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화
희망퇴직 (完)
릴리가 고개를 들었다.
“네, 선배님.”
“너도 알겠지만, 제국 보안국은 기수제잖아. 바깥에서 신분이 뭐였든 간에 여기서는 싹 다 무시된다고. 물론 굳이 숨길 일은 아니지만, 그걸로 누구를 무시하거나 무시당하거나 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돼.
나하고 봄 같은 경우만 해도 백작가문 둘째, 셋째지만 자작가 요원을 봐도 무시하는 일도 없고 공작가 자제 앞에서도 굽히는 일 없어. 보안국은 무조건 아카데미 졸업 후 입사시험 봐서 들어오고, 들어온 순서대로 기수가 정해지니까.”
“네. 저도 그렇게 들어왔습니다.”
아무리 선제후의 딸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다. 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카데미에 들어올 수 있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시험을 본 다음 학점과 결과를 통해 공무원이 될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귀족들은 보안국을 멋대로 삼킬 수 없었다. 각지에서 온 귀족들이 죄다 섞여 있었기에, 역으로 이렇다 할 파벌을 형성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숱한 공작에도 보안국이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하는 근간이기도 하다. 심지어 버네이스 국장은 이름도 없는 남작가문 출신이다.
“그렇지만 말이야. 성장 배경이라는 걸 완전히 무시할 수는 또 없단 말이지. 오해는 하지 마! 제국은 넓고, 생활 방식도 다 다르거든. 그러니까 어떤 점에서는 서로서로 이해하기가 참 힘들어.”
“정말 힘들지.” 뵘과 봄이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 역시 조심스럽게 맥주잔을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카인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
‘이 새끼들이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묻고 싶은 말은, 검술이라 하면 제국 제일, 더 나아가서는 세계 제일이라 불리는 백혈기사단의 일원에게 감히 여쭙는 거야. 검술적 측면에서 봤을 때, 우리 카인 과장님의 실력. 어느 정도인 것 같으냐?”
“모릅니다.”
카인마저도 릴리를 바라보았다. 릴리는, 볼이 발그레하기는 했지만, 더없이 진지했다.
“모른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뵘이 되물었다. “괴츠 잡는 거 보지 않았어?”
“봤습니다만, 과장님께서는 검이 아니라 지팡이를 쓰셨습니다. 지팡이로도 펼치는 검술이 분명 있기는 하지만, 그 활용과 응용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과장님의 검술에 대해서는 본 바가 없어 말할 수가 없습니다.”
뵘과 봄이 입을 떡 벌렸다.
“진짜 지팡이로 잡았어요? 아니, 어떻게?”
릴리의 눈이 반짝거렸다.
“욕을 퍼부으셨습니다. 이렇게요.”
릴리는 정말 순진무구하게도, 뵘과 봄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카인이 모르는 척하며 손가락을 접어주었다.
“그거 아무 데서나 하는 거 아니야. 너 그거 무슨 뜻인지 알아?”
“잘 모릅니다.”
“어. 그래.”
놀랍지도 않았다. 백혈기사단에서 딸을 참으로 곱게 키웠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뵘과 봄이 떨떠름해했지만, 그들 역시 같은 의견인 듯싶었다.
“그래서. 어…왜 욕을 한 것 같아?”
“근육의 움직임을 읽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만.”
세 남자의 시선이 엇갈렸다.
“오. 이유를 아네?”
“네.” 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괴츠를 일부러 흥분과 긴장에 빠트려서, 그로 하여금 공격 자세를 취하게 하셨습니다. 괴츠는 무게 중심을 조금 뒤쪽에 두었고, 오른팔의 검은 살짝 느슨하게 잡았지만, 왼쪽으로 허리를 살짝 틀었었습니다.”
카인은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역시 호랑이가 개를 낳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그녀가 본 것을 그도 보았다. 그 자신이 유도한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야?”
“괴츠는 오른팔의 검을 일부러 크게 흔들었습니다. 시선을 붙들기 위해서였겠지만, 진짜 공격은 그 뒤에 가해지는 왼 주먹 스트레이트 펀치입니다. 무게 중심을 뒤로하고, 왼쪽으로 허리를 튼 것도 모두 주먹에 체중을 담기 위해서였습니다.”
“맞게 봤네.” 카인이 확인해주었다. 릴리의 입가가 달싹거렸다. 미소가 자꾸만 커졌다. 카인은 조금 겸연쩍었다.
“그래서. 음. 검술은 평가를 못 한다고 하니. 내 지팡이 술은 어땠던 것 같아? 혹시 기사단에서 지팡이도 다루나?”
“이론과 상대법 정도만 다루고 깊게 익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쓸 줄은 압니다.”
“지팡이술은 동쪽 공화국에서나 쓰는 기술인데 그것도 다 배운다고? 명가는 명가네. 그래서. 평가는?”
릴리 요원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아름다웠어요. 오르가즘이 느껴졌습니다.”
뵘은 혀를 씹었고 봄은 맥주를 조금 뿜었다. 카인은 이를 악물었다. 반사적인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야. 야. 너, 너, 그거 무슨, 무슨 말인지 알, 알고 쓰는…”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릴리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백과사전이라도 읊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교합이 절정에 다다르면…”
“마, 막내야! 고기, 고기 먹어! 고기! 아니 애가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빵, 빵 먹어 빵!”
봄이 억지로 길쭉한 빵을 릴리의 입에 욱여넣었다.
“우그웁?” 놀란 다람쥐처럼, 릴리는 입안의 빵부터 우물거렸다. 괴상해진 분위기에 술이 확 깨었다.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웠어.”
카인은 이마를 짚었다. 빵을 꿀꺽, 삼킨 릴리가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아버님의 장서관에서 읽었습니다. 못 들어가게 하시기에 오기가 생겨서 몰래 들어가서 읽었는데, 안이 넓었습니다.”
“…그. 그랬구나.”
릴리가 머뭇거렸다.
“저, 제가 무슨…혹시 실수라도…”
“아냐. 아냐. 괜찮아.” 카인이 릴리의 머리에 손을 얹으려다, 애매하게 거두었다. 어차피 떠날 사람인데.
“음. 뭐. 보편적으로 쓰는 말은 아니지만, 보안국에서 지내다 보면 자연스러워질 거야. 뵘하고 봄한테 잘 배우면 괜찮겠지. 안 그래?”
“당연하죠.” 뵘이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우리 막내인데, 우리가 안 챙기면 누가 챙깁니까? 안 그래요, 형님?” 봄이 히죽거렸다. 카인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잘 부탁한다. 진짜.”
묘한 기운에 뵘과 봄이 눈을 마주쳤다. 어색한 웃음이 이어졌다.
“아우. 우리 형님 새삼스럽게 왜 그러실까. 당연히 형님이 앞장서시면, 저희도 따라가죠. 아니면 저희가 길을 뚫어 드릴까요? 우리 형님 앞으로 승진길만…”
“나 그만둔다.”
릴리가 입을 틀어막았다.
“네?!”
뵘과 봄이 릴리를 바라보았다. ‘네’ 라니. 릴리의 경악은 그치지 않았다.
“왜, 왜요?”
이제는 요, 자까지 쓰다니. 항상 다나까만 쓰던 애가. 봄은 목을 가다듬었다.
“이번엔 어디로 가시는데요? 일 년 넘어요? 아니면 삼 년? 북부는 아닐 거고.”
“동부겠지.” 뵘이 이어받았다. “그 장사꾼들 요새 꼬락서니가 좀 이상해. 돈으로 군대를 사 모을 거란 소리도 있고. 휴전 깨려고 한다는 소문도 돌고…”
릴리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다. 다행히 뵘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형님이 오늘 좀 짓궂네. 놀랬지? 보안국 절차야. 외국으로 일 년 이상 파견 나가면 퇴직계를 내거든. 그래야 만에 하나, 보안국 요원 명단이 누출되었을 때 잡히지 않을 수가 있으니까. 우리도 두어 번 썼어. 형님도 전에 쓰셨고. 너도 나중에 파견 나가면 쓸걸?”
“제법 괜찮아.” 봄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퇴직금 중간정산 나쁘지 않거든. 서류상으로만 떠나는 거고 몸은 계속 보안국 소속이라서 호봉이나 경력도 다 따라가. 그리고 어디 가는지는 동료한테도 안 밝혀. 국장하고 본인만 알아…”
릴리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그래서 카인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자리에서 말하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하면서.
“집에 간다고. 고향 농장으로.”
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카인은 미약하게 웃었다. 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저기. 형님?”
“형님은 무슨. 이제 밖에 나가면 난 그냥 자유농 평민이야. 과수원집 농장 첫째 아들. 밖에서 보면, 만약에 미르덴부르크 가면, 도련님이라고 부를게. 우리 막내는…난 쳐다도 못 보겠네.”
“형님! 농담이 좀 심하신 거 아니에요? 이러면 우리 서운해지는데? 왜 이래요, 진짜. 아니 대체 어디를 가길래 그래? 동부 깊숙이 들어가요? 죽을 각오 해야 하는 일이야?”
카인은 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뵘과 봄을 바라보았다. 릴리가 흑, 하며 입을 틀어막고 뛰쳐나갔다. “아잇, 진짜. 야, 야, 막내야!” 뵘이 뒤따라 나갔다.
“막내 잘 부탁한다. 봄.”
“형님. 진짜 이건 아닌 것 같은데요. 고향 간다고요?”
“그래. 그만두련다.”
“말도 안 돼. 제국 보안국 4과장 카인이 감나무 가지나 꺾는다고요? 형님은 농사꾼 체질 아니에요! 머리 안 돌아가는 나도 아는데 형님이 그걸 모를 리가 없잖아!”
“우리 집 감나무 안 키운다.”
“그러면?”
“사과나무 키워. 당도도 높아. 특산품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먹고 산다.”
“형님.” 봄이 맥주잔을 만지작거렸다.
“형님. 진짜, 남자 대 남자로. 솔직해집시다. 혹시 무슨 중죄라도 저지른 거면, 괜찮아요. 도와줄게. 예? 사비를 털어서라도 도와 드릴게! 우리 솔직히 보안국 일하면서 온갖 꼴 다 보고 살잖아. 인간의 밑바닥 보기에 보안국만 한 곳도 없잖아요?”
“없긴 하지.”
“사람이니까 저지를 수 있고 사람이기에 저지를 수 있는 일에 대해선 우리가 전문가 아뇨.”
“그렇지.”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거 알잖아요. 그런 거에 실망하고 마음 상할 나이도 연차도 아니잖아. 알 거 다 알고 볼 거 다 보고 이제 익숙해 질 만한 짬 아닙니까.”
“알지. 상황 따라 얼마나 사람이 맛이 가는지 알지.”
“그러니까 그 빌어먹을 상황 이야기 좀 해 봐요. 무슨 일이에요. 진짜로 돕고 싶어서 그래. 더럽고 치사해도 가족이잖아. 가족보다도 더 끈끈한 가족이잖아! 형님이 한 말 아니에요, 그거!”
카인은 말을 하지 못했다. 봄의 목소리가 조금씩 젖어들었다.
“에이 씨, 진짜! 고개 숙이고 그럴 겁니까, 형님? 속상하게 왜 그래요! 고개는 숙이지 마요!”
“결정했어.”
“아이 진짜…”
봄이 거칠게 잔을 내려놓았다. 눈가를 슬쩍 닦으며 문밖으로 나갔다.
카인은 다 식어 빠진 요리를 내려다보았다. 고기 조각을 잘라내어 씹었다.
식어 빠진 탓인지 맛이 없었다. 그런데도 카인은 쩝쩝거리며 고기를 씹었다. 혼자 맥주잔을 채워 마셨다.
허기도 목마름도 채워지지 않았다.
* * * * *
퇴직 절차는 순서대로 이루어졌다.
면담. 상담. 최종 확인. 절차에 대한 안내. 남은 퇴직금 정산. 예비 퇴직자 교육 안내.
뵘과 봄은 말을 잃었다. 릴리는 겉으로 봐서는 멀쩡해 보였지만, 눈이 항상 충혈되어 있었다.
남은 일은 건조한 것들뿐이다. 카인은 뵘과 봄에게 과장의 업무에 대해, 보고서에 대해 인수인계를 해 주었다. 둘 다 임시 과장직을 맡기 거부했지만, 그렇다고 막내에게 임시 과장을 맡길 수도 없는 노릇.
그렇기에 사무실 모습은 꽤 기묘했다. 뵘과 봄은 카인을 애써 무시했고, 카인은 그 무시를 무시했다. 그 와중에도 릴리는 카인의 말을 한마디도 빠짐없이 받아 적었다.
“너 때문에 내가 늙는다. 늙어.”
버네이스 국장은 이제 화도 내지 않았다. 카인은 묵묵히 힐난을 받아들였다.
“인수인계는 다 했어?”
“일단 가르쳐야 할 건 다 했습니다. 새 과장은 언제 옵니까?”
“마음 굳혔냐?”
“네.”
버네이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가로 다가간 다음 후,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괴츠 아직 안 풀려났다.”
“법무대신이 난리 안 칩니까?”
“내가 막았어. 공개회의 기억은 나냐? 너 세워놓고 잡아먹으려고 했던 그 회의.”
기억나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으니까. 카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네 과잉진압 때문에 괴츠 그놈의 생사가 불투명해졌고, 보안국은 관련자를 문책하여 공식 기록으로 남기고 놈이 ‘건강해질’ 때까지 ‘보안국 책임하에’ 치료하기로 하였음. 이렇게 써서 보냈다. 그 놈 지금 지하 감방에 붙들려 있어. 대가리 혹 가라앉기 전까진 못 나간다.”
“다 가라앉으면요?”
“혹 하나 더 낼 거다.”
버네이스는 조금도 농담하는 것 같지 않았다.
“뭘 그렇게 보냐.”
“의외여서요. 이빨 다 빠지신 줄 알았는데.”
“이 없으면 잇몸이다.” 버네이스가 책상 아래에서 술병을 꺼내 병나발을 불었다.
“그 새끼가 대체 뭐라고 법무대신이 감싸드는지 원. 약점이라도 잡힌 것인지…”
카인의 머리를 어지럽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괴츠의 해악은 둘째 치더라도 고작 사병 100명도 안 되는 기사 놈이다.
그런 놈을 왜 법무대신이 풀어줘라 마라 하고 있단 말인가?
‘알 게 뭐야. 그만두면 끝인데.’ 카인은 머리를 내저었다.
“퇴직절차. 어디까지 했냐?”
“…비밀 취급 인가증 내일 내야 합니다.”
“너 그거 내면 요원으로 생명 끝나. 알지?” 버네이스가 한 모금을 다시 들이켰다.
“임마. 젊을 땐 그럴 수 있어. 그냥 확 떠나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고. 차라리 휴직계를 내. 휴직계를. 인가증 제출 전까진 퇴직 무효화 할 수 있는 거 알지?”
“압니다.”
릴리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비밀 취급 인가증 제출 여부가 위장 퇴직과 진짜 퇴직을 가르는 기준이다.
“진술서 더 쓸 거 없지?”
“네.”
“퇴근해.”
“예.”
카인이 일어섰다. 국장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뒤편에서 침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새끼야, 너한테선 퇴직 선물 하나 받고 싶었다.”
카인은 별말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다음 날, 카인은 내사과에 출두하지도, 비밀 취급 인가증 제출도 못 했다.
빠바바빠바바밤, 하는 황실 인물 방문 나팔 소리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