

판관의 이마에서 힘줄이 돋아났다.

“성인으로 인정하려면 그들의 모든 인생과 궤적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지. 처음에 나는, 일곱 영웅의 미심쩍은 행보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일 거로 생각했소.”

카인은 흠칫 놀랐다. 바로 그 자신이 릴리와 나누었던 대화 아닌가. 시성 절차를 통해, 제한 없고 합법적인 수사가 가능할 거라고. 그런데 판관 말라키아의 말은 뉘앙스가 조금 이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까?”

“…아니었소. 아까도 말했지만, 교황 성하께서는 일곱 영웅을 도저히 끌어 내리려야 내려올 수 없는 위치로 올리려고 하시오.

완전무결하고,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았거나, 실수를 했더라도 그것을 극복한 말 그대로의 영웅. 털어도 먼지 한 톨 나지 않을 그런 박제된 영웅. 그러려면, 찌꺼기들은 전부 찾아내서 소각해야 했소.”

카인이 이를 악물었다. 말라키아 역시 카인의 분노를 인지했다. 그 역시도 분개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소. 성하께서는 모든 의혹을 부정하고, 소각하고, 없던 일로 불태우려 하고 계시오.”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믿음.”

말라키아는 눈을 감았다. 분노를 흩트려버렸다. 갑작스럽게 분노가 꺼진 자리에는 체념이라는 그을음 한 줄기만이 남았다.

“평범하고, 소박한, 보통 사람들의 순박한 믿음과 일상을 위해서였소.

검의 경애 공원…일곱 영웅에 대한 그 숱한 민담과 기대. 희망. 모든 이들이 같은 깃발 아래 싸웠던 동질감의 경험. 다투기는 해도, 그래도 우리는 하나가 된 적이 있었다는 것.

그 꿈이 배신이자 기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소? 무너지고, 갈라지고, 다투고 비난하고 서로를 욕보이다가, 마침내 칼로 찔러 죽이겠지. 지금까지 보다도 더 큰 갈등이 빚어질 거요. 당했다는 생각, 속아 넘어갔다는 생각,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회의감이 팽배하겠지.

차라리 아무것도 없었다면 모를까. 잠시 행복한 꿈을 꾼 다음의 비참함은 더더욱 사람을 괴롭게 하는 법이니까. 목마른 이에게 할 수 있는 잔인한 일은, 물을 아예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입술 적실 만큼만 주는 거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확실하지도 않은 것으로…”

말라키아는 숨을 들이쉬었다.

“확실하지도 않은 것으로 섣불리 소란을 피울 이유는 없소. 누군가 마왕의 흉내를 내고 있다면, 처단하면 그만이오.

마왕 본인이 부활한 것이라면 사태는 조금 달라지지. 사람들은 동요할 거요. 하지만 희망을 잃지는 않겠지. ‘일곱 영웅은 아직 우리 곁에 있다.

그리고 마왕은 한 번 이겨낸 적 있으니, 우리가 하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운이 좋으면 ‘역시 마왕은 쉽사리 제거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이번 기회에 뿌리를 뽑아야겠다고 더 의욕이 생길지도 모르오.

가장 최악의 경우는 이거요.

일곱 영웅이 하나하나 비참하게 쓰러지는데, 그들의 모습이 사실 우리가 알고 있던 영웅과는 동떨어져 있었다는 것. 그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영웅도 아니었고, 추잡하고 더럽고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이들이었으며, 그들의 업적조차도…의심스럽다는 것.

비웃음의 저주가 온 세상을 덮친다면. 어떻게 되겠소? 마왕의 악몽 같은 그림자가 온 누리를 다시 뒤엎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무엇에 기대어 살아야 하겠소?”

판관 말라키아는 분명히 지쳐 보였다. 카인은 그가 어떤 ‘도움을’ 주려고 한다 생각했다. 판관의 입장에서, 그리고 다른 이단심문관들이 보는 앞에서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흘러가는 상황이 가장 절망적인 세 번째, 최악의 경우로 흘러가고 있다는 건 말라키아 본인도 알고 있다. 어쩌면 교황도 알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교황은 이 모든 일을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흐름으로 억지로 밀어붙이려 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미래를 직접 만드는 것이라 했던가. 교황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행복을 위해’, 일곱 영웅에게 극적인 자리를 만들어주려 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소각하고. 업적만 남긴 자리에.

역사를 박제하려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면 하스펠 신부의 희생은 무엇이 됩니까? 죽은 자비기사단원들. 윌리엄 신부의 옆에 있다 휩쓸린 이들은?”

카인의 숨이 거칠어졌다. 망나니 기사들이 제멋대로 보통 사람들을 희롱하던 때. 모든 기대를 놔버린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제국과 교단을 비웃던 모습도 오로지 일곱 영웅만이 우리 곁에 남았다네, 라며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도.

“검의 경애 공원 성지가 그 정도의…정말로, 그 정도 가치가 있습니까?”

말라키아는 답을 하지 않았다.

“마그데부르크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말라키아가 긴 숨을 내뱉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팔걸이를 툭, 툭, 내리쳤다.

“또한, 하수도이기도 하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하수도. 세상 모든 죄인이 이곳에서 죄의 오물을 내려놓고 가오.

세상의 모든 더러움은 이곳에 던져두고,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오. 깨끗하고. 정결해지고. 아름다워진 채로.

입 안으로 들어간 것은 사람을 이롭게 하지만, 몸에서 나간 것은 그게 무엇이든 사람을 더럽게 하는 법이니…마그데부르크와 검의 경애 성지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하수도라 할 것이오.”

구름 사이를 뚫은 오후 빛줄기가 카인과 말라키아 사이를 갈라놓았다.

“이 종교재판소도 그렇소. 여기까지 올 정도라면 가장 추악하고도 더러운 것을 몸에 품은 자들일 터. 우리들 이단심문관들은, 그저 오물을 그러모으고, 태우고, 집어삼킬 뿐이오.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상상할 수도 없소. 우리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약속할 수 없소. 더 나은 쪽으로 이끌어가는 일을, 우리는 할 수 없소. 그러나.”

빛줄기가 더욱 선명해졌다. 말라키아의 몸에도 힘이 돌아왔다. 그것은 판결이자 선언이었다. 평생 버텨온 그의 견고함이었다.

“그러나 더 나쁜 쪽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있소. 여태까지 그리하였듯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오. 그리고 그것이. 교황 성하의 뜻이오.”

“…교단은 애당초 지원할 생각이 없었군요.”

카인의 갑작스러운 말에 말라키아가 움찔했다.

“지원은커녕 방해와 증거 파기만이 가득할 겁니다. 교단도 자세한 진상에 대해 모르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게 뭐든 굳이 들추고 싶은 생각조차 없었던 거지요. 알고 싶지 않으니까.”

“뭐라고 생각하든, 그건 당신의 자유요.”

“제국에 협조 요청을 보낸 것도 ‘우리는 할 만큼 다 했다. 뭔가 못 알아냈다면 그건 우리 잘못만은 아니다. 제국 잘못이다.’라는 것일 거고.

만약에 나와 내 동료 요원이 뭔가 알아낸다면. 그리고 그것이 만에 하나, 사람들의 환상을 깨버릴 만큼 끔찍한 것이라면, 그 모든 대가는 제국이 고스란히 받아먹어야 하겠군요.”

“뭐라고 생각하든, 그건 당신의 판단이오.”

“교황 성하께서는 영웅들과 함께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생각이십니까? 감히 누가 끌어 내리지 못할 곳으로?”

“그대가 황제의 뜻을 섣불리 말하지 못하듯, 나 역시 교황 성하의 뜻에 대해 말할 수 없소.”

빛줄기가 사라졌다.

말라키아는 이제 말라붙은 나무둥치만큼이나 초라해 보였다. 한때 거목의 밑동이었을지도 모르나, 지금 남은 것은 풍파에 닳고도 닳아버린 지친 늙은이의 왜소함뿐이다.

감히 바라보기조차 힘들었던 종교재판관의 판관조차도 그저 한 인간일 뿐이다. 한계가 명확한,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은,

그리고 오로지 더 나쁜 것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릴 뿐인.

카인 자신처럼. 닳고 닳아버린 사람.

“사과나무라도 심지 그러셨습니까.”

작은 말. 중얼거리는 말. 그 자신에게나 들릴 만큼 작은 말이었다. 그러나, 릴리만큼은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릴리가 또다시 카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말라키아가 몸을 뒤로 젖혔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조사에 행운이 있기를 바라겠소. 신께서 여러분의 앞길을 밝혀주기를. 그러나 서두르셔야 할 거요. 일몰이 내려오기 전에. 모든 것이 암흑에 잠기기 전에, 불씨를 빚어내시오. 내려앉을 밤에 대비하시오.”

카인과 릴리는 말없이 일어섰다. 이단심문관들이 침묵으로 그들을 배웅했다. 그러나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을 때,

“…그러나 작은 단서 하나는 내가 전해 줄 수 있겠구려.”

부러지지 않은 가지의 완고함이 그들의 마음을 붙잡아주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일요일 중으로 한편 더 올리겠습니다. 월요일부터는 연참 제한이 풀리니, 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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