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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몰락 보고서-6화 (7/47)

제 6화

남자 보는 눈 없는 여자 (1)

오전 9시 30분.

째깍. 째깍. 태엽 시계는 돌아가고, 사각. 사각. 펜은 양피지를 달린다. 기계음은 규칙적이지만 필기 소리는 간헐적이다.

뵘과 봄이 없는 사무실. 카인은 서약서 양식을 베껴 쓰는 중이다. 임무 수행 중 보고 듣고 알게 된 모든 정보에 대해 죽을 때까지 누설하지 않겠다는 맹세문이다.

자필 맹세문과 비밀 취급 인가증, 그리고 보안국 요원임을 뜻하는 인장과 배지를 제출하는 것으로 큰 절차는 끝난다.

법률 문서가 다 그렇듯이 문장 하나가 여섯 줄을 넘어갔다. 관사와 부사와 접속사, 안은문장 이은 문장 겹문장의 대향연은 견디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보안국에도 인쇄 기계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줄기차게 이어졌지만, 버네이스 국장은 와인 제작용 포도 짜는 기계를 들여놓을지언정 인쇄 기계는 못 들여놓겠다고 천명했었다. 당연히 보안 문제 때문이다.

조판을 짠다는 것은 특정 정보를 많이 유통하겠다는 뜻이고, 다량 유통된 정보는 당연히 가치가 떨어진다. 정보의 등급이 구분되어 가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명확해진다면, 가상의 공격자는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버네이스는 ‘은폐란 뭔가를 바닥에 묻어버리는 게 아니라 다른 것과 뒤섞어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럴싸한 말이었지만 중간 관리자들에게는 짜증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실무와 문서 작업을 해야 하는 건 카인과 같은 과장급이니까.

“어휴.”

역시나 카인은 집중하지 못했다. 반절은 그 자신의 심란한 마음 때문에, 나머지 반은 릴리 때문이다.

카인이 글을 쓰고 있을 때, 릴리는 손을 멈추고 카인을 훔쳐보았다.

대놓고 쳐다봤기에 바보가 아닌 이상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카인이 고개를 들면, 이번엔 릴리가 고개를 숙이고 보고서를 써 내려갔다.

가뜩이나 눈도 큰 애가 울상까지 짓고 있으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카인은 결심했다. 주의를 좀 주기로. 자기야 어차피 갈 사람이지만, 릴리는 아니잖은가. 자고로 요원은 어떤 상황에서도 제 할 일을 다 해야 하는 법.

“큼. 잘 돼 가니?”

“네.”

“오 분에 한 문장씩 쓰던데 잘 돼 간다고?”

“과장님은 삼십 초에 한 번씩 멈추셨잖습니까.”

카인은 멍하니 릴리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원망이 가득해 보였다.

“갈 사람이라고 이제 아주 막 나가냐?”

“안 가시면 되잖습니까.”

“방금 그 말 때문에 가기로 결심했다. 네가 아쉽지 내가 아쉽냐?”

“죄송합니다!”

드르륵, 카인은 일어섰다. 그래야 웃는 얼굴을 조금이나마 가릴 테니까. 릴리의 책상 옆에 의자를 끌고 앉았다.

“그래서. 뭐가 문제야? 어디서 막혀?”

“아…” 입을 헤벌리던 릴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정보 분석 보고서 작성 중인데,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타란토 왕국 건입니다.”

제국은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직할령과 황제로부터 대리 위임받은 왕과 귀족들이 다스리는 영지로 나뉜다. 타란토 왕국은 제국의 동남부 지역이며, 카인과 릴리가 작전을 나간 막시 주가 속한 곳이기도 하다.

릴리가 보고 있던 문서는, 타란토 왕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이한 일에 대한 보고였다.

세금.

왕이 자기 영토에서 얼마나 많은 세금을 거두었는지 황제에게 똑바로 보고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타란토 왕 보에몽 1세의 보고는 기이했다.

세금 총액 자체는 5년 치 평균과 비슷했다. 황제에게 당연히 바쳐야 하는 몫도 크게 줄어들지는 않았다. 문제는 세입과 지출 항목이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새 병사 고용과 무기 구매에는 돈을 많이 썼는데, 정작 부대 유지비는 줄였습니다. 징집병은 많이 뽑았는데 훈련도 관리도 안 시킨다는 건, 군대의 질을 스스로 저하하겠다는 선언이지 않습니까.”

“보에몽 1세는 뭐라고 했대? 재무국에서 질의서를 보냈을 것 아냐. 그 수전노들이 이걸 그냥 보고 넘겼을 리가 없어.”

재무국 사람과 만날 때는 팔다리를 의자에 묶어야 한다는 것이 건강상식이다. 단 3분만 이야기해도 치솟는 살의를 느낄 테니까. 저혈압 치료가 필요하다면 5분이면 충분하다. 물론 재무국은 그 와중에도 상담료를 요구하겠지만.

“산적이 너무 많아서 순찰 경비대를 늘려야 했답니다. 질보다도 양을 우선시했다는군요. 교대 근무에 더 많은 인원을 투입하고, 또 더 넓은 지역을 살피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대었습니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정작 타란토의 산적은 많지 않습니다.”

“날강도 기사들 때문이지?”

“네. 괴츠와 같은 이들이 산적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였고, 그 때문에 산적들이 상비군 혹은 기사들의 휘하에 들어가는 일이 빈번합니다.”

괴츠 같은 놈들은 야비하다. 제국과 왕국에서 자신들을 주시한다는 걸 안다. 법을 악용할지언정 불법을 저지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강도에게 돈을 뜯기면, 그건 피해를 받은 것이 된다. 하지만 날강도 기사들은 그렇게 나오지 않았다.

‘닭 깃털 뽑아내는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당신네 연 수입의 절반 정도를 매년 투자하시지.’라는 식이다.

이런 경우 ‘합법적 투자’로 탈바꿈되기에, 제국 쪽에서는 딴지를 걸기가 어렵다.

당연한 말이지만 황제 아래 왕국도 좋아할 리가 없다. 이런 식으로 ‘투자’가 이루어지면, 결국 왕국에서는 세수가 잘 걷히지 않게 되니까. 그런데 보에몽은 정반대였다.

“탄원서를 낸 귀족들 죄다 타란토 왕국 소속이라면서.”

“그랬습니다.”

날강도 기사 놈이 왕국 하나를 쥐고 흔드는 상황이다. 타란토 왕이 황제에 뽑힐 수도, 또 황제를 선출할 수도 있는 권한자인 선제후라는 걸 생각한다면 좀 더 진지한 사안이기도 하다.

하지만 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릴리의 고민은 그것이었다.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혹시, 과장님은…”

“나도 모르겠는데.”

릴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인은 릴리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게 이상해?”

“아,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뭐가 문제냐 그거야.”

“네?” 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꼭 토끼 같았다. “말씀드렸다시피, 왜 타란토 왕이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야.” 카인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카인은 요원이지, 아카데미 스승은 아니었고, 그래서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건 늘 어려운 일이었다.

“타란토 왕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른다, 그건 이해했어. 그러면 다음 질문은 ‘그렇다면 어디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가?’ 겠지. 어디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지 알았다면,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지 알았다면, 너는 분명 그렇게 했을 거잖아. 네가 진짜 막히는 부분은 여기고. 어디에서 답을 찾아야 하나,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거야. 그렇지?”

천천히, 조금 늦게, 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모릅니다.”

“저기. 숫돌, 아니. 릴리.”

의외로, 릴리는 조금 멈칫거렸다. 릴리, 라는 요원명이 어색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네. 과장님.”

“너 설마 ‘내가 뭘 놓치고 있나?’ 생각해서 진도 못 빼고 있던 건 아니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손으로 입을 가리는 걸 보니, 다시 한숨부터 나온다. 릴리는 자기 감정에 너무 솔직하다. 지나칠 정도로, 위험할 정도로. 기사라면 상관 없지만, 요원이라면 결격사유다.

“오 분마다 서류뭉치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대는데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릴리가 주춤거렸다. 목을 끌어당기더니 고개를 돌리고 입을 가렸다. 하지만 작은 손으로는 환한 미소를 완전히 가릴 수가 없었다.

“…저를 봐 주고 계셨던 거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나를 봤으니까.’라는 말은 그냥 삼켜버렸다. 릴리가 시선을 슬쩍 피하며 흘러내린 머리를 연신 귀 옆으로 쓸어내리는 지금은 더 그랬다.

“너 여기 시험 봐서 들어왔잖아. 그 정도면 네 역량은 충분해. 똑똑하다고. 네가 결론을 못 내린 건 단서가 부족해서지 머리가 나빠서가 아냐. 알아들어?”

“네.”

릴리의 입술 사이로 작고 뾰족한 혀가 살짝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사탕이라도 입에 머금은 모습이었다. 카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보 더 모아 봐. 다른 부서 사람들 만나 봐도 좋고, 아니면 인가증 가지고 기록실 찾아가던가.”

“과장님이 가르쳐주십시오.”

별안간 릴리가 카인의 팔을 붙들었다. 억지로 비틀어 뺄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가르쳐주십시오. 알고 싶습니다. 더 배우고 싶습니다.”

“저기. 숫돌아.”

“하루만.” 릴리는 무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단 하루만이라도 안 되겠습니까? 하루가 안 된다면, 반나절만이라도. 반나절이 안 된다면 한 시간만이라도.”

릴리가 마른침을 삼켰다. 볼이 상기되어 있었다. 입술이 살짝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땡. 땡. 땡.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10시를 알리는 소리다. 깜짝 놀란 릴리의 순이 조금 느슨해졌다. 카인은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손을 밀어내었다.

“해 주고 싶어도, 못 해. 기록실은 비밀 인가 취급증 있어야 들어가거든. 그리고 난 지금 내사과에 가야 하고. 취급증하고 보안 서약서, 요원 인장과 배지 반납해야 해.”

릴리가 고개를 숙였다. 어깨라도 털어줄까,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뵘하고 봄한테 물어봐. 잘 알려줄 거야.”

“…그러면.”

“응?”

“내사과에 같이 가는 것만이라도…”

“야, 거기까지 얼마나 된다고.”

릴리는 고개를 들었다. 애써 얼굴을 굳히면서.

“…내사과 가는 길을 알고 싶어졌습니다.”

“너 알잖아.”

“잊어버렸습니다. 기억 안 납니다. 아니, 가본 적도 없습니다. 그게 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얼굴은 뻔뻔했지만 눈에는 물기가 그렁하다.

“알았다. 알았어. 가자. 가.”

* * * * *

제4과는 본관에 있고, 내사과는 별관에 있다. 별관에 가려면 공원을 가로질러야 한다.

원래 카인의 계획은 느긋하게 공원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서약서를 마저 베껴 쓰는 것이었는데, 옆에 릴리가 딱 붙어 있는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다 안 썼는데. 1/4 정도 남았나? 내사과 안에서 마저 쓰지 뭐.’

초여름 날은 화창하다. 공원의 꽃은 화사하고, 정원사들은 부지런히 분재 가위를 들고 돌아다녔다. 공원은 민간에게도 개방된 곳이었기에, 피크닉을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자리를 깔고 와인에 치즈를 즐기는 사람들. 점심값이라도 벌고자 악기 하나 덜렁 들고 그럴싸한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음대 학생들. 벌에 쏘이는 게 두려워 도망 다니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걱정스럽게 보면서도 수다를 그치지 않는 여인네들.

카인과 릴리는 인도를 따라 걸었다. 사람이 꽤 많았기에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고, 그때마다 릴리는 카인 쪽으로 조금씩 붙었다. 손등이 맞부딪히는 수준을 넘어서서 이제는 어깨와 팔을 맞대는 수준까지 되었다.

모르는 척, 카인은 몸을 슬쩍 떼었다. 그때마다 릴리는 굳이 따라와 붙었다.

“서류 가방 제가 들어도 되겠습니까?”

“아니.”

“전 빈손입니다. 과장님은 왼팔에 서류 가방을 끼고 계시고 오른팔에는 지팡이를 짚고 계시지 않습니까. 짐이 많으신 것 같으니,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너 들고 도망가려 그러지?”

농담 삼아 한 말이었는데 릴리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 그, 그,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전 도둑이 아닙니다.”

“아. 그러면 가방의 위치를 잠깐 다른 곳으로 옮겨 놓을 생각이었니?”

답이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럴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카인은 히죽 웃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제2과 녀석들, 그리고 그들의 수장인 고드프리 요원이 있었다. 호엔부르크 공작가의 장남이다 했다.

“어이고. 우리 카인 과장님. 어떤 일로 이런 귀한 곳에 행차하셨을까? 공기가 벌써 '평민'다워지는군.”

2과 녀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릴리의 몸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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