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몰락 보고서-33화 (34/47)

제 33화

검으로 바치는 경애 (8)- 문장 일부를 보다 명확히 고쳤습니다. 앞서 읽으신 분들은 작가의 말 참고 부탁드립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종교재판소 복도는 길었다. 영원히 쭉쭉 늘어나는 저주라도 걸린 게 아닐까 싶은 정도로 길었다. 하인리히 신부가 가끔 지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는데,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인 듯 했다.

“원래 여기는 마그데부르크의 방어시설 중 하나였습니다. 교단 소유가 된 이후에 건물을 증축해서 종교재판소로 만들었고요.”

어쩐지 변명조로 들리는 설명이었다. 카인은 숨을 헐떡였다. 옆의 릴리도 이마의 땀을 연신 손등으로 닦는 중이었다.

“살벌하게 길군요.”

그러면서도 카인은 열심히 복도를 살피고, 지나온 문들을 살폈다.

종교재판소는 6층이다. 고위 이단심문관들의 사무실은 4층에 집중된 듯하다. 문 옆에는 누구의 방인지 명패가 붙어 있었고, 그중에는 하스펠 신부 이름도 있었다.

중앙 복도에서 오른쪽 25번째 문. 카인은 기억했다.

“다 왔습니다. 여깁니다.”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하인리히가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큼직한 열쇠를 꺼내 잠금장치를 풀었다. 다행스럽게도 비밀스러운 주문을 외워야 한다던가 특정 시간에만 열리는 건 아닌, 그냥 평범한 자물쇠인 듯했다.

널찍한 방은 평범했다. 양쪽 벽에는 연감과 판례, 해석 교리 두루마리 등이 놓인 책장이 있었고, 책상 뒤쪽으로는 중앙 정원으로 통하는 발코니가 있었다.

회의할 때 쓰는 듯 하는 길쭉한 테이블에, 의자 여덟 개가 있는 걸 봐서는 수사관들의 수가 많은 듯했다. 신부는 자기 책상 쪽에 앉았고, 카인과 릴리는 의자를 끌고 책상 반대편에 앉았다.

“일단 차라도 한 잔 드시지요.”

신부가 책상 옆에 늘어진 밧줄을 잡아당겼다. 문밖에서 수사가 들어왔다. 신부의 주문을 받고는 향이 좋은 찻잔을 카인과 릴리, 하인리히의 앞에 각각 내려놓았다. 벌꿀을 타고 레몬 조각을 띄운 음료였다.

“이단심문소 본원에 갔더니 사람이 많더군요. 재판이 자주 열리는 모양이지요?”

“요즘은 그렇습니다.” 하인리히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카인의 질문에 답했다.

“종교재판소는 말 그대로 종교적 분쟁을 판별하는 곳. 과거에는 이단자를 엄히 심문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단자는 일반적으로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영주까지도 꼬임에 넘어가고는 했지요. 단순히 신부 한두 명이 가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체 무력을 키우게 되었죠. 또, 수많은 이들을 재판하려다 보니 이렇게 큰 건물을 보유해야 했고.”

하인리히는 작게 한숨짓고는 다시 한 모금을 들이마셨다.

“사실 건물을 이렇게 유달리 크고 고압적으로 지은 이유는 ‘기죽이기용’입니다. ”

“기를 죽인다고요?”

“네. 이단자는 지지층이 탄탄하고, 머무는 곳마다 환영을 받습니다. 그럴싸한 달콤한 유혹을 하지 못한다면 이단자가 아니라 그냥 정신 나간 망상가에 불과하겠죠.

머릿속의 망상과 현실의 차이를, 기괴한 논리와 광신으로 채워 넣는 이들입니다. 그들에게 종교재판소의 위압적인 건물은, 여기가 자기가 그동안 놀던 놀이터가 아님을 되새기게 하죠.

완전히 낯선 곳. 아군이라고는 없는, 오로지 이단 혁파에 목숨을 바친 대적자들로 가득한 곳에서, 이단자는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변호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됩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이단의 기세 반은 꺾은 셈이죠.

물론…요즘은 그런 이단 재판보다는, 마녀와 마법사 관련 재판이 더 자주 열립니다. 슬픈 일이죠.”

차 한 모금을 들이마시고 하인리히는 두 손을 비벼대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하마터면 큰 사고가 일어날 뻔했어요. 지팡이 다루는 솜씨가 좋으시더군요?”

“엉겁결에 한 일이었습니다.”

“아하.” 하인리히 신부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 지었다.

“엉겁결에 턱을 쳐올린 건 그렇다 치겠는데, 울대를 정확히 찍어 내리시더군요. 그것도 엉겁결에 한 일입니까?”

“그냥 때리고 싶게 톡 튀어나왔길래.”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고, 신부는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터트렸다.

“저도 때려주고 싶긴 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감탄했습니다. 어떻게 그 추론을 모두 다 하셨습니까? 여보, 당신도 놀랐지?”

“네. 와, 듣고 있는데 이게 대학 교수님 강의실인지 재판정인지 모를 정도였다니까요.”

카인과 릴리는 한참 동안 하인리히의 영민함을 칭찬했다. 누가 들어도 조금 어색했지만, 신부는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혼자 한 일은 물론 아닙니다. 이단심문관 한 명에는 수사를 보조하는 수사관들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경호원 역할도 하지만, 조사를 여러모로 도와줍니다.”

“경호원도 별도로 둔단 말입니까? 의외로군요.”

“이단심문관은 출장이 잦거든요. 가끔 사특한 무리 가운데는 자신의 음모가 밝혀질 것을 두려워해서 자객을 보내는 이들도 많습니다. 요즘엔 칼 들고 달려드는 경우는 많이 줄긴 했는데, 벼랑 아래 지나고 있을 때 바위를 떨군다든가 하는, 사고를 위장한 공격으로 많이 변모했죠.”

카인은 하인리히가 꺼내 들었던 서류를 생각했다. 원고 쪽에 있던 사악한 형제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그 서류는 분명 원본일 것이었다.

정신 제대로 박힌 놈이면 그런 서류를 아무 곳에나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인리히가 사전 조사 통지를 했다면 미리 숨겨놨을지도 모른다.

서약서가 있다는 건 백작 부인의 증언을 통해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서약서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알고, 그걸 가져오는 건 다른 영역의 문제다.

‘수사관들의 솜씨가 지나치게 좋은데.’ 카인은 조금 의심스러웠다. 하인리히 신부가 두 손을 책상 위에 얹어두었다.

“아무튼, 두 분. 사업을 하신다고 들었는데요. 어디서 오셨다고 하셨죠?”

카인과 릴리의 눈이 마주쳤다. 카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자기가 말하겠다는 의미였다.

“저. 신부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저희는 오트란토 봉쇄수도원 쪽에서 왔고, 하스펠 신부의 전언을 가져왔습니다.”

하인리히 신부가 등을 꼿꼿하게 세웠다. 입을 두어 번 꿈틀거렸지만 흠, 하며 눈썹을 한 번 들어 올리는 것 이상의 대응은 자제했다.

“전언이라. 하스펠 신부가 나에게?”

“네.”

“이상하군요. 그와는 별다른 친분이 없는데…”

거짓말이다. 카인은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인리히의 눈동자는 천장을 헤매고, 손은 책상을 타탁, 탁 소리 내며 두드린다.

그러나 하인리히의 진짜 의도는 책상 아래 숨겨진 페달이다. 미세하지만 묵직한, 연쇄적인 진동이 지팡이를 통해 카인의 손바닥으로 전달된다.

‘경호원을 부르는 거겠지.’

카인은 하스펠의 뜯겨나간 휘장을 하인리히의 책상에 두었다. 신부의 입술이 말려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하인리히는 그것이 부고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일이 아직 안 끝났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뜯어 주셨지요. 5차 십자군 종군 휘장이라고 들었습니다. 마왕에 맞서 일어섰던 십자군…하인리히 신부님의 옷깃에 달린 것과 같군요.”

“역시 평범한 상인들은 아니었군.”

고위 이단심문관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당신들 누구요. 어디서 온 거요?”

“저희는 제국에서 왔습니다. 저와 제 동료 요원입니다. 용사 피습 사건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부서. 요원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하인리히를 믿어도 된다는 건 하스펠의 평가일 뿐이다. 자세한 건 카인과 릴리의 눈으로 확인해야만 한다.

하인리히 신부 역시 카인의 의도를 읽은 듯했다. “잠시만.” 책상 옆의 줄을 잡아당겼다. 문이 열리며, 아까 보았던 단발머리 적금발 수녀가 들어왔다. 무표정해 보였지만 눈매는 사납고,

‘대체 뭐지?’

카인의 주의를 계속해서 끌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다. 더구나 카인은 수녀와 얽힌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에게는 자꾸만 눈길이 갔다.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은 인간 모양 조각상처럼, 어떤 기이한 위화감과 어색함이 느껴졌다.

‘머리카락 때문인가?’

하인리히와 비슷한 적금발이었지만, 성향이 완전히 다르다. 하인리히가 구릿빛에 가깝다면, 수녀는 금빛이 감도는 붉은 머리다. 제국에서는 흔한 색이니 별 이상한 것도 없다.

“찾으셨습니까.”

“고위 이단심문관들 다 내 방으로 오라고 해. 판관님도. 중요한 일이니, 종을 다섯 번 치도록.”

“알겠습니다.”

수녀가 방을 나갔다. 카인은 자기가 어떤 편집증은 아닌가 의심했다. 그녀의 발디딤 때문이었다.

발걸음은 안정적이었고, 자세도 바르지만,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지나칠 정도의 부드러움과 자연스러움이다.

춤꾼이라고 해도, 시장에 물건 사러 갈 때와 무대에 올랐을 때의 걸음걸이는 다른 법인데.

종이 다섯 번 울리고, 잠시 기다리자 붉은 이단심문관복을 입은 이들이 방 안에 들어섰다. 남자와 여자가 섞여 있었지만 모두 나이가 많아 보였다. 졸린 눈을 비비는 판관 말라키아도 있었다.

“하인리히 형제. 무슨 일이오?”

“중요한 일입니다.”

“의자 가져와서 앉아야 할 정도로 중요하오?”

“그렇습니다.”

“잠 좀 자나 싶었더니.” 판관이 투덜거렸다.

경비병들과 수사들이 의자를 가져왔다. 스무 명이나 되는 이단심문관들이 자리에 앉았다. 카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는 제 동료와 함께 수도에서 먼 길을 왔습니다. 보안 규칙상, 저희의 정확한 이름과 소속을 밝힐 수 없는 점을 미리 사과드립니다. 다만 저희가 ‘요원’이라는 것, 제국과 황실을 위해 일한다는 것, 오트란토 봉쇄수도원에서 오는 길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이단심문관들은 큰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다만 주먹을 움켜쥔다거나, 허벅지를 꽉 꼬집는다거나,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놀라움을 표현했다. 말라키아 판관은 잠이 다 깬 듯했다.

“일단 듣겠소이다.”

카인은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짧고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릴리 역시 자신이 조사했던 내용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자비기사단 견습 기사의 비참한 최후와 시신이 뭉쳐 만들어진 기이한 용에 대해서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순결의 성기사에 대해 하스펠이 유언처럼 남긴 것도, 하인리히 신부에게 했던 전언 이야기 역시 하지 않았다.

당사자에게 전달했으니,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건 불필요하다. 대신 그의 휘장만큼은 꺼내놓았다.

“하스펠 신부는 이걸 저희에게 징표로 삼으라 하셨습니다. 이에 여러분에게 보여드립니다.”

이단심문관들이 징표를 돌려가며 보았다. 십자군 종군 휘장이 있었던 이는, 자기 것과 비교해보았다. 없는 이들 역시 ‘하스펠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종군 휘장은 확실하다’로 결론을 내렸다.

판관 말라키아가 이단심문관을 대표하여 답했다.

“간략하고도 상세한 설명 감사드리오. 그런데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다면, 모든 걸 다 말씀해주시지는 않은 것 같은데. 내 짐작이 맞소?”

“그렇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들이 빠진 것 같은데. 말을 안 하는 이유가 궁금하구려.”

“저희는 이 사안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아는 건, 제국이 수집한 정보에 저희의 좁은 안목으로 알아낸 것들이 전부지요. 교단이 제국에 말하지 않은 것, 설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내 말 더 듣고 싶으면 너희도 정보를 내놔라.’ 는 의미였다. 이단심문관들의 얼굴에 쓴웃음이 감돌았다. 말라키아 역시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사과드리오. 사안이 민감한 것이니만큼, 우리도 신중하게 접할 수밖에 없소이다. 그러니, 우선 당신들이 정말로 오트란토 봉쇄수도원에서 온 것이 맞는지 확인해야겠소. 지루한 절차지만, 꼭 필요하니까.

우리도 하스펠에게서 연락이 없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가 전전긍긍하던 찰나였소. 그래서 자비기사단에 연락을 취했더니, 거기에서도 연락 받은 게 없다는 회신이 돌아왔지.

우리는 당장 후속 조사단을 급파했소. 시간을 따져 보면 요원 여러분이 그곳을 떠난 이후가 되겠군. 엇갈린 셈이오.

그런데 거기엔 파괴된 수도원과 자비기사단 장비, 그리고 수도사들의 옷가지를 제외하고는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소. 딱 하나를 빼고는.

여러분이 정말로 그곳에서 왔다면, 수도원이 파괴되는 것을 보았고 경내를 모두 둘러보았다는 설명이 맞는다면, 그것에 대해서도 답할 수 있어야 하오. 그게 뭐요?”

“수도원 시체안치소 석관 안에 자비기사단 견습 기사가 잠든 듯 누워 있었겠지요. 목에 칼에 베인 흔적이 또렷하고,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흉터는 그다지 크게 나지 않은.”

“그자가 왜 그렇게 된 거요?”

“그 견습 기사는 기적을 쓸 줄 알았습니다. 마지막 순간, 검에 목이 꿰뚫린 그 순간에, 손으로 자기 목의 상처를 치유했습니다. 저와 제 동료 요원이 그를 관에 넣어주었고요. 이 정도라면, 설명되겠습니까?”

“누가 그를 검으로 찔렀소?”

카인은 둘러 말하지 않았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는 검은 그림자에 ‘빙의되어’ 있었고, 저와 제 동료를 죽이려 들었습니다.”

판관 말라키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맞춤법 검사기 안 돌린 버전을 올려서 급하게 수정하였습니다.

※ 오늘의 중세 TMI 는 '자물쇠' 입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자물쇠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은 19세기 중엽에 찾아낸 것으로, 기원전 4,000년 전 아시리아의 것이라고 합니다.

순결의 성기사에 대해 하스펠이 유언처럼 남긴 것도, 하인리히 신부에게 했던 전언 이야기 역시 하지 않았다. 당사자에게 전달했으니, 다른 이들에게는 불필요하다.

라고 문장을 보다 명확히 고쳤습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5/6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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