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일어나기 싫다.’
레슬리는 꼬물거리며 이불에 몸을 더 파묻었다. 폭신한 침구들이 그녀를 폭 안아 주자 절로 기분이 좋아 웃음이 흘렀다. 여기서 일어나면 후작가로 되돌아가야 했다. 싫다. 정말, 싫었다.
돌아가면 르아는 분명 자신을 보자마자 소리를 지를 것이고, 엘리는 제가 어디서 힘에 관한 이야기를 흘리지 않았나 캐물을 것이다. 후작과 후작 부인 역시 자신을 귀찮게 하겠지. 생각만 해도 귀찮고 골치가 아파 와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계속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하녀 한 명이 레슬리를 깨우러 왔다가 먼저 일어나 있는 그녀를 보며 방긋 웃었다.
“일어나셨군요. 여기 세숫물을 가져왔어요.”
그러더니 재빠르게 다가와 세숫물과 뽀송뽀송한 수건을 건넸다. 세수가 끝나자 레슬리를 거울 앞에 앉히더니 정성스레 그녀의 은발을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 받는 대접에 레슬리는 눈을 크게 떴다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갈색 곱슬머리를 한 하녀는 거울을 통해 시선이 맞을 때마다 주근깨가 박힌 뺨을 움직이며 웃어 주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레슬리는 웃음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때리거나 고함을 지르는 것은 익숙했으나 이렇게 웃어 주는 건 익숙지 못한 탓이었다. 레슬리가 계속 부끄러워하자 하녀는 대화를 해 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공작님이 밑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셀바토르 공작님이요.”
하긴 어제 제대로 이야기의 끝을 내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녀는 긴 전신 거울을 통해 레슬리와 시선을 맞추더니 방긋 환한 미소를 띠웠다.
“그리고 오늘 아침은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레슬리 아가씨를 위해서 바타 요리사님이 온 힘을 기울여서 아침을 준비하셨거든요.”
“아…… 네.”
레슬리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손님이 왔다고 신경 써 주는 걸까? 하긴, 어제 음식도 굉장히 맛있었지.
어제 먹은 음식을 생각하자 배에서 꼬륵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는 것 같아서 레슬리는 슬쩍 배를 살살 문질렀다. 어제 공작 앞에서 갑자기 꼬륵거려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레슬리 아가씨, 리본은 어떤 색으로 하시겠어요?”
레슬리가 잠시 어제 일을 떠올리며 다시 얼굴을 붉히고 있는데, 하녀가 작은 상자에서 몇 개의 리본을 꺼내 그녀 앞에 보여 줬다. 색색의 장식이 달린 아름다운 리본들을 멍하니 보고 있던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왜 자신에게 이런 걸 보여 주는 걸까? 레슬리가 머뭇거리자, 하녀가 다시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아무거나 어떤 거든 마음에 드는 걸 고르셔도 괜찮아요. 아니면 이걸 다 해도 되고요.”
이걸 머리에 주렁주렁 단 자신을 생각하자 작게 웃음이 터졌다.
레슬리는 하녀와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작은 장식도 가져 본 적이 없으니 어느 것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릴지 전혀 몰랐다.
몇 개의 리본을 대어 보고, 레슬리와 하녀는 간신히 두 개로 최종 선택지를 좁힐 수 있었다. 하나는 푸른 실크로 만든 풍성해 보이는 리본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녹색으로 황금색 무늬가 그려진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레슬리는 진녹색 리본을 집어 들었다.
“푸른색이 좀 더 어울리시는 것 같은데요.”
하녀가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슬리의 은발에는 푸른색이 도는 풍성한 리본이 더 잘 어울렸다. 그런데도 레슬리는 진녹색 리본을 손에 꼭 쥐었다.
“그래도 이걸로 할게요.”
레슬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은 하녀가 다시 머리치장을 돕기 시작했다. 하녀가 반묶음으로 머리를 정리하고 능숙하게 리본으로 머리를 꾸미는 동안, 레슬리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푸른 리본도 예쁘긴 했다. 하지만 진녹색 리본이 셀바토르 공작가 특유의 암녹빛 눈동자를 떠올리게 하는 색이라 그걸 택했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웠다.
머리 정리까지 끝나자 하녀는 그녀를 어제저녁 식사를 즐겼던 1층 식당으로 안내했다. 길고 긴 식탁 중앙에 황금빛 로브를 입은 공작이 앉아 뭔가를 계속 보고 있었다.
“아, 레슬리 양.”
레슬리가 도착한 걸 발견하자, 공작은 자신이 보고 있던 서류들과 함께 깃펜을 집사에게 건네주며 그녀를 보고 웃어 보였다.
“어서 와요. 잠은 잘 잤나요?”
“네, 잠자리도 편안했고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어요. 공작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 이 리본도 감사드려요!”
레슬리가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인사하다, 갑작스레 떠오른 리본에 대한 감사를 덧붙이며 동그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자 뒤에서 작은 한숨이 흘렀다. 레슬리가 슬쩍 뒤를 바라보자 식사 시중을 위해 서 있던 사용인들이 바쁜 듯 잽싸게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눈만은 반짝이며 작게 키득거리고 있었다.
자신을 여기까지 안내해 준 하녀가 공작과 가장 가까운 자리의 의자를 빼 주었다.
“그거 다행이네.”
공작 역시 은은한 미소를 흘리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레슬리가 높은 의자에 앉자마자 바로 식사가 식탁 위에 차려지기 시작했고, 레슬리는 아까 하녀가 말했던 것이 정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보는 맛있는 음식들이 줄줄이 올라올 때마다 레슬리는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거기다 레슬리의 취향에 맞춘 것인지, 알록달록한 디저트류가 평소보다 더 올라와 있었다.
“감사합니다.”
음식을 보며 눈을 빛내던 레슬리는 식당 문 근처에서 자신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던 주방 식구들과 눈이 마주쳤다.
“잘 먹을게요.”
레슬리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마자 다들 얼굴에 떠 있는 미소가 짙어졌다. 특히, 요리사 바타의 광대는 천장까지 뚫을 듯 위로 솟구쳤다.
“우리 집에선 식사 예절 같은 건 신경을 쓰지 않으니 좋아하는 음식부터 마음껏 먹어요, 레슬리 양.”
“저어……. 베스라온 님은요?”
레슬리는 공작의 말에 예의도 없이 튀어나가려는 팔을 간신히 억눌렀다. 아침 식사 시간인데도 이 넓은 식당엔 셀바토르 공작과 레슬리 단둘뿐이었다. 듣기로는 이 공작가의 아들은 두 명, 베스라온과 루엔티라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공작님의 남편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놈은 아침 훈련이 끝나고 자기가 알아서 먹겠지. 그러니 레슬리 양, 먼저 들도록 해요.”
공작가의 나머지 두 명이 왜 안 보이는지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결국 레슬리는 형형색색의 디저트에 눈을 돌렸다.
후작 부인이나 엘리는 종종 날씨가 좋을 때면 후작가 정원에서 작은 티 파티를 열었다. 레이스가 달린 새하얀 테이블보에 색만으로도 어여쁜 다과들을 올려 두고 향긋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곤 했다.
그걸 언제나 다락방에서 몰래 바라만 봤었는데.
지금 눈앞에는 그것보다 10배, 아니 100배는 더 예쁘고 맛있어 보이는 디저트가 놓여 있었다.
레슬리는 살짝 손을 뻗어 작은 장미 모양 과자를 입에 물었다. 순식간에 장미가 입에 녹아 사라지고 진한 단맛이 퍼져,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거렸다.
그런 레슬리의 모습을 만년 귀여움 부족인 사용인들은 벽에 찰싹 붙어서라도 더 구경하고 싶어 했지만, 공작이 그들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자마자 바로 제자리로 흩어졌다. 일단 살아남는 게 먼저였으니까.
“레슬리 양.”
과일이 듬뿍 들어간 젤리를 집어 제 접시로 조심스레 옮기던 레슬리가 시선을 옮겨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지.”
공작은 소스가 얹어진 생선찜을 작게 잘라 우아하게 입에 넣으며 대화를 시작했다. 그 한마디에 방금까지 새로운 식감에 눈을 반짝이며 즐거워하던 어린아이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차갑고 무기질적인 눈빛을 가진 사람만 남아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 눈을 보고 공작은 작게 웃었다.
“레슬리 양이라면 총명해서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레슬리 양을 내 양딸로 들일 생각이야.”
그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내 딸’이라고 베스라온에게 말했으니, 공작의 말은 놀라울 것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나도 필요할 때 레슬리 양을 이용할 텐데.”
차라리 그게 편하지. 레슬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공작을 바라보았고, 공작 역시 그 속뜻을 알아들었는지 작게 웃었다.
“귀족 집안의 아이를 다른 귀족이 입양하는 일은 쉽지 않죠. 특히, 스페라도 가문처럼 고위 귀족의 아이는 더더욱 힘들고. 주로 귀족 간의 입양은 후계가 없어 친척 간에 이뤄지거나, 아니면 높은 가문에서 모종의 이유로 몰락 가문의 아이를 데려오는 것을 뜻하니까.”
공작은 살짝 웃으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귀족 간의 입양이 힘들다고 이야기했는데도, 레슬리는 한없이 담담한 얼굴로 바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공작님은 하실 수 있으시죠.”
공작은 직접 주전자를 들어 레슬리 앞에 놓인 물컵에 물을 가득 따라 주며 그녀의 말에 답했다.
“그래. 나는 할 수 있단다, 레슬리 양. 스페라도보다 작위가 높은 몇 안 되는 가문이 우리 셀바토르 공작가고, 나는 셀바토르 가주니까.”
레슬리는 공작이 직접 따라 주는 물이 점점 물컵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적당한 선까지 물을 따른 공작은 웃으며 은제 주전자를 자신의 옆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시간은 필요해. 기본적인 서류도 서류지만, 내가 레슬리 양을 입양하고 싶다고 하면 분명 그걸 의아하게 여긴 황실에서 이것저것 캐물을 게 뻔하고, 다른 귀족들마저 은근히 내 발목을 잡겠지.”
내가 좀 적이 많거든. 귀찮게도 내가 뭐만 하려고 하면 일단 반대부터 하고 본다니까. 공작은 짧게 투덜거리더니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대의 부모, 스페라도 후작 부부의 동의야. 친부모가 어엿하게 살아 있는데 그 동의도 없이 내가 레슬리 양을 데려올 수는 없는 거니까.”
“부모…….”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스페라도 후작 부부는 자신을 엘리를 위해 낳은 데다가, 끝에는 직접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었다. 절벽에서 떨어진 자신을 구출한 것도 반년 뒤 있을 의식을 위해서겠지.
‘그런 걸 친부모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친부모라 해도 꼭 그들의 허락이 필요할까. 레슬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가 조심스레 공작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럼 제가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그 대답에 공작은 식탁을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리더니 곧 답을 내놨다.
“한 달 정도 걸리겠군.”
“한 달이나…….”
레슬리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시간에 푹 고개가 처지는 걸 느꼈다. 이곳에 한 달 후에나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걸까.
‘그냥 지금 떼를 써서 안 가겠다고 하면 안 되나?’
아침에 간신히 접었던 마음이 불쑥 솟아올랐다. 자꾸만 여기 남아 있고 싶다고, 스페라도 후작가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 내가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거지. 냉정히 따지자면 자신이 지금 이 저택에 머무르게 되면 스페라도 후작가와 셀바토르 공작가에 분란만 가져올 것이다.
거기다 한 달. 분명 셀바토르 공작은 황실과 다른 귀족들이 자신을 걸고넘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 모든 걸 처리하는 데 한 달이면 굉장히 빠른 시간이었다. 아무리 셀바토르 공작이라 해도 자신을 위해 무리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 그러니까 이 이상을 요구하면 안 돼.’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레슬리는 공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셀바토르 공작은 그녀를 보며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레슬리 양, 그대와 나를 제외하고 그 힘에 대해 아는 사람이 더 있나? 특히, 스페라도 후작가 중에 말이야.”
“엘리가 알아요.”
“엘리라면…… 엘리 데아른 스페라도 말이로구나. 그녀 외에 다른 사람은?”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혹여나 후작 부부가 자신에게 관심을 둘까, 자신에게 ‘사랑하는 딸’이라 부를까, 그것이 너무도 지독하게 싫어서 레슬리는 힘을 숨겼다. 엘리는 같은 힘을 가졌기 때문에 끝까지 숨길 수 없으니 오히려 제 쪽에서 먼저 보여 준 것이었지만.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다. 엘리는 이제 레슬리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필사적으로 숨길 것이다.
“아니, 아무도 없어요.”
레슬리의 대답에 공작의 고개와 시선이 살짝 옆으로 기울더니 곧 암녹빛 눈동자가 레슬리에게 닿았다.
“그 엘리 양은 네 비밀을 지킬 수 있을까?”
“후작 부부의 관심이 저에게 오는 걸 원치 않을 테니,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할 거예요.”
흐음. 다시 식탁을 톡톡 두드리던 셀바토르 공작은 손에 들고 있던 포크마저 놓고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레슬리 양이 자신의 가치를 더 키우지 않길 원해.”
무슨 소리인 걸까?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귀여운지 공작은 작게 웃음을 흘리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레슬리 양이 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레슬리 양을 놓아주려 하지 않겠지. 거기다 더 큰 것이 너를 노릴 수도 있어. 예를 들자면…… 그래, 커다란 뱀일지도 모르겠군. 머리가 두 개 달린 커다란 뱀.”
“머리가 두 개 달린 커다란 뱀…….”
황실이다.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르카디우스 황실의 문양은 해와 달을 입에 물고 있는 거대한 뱀이었다. 초대 황제를 도와 르카디우스 건국을 도왔다는 머리 두 개 달린 뱀은 그대로 황실의 문양이 되었다.
“다른 뱀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그 뱀은 욕심이 좀 많거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레슬리 양이라면 잘 이해했으리라 믿어.”
“네, 알겠습니다.”
레슬리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검지와 중지를 펴 보였다.
“좋아. 내가 레슬리 양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이렇게 두 가지야. 첫째, 그 힘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말 것. 둘째, 한 달을 다치지 말고 그 후작가에서 버틸 것. 힘은 최대한 아껴 두도록 해. 뭔가 낌새가 안 좋다 싶으면 셀바토르 공작가로 연락을 넣어. 내가 가지 못한다면 아들놈들을 보내 주지.”
가면 밑에서 보이는 셀바토르 공작의 암녹색 눈이 살짝 휘는 걸 보며 레슬리도 공작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럼 공작님, 이번엔 제 쪽에서 질문을 드릴게요. 앞으로 제가 ‘레슬리 셀바토르’가 되어서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세요.”
레슬리 셀바토르. 잠시 그 이름을 말했을 뿐인데, 뭔가 마음 한편이 간질거려 레슬리는 괜스레 두 손을 꼭 쥐었다. 혹시 이 집에 들어와 레슬리 셀바토르가 되면 축복의 이름도 지어 주지 않을까. 작은 기대감이 차올랐다.
“으음. 미안하지만, 레슬리 양. 그건 알려 주기 조금 어렵겠어.”
공작이 드물게 정말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레슬리 셀바토르’가 되어 이 저택에 오는 날 알려 주도록 하지. 레슬리 양이라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 그 일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르다니. 조금 불공평할 수도 있겠지만, 레슬리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공작이 응접실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머나, 우리 집에 쥐가 있나 보네. 고마워요, 스페라도 양.’
쥐가 있는 상황에서 기밀 이야기를 한다는 건 위험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다 퍼뜩 든 생각에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혹시 스페라도 후작이 내가 여기에 왔다는 걸 알면 어떻게 하지?’
거기다 힘까지 써 보였다. 레슬리가 셀바토르 공작가를 방문한 데다가 힘까지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 분명 스페라도 후작은 자신이 저택으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방에 가둘 것이다.
홀로 방 안에 갇혀 울던 안 좋은 기억이 자꾸만 스멀스멀 올라올 때, 담담한 공작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렴, 레슬리 양.”
시선을 맞추자 다시 웃어 준다. 처음에 봤을 땐, 늪지대가 생각날 정도로 어두워 보였던 암녹색 눈동자가 오늘 보니 더 밝고 어여뻐 보였다.
“내가 있잖니?”
분명 자기 생각을 모를 텐데도 정확히 짚어 주는 공작의 말에 레슬리는 걱정이 단번에 옅어지는 걸 느꼈다.
***
셀바토르 공작가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어디서나 볼 법한 작은 갈색 마차가 빠르게 공작저를 벗어나 신전으로 향했다. 잠시 복도 창가에 서서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던 셀바토르 공작은 제 첫째 아들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베스라온, 이제 훈련이 끝난 거니? 아침 훈련치고는 생각보다 길구나.”
땀으로 젖은 베스라온이 그 말을 듣고 시선을 피했다. 본디 아침 훈련은 새벽에 시작해 아침 식사 전에 끝나는 것이었지만, 오늘따라 베스라온이 조금 더를 외치며 질질 끈 탓에 평소의 식사 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훈련을 종료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공작은 잘 알고 있었다.
“저는 그렇게 작은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베스라온이 드물게 얼굴을 붉히며 땀범벅이 된 짧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하긴, 그렇겠지. 베스라온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컸던 탓에 레슬리는 베스라온의 허리에도 닿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다 언제나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람들이나 기사단 같은 거친 사람들 사이에서만 지냈으니, 레슬리같이 작은 아이에게 면역력이 없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친해져야지. 곧 네 동생이 될 건데.”
후. 거기까지 말한 공작이 아쉽다는 듯 작은 한숨을 흘렸다.
“사이도 엔티도 소개해 줬으면 좋았으련만, 다들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안타깝네.”
자신의 남편인 사이레인과 둘째 아들인 루엔티가 자리에 없는 게 이렇게 아쉬운 결과를 낳을지는 몰랐다. 두 사람은 현재 수도 공작저를 비울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해 공작령의 일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분명 사이라면 엄청 좋아했을 텐데. 자신이 첫째를 임신했을 때 무조건 딸이라며, 자신이 그런 꿈을 꿨다며 ‘엘리자베스’라는 어여쁜 이름까지 지어 놓고 저택 한 층을 통째로 딸을 위한 공간으로 꾸며 놨던 귀여운 남편이었다. 결과물은 저거였지만.
그랬던 남편이니 레슬리를 보면 좋아할 것이다. 단번에 저택 사용인들의 마음도 잡지 않았던가. 너무 좋아서 눈물도 흘릴지도 모르지. 은근히 감수성이 풍부한 제 남편을 떠올리며 셀바토르 공작은 작게 웃음 지었다.
“돌아와서 말하면 되지요.”
베스라온의 말에 공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다시 한숨을 흘렸다. 그러더니 뭔가가 떠오른 듯 작게 창가를 톡톡 치다가 창가에서 시선을 떼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베스라온, 집 안에 쥐가 있는 모양이더구나. 스페라도 후작이 내가 고아원에 사람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공작은 한쪽 입꼬리를 뒤틀며 웃어 보였다. 분명 스페라도 후작은 이것으로 자신의 약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어디서 감히.’
약간의 분노가 일렁였지만, 곧 잠잠해졌다. 생각해 보니 그자 덕분에 레슬리 양을 만날 수 있었다. 제대로 역효과가 난 것이다. 스페라도 후작은 꿈에서도 모르고 있겠지. 자신이 무시하던 딸이 얼마나 어여쁜지를, 얼마나 강한지를. 그리고 그 작은 머릿속에서 어떤 일을 계획하는지 하나도 모른 채 오늘도 편히 지내고 있을 것이다.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
아까까지만 해도 얼굴을 붉히던 베스라온은 쥐 이야기를 듣자마자 빠르게 머릿속으로 범인은 물색하고 있었다.
“그래, 부탁하마.”
공작은 옅게 웃으며 집무실로 돌아갔다.
베스라온이 집 안에 숨어든 쥐를 찾기 시작한 그때, 레슬리는 신전으로 먼저 간 후 신전 마차로 갈아타고 스페라도 저택으로 돌아왔다. 스페라도 후작가의 사람들은 이미 마부를 통해 그녀가 신전에서 밤샘 기도 후 돌아온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후작가를 들어서자마자 맨 처음 자신과 부딪친 엘리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너 어딜 다녀오는 거야? 어딜 다녀오는 길이냐고.”
“밤샘 기도.”
짤막하게 대답하고 그 옆을 스쳐 지나가는데 엘리가 제 팔을 덥석 잡았다. 언제나 반짝임으로 가득 차 있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분노와 의구심으로 탁하게 변질되어 있었다.
“거짓말하지 마. 네가 밤샘 기도를 올리고 왔다고? 도대체 뭐에 대해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를 올렸는데. 말해.”
잠시 그 탁해진 눈동자를 바라보던 레슬리는 탁 소리 나게 그녀의 팔을 쳐 내고 손목을 문질렀다. 어찌나 강하게 잡았는지 벌써 손목에 붉은 손자국이 나 있었다.
“알아서 뭐 하게? 그리고 굳이 내가 너에게 말해 줄 이유가 있을까? 나는 네 일 따위 하나도 궁금하지 않으니까, 너도 그렇게 해.”
레슬리의 대답에 엘리의 어여쁜 얼굴이 분노로 더 일그러졌다. 흉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덤덤하게 엘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빛에 엘리는 더 화가 치솟는지 까득, 이빨까지 갈기 시작했다.
“신전에 사람을 보내면 다 들통날 일이야. 말해!”
엘리의 추궁에 레슬리는 작게 한숨 쉬었다. 이 이상 상대할 가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사 엘리가 정말로 신전에 사람을 보내도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셀바토르 공작은 레슬리가 자신의 집에 들렀던 사제와 입을 맞출 수 있게 도왔으니까. 스페라도 후작가의 사용인은 정말로 레슬리가 밤샘 기도를 올리고 갔다는 확답만 받아서 돌아올 것이다.
“알아서 해.”
“너!”
“이게 무슨 소란이니?”
엘리가 새된 목소리로 저택이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 지르는데, 중앙 계단 쪽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페라도 후작 부인이 라일락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딸, 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우리 사랑스러운 아가가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걸까?”
움직이기 힘들어 보일 정도로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도 우아하게 발걸음을 옮겨 두 사람에게 가까이 온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엘리를 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어머니!”
“그래, 우리 딸. 무슨 일이니?”
엘리가 그 품속에 폭 안겨 후작 부인을 부르자, 부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어여쁜 딸을 토닥였다. 마침 창가에서 쏟아진 햇빛이 두 사람을 비췄고 그 모습은 마치 명화처럼 아름답고 평온해 보였다.
레슬리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짙은 그늘 밑에서 바라보았다.
“엘리, 우리 사랑스러운 아가. 무슨 일이니? 도대체 뭐가 우리 예쁜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후작 부인이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엘리의 아름다운 밀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엘리는 입을 꾹 다문 채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저것이…….”
“저것?”
처음부터 후작 부인의 눈에는 레슬리 따위 보이지 않았는지 그제야 그녀의 시선이 레슬리에게 닿았다. 순간 데리엘의 얼굴이 혐오스러운 것을 봤다는 듯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벌레를 봐도 저보단 괜찮으리라.
엘리를 부를 때와는 다르게 격앙된 목소리로 후작 부인은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너, 내 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말에 레슬리는 어이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 내 딸이라니. 자신도 일단은 후작 부인의 배에서 나온 아이인데.
잠시 무기질적으로 후작 부인을 바라보던 레슬리는 그냥 고개를 돌려 제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상에……. 저게 지금 날 무시한 거니?”
“어, 어머니.”
후작 부인은 자신을 말리는 엘리의 말도 무시한 채 성큼성큼 다가가 거칠게 레슬리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급작스러운 고통에 레슬리는 짧은 비명을 터트렸다.
“악!”
“이리 오렴. 너는 좀 벌을 받아야겠다.”
그녀의 은발을 맨손으로라도 잡고 싶지 않았는지 어느새 얇은 레이스 장갑을 낀 후작 부인은 그대로 거대한 거울이 있는 방으로 발을 옮겼다. 머리카락이 잡힌 상태라 레슬리의 작은 몸이 속절없이 후작 부인 쪽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후작 부인의 손이 가벼워졌다. 의구심에 후작 부인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자 한 움큼이나 되는 은발만이 남아 있을 뿐, 레슬리는 없었다. 그녀는 이미 저 멀찍이 서 있었다.
“정말로 네가 미친 게 틀림없구나!”
후작 부인은 제 손에 쥐인 은발을 대리석 바닥 위에 내팽개치고 다시 레슬리의 머리채를 잡으려고 우악스럽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재빠르게 그녀의 손을 피한 레슬리가 후작 부인을 노려보며 먼저 외쳤다.
“나는 이 이상 그 방에 가지 않을 거예요.”
거대한 거울이 있는 방. 언제나 데리엘 후작 부인이 거울 속 자신과 시선을 맞추며 ‘쓸모없는 아이’라는 말을 되새기게 했던 그 방. 미치도록 싫었던 그 방에 다시 들어갈 생각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분노가 들끓어 레슬리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사실은, 정말 사실은, 어둠으로 전부 먹어 버리게 하고 싶었다. 괴물 같은 후작 부부도, 엘리도, 자신에게는 끔찍한 기억만 남아 있는 이 저택도 전부 다. 아직도 이따금 그런 충동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하지만 안 돼.’
그보다 더 큰 벌을 받아야 했다. 가문의 명성이 전부인 후작에게는 그 가문을 짓밟고 모든 권위를 추락시키는 게 죽음보다 더 괴로운 일이라는 걸 레슬리는 잘 알고 있었다. 여태 레슬리가 보아 온 후작의 행보가 그걸 확인시켜 줬다.
거기다 스페라도 가문은 대대로 권력욕에 미쳐 온 가문이었다. 신전에서 봤던 아이들의 죽음이 그걸 레슬리에게 확실하게 들려줬으니까.
“휴우.”
그러니까 참자. 잠깐만 참고 있자. 레슬리는 거친 숨을 내쉬고 몸을 돌려 빠르게 제 방으로 올라갔다.
뒤에서 후작 부인이 뭔가를 더 소리치는 듯 부산스러웠지만, 레슬리는 무시하고 제 방으로 올라가 걸쇠를 걸어 잠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이불보를 끝까지 뒤집어썼다.
다시 불길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작고, 작은 목소리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밀어내던 수많은 팔. 그 잔상이 레슬리가 한순간의 분노에 몸을 맡기지 않도록 도와줬다.
“걱정하지 마. 내가 꼭 너희와 내 복수를 해 줄게.”
레슬리는 주머니에 넣어 놨던 짙은 녹색 리본을 꼭 쥐고 모두에게 중얼거렸다.
***
“미친 거예요.”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단숨에 후작의 서재로 찾아가 자신의 남편 앞에 앉았다.
“미친 게 틀림없다니까요. 분명 그 불에 들어갔다가 절벽에 떨어지는 바람에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어요.”
불안한지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잘근잘근 물고 있었다. 이 행동은 어릴 적부터 데리엘이 극도로 불안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여보, 아니 데리엘.”
제 아내의 이름을 부른 후작은 손을 뻗어 잇자국으로 가득한 손을 토닥였다. 귀찮긴 했지만 지금 토닥여 주지 않으면 자신의 부인은 밤새 자기 옆에서 하염없이 투덜거릴 것이 분명했다.
“저깟 것이 뭘 어쩔 수 있겠어. 여차하면 지하에 가둬 버리면 돼. 반년 후에 풀어 주지.”
스페라도 후작가의 지하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와인 창고가 있었다. 어둡고 습하며 음침한 곳. 미로처럼 길이 사방으로 뻗어 있는 곳이라 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 이가 발을 들이면 대다수가 길을 잃고 헤맬 정도였다. 그곳에 가둬 버리면 조용해지겠지.
그래도 후작 부인은 불안한지 후작을 보며 소리쳤다.
“당신 그 독기 어린 눈을 보지 못했어요? 아아, 무서워. 무서워요. 성격도 이상하게 바뀌어선. 거기다 옛날엔 하인들 말에 꼼짝도 못 하던 애가 이젠 막 애들을 부려 먹는다니까요.”
후작 부인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요즘 집안의 사용인들이 레슬리가 달라졌다며 그녀에게 귀띔하곤 했다. 아무리 소리쳐도 더는 겁을 먹지 않는다고도 했고, 무시로 일관해도 괜찮다는 듯 행동했으며, 이상할 정도로 모든 일에 담담해졌다고 고했다.
“거기다 얼마 전엔 르아가 넘어졌어요. 그 앙큼한 것이 분명 무슨 수를 쓴 게 틀림없어요. 르아는 침대와 책상 사이에 줄을 매어 놓았을 거라고 하더군요.”
레슬리의 방에서 넘어진 르아는 아직도 끙끙거리고 있었다. 분명 일부러 자신을 침대 쪽으로 유인해 그런 것이 틀림없다며 화를 내던 르아를 후작 부인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실수로 넘어졌다는 생각 따윈 조금도 하지 않은 채, 르아는 모든 잘못을 레슬리에게 넘겼고 후작 부인은 거기에 동의했다.
“그런데 고것이 줄을 싹 치워 놨대요. 방에 들어가 전부 뒤져도 침대와 책상 사이를 이을 만한 줄을 발견하지 못했대요. 마치 마법처럼 숨겨 놨다고 얼마나 르아가 투덜거리던지.”
“뭐?”
그때까지 부인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던 후작이 소파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마법?”
“그래요. 마법이요. 지금 생각하면 그 줄, 커튼 끈이 아니었을까…….”
그 뒤로 후작 부인이 뭔가를 더 중얼거렸지만, 후작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오직 그 아이가 자신의 옆을 지나갈 때 하던 말만 떠올랐다.
‘제가 없으면 가장 곤란할 사람은 당신…… 아닐까요?’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온 암전. 순식간에 눈은 빛을 잃고 비틀거리던 스페라도 후작은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 그 힘.
‘동시대에 힘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가.’
서고를 뒤져 봐야겠다. 밤을 새우더라도 서고를 전부 뒤져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스페라도 후작은 주먹을 꽉 쥐고는 아직도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데리엘, 기분이 나쁘다면 번화가에 다녀오는 게 어때?”
“번화가에 말인가요?”
“그래, 저녁때 열리는 보석 경매에 엘리를 데리고 다녀와. 돈은 얼마든지 써도 좋아.”
“어머나!”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이번 경매는 꽤 괜찮은 보석들이 나오는 경매였다. 거기다 돈을 얼마든지 써도 된다니! 데리엘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저녁 때 열리는 경매에 참여하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고마워요, 여보.”
“뭘, 내 사랑의 기분이 풀린다면 내가 더 행복하지.”
그렇게 후작 부인을 내보낸 후작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서재를 뒤지기 시작했다. 분명 이쯤에…… 아니 이쯤이던가? 서재에서 책을 읽은 지가 오래되어 위치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없어.”
언제나 단정하게 뒤로 고정되어 넘겨져 있던 후작의 밀색 머리카락이 땀과 짜증으로 흐트러졌다. 후작의 주변에는 수많은 책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중 하나를 살피던 후작은 책을 거칠게 덮었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밤이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동시대에 힘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의 기록을, 그리고 제물이 될 운명으로 태어났음에도 힘을 가진 아이들의 기록을 찾아야 했다.
스페라도 가문의 아이들은 제 운명을 타고난다. 적어도 스페라도 가주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부드러운 밀색 머리카락과 녹음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태어나면, 힘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건 둘째, 셋째를 낳으면 더욱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둘째와 셋째 중 새하얗게 새어 버린 거지 같은 은발을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면 첫째에게 기대를 걸어도 괜찮았다. 대대로 은발을 가진 아이들은 제물로 가장 적합한 아이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스페라도 후작은 엘리의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을 보자마자, 싫다고 우는 후작 부인을 어르고 간신히 달래 둘째를 낳았다.
그리고 레슬리를 보자마자 후작은 환하게 웃었다. 은발이었다.
레슬리가 태어나던 날 흥과 술에 취해 스페라도 후작은 제 서재에서 크게 소리 질렀다. 기쁨이, 환희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1백 년 만의 어둠술사.
이대로 엘리가 힘만 자각해 준다면, 그래 준다면, 다른 후작가 따윈 우리에게 덤비지도 못할 것이다. 스페라도 가문에는 봄날이 돌아올 게 분명했다.
후작가가 뭐람. 셀바토르 그 오만방자한 년도 자신을 깔보지 못할 것이다. 셀바토르 공작, 여자가 공작 위에 오른 것도 마뜩잖은데 그녀는 늘 그를 자신의 밑으로 보고 비웃었다.
진실로 셀바토르 공작이 그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스페라도 후작, 자신이 그렇게 느꼈다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혹여나 엘리가 힘을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았다. 밀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 가장 스페라도 가문다운 색을 가진 아름답고 예쁜 아이를 원하는 곳은 많을 것이다. 비싼 값에 팔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후작의 기대에 부응하듯, 엘리는 제1황자의 마음을 잡아 보였다. 스페라도 가문과 황실 간 약혼 이야기가 오가고, 약혼이 확정되었다.
엘리는 스페라도 후작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비싼 패가 되었다.
힘을 가질 확률이 높은 딸, 황실에 비싸게 팔릴 딸. 그리고 쓸모없고 아둔한 제물.
후작의 마음은 당연히 가장 가치 있는 쪽으로 기울었고, 레슬리는 어차피 엘리를 위해 낳은 아이니 엘리에게 주었다.
공부를 싫어하는 엘리를 위해 대신 지식을 채워 놓을 주머니로, 황실에서 그 아이를 모실 시녀로. 여차하면 위험 상황에서 방패막이로 쓸 수 있게. 그게 제물의 삶이 아니던가?
가주인 후작은 레슬리를 그런 태도로 대했고, 억지로 둘째를 낳은 후작 부인 역시 레슬리를 좋게 보진 않았다.
어느 때는 모든 일이 그 아이의 탓이라며 몰아갔고, 종종 거울이 있는 방으로 끌고 들어가 모든 분풀이를 작은 아이에게 쏟아부었다. 엘리는 후작과 후작 부인의 행동을 그대로 배워 레슬리를 대했다.
“그랬는데…….”
그게 힘을 자각하다니? 스페라도 후작은 다시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만약.
“정말로 힘을 자각한 거라면.”
가문의 영광 나날을 돌려줄 건 엘리가 아니라 레슬리였나? 후작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 보았다.
밀색 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타고났음에도 아주 미약한 힘을 가진 엘리와, 적어도 남을 공격할 만한 힘을 가진 레슬리. 둘 중 어느 아이가 더 그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줄까?
‘이렇게 하면 되겠어!’
후작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엘리는 이대로 황실 쪽에 넘겨 버리고, 레슬리는 분쟁이 일어나는 지역으로 보내 버리면 되는 것이다.
황실에서는 거대한 지참금이 내려올 거고, 레슬리가 싸우면 싸울 때마다 포상금이 스페라도 후작에게 들어올 것이다. 거기다 후에 레슬리에게 적당한 놈을 붙여 아들을 낳게 하면 후계 문제까지 해결된다.
엘리가 아들을 여럿 낳아 황실의 피가 섞인 후계를 얻게 된다면 더 좋긴 하겠지만, 그건 확실하지 않은 방법이니까.
후작은 만족스러움에 나른하게 웃었다. 명예에, 힘에, 모든 걸 확실히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좋다, 좋아. 이제 그의 앞길에는 화사한 꽃길만이 펼쳐져 있으리라.
후작은 자신이 어릴 적 아버지가 해 준 말을 떠올렸다.
“자 보렴, 트라. 저 넓은 땅이 전부 너의 것이란다.”
전 스페라도 후작은 자신의 장남 트라를 번쩍 들어 안고는 드넓은 땅을 손으로 가리켰다.
트라의 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푸른 눈동자는 미래에 자신의 것이 될 땅을 보며 만족스러움으로 반짝거렸다.
“이 아비 말을 잘 명심하렴.”
그런 트라가 귀여운지, 전 스페라도 후작은 트라의 머리를 손으로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사실 우리 땅은 저 너머까지였단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고, 황실과 두 공작가 역시 우리를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로 강했지. 하지만 점점 우리는 약해지고 있단다. 왜 그런지 아니?”
“힘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지 못해서 그래요.”
“그렇지. 잘 아는구나.”
완연한 미소를 지으며 스페라도 후작은 다시 트라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트라가 작게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단 한 명, 한 명만 태어나도 좋아. 그러면 모든 일이 쉽게 풀릴 거란다. 너는 내가 낳은 아이 중 가장 총명한 아이지. 그러니 내 뜻을 이해할 수 있지, 트라?”
아버지의 물음에 트라의 눈이 슬그머니 뒤쪽을 향했다. 거기엔 두 명의 제 형제가 있었다. 먹지 못하고 제대로 자지도 못해 마르고 불쌍해 보이는 동생 두 명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바로 시선을 밑으로 했다.
비록 자신이 녹음의 눈은 아니었지만, 밀색 머리를 가지고 태어나 희미한 희망을 품고 아버지가 낳은 형제들. 하지만 저 중에선 은발은 나오지 않았다.
천만다행히도 전 스페라도 후작은 트라에게 잘못을 돌리지 않았다. 은발을 타고 태어나지 못한 둘을 트라 앞에서 보란 듯이 윽박지르고 때로는 손찌검까지 했다. 마치 보고 배우라는 듯 호되게 그 둘을 억압했다.
제 동생 둘에게서 시선을 뗀 트라는 다시 아버지가 보여 준 땅을 바라보았다. 아니, 원래 스페라도 가문의 땅이었다는 그 너머까지 바라보았다.
저 너머의 땅을 전부 차지하게 되면 아버지가 말한 대로 황족도, 두 공작가도 자신의 발아래에 있게 될까? 그 모습을 상상한 트라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그 뜻을 이해했어요.”
어릴 적부터 영민하게 아버지의 뜻을 알아챈 자신이 아니던가.
‘하지만 일단 정말로 힘을 가졌는지 확인해 봐야지.’
그래, 그게 전제조건이니까. 자신의 사랑을 받으려면 응당 쓸모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 거니까. 후작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엘리가 그랬듯 본인이 직접 힘을 보여 주며 자신에게 말해 주는 것이지만, 레슬리가 그럴 것 같진 않았다.
‘제물의 불에 넣은 뒤로는 까칠해졌단 말이지.’
쯧. 겨우 고작 그런 걸 가지고. 아니지, 아팠을 수도 있지.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레슬리는 작은 아이가 아니던가? 올해 그 아이가 몇 살이나 되었지? 거기다 자신이 그 불길 속에 집어넣었으니 많이 놀라고 아파서 그랬을 수도 있지.
후작은 그때 벌였던 행동을 조금 후회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창끝으로 찔러 넣지는 말걸. 이렇게 될지 누가 알았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 조금 잘해 줘야겠다. 후작은 그렇게 다짐했다.
확인할 다른 방법이 있을까. 마법이나 신력이라면 확인이 편한데. 어둠은 마법이나 신력과는 다르게 힘을 쓰는 데 표시가 나지 않았다. 그저 있던 듯 없던 듯 와서 조용히 먹어 치우고 사라졌다. 조용하고 강력한 힘, 그게 어둠이었다.
‘아까 누가 공격을 받았다고 했었지?’
그놈의 이야길 들어 보면 좋겠는데. 후작 부인이 떠들면서 몇 번이나 르아의 이름을 언급했지만, 스페라도 후작은 그런 이름 따위 기억하지 않았다.
부인의 방에 가서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는데, 소파 밑에 어지럽게 널려 있던 책 한 권이 발끝에 툭 닿았다.
본 적 없는 책. 책이라기보다는 일기장 같은 것을 들고 후작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내 서고에 놓여 있는 거지?
펼쳐 보니 종이가 노랗게 변색된 게 상당히 오래되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갈겨써진 고어.
고어를 배운 지 너무도 오래돼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후작은 조금씩 페이지를 읽어 나갔다. 그리고 보이는 한 문장.
[밀색 머리에 힘을 타고난 아이가 태어나면, 반드시는 아니지만 은발 머리의 아이가 태어났다.]
[은발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도 약간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쓰기 힘들 정도의 미약한 힘. 우리는 이 힘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걸로 사람을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둠을 보강해 르카디우스가 제국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면 우리도 살 수 있지 않을까.]
급하게 한 장을 넘기니 한 페이지가 찢겨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다음 페이지에 글이 이어지고 있었다.
[여러 방법을 시도한 결과, 아이를 불에 넣으면 힘을 가지고 있는 다른 아이에게 그 아이가 가지고 있던 힘이 전달되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기묘한 일이다. 은발의 아이가 10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밀색 머리의 아이가 받는 힘은 고작 8 정도. 2의 힘은 어디로 갔을까?]
그 뒤로 뭔가가 더 이어졌지만, 후작은 그걸 읽지도 않고 책을 덮어 버렸다. 후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저에게 공격한 힘, 그리고 다른 하녀에게 일어났던 이상한 일.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어둠술사의 탄생이었다.
***
“레슬리 아가씨.”
레슬리는 자신을 부르는 르아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 르아가 웃고 있었다. 환하게 웃음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이 르아가 아가씨를 위한 세숫물을 가져왔어요.”
그러면서 조심스레 자신 앞에 세숫물을 내려놓더니 어서 일어나라는 듯 다시 자신을 보며 웃었다.
“어서 와서 씻으세요. 아휴, 방에 먼지가 많네요. 오늘은 날씨가 따듯하니까 밖에 산책하러 다녀오는 건 어떠세요? 겨울이긴 하지만 잠시 바람을 쐬는 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 거예요. 그동안 제가 방을 청소해 둘게요.”
2주에 한 번 해 줄까 말까 한 청소를 하겠다더니 이젠 산책까지 권하고 있었다.
“무슨 꿍꿍이야? 무슨 속셈으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아휴, 아가씨. 제가 아가씨를 해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리 날을 세우세요.”
자신은 정말 아무런 사심 없이 순수하게 레슬리를 위해 이러는 거라는 듯 환하게 웃어 보였지만, 레슬리는 더 거부감이 짙어지는 걸 느꼈다. 도대체 자신에게 왜 이러는 거지?
“됐어, 나가.”
레슬리는 나가지 않으려고 난리 치는 르아를 밀다시피 내보내고 문을 닫아 버렸다. 거기다 이상해진 건 르아뿐만이 아니었다.
“레슬리 아가씨,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 식사는 어떤 거로 가져다 드릴까요? 저번에 보니 새고기를 잘 드시던데, 그걸 준비해 드릴까요?”
“아가씨, 간식은 어떤 거로 드시겠어요?”
“…….”
분명 후작 부인과 그 사달을 냈기 때문에 벌을 받을 줄 알았는데, 며칠 동안 스페라도 후작 저택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나니 모두 이상하게 친절해졌다. 아니, 친절해진 척했다. 다들 눈 속에는 아직 혐오감을 숨긴 채 자신에게 웃음을 내보였고, 웃고 있는 입안에는 욕설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레슬리는 대놓고 눈을 찌푸렸다. 르아가 실실 웃으며 그녀에게 세숫물과 뽀송뽀송한 수건을 가져다주더니 거기다 드레스 한 벌을 가져다 놓았다.
레슬리의 눈동자 색을 닮은 라일락색 드레스는 색색의 보석과 최고급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었고, 치맛단은 물결처럼 만들어져 있어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정말로 아름다운 엘리의 드레스였다.
“예쁘죠?”
르아가 다시 웃으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레슬리가 엘리가 저 옷을 입고 나왔을 때 뚫어져라 본 것을 어찌 용케도 기억한 모양이었다. 아, 기억났다. 분명 그때 언니 것을 탐내면 안 된다고 호되게 야단쳤었지. 그래서 기억하는구나.
“후작님이 주신 선물이랍니다. 색도 어여쁜 보라빛 장미색이니 분명 아가씨랑도 잘 어울릴 거예요.”
“이건 엘리 거잖아.”
레슬리는 르아를 바라보고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도 르아의 웃음을 사라지지 않았다.
“엘리도 이걸 나에게 가져온 걸 알고 있어? 분명 난리 났을 텐데.”
“아휴, 그럼요, 그럼요. 엘리 아가씨도 알고 있죠. 거기다 언니가 동생에게 옷 한 벌 선물해 주는 건데, 엘리 아가씨가 이 정도로 난리 칠 리가 없어요. 엘리 아가씨가 얼마나 상냥하신데요.”
엘리가 저에게 주는 선물이라니. 어이가 없어 레슬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 드레스는 엘리가 유명한 드레스 제작자에서 몇 달이나 기다려 받아 온 드레스였다. 그런 드레스를 동생이란 이유로 선물해 줄 정도로 엘리는 ‘상냥’하지 않았다.
여태 살면서 그녀에게 천 쪼가리 하나라도 받아 본 적이 있던가?
작아져서 못 입게 된 드레스를 레슬리에게 줄 만도 했지만, 늘 엘리는 예쁘게 웃으면서 그 아름다운 드레스들을 레슬리 앞에서 찢어 버리곤 했다.
그녀의 연녹색 눈동자는 그때마다 레슬리에게 이렇게 속살거렸다. 너는 절대 이런 드레스를 가져 볼 수 없다고.
르아의 대답에 속이 거북해진 레슬리는 작게 헛구역질을 몇 번 하다 침대에 도로 누워 버렸다. 그 모습을 본 르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가씨!”
“나가. 피곤해. 잘 거야.”
“안 돼요, 안 된다고요. 후작님이 꼭 오늘은 식사를 같이하자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저 드레스를 입고 가셔야 해요.”
“후작이?”
레슬리는 그 말에 놀라 도로 몸을 일으키고 르아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후작이라니요. 아버지라고 불러야지요. 자아, 따라 해 보세요. 아버지!”
“그딴 소리는 집어치우고. 후작이 날 보자고 했다고?”
레슬리가 호칭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걸 안 르아는 툴툴거리며 말을 이었다.
“네에. 오랜만에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자고 하셨어요. 오늘은 특별히 레슬리 아가씨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주신대요.”
그러면서 르아는 레슬리에게 드레스를 내밀었다. 어서 준비하고 식당으로 내려가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레슬리의 머리는 다른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가족 식사라니. 예전에 자신이 참여한 가족 식사는 어땠던가. 가족이 대가족인 것도 아닌데 홀로 구석 자리에 앉았었다. 낡고 불편한 의자는 조금이라도 레슬리가 몸을 움직이면 요란하게 삐꺽거려서 사람들의 눈총을 받았다.
음식은 또 어땠지. 혼자 싸늘하게 식어 버린 감자 수프에 딱딱한 빵. 바로 코앞에서는 기름지고 절로 식욕이 돋는 음식들이 가득하게 차려 있었고, 세 사람은 그 음식을 먹으며 웃음 짓고 있었다. 철저하게 레슬리는 외면한 채, 아주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안 가.”
레슬리는 침대에 도로 누워 버렸다. 이번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강경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런 레슬리를 보고 르아가 필사적으로 그녀를 달랬다.
“아가씨! 후작님이 아가씨가 보고 싶으시대요. 자아, 어서 가요. 이 르아가 식당까지 손을 꼭 잡고 내려가 드릴게요.”
그 말에 더욱 짜증이 치솟는 걸 느꼈다. 저 부탁은 몇 년 전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후작 부인에게 맞은 다리가 아파, 계단을 내려갈 때 손을 잡아 달라고 르아에게 말했었다. 당연히 거절당했다.
“난 보고 싶지 않아.”
“아가씨이…….”
레슬리가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 올리면 포기하고 나가던 르아가 오늘따라 끈질겼다.
“아가씨가 식사에 오시지 않으면 이 르아가 체벌을 받는단 말이에요.”
아, 역시. 후작은 종종 자신뿐만 아니라 사용인들에게도 손을 올리던 사람이었다. 그걸 언제나 보며 비웃는 쪽이었던 르아였는데, 오늘은 제가 맞을 수 있으니 애가 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
레슬리는 이번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아 버렸다. 이러고 있으면 제풀에 지쳐 가겠지.
“레슬리 아가씨. 착하시죠? 같이 식사하러 가요. 요리사님이 아가씨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놓는다고 했어요. 그리고 후작님에게 감사 인사도 하셔야지요. 식사하면서 감사 인사를 건네면 분위기가 좋아질 거예요. 후작님이 요즈음 아랫사람들의 분위기를 단속하신다고 얼마나 힘들어하셨는데요!”
결국 레슬리는 르아의 그 말에 몸을 일으켰다. 기묘하게 사람들이 친절해진 것, 역시 후작의 짓이었구나. 잠시 눈을 깜빡이던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르아의 얼굴이 정말 환해졌다.
“좋아, 갈게.”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아봐야겠다. 레슬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실내화를 신었다. 그런 레슬리를 르아는 구세주라도 되는 듯 반짝반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혹여라도 맞게 될까 걱정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런 르아를 바라보며 레슬리는 한마디 덧붙였다.
“대신 저 드레스는 안 입어. 이 상태로 갈 거야.”
역겨워서라도 걸치고 싶지 않으니까.
***
이게 뭐지.
엘리의 새하얀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풍성한 속눈썹 밑으로 보이는 어여쁜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짜증과 분노가 서렸다. 왜 이게 여기 와 있는 거야?
어제부터 짜증 나는 일의 연속이었다. 가장 아끼던 아르롱 가게의 드레스가 사라졌는데, 자신이 데리고 있는 하녀 중 그 누구도 행방을 알지 못했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자신의 드레스를 관리하던 하녀를 도둑으로 몰아 집에서 쫓아내기로 했다. 자신은 아니라고 믿어 달라고 징징 우는 모습에 뺨을 몇 대 때렸더니 그제야 조용해졌다. 그나마 오늘 어머니와 드레스를 새로 맞출 생각으로 기분 전환을 하며 식당으로 내려온 건데.
“너 왜 거기 앉아 있는 거야? 거긴 내 자리잖아! 아니, 애당초 네가 왜 식당에 와 있어?”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거지 같은 은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 은발은 가장 볕이 잘 들고 따스한 자리인 자신의 자리에 앉아 늘 자신이 사용하던 식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자리, 자신의 것인데! 분명 자신을 위해 태어난 것인데 요즘 최고로 엘리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 역시 레슬리였다.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 버리고 저것이 위로 올라갔다. 거기다 요 며칠 사용인들마저 저것에게 친절하게 대해 엘리는 불안해지던 참이었다.
“비켜!”
그런 불안과 짜증의 원인을 왜 식당까지 와서 봐야 하는 건지! 엘리는 소리를 빽 지르며 성큼성큼 레슬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레슬리의 머리카락을 잡으려고 했다.
“엘리!”
하지만 슬프게도 그건 엘리가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에 의해 제지되었다. 어느새 식당에 도착한 후작이 실망했다는 눈으로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 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몰상식한 짓이냐. 동생의 머리채를 잡으려고 하다니.”
“아, 아버지?”
엘리가 당황한 듯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지금 아버지가 자신에게 소리를 지른 건가? 나를 혼낸 거야?
엘리는 태어나서 열다섯 살이 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혼나 본 적이 없었다. 사용인들을 심심풀이 삼아서 때리고 놀아도, 매번 엄청나게 많은 드레스를 사도, 그 무슨 짓을 해도 자신에게 절대 화내지 않던 사람이 아버지였는데.
“아버지, 하지만 이 쓸모없는 것이 제 자리에 앉아 있지 않겠어요? 거기다 보세요. 저 식기들은 제가 아끼는 것들인걸요.”
순식간의 엘리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해지면서 눈가가 붉어졌다. 조금이라도 톡 건드리면 눈물이 방울져 떨어질 것이다. 누가 봐도 안쓰러운 모습. 엘리가 이러면 아버지는 늘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당연히 이번에도 그러겠지.
“그런 식으로 동생을 때린 걸 넘어가려고 하다니. 실망이로구나, 엘리.”
뭐? 충격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엘리를 무시한 후작은 레슬리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의 푸른 눈이 재빠르게 레슬리를 훑었다.
“레슬리, 사랑하는 내 딸. 그래, 잠은 잘 잤니? 그런데 왜 드레스를 입지 않았지? 일부러 네 눈동자 색에 맞춘 어여쁜 드레스를 골랐는데. 아아, 마음에 들지 않았구나. 걱정하지 말렴. 이 아비가 그것보다 몇 배는 더 예쁜 드레스를 사다 주마.”
“여, 여보…….”
퍽 상냥해 보이는 그 모습에 마침 식당에 들어오던 후작 부인도, 엘리도 얼어붙고 말았다. 하지만 엘리의 몸을 움직이게 한 말이 있었다. 드레스, 그것도 연보라색 드레스. 결국 엘리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설마 제 드레스를 저것에게 주신 거예요? 제가 얼마나 그 드레스를 아꼈는지 아시잖아요! 정말 너무하세요!”
“너무한 건 네가 더 너무하지!”
후작은 자신을 잡으려는 엘리의 팔을 거칠게 밀어내고 무섭도록 날카로운 눈으로 엘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언니가 되어서 동생에게 뭐 하나 주는 걸 아까워하는 거야! 네 옷장을 봐라. 드레스가 몇 백 벌이 쌓여 있어. 거기서 한 벌 준다고 네가 헐벗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거기다 너는 묘하게 레슬리를 괴롭히더구나.”
후작의 고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제 부인을 바라본 스페라도 후작은 더 큰 목소리로 자신의 아내를 질타하기 시작했다.
“당신도 참 실망이구려. 우리 딸을 보오. 열 살밖에 안 된 애가 이렇게 삐쩍 말랐는데 신경도 안 쓰고 무엇을 했던 거요! 그동안 감자 따위나 먹이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집안 살림은 당신의 몫이라 그냥 보고만 있었는데 오늘 보니 안 되겠어!”
“지금 당신,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예요? 세상에, 당신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어요?”
교묘하게 잘못을 아내와 엘리에게 떠넘긴 후작은 후작 부인이 뭐라고 하는 걸 가뿐히 무시하고 레슬리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자아, 레슬리. 이제 걱정할 필요 없단다. 이 아비가 널 지켜 주마!”
그 말에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머리끝을 매만지던 레슬리가 입을 열었다.
“저는 열두 살이에요. 열 살이 아니라 열두 살.”
그러고는 무기질적인 눈으로 시선을 돌려 후작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는지, 그 후작마저 잠시 몸을 움찔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주 잠시였다.
후작에게 있어서 레슬리는 언제나 손쉽게 움직이는 딸이었으니까. 요즘엔 조금 달라졌다고는 해도 평생을 자신의 말에 반항 한 번 못 하고, 늘 자신의 사랑을 갈구하던 아이였다. 그러니 호감을 얻기란 쉬워도 너무 쉬울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데 왜 저한테 이러세요?”
냉담한 말이 돌아왔다. 꺼림직한 감각이 느껴지긴 했지만, 후작은 웃으며 제 작은 사랑스러운 딸을 바라보았다.
“내가 뭘 말이냐. 아버지가 딸을 챙기는 게 뭐가 어떻다고.”
“평소엔 안 그러셨잖아요. 언제나 저를 때리고, 소리 지르고, 욕하고, 억압하고…….”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레슬리의 시선이 잠시 난로 쪽에 닿았다. 정확히는 그 안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길에 라일락색 눈동자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최근엔 다른 일도 있었죠.”
그 일을 아는 후작과 후작 부인, 그리고 엘리는 움찔거렸지만, 다른 사용인들은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큼! 물론 이 아버지가 그동안 잘못해 왔다는 걸 안다, 레슬리. 아버지가 무심했으니 그런 행동을 보여도 나는 다 이해한단다. 하지만 그것들은 다 너를 너무도 사랑해서 그런 거라는 걸 알아주렴.”
개소리, 개소리, 개소리. 하지만 레슬리는 후작의 말을 막지 않고 그저 말없이 바라보았다.
“내가 너를 잘못 대했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지. 그래서 많이 생각하고 많이 후회했단다. 가치 있는 것을 한눈에 못 알아보던 이 아버지를 부디 용서해 주고, 그간의 일은 없던 일로 하자.”
스페라도 후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레슬리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앉아 있던 의자가 갑자기 뒤로 밀려 큰 소리 함께 넘어졌지만, 식당에 있던 그 누구도 레슬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내 용서 따위 바라지 마세요. 할 생각 따위 추호도 없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레슬리는 스페라도 후작 쪽으로 한 발 다가가 작게 말했다. 어느새 무기질적이던 눈은 분노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절대로 당신을 용서하지 않아, 스페라도 후작.”
그 말을 끝으로 레슬리는 후작과 멍청하게 서 있는 엘리와 ‘잠깐, 말이 이상하잖아요. 내 잘못이라니요!’라고 뒤늦게 소리 지르기 시작한 후작 부인을 지나쳐 복도로 나왔다. 이 이상 식당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가치 있는 것. 그렇게 말했었지.
‘어렴풋이 눈치챈 걸까.’
하지만 괜찮아. 어둠은 고요했다.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힘을 가졌는지, 아닌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의 변수가 있었지.
복도를 지나 자신의 방으로 가려는데 어느새 식당에서 뛰쳐나온 엘리가 거칠게 그녀의 어깨를 잡고 억지로 몸을 돌려세웠다.
“너! 말했어? 말했냐고!”
“아니.”
엘리도 역시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머리가 헝클어지는 것도 모르고 급하게 달려와 자신에게 묻는 거겠지.
“네가 말한 거 아냐?”
레슬리는 엘리를 의심하고 있었다. 단 하나의 변수가 그녀였으니까. 레슬리가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두 명의 사람 중 하나가 그녀였으니까.
“내가 미쳤어? 너 좋은 일을 하게?”
“그런데 어떻게 후작이 눈치챈 거지? 멍청하게 네가 말을 흘린 거 아냐?”
“뭐? 멍청……!”
평소 습관대로 뺨을 후려치기 위해 손을 들던 엘리가 움찔거렸다. 어느새 그녀의 손목에 어둠이 감겨 있었다.
“이…… 이익…….”
어둠은 엘리가 분을 못 이겨 이상한 소리를 내다가 레슬리를 거칠게 놓았을 때야 그녀의 손에서 사라졌다.
“언니.”
레슬리는 분을 못 이겨 몸을 바들바들 떠는 엘리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몰려든 사용인들이 그녀와 레슬리를 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우리, 잘하자. 멍청하게 서로 발목 잡지 말고. 알았지?”
거기까지 말한 레슬리는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왔다.
***
“젠장, 짜증 나는 것!”
“히익!”
스페라도 후작은 거칠게 자신이 마시고 있던 술병을 집어 던졌다. 그 술병은 보고를 위해 서재로 와 있던 르아의 옆을 지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고, 지독한 술 냄새가 다시 방 안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너무도 독한 냄새에 코가 아려와 르아는 울면서 코를 훌쩍거렸다.
후작은 지금 두 가지 이유로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하나는 레슬리가 저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레슬리가 가지고 있는 힘의 크기였다.
두 번째 어둠술사라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어둠의 힘이 얼마나 될지 후작은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무릇 팔 물건의 가치는 상인이 가장 잘 알아야 하는 법이 아닌가. 막말로 사람을 공격한다고 해도 저에게 했던 것처럼 시야를 잠시 가리거나, 발을 거는 정도라면 제값을 받고 팔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 힘을 알아보기 위해 레슬리 그것에게 굽히는 것도 짜증이 나는데, 알아오라고 시킨 하녀는 너무도 쓸모가 없어서 더욱 화가 치밀었다.
“내가 이렇게 굽히고 들어가는데, 저깟 것이 뭐라고 이렇게 도도하게 구는 거야! 내 딸이잖아! 내 딸이면 내 말을 들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벌써 며칠째 레슬리는 냉담한 반응만 보였고, 후작은 그 모습에 슬슬 분노가 치밀고 있었다. 고작 반달 전에는 제 말이라면 껌뻑 죽던 아이였는데.
“제기랄. 제기랄!”
챙캉! 이번엔 컵을 던져 버린 후작은 거칠게 고함지르다 르아를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보이는 눈은 광기를 띠고 있는 미친놈의 눈과 흡사했다.
“너, 더 알아 온 게 없어?”
“아. 으……. 네……. 죄송합니다.”
르아는 산만 한 몸을 덜덜 떨었다. 언제나 보고를 올리러 올 때마다 뭔가가 깨졌고, 엄청난 고함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르아 역시 후작을 받아 주지 않는 레슬리가 미워 죽을 참이었다.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 건 따지고 보면 레슬리, 고것이었으니까!
“내 이야기를 좋게 흘리는 건?”
“해 보고는 있지만, 반응이 냉담해서…….”
“그러니까 그 반응을 좋게 이끌어야 할 거 아니야! 네가, 네가 해야지!”
바로 코앞에서 후작이 윽박지르자 르아는 몸을 최대한 움츠렸다. 독주의 냄새가 사방에서 퍼져 골이 띵 하고 울렸다.
“아무것도 찾아낸 게 없나? 특이사항 같은 거!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까 말해!”
억세고 굳은 손이 르아의 어깨를 꽉 쥐었다. 고통이 밀려와 르아가 작게 소리 지르며 눈물을 글썽였지만, 스페라도 후작은 되레 손에 힘을 줬다.
“아, 으……. 그게, 하나. 하나 있어요!”
“뭐지 그게?”
“그 불을…… 불을 무서워하시더라고요!”
며칠 전, 레슬리는 잠시 정원을 갔다가 쓰레기를 태우는 불을 보고 비명 지르며 몸을 떨었었다. 일정 거리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아 했지만, 저택으로 들어가기 위해 불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레슬리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었다.
그러다 불똥이 하나 툭 하고 튀었을 때 레슬리는 작은 비명과 함께 풀썩 그 자리에 쓰러져 가쁜 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불……. 불이라.”
후작의 눈이 번뜩거렸다. 그래,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불에 들어갔다 절벽에서 떨어졌던 아이니 분명 그에 대한 공포심이 생겼을 게 뻔했다. 그걸 이용하면 되는 거잖아?
‘불 속에 넣어 보자.’
그러면 살기 위해 힘을 쓰겠지. 그걸 내가 똑똑히 보고 확인하면 되는 거야. 저것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얼마쯤에 팔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겠지.
‘하지만 어떻게?’
스페라도 후작은 미간을 좁혔다. 안 그래도 요즘 경계심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아이였다. 어딜 가자고 해도 듣지 않을 게 뻔한 아이. 그렇다고 이 유서 깊은 저택에 불을 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서재의 문이 열리고 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작님, 실례하겠습니다.”
“무슨 일이지?”
깨진 술병과 컵을 말없이 바라보던 집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후작에게 시선을 돌려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익숙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마님께서 이번 신전 가는 일에 대해 여쭤볼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신전?”
“네. 늘 가시던 기도일이 내일모레입니다, 후작님.”
“그런 건 알아서 처리하라고 해! 지금 바쁘단 말이다. 아니, 잠깐…….”
신전? 신전, 신전. 집사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중얼중얼하던 후작이 갑자기 멈춰 섰다. 후작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신전, 가야지.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뭐가 있겠나.”
낮고 음습하게 웃으며 후작은 집사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후작에게 익숙한 집사마저 의구심이 드는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레슬리도 데려가자고.”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
***
각종 허브와 양념을 치고 오븐에서 구운 통베이컨 요리가 먹음직스럽게 올라와 있었다. 반은 통으로 올라와 있었지만, 다른 반은 레슬리가 한 입에 먹을 수 있게 작게 썰려 있었다. 그 옆에는 구운 후 버터를 올린 감자에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설탕을 입힌 바삭한 빵, 그리고 지금 계절에는 보기 힘든 과일이 듬뿍 올라간 디저트가 꽃과 함께 놓여 있었다.
그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을 레슬리는 아무런 감정 없이 내려다보았다. 후작의 짓이었다. 매일같이 새로운 요리가 올라왔다. 후작 부인과 엘리조차 이보단 질이 떨어지는 음식을 먹을 것이 틀림없을 정도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음식들이었다.
“치워.”
빵 두어 개를 집어 든 레슬리는 음식을 가져온 르아를 바라보았다. 후작과 식당에서 만난 뒤로 레슬리는 식당에 내려가지 않았기에 언제나 르아가 그녀의 식사를 다락방까지 가지고 오르락내리락했다.
“아휴, 아가씨. 좀 더 드셔야지요. 이렇게 삐쩍 말라서는 이 르아는 너무 걱정된답니다.”
가식적인 말이다. 레슬리는 웃음을 흘렸다. 후작 부인이 혹여나 레슬리가 살찔지도 모른다며 새 모이만큼 밥을 줄 때 가장 열렬하게 부인의 편을 들었던 게 르아였다.
“예전엔 내가 너무 살이 쪄서 못나 보인다고 하지 않았어?”
“아휴, 그건 르아가 다 아가씨를 걱정해서 한 말이었지요. 그런 걸 마음에 담아 두고 계시다니, 속이 좁으시군요.”
아무것도 아닌 걸 저 혼자 마음에 담아 뒀다며 구시렁구시렁하며 르아는 샐쭉하게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둥글게, 둥글게, 원만히 넘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랍니다, 레슬리 아가씨.”
대답할 가치를 못 느낀 레슬리는 그대로 르아를 무시한 채 창문 밑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았다.
“또 식탁이 아니라 저기서 드시네.”
르아가 다시 자신을 걱정하는 척하며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레슬리의 머릿속엔 온통 한 달이 언제 지나갈까, 그 생각뿐이었다.
고작 이 후작가에서 며칠을 버텼을 뿐인데,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도대체 여기서 12년을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서 공작가로 돌아가 그곳에서 새 성을 받고 살고 싶었다.
맛있는 음식, 폭신한 침구, 따듯했던 차. 그 모든 것보다 자신을 친절하게, 그리고 따듯하게 맞이해 주는 사람들이 그리웠다. 현재 후작가도 그녀에게 더없이 친절했지만, 그건 레슬리를 사람으로 봐서가 아니라 쓸모 있는 도구로 여긴 후작과 그 후작의 명령이었기에 환멸감만 느껴졌다.
그래서 레슬리는 주로 이 의자에 앉아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다락방의 유일한 장점은, 여기서 창문 밖을 내려다보면 드넓은 경치에 답답한 속이 조금은 트인다는 거였다. 그래서 요즘은 식사조차 여기서 하고 있었다.
자신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는 레슬리의 모습에 투덜거리던 르아가 펼쳐 놓은 음식들을 주섬주섬 다시 쟁반 위에 올리다가 뭔가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더니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신전에 가는 날인 거 아시죠? 다 먹고 준비하세요.”
그게 오늘이던가?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가문마다 주기적으로 신전에 가 기도를 올리는 날이 있었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경우는 그게 대기도 때였고, 스페라도 후작가는 오늘이었다. 나름 중요한 의식이었기에 스페라도 후작가의 기도 날에는 레슬리도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레슬리의 유일한 외출 기회였다.
“신전…….”
“또 안 가신다고 하는 건 아니겠죠? 중요한 일이잖아요. 거기다 오늘은 후작님이 혼자 마차를 타고 가셔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어휴, 어쩜 이리도 다정하게 아가씨를 생각해 주시는지. 그러니까 인제 그만 아가씨도 괜한 반항은 멈추고…….”
레슬리가 또 가지 않는다고 이야기할까 봐 음식을 들고 있던 르아가 재빠르게 말을 가로챘다. 그러면서도 고집을 피우면 어떻게 하나 슬그머니 레슬리 눈치를 보면서 생각 없이 제 말을 늘어놨다.
더 들으면 머리가 썩을 것 같아 레슬리는 한마디 내뱉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갈 거야.”
어디가 되었든 이 저택을 벗어나면 한결 숨쉬기가 편해질 것 같았다.
레슬리의 대답에 르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혹여나 레슬리가 마음을 바꿀까, 르아는 재빠르게 코트를 가져왔다.
빵을 다 먹은 후 외출 준비를 마친 레슬리가 저택으로 내려오자 거기에는 마차 두 대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마부는 레슬리에게 작은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진짜네.’
폭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댄 레슬리는 멍하니 마차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르아가 후작이 자신만 다른 마차에 태워 준다 했다고 말했을 때는 믿지 않았다. 후작은 요즘 레슬리의 환심을 사려고 발악을 하고 있었으나, 되레 역효과로 레슬리의 환심은커녕 후작 부인과 엘리의 원망만 사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오늘도 말만 그렇게 하고 후작은 레슬리가 탄 마차에 올라타 이것저것 말을 붙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후작은 작지만 좋은 마차 하나를 레슬리에게 통으로 내어 주었다. 창고에서 꺼내서 그런가 마차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긴 했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거기다 르아까지 타지 않아 레슬리는 간만에 편안한 기분으로 신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신전에 도착하면 후작가에 있을 때보다 숨쉬기가 편하겠지.
‘공작저에서 만났던 사제님에게 말해서 하룻밤 신전에서 자고 가도 괜찮겠다.’
어서 한 달이 지나면 좋겠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공작저였으면 좋겠어. 그 생각을 하다 레슬리는 살짝 웃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괴물 공작가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공작저에 데려다줬던 마부는 그 근처에 가는 것조차 꺼렸다. 그런 곳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난 자신이라니.
신께 기도해 보자. 여태 자신의 기도를 한 번도 들어주시지 않았으니, 저를 불쌍히 여기면 한 달이 후딱 지나가는 것 정도는 들어주시겠지. 레슬리는 옅게 웃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마차가 멈춰 섰다.
‘뭐지?’
레슬리는 황금색 술이 달린 커튼을 걷어 마차 밖 풍경을 확인했다. 늘 신전으로 가던 익숙한 길이 눈에 들어왔다. 신전은 규모 때문에 수도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고, 수도와 신전을 잇는 길은 여러 개가 있었다.
그중 이 길은 스페라도 가문이 주로 이용하는 길로, 다른 길에 비교해 많이 한산한 편이었다. 그 익숙한 길을 보며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레슬리는 마부석과 연결되는 창을 콩콩 치며 마부를 불렀다. 하지만 몇 번이고 소리쳐도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한 감각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레슬리는 빠르게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내려서 확인해 보자.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철컥! 철컥, 철컥!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차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혹시 자신이 잘못 연 게 아닐까 몇 번이고 문고리를 잡고 흔들어 보았지만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단하게 잠긴 것이다. 그리고 뭔가가 쌓이는 소리가 들렸다. 퉁, 퉁.
섬뜩함이 몸을 타고 흐르는 걸 느꼈다.
잘못됐다. 뭔가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되었다. 창문으로라도 나가야 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불길이 치솟았다.
물에 쉽게 젖지 않게 가공된 나무로 만든 마차일 텐데도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는 걸 보니 아까부터 코를 찌르던 이상한 냄새가 기름이었던 모양이다. 이윽고 불길이 마차를 뒤덮기 시작했다.
“흐아…….”
레슬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악몽이 작은 아이를 다시 찾아왔다. 제물이 되어 불길에 먹히던 그날이 떠올랐다. 자신을 구해 준 작은 손들은 무섭지 않았지만, 그 손들과 자신을 감싸던 불은 너무도, 너무나도 무서웠다.
“흐아앙.”
자신을 도와 달라고 부를 이름조차 찾지 못한 채 레슬리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힘을 써서…….’
아주 조금만 써서, 문고리만 부숴서 나가면 되지 않을까. 공작님이 쓰지 말라고는 했지만, 후작이 자신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발악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
눈이 마주쳤다. 마차에 난 작은 창문으로 레슬리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 남자는 재빠르게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이미 얼굴을 보았다. 익숙한 얼굴의 남자는 스페라도 가문의 하인 중 한 명이었다.
후작이 벌인 짓이구나. 그제야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후작이, 내가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나를 마차에 따로 태우고, 사람이 없는 길목에서 마차에 불을 지른 거구나. 내가 불을 무서워하는 걸 알고.
“당신들은……!”
언제까지 나를 괴롭히려는 거야? 도대체 언제까지? 그 말을 내뱉지도 못하고 레슬리는 콜록거렸다.
시커먼 연기가 마차 내부를 가득 채우고 숨을 쉬는 것마저 괴롭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마차를 집어삼킨 불길이 레슬리의 시야를 가렸다. 열기에 머리가 핑 돌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다 마차 바닥에 엎어진 레슬리는 숨을 옅게 내쉬었다.
죽을까? 죽는 걸까? 그렇다면 차라리 여기 있는 전부를 먹어 치워 버리고……. 레슬리의 분노에 반응하듯 발치에 고여 있던 어둠이 움찔거렸다.
어느새 라일락색 눈동자에는 뒤틀린 분노만 남아 아까 하인들이 몸을 숨긴 숲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다 죽여 버리고…….
으지직!
서서히 퍼져 나가던 어둠이 거대한 소리에 다시 레슬리의 발치로 돌아왔다. 다시 엄청난 소리가 들려오고 마차가 전복될 듯 몇 번 휘청거리더니, 단단했던 마차 문이 그대로 뜯겨 나갔다.
맨손으로 마차 문을 뜯어낸 사내가 확 몰려든 연기에 눈을 찌푸리며 바닥에 쓰러진 레슬리를 보고 손을 뻗었다.
누구지? 이미 시야가 눈물과 고통으로 흐릿해져 레슬리는 여러 차례 눈을 깜빡였지만,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쿨럭, 제기랄……. 괜찮나?”
아, 공작저에서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리다. 레슬리는 있는 힘을 짜내 그의 커다란 손을 잡으며 이름을 불러 보았다.
“베스라온 님…….”
그리고 밀려드는 안도감에 눈을 감았다.
***
도착해 보니 욕지거리가 풍기는 현장이었다. 기름을 퍼부은 듯 마차는 거대한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혹여라도 안에 있는 아이가 나올까 몇 겹이나 되는 거대한 나무들이 입구를 막고 있었다.
“으아아, 불이다!”
베스라온을 따라온 한 기사가 크게 소리쳤다. 그의 푸른 눈이 마차를 집어삼킨 불길 앞에서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단장님. 불, 불이에요!”
“나도 알아.”
무뚝뚝하게 대꾸한 베스라온과 다른 기사들은 재빠르게 마차로 다가가 먼저 마차 문을 막고 있는 통나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불길에 휩싸인 마차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정말이었을 줄이야.’
베스라온은 공작저로 돌아가던 중 한 여자아이를 만났다. 혹여라도 자신의 정체가 밝혀질까 짙은 남색 망토를 뒤집어쓴 여자아이는 베스라온과 자신을 따라오던 기사들을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혹시 기사님이신가요?”
“그럼요, 아가씨. 무슨 일인가요?”
한 기사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자,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주저하던 아이가 뭔가를 결심한 듯 자신에게 말을 걸어 준 기사를 바라보았다.
“……신전으로 가는 길에 마차가 불타고 있어요.”
“네? 신전이요?”
놀라 눈을 깜빡이는 자신의 부하 앞으로 성큼 나선 베스라온이 무뚝뚝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베스라온이 다가오자 놀란 아이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단장님, 단장님이 그렇게 말하면 아이들은 겁을 먹습니다.”
뒤에서 부하가 그를 말렸지만, 베스라온은 말없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아이가 움찔거리더니 새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어, 어쩌다 알게 됐어요! 그게 중요한가요? 마차가 불타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그러니까 빨리 가서 그 아이가 힘을 쓰기 전에 구해 주란 말이에요!”
“그 아이? 힘?”
베스라온이 다시 반문하자 놀란 듯 자신의 입가를 틀어막은 아이는 냅다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 어어? 잠시만요! 어디 길인지는 말해 줘야죠!”
부하가 도망치는 아이를 보며 소리를 질렀지만, 그 아이는 순식간에 골목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골목으로 들어갈 때, 눌러쓴 망토 밑에서 흘러내린 밀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밀색 머리카락, 마차, 신전.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 아이와 힘.
베스라온의 머릿속에서 불길한 감각이 흐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람. 거짓말 같아 좀 꺼림칙하긴 한데, 일단 가 볼까요, 단장?”
“……가자. 인원을 나눠서 최대한 빠르게 신전으로 가는 모든 길을 탐색한다.”
그리고 열두 개나 되는 길을 인원을 나눠 살폈고, 한 인적 드문 길에, 정말 마차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단장, 위험해요! 다친다고요!”
한 기사가 그를 말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맨손으로 불이 붙은 마차 문을 뜯어낸 베스라온은 마차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은발이 불빛에 반짝였다.
“베스라온 님…….”
자신을 보며 작은 손을 힘껏 뻗는다. 그 손을 잡자 눈에 빛을 잃더니, 그대로 기절했다.
“흐아, 위험했다.”
아이를 아슬아슬하게 빼내자마자 마차는 불길에 휩싸여 무너지기 시작했다.
따라온 부하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다들 급하게 마차를 막고 있던 통나무를 치우느라 그을음이 묻어 옷들이 더러워져 있었고, 손에 화상을 입은 자도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누구 마차죠? 죽이려고 이런 것 같은데. 세상에, 이렇게 작은 아이를…….”
베스라온은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불타 버린 마차를 바라보았다.
그래, 대놓고 죽이려고 한 짓이다. 짐작이 가는 사람은 있었지만 쉽게 입을 열 수 없어 그저 침묵하는데, 갑자기 숲 쪽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대여섯이나 되는 남자들은 덤덤한 표정으로 베스라온과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저희 아가씨를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더니 대뜸 베스라온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어디의 누구신진 모르나, 나중에 감사 인사를 전하겠습니다. 자아, 아가씨를 돌려주십시오.”
전혀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
그 말을 듣고 있던 베스라온은 옆의 기사에게 레슬리를 맡기더니 성큼 걸어가 그 남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크억? 켁, 켁! 무, 무슨 짓을…….”
남자가 작은 것도 아니었건만, 베스라온은 너무도 손쉽게 한 손으로 남자의 목을 움켜잡았다. 당황한 남자는 베스라온을 올려다보았다.
“신기해.”
무겁게 가라앉은 암녹색 눈동자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늘 하인으로, 후작의 밑에서 눈치만 보았던 남자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이 위압감. 키나, 덩치의 차이에서 오는 것만이 아니었다. 베스라온은 태생부터가 고위 귀족인 사람, 그리고 늘 우위에 있던 남자였다.
“아무리 추운 이런 날씨라지만 땀을 흘린 흔적도 없고. 오히려 몸이 차갑군.”
그러더니 암녹색 눈동자가 사내의 뒤에 서 있던 다른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몇몇 손은 도끼를 들고 있었다.
베스라온의 시선에 굳어 있던 사람들은 허겁지겁 그 도끼를 자신의 몸 뒤로 숨겼다. 하지만 늦었다.
“거기다 도끼라니. 마치 불이 날 걸 예상한 듯하군.”
불이 났을 때 물이나 모래를 끼얹어 불을 꺼트리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마차 같은 좁은 공간에 사람이 갇혀 있다면 도끼로 구멍을 내어 먼저 사람을 구조하곤 했다. 그런 도끼가 사내들의 손에 들려 있었다.
“젠장!”
목을 잡힌 남자가 거칠게 베스라온의 팔을 쳐 냈지만, 베스라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간지럽지도 않다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자는 거칠게 몸을 비틀어 간신히 베스라온의 손아귀에서 자신을 빼내었다. 사실은 베스라온이 놔준 거였지만.
“큭. 무, 무슨 상관입니까. 이건 어쩌다 난 사고일 뿐이죠. 도끼도 혹시 몰라서 가져온 겁니다.”
“사고? 웃기고 있네! 사고가 났는데 마차 문이 통나무로 막혀 있어? 거기다 걸쇠까지 잠겨 있고?”
베스라온 뒤에 있던 부하가 크게 소리를 내지르자, 당황한 사내들이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숨긴 도끼를 내밀고 이젠 베스라온과 네 명의 부하들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무슨 상관이야! 그건 우리 집 아가씨니, 내놔! 이 납치범 새끼들아!”
“납치범? 이 살인마 놈들이!”
흥분해 날뛰려는 부하를 한 손으로 제지한 베스라온은 자신에게 도끼를 들이밀고 있는 남자를 덤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납치범이라고. 우리는 제3 황실 기사단인 린체의 기사단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기사단장인 베스라온 라엔 셀바토르.”
“힉!”
린체 기사단과 셀바토르 공작가의 이름이 나오자 도끼를 들고 있던 남자가 그만 도끼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바로 제 발 옆에 도끼가 박혔는데도 그 사실을 모른 남자는 베스라온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식은땀으로 옷이 흠뻑 젖기 시작했다.
“나와 내 기사들은 납치범이라고 했지.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는가?”
“감히 우리를 모욕하다니! 그대의 주인 이름을 말하라! 하인을 잘못 교육한 죄, 그대의 주인이 물어야지!”
베스라온에 동조한 한 기사가 검을 뽑자 괴상한 비명을 지른 사내들이 허겁지겁 나무들 사이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쫓을까요?”
잠시 그 사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베스라온이 입을 열었다.
“아니.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일단 이 아이를 신전으로 데려가는 게 먼저야.”
베스라온은 기사의 품에 안겨 있는 레슬리를 바라보다 손을 뻗어 얼굴에 묻은 그을음을 닦아 주었다. 아까 꺼낼 때 보니 상처를 심하게 입은 것 같진 않아 보였지만, 그래도 신전으로 가는 게 먼저였다.
“그런데 단장, 이 아이를 아시는 눈치신데요.”
잠시 그 물음에 침묵하던 베스라온이 입을 열었다.
“……내 동생.”
***
불, 불, 불.
레슬리는 꿈에서조차 불길에 쫓기고 있었다. 온통 불길에 휩싸인 스페라도 후작이 미친 듯 웃으면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도망치고, 도망쳤지만, 결국 붙잡힌 레슬리를 후작이 웃으면서 목을 졸랐다.
“아악!”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잠에서 깨어 버린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여기는 어디지? 내가 기억하던 마지막은 불 속이었는데. 아니, 아니야. 누군가가 나를 구하러 와 줬었어. 기억이 엉켜 잘 생각나지 않았다. 누구였지? 누구였더라.
“일어났나요, 레슬리 양?”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레슬리는 놀라 황급히 몸을 뒤로 움직였다. 희미한 촛불 빛이 셀바토르 공작을 그려 냈고, 그녀를 보자마자 레슬리는 안도의 숨을 뱉었다. 생각났다. 누가 자신을 구해 주었는지.
“베스라온 님이…… 저를 구해 주셨군요.”
“그래요. 내 아들이 레슬리 양을 구해 냈지요.”
그렇게 말하며 셀바토르 공작은 작은 약병을 내밀었다.
“화상을 심하게 입진 않았지만, 그래도 살이 익어서 사제들이 다녀갔어요. 자, 이걸 먹어요, 레슬리 양. 잠을 푹 잘 수 있게 도와줄 거야. 지금 레슬리 양에게 필요한 건 다른 게 아니고 휴식이거든.”
주저주저하며 약병을 받아 든 레슬리는 단번에 약을 삼켰다. 쓰디쓴 맛이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와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리자 셀바토르 공작이 웃으며 레슬리의 입에 작은 과자를 넣어 주었다. 저번에 먹었던, 입에 넣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던 신기한 식감의 과자를 공작은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약의 쓴맛이 사라지고 달콤한 맛과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감사 인사를 전해 드려야 하는데…….”
“내가 전해 줄 테니 자요. 레슬리 양.”
생각보다 더 약 효과가 좋은지 정말 순식간에 쏟아지는 잠에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런데 지금 자면…… 아까 그 꿈을 또 꾸지 않을까.
졸음과 싸워 힘겹게 눈을 뜬 레슬리는 공작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옆에서 앉아 따스하게 자신을 바라봐 주는 사람을.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주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졸음에, 약에 취해 공작을 잡기 위해 뭔가 말을 흘렸다.
“공작님, 우리는 계약 관계인 거지요……?”
그런 레슬리를 셀바토르 공작은 귀찮은 기색 없이 웃으며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계약된 관계지.”
“그렇구나……. 다행이다.”
라일락빛 눈동자가 졸음에 잠기는데도 레슬리는 안간힘을 써 가면서 눈을 뜨고 있었다.
“책……에서 봤어요. 계약은…… 꼭 지켜야 하는 약속이라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을 계약이라고 한다고 했어요…….”
아아, 그래서였구나. 공작은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저 작은 게 계약이라며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공작님은…… 계약에 따라서 제 편인 거지요……? 저를 불 속에 안 넣을…….”
“그래요, 레슬리 양. 나는 레슬리 양과의 계약에 따라서 그대 편이에요.”
거기까지 말한 공작은 손을 뻗어 레슬리의 눈을 가렸다. 거칠고 굳은살이 박인 손이지만, 따스했다.
“그러니까 푹 자요, 레슬리 양.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줄게요.”
그 말에 미소 지은 레슬리는 바로 깊은 잠에 빠졌다.
약속대로 레슬리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준 셀바토르 공작은 방을 빠져나와 작게 한숨지었다. 그런 셀바토르 공작을 부르며 베스라온이 다가왔다.
“어머니.”
“손은?”
“사제에게 보였더니 금방 나았습니다.”
그러더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제 손을 쫙 펴 보였다. 그 손을 본 셀바토르 공작은 살짝 미소 지으며 베스라온의 어깨를 토닥였다.
“잘했다, 베스라온.”
다시 작게 한숨 쉬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작게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페라도 후작은 선을 넘어 버렸어.”
“제대로 미친 것 같더군요. 마차에 불을 지를 줄은 몰랐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예전에 말씀하셨지. 스페라도 가문의 차남과 차녀는 이상하게 일찍 죽는 아이들이 많다고.”
그 말에 베스라온이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최근에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고, 할아버지께서도 예전 일이라고 하셨으니. 거기다 남의 가문 일을 우리가 신경 쓸 일도 없었고 말이야.”
흐음. 작게 숨을 내쉬며 셀바토르 공작은 볼을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그게 걸렸단 말이지…….”
그래, 그래서 저 작은 아이를 집 안에 들어오게 했었다. 어릴 적, 할아버지께서 스쳐 지나가듯 한 말이 너무도 마음에 걸려서.
“내가 스페라도 후작가에 다녀와야겠다, 베스라온.”
***
오늘은 신전에 가서 기도를 올리는 날이었다. 늘 평소와 같이 어여쁜 드레스를 골라 입고 머리에는 자신의 밀색 머리카락을 돋보일, 보석 꽃으로 장식된 리본을 달고, 자신의 눈 색을 닮은 에메랄드가 달린 신발을 신었다.
신전에는 평민뿐만 아니라 고위 귀족도 방문하는 곳이기에 엘리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자신은 언제나 최고로 아름다워야 하니까.
그렇게 치장을 마치고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마차에 올라타려는데 레슬리 홀로 다른 마차에 올라타는 게 보였다. 같이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게 좋아 엘리는 살짝 눈을 흘기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신전을 향해 잘 가던 마차가 중간 지점에서 갑자기 멈춰 서더니 몇몇 하인들이 마차로 몰려들었다. 전부 익숙한 얼굴의 하인들이었는데, 하인 중에서도 힘이 센 사내들만 몰려 있었다. 거기다 다들 도끼를 한 자루씩 들고 있었다.
도대체 저건 뭐 하는 거지? 엘리가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멈춘 마차에 몰려든 하인들 그리고 꽉 쥐고 있는 도끼. 게다가 후작이 마차 창문으로 건넨 종이를 확인하자마자 그들은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 사라졌다.
“여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스페라도 후작 부인이 불안하다는 듯 라일락빛 눈동자를 자신의 남편에게 고정했다.
“별일 아니야. 이제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거다.”
“신전은요, 기도는요!”
“하루쯤 빠진다고 별문제 없잖아?”
그러더니 스페라도 후작 부인이 뭐라 하기도 전에 마부석 쪽 벽을 두들겼다. 그러자 바로 마부가 말을 돌려 후작가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마 사전에 마부에게 아버지가 언질을 준 듯 보였다.
“당신! 제발 말 좀 해요. 도대체 요즘 왜 이러는 거예요! 그 아이 편이나 들지 않나, 갑자기 신전 방문하러 나왔다가 아무 말도 없이 되돌아가질 않나. 거기다 아까 그놈들은 왜 부른 거예요? 그 흉흉해 보이는 도끼는 또 뭐고요!”
잠시 눈물까지 글썽이며 자신을 노려보는 후작 부인을 덤덤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 쉬고 웃어 보였다. 피곤함이, 귀찮음이 묻어 있는 미소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예전처럼 더없이 다정했다.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 나 혼자 잘되자고 이러는 거 아니잖아. 우리 스페라도 가문을 위해서, 당신과 엘리를 위해서 내가 이러는 거야. 도끼는 불을 대비해 들게 한 거니, 무서워할 필요 없어.”
후작이 부인을 달래며 스페라도 가문으로 돌아가는데, 같이 출발한 마차 한 대는 계속 신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문의 인장조차 박히지 않은 작은 마차. 도끼를 들고 있던 남자들 그리고 아버지가 말한 불.
분명, 레슬리가 혼자 탄 마차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풍겼었지.
“……설마.”
“응? 아가, 뭐라고 했니?”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고 있던 후작 부인이 엘리를 바라보았지만,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 엘리는 제 어머니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머니.”
그리고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하녀들도 모르게 길거리로 나왔다. 저택에 있는 하인들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알아챌 테니까.
급하게 가져온 남색 망토를 뒤집어쓴 엘리는 후작가를 빠져나와 큰길로 내달렸다. 그리고.
“혹시 기사님이신가요?”
한 무리의 사람들을 향해 소리 지르듯 말했다. 평범한 일반 복장이긴 했지만,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보고 말을 건 것이다.
용병이나 다른 직업의 사람일 수도 있었지만, 검을 차고 있는 사람이라면 늘 기사로 알고 있던 엘리는 간절하게 다가갔다. 비록 맨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남자가 무서워 잠시 주춤했지만, 그 남자 뒤에 서 있던 여자가 웃으며 맞다고 말해 주어 용기를 내었다.
엘리는 그들에게 전부 이야기했다. 신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마차가 불타고 있노라고. 기사들을 재촉하느라 조급한 마음에 이상한 말도 내뱉었지만, 다행히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리고 그대로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래, 난 잘한 거야.”
잘……한 거겠지? 잠시 숨을 고르던 엘리는 썼던 남색 망토를 아무 상자에나 거칠게 집어넣었다. 어서 이 흔적을 숨겨야 할 것 같았다. 상자의 문을 닫자마자 그녀의 전속 하녀 중 한 명이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왔다.
“세상에, 아가씨. 지금 밑에선 난리가 났어요.”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후작님이 단단히 화가 나셔서 집안이 아주 뒤집히고 있어요.”
그 말에 엘리는 주저 없이 방을 나서서 아버지의 집무실이 있는 밑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절반쯤 내려가자마자 분노에 가득 찬 아버지의 목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 이 쓸모없는 것들아!”
그러더니 뭔가가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 뒤를 미약한 비명이 뒤따랐다. 엘리를 따라온 하녀는 겁을 먹고 덜덜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리는 아무 반응 없이 복도에 흩어지는 아버지의 말들을 귀담아들었다.
“그래서 어디 갔어? 그 아이는 어디로 갔냐고!”
“크악! 소, 손! 내 손이…….”
“대답하라고!”
질문에 답할 시간도 없이 가죽끈으로 남자를 내리치는 소리와 비명이 다시 울려 퍼졌다. 울먹임이 뒤섞인 미약한 목소리가 낮게 들려와 엘리는 몸을 낮추고 더욱 집중해 귀를 기울였다.
“그, 그…… 그 린체의 기사들이라고 했습니다. 덩치 큰 놈이 자신을 베스라온이라고 했습니다요……. 베스라온 라엔 셀바토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주인님, 그만, 제발…….”
덩치 큰 사람? 셀바토르? 엘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셀바토르라면 공작가가 아니던가?
‘그 정도 귀족 집안이라면 아버지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곳이잖아?’
아버지가 쉽게 건드릴 수 없는 곳은 이 제국에서 몇 곳 되지 않았다. 자신이 그런 가문의 사람에게 우연히 부탁했다니. 나중에 일이 터지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 전에 레슬리 고것은 이 저택으로 돌아오려고 하지 않을 거야.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요즈음 엘리는 늘 악몽을 꾸고 있었다. 언제나 사랑받던 제 자리에 레슬리가 앉아 있는 꿈이었다.
언제나 푸석푸석해 보이던 은발은 윤기가 흘러 마치 달빛과도 같았고, 생기가 돌기 시작한 눈은 더없이 반짝거렸다. 자신은 입어 보지도 못한 값비싼 드레스에, 보석 목걸이와 보석 핀으로 머리를 예쁘게 올린 레슬리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행복한 듯 웃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늘 레슬리가 있던 딱딱하고 추운 곳에 있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밀색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해져 만지면 바스러질 것 같았고, 눈 밑은 거뭇거뭇했으며 볼은 홀쭉해져 볼품없었다.
자신의 애처로운 모습에 머리를 쥐어뜯는 엘리 앞으로 어느새 레슬리가 다가와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작고 어여쁜 입술이 열리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안녕, 제물?’
“시끄러워!”
“엘리 아가씨?”
엘리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뒤에 서 있던 하녀가 당황해 그녀를 작게 불렀다. 아무래도 지금 여기에 엘리와 하녀가 있다는 사실을 후작이 알면 좋을 것이 없었으니까. 다행히도 엘리의 목소리는 더 큰 후작의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하지만 엘리는 한참이나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자꾸만 꿈이 현실이 되어 가는 듯했다.
“고것은 돌아오지 않으려고 할 거라고!”
후작의 외침에 엘리는 저도 모르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차라리 돌아오지 마. 그게 너도나도 사는 일이니까. 엘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돌아가자.”
그렇게 숨을 고른 지 한참 만에 엘리는 몸을 돌렸다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집사와 마주쳤다. 언제나 무덤덤한 얼굴을 유지하던 집사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엘리 아가씨.”
“무슨 일이야? 지금 아버지께 가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닐걸.”
엘리의 말을 대변해 주듯 다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잠시 집무실 쪽을 바라보던 집사가 입을 열었다.
“셀바토르 공작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셀……바토르 공작이?”
엘리는 놀라 집사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아까 레슬리를 데려갔던 사람이 셀바토르가의 사람이라고 했었지.
“왜, 왜?”
“그걸 저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저 후작님과 할 말이 있으시다는 말씀 외에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으시더군요.”
“지금 공작께서는 어디 계시지?”
“장미 응접실에 계십니다.”
집사의 말을 듣자마자 엘리는 재빠르게 장미 응접실 쪽으로 뛰었다. 언제나 사뿐하게 걸어 다니던 엘리가 뛰는 모습에 사용인들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지금 엘리에게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장미 응접실에 도착하자마자 엘리는 한 여자와 마주쳤다. 길고 검은 머리를 늘어트린 여자는 엘리가 여태 본 그 어떤 여자보다 아니, 웬만한 남자들보다도 키가 컸다.
거기에 눈길을 사로잡는 게 하나 더. 얼굴의 절반이 하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서 암녹색 눈동자가 빛났다. 가면과 큰 키 그리고 검은 머리와 암녹색 눈동자. 소문으로 듣던 셀바토르 공작이 분명했다.
검은 모피를 두르고 있던 셀바토르 공작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가볍게 창문틀을 톡톡 두드리고 있다가 조금 늦게 문 앞에 서 있는 엘리를 바라보고는 미소 지었다.
“제국의 고결한 수호자, 셀바토르 공작님을 뵙습니다.”
그 미소에, 시선에 포식자 앞에 선 초식 동물이 된 기분이 들었지만, 엘리는 빠르게 환하게 웃으며 아름답게 셀바토르 공작에게 인사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이 더러워 보이긴커녕 오히려 막 운동을 끝낸 아이처럼 생기 있어 보였다. 확실히 엘리는 아름다운 아이였다.
“나도 만나서 반가워요, 엘리 데아른 스페라도 양.”
인사를 나누더니 셀바토르 공작은 천천히 엘리에게 다가왔다. 천천히 아무런 악의 없이 다가오는 게 분명한데도 다리가 알 수 없는 힘에 붙잡힌 듯 꼼짝하지 않았다.
또각. 바로 엘리의 앞에서 셀바토르 공작이 멈춰 섰다. 그리고 말없이 그녀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스페라도 후작 영애.”
“올해 열다섯이 되었어요.”
엘리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도대체 왜 온 것인지, 그리고 데려간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버지가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알아보고 싶은데, 가능할까. 공작은 제1황자보다 더 만만치 않다.
“크네요. 나이에 비교해 커 보여요.”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데, 갑자기 들려온 셀바토르 공작의 말에 엘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부끄럽다는 듯 뺨을 붉혔다. 그리고 더 눈꼬리를 접어 보였다.
“종종 그런 소리를 들어요. 나이에 비교해 성숙해 보인다고,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다들 칭찬해 주셔서……. 언제나 부끄러워요.”
“그래요.”
그런 엘리를 보며 공작이 귀엽다는 듯 작게 웃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섞인 꺼림칙한 웃음이었다. 뭐지? 엘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나저나 스페라도 후작께서는 조금 늦나 봐요.”
“네, 조금 늦으실 것 같아서 제가 내려왔답니다. 아버님이 내려오시기 전까지 말동무를 해 드리고 싶어요.”
아마 집무실에서 그 난리를 피웠으니 옷도 갈아입고 조금 늦게 내려올 것이다.
“그래요……. 그렇담 스페라도 후작 영애, 말동무보다는 나에게 저택을 구경시켜 줄 수 있나요? 굉장히 고풍스러운 저택이라 꼭 구경하고 싶네요.”
셀바토르 공작이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는 엘리를 보며 다시 웃음 지었다.
***
“이런,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셀바토르 공작님.”
뒤늦게 장미 응접실로 나타난 후작이 사람 좋아 보이는 멀끔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그리고 차를 마시고 있는 공작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공작을 오래 이 저택에 두지 않겠다는 듯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제 딸아이의 일 때문에 오신 거군요. 제가 먼저 가야 했는데, 상황을 파악하느라고 늦어 버려 셀바토르 공작님에게 큰 결례를 범하게 되었군요. 귀한 발걸음을 낭비하게 해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언제나 말은 번지르르한 사내다. 그렇게 생각하며 셀바토르 공작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좋은 찻잎을 잘 우려냈는지 향긋한 냄새가 입안 가득 퍼졌다.
“제 하인들이 그러더군요. 마차에 붙은 불을 보고 겁에 질려 꼼짝을 못하고 있었는데 듬직한 기사들이 다가와 구해 줬다고요.”
거기까지 말한 스페라도 후작이 낮게 혀를 찼다.
“언제나 방화 같은 상황에 대비할 수 있게 아랫것들을 교육했지만, 언제나 금방 까먹어 버리죠. 다시 배우고 익힐 정도로 부지런한 놈들이 없어 이 사달이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랫것들이 다 그렇지요. 그 멍청한 것들을 대신해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셀바토르 공작님.”
자신의 책임은 조금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모든 걸 다 다른 놈들에게 떠밀면서도 자비로운 주인인 척 행동하는 스페라도 후작을 셀바토르 공작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제 딸아이는 어디…….”
“스페라도 후작.”
더는 듣고 있기 힘들다는 듯 셀바토르 공작이 그의 말을 끊었다.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폭신한 소파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댄 공작을 스페라도 후작은 의구심에 가득 찬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 아이가 당신의 딸이 맞습니까?”
“예?”
갑작스러운 말에 스페라도 후작은 잠시 미간을 좁히다가 바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이 아까 만난 스페라도 후작 영애의 모습과 똑 닮아 공작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럼요. 무슨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아이는 제 둘째 딸이 맞습니다.”
“스페라도 후작은 작은딸을 가문의 인장도 찍히지 않은 마차에 태우나 봅니다.”
혹시나 일어날지 모르는 사태를 대비해 가문의 인장이 없는 마차를 대비시켰던 건데, 그게 오히려 스페라도 후작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위태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 아이가 같은 마차를 타고 싶지 않다고 하는 바람에 급하게 작은 마차를 태운 겁니다. 공작께서도 두 아이를 키워 보지 않았습니까? 으레 그 나이쯤 되면 부모의 말에 반항하는 법이지요.”
흐음. 잔기침을 하며 목을 정리하더니, 뻔뻔스럽게 스페라도 후작은 말을 이어 갔다.
“거기다 마차 역시 그 아이가 고른 겁니다. 고집이 너무 강한 아이라 저도 종종 애를 먹습니다.”
“아름답게 잘 만들어진 다섯 대의 마차를 그 어린아이가 전부 무시하고, 가장 작고 기름을 먹어 악취가 풍기는 마차를 선택했다고요.”
베스라온은 마차에 기름이 먹여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공된 나무가 그렇게 쉽게, 그리고 그렇게 빠르게 불타오를 수 없었다. 그 말을 넌지시 흘리자 후작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져 갔다.
“후작, 아름다운 따님을 두었더군요. 늘 황궁에서 자랑하실 만한 따님이었어요. 엘리 데아른 스페라도 양 말입니다.”
갑자기 공작이 웃으며 엘리의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후작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저는 스페라도 영애와 이 저택을 구경했습니다. 셀바토르 공작저 아니, 황실 못지않게 고풍스럽고 우아한 저택이에요.”
그러더니 이번엔 저택의 칭찬을 늘어놨다. 그 칭찬에 후작의 얼굴에는 우쭐거림이 올라왔다.
“뭐, 그렇지요. 저희 스페라도 저택은 역사가 아주 깊은 저택이니까요.”
우쭐거림이 그대로 묻어나는 스페라도 후작의 말을 뒤로하며 셀바토르 공작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이렇게 큰 저택에 아이의 방은 하나니.”
“……?”
“후작은 언제나 황궁에서 그랬지요. 자신처럼 자식 사랑이 지극한 아비는 드물다고. 스페라도 후작 영애를 위해 드레스 가게를 하나를 전부 구매했다는 소문을 듣고 저도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후작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지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칭찬이 나왔다가 묘하게 비난이 들어온다. 스페라도 후작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그……랬었지요.”
“예. 거기다 스페라도 후작 영애를 위한 옷 방에, 서재에, 아름다운 온실에……. 너무도 많은 것이 이 저택에 있었어요. 그런데 다른 아이를 위한 것은 하나도 없더군요. 나는 이 저택을 돌아다니며 다른 아이의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를 발견하지 못했어요. 마치 이 저택에 사는 아이는 단 한 명인 것처럼 말이죠. 참 이상하지 않나요, 후작?”
이제야 공작의 의미를 눈치챈 후작이 까득, 이를 갈았다. 그와 동시에 훅 낮아진 후작의 목소리가 응접실에 흘렀다.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는 푸른 눈에는 독기가 품어져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처음 했던 말을 그대로 하고 싶은 겁니다. 트라 베쉬 스페라도 후작, 정말 그 아이는 당신의 딸이 맞나요?”
독기가 흐르는 푸른 눈을 셀바토르 공작은 암녹색 눈동자로 내려다보았다.
“다른 용도로 키워진 게 아니라?”
갑자기 튀어나온 한마디에 스페라도 후작의 눈이 커다래졌다.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는지, 그는 자신의 바지춤에 손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런 괴상한 소리를 어디서 주워들으신 건진 모르겠지만…….”
“제가 어릴 적 저희 조부께서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스페라도 가문에선 이상하게 둘째와 셋째들이 어린 나이에 죽는다.’라고 말이에요.”
스페라도 후작의 말을 잘라 버린 셀바토르 공작이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전부 은발이라고 했습니다.”
거짓이다. 할아버지께서도 거기까지 관심을 가진 건 아니셨기에 셀바토르 공작은 정말로 그 아이들이 전부 은발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신전에 가서 스페라도 가문의 책을 찾아보면 탄생 기록에 있을지도 몰랐지만, 그녀는 굳이 그걸 보지 않고도 대강의 사정을 유추할 수 있었다.
늘 후작은 딸의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을 자랑했었다. 그리고 자신도 스페라도 가문의 색인 아름다운 밀색 머리카락이라며 말을 덧붙였었다. 그런 집안에서 레슬리는 홀로 은발이었다. 그리고 잠든 레슬리의 곁을 지키며 들은 한마디.
‘부, 불……. 살려 주세요! 제발……. 무서워. 불……. 무서워.’
상당히 강한 약을 먹었음에도 레슬리는 푹 잠들지 못하고 악몽에 쫓기는 듯했다. 보다 못한 한 하녀가 손을 꼭 잡아 주고 작게 자장가를 노래하자 그제야 조금씩 다시 깊은 잠에 들기 시작했다. 마음에 큰 상처가 남은 듯 보였다.
마차 사건으로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공작은 그 상처가 훨씬 더 전에 생긴 것으로 짐작했다. 공작이 처음 레슬리를 만났을 때부터, 레슬리는 이미 한 번 죽음의 고비를 넘긴 사람 같았으니까. 그래서 작게 도박을 걸어 스페라도 후작에게 던진 것인데. 후작이 제 밑천을 드러냈다.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셀바토르 공작.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분노로 몸을 떠는 남자,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셀바토르 공작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도 잘 몰라, 후작. 하지만 하나는 알지. 그대가 레슬리 양을 딸이 아니라 다른 용도로 키웠으며, 몇 번이고 죽이려고 한 것을 말이야.”
이 이상 이 저택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걸치고 온 모피를 집어 든 셀바토르 공작은 아직도 몸을 떨고 있는 스페라도 후작 앞으로 걸어갔다.
건강함에도 몸이 좋지 않다며 전쟁에도 사람을 사서 보낸 남자, 가벼운 미끼에도 잘 걸려드는 후작을 보며 셀바토르 공작은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내 딸이야. 자식은 응당 부모의 것이지. 그러니까 내가 그 아이를 어떻게 하든 그건 내 마음이야!”
“별의별 개소리를 다 듣는군. 올해 들어 본 말 중에서 가장 거지 같은 소리야.”
공작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후작이 최대한 몸을 뒤로했지만, 곧 소파 등받이에 막혀 버렸다. 자신의 집에서 질 수 없다고 생각한 그 마지막 가엾은 자존감이 그를 도망가지 못하게 잡아 주었다.
“당장 그 아이를 가져오지 않으면, 기사들을 이끌고 셀바토르 공작저를 쳐들어가겠다! 그리고 결투를 신청해 그대를 죽이겠어!”
“부디 그래 주길, 스페라도 후작.”
어느새 바로 앞에 선 셀바토르 공작이 팔을 뻗었고 스페라도 후작은 눈을 감고 움찔거렸다. 하지만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슬그머니 눈을 떴다. 셀바토르 공작의 팔은 스페라도 후작을 지나 소파의 등받이를 잡고 있었다.
으드득! 원목으로 만들어진 것이 가엾은 소리를 내며 우그러들기 시작했다.
괴물 같은 악력으로 그걸 부수고 있는 셀바토르 공작의 얼굴은 더 없이 평온해 보였다. 그 힘을 확인한 스페라도 후작의 눈이 미친 듯 떨리고 있었다.
요즘 같은 평화의 시대에서는 셀바토르 공작가 특유의 힘을 사용할 일이 별로 없었고 이 남자는 전쟁에서 귀족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남자였다. 맨 먼저 도망가고 가장 안전한 자리에서 싸우던 이들을 욕하며 훈수나 두던 남자. 그러니까 오늘이 스페라도 후작이 셀바토르 공작가의 힘을 본 첫날이었다.
“분명 그날은 즐거울 거야. 내가 직접 맨손으로 그대의 목을 부러트릴 거니까.”
셀바토르 공작은 방금까지 화려한 문양이 박혀 있던 소파 일부를 스페라도 후작 눈앞에서 뿌려 주며 눈을 접으며 웃음 지었다.
“부디 그날을 온 마음을 다해 기다리고 있겠어요, 스페라도 후작.”
그 말을 끝으로 셀바토르 공작은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섰다. 잠시 지나자 다시 스페라도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규가 섞인 듯한 목소리가 스페라도 후작가를 가득 메웠다. 셀바토르 공작을 배웅하기 위해 입구에 서 있던 집사마저 당황해 주변을 살필 정도였다.
“재판, 재판을 걸 거다! 황제 폐하에게 말해 재판을 걸어서 내 것을 되찾을 거야!”
그 절규를 들으며 셀바토르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안에 남은 가루를 툭툭 털어 버렸다. 스페라도 후작은 불쌍할 정도로 나약하고 뒤틀린 남자였다.
“재판이라, 그것도 즐겁겠네.”
가엾은 후작은 아무래도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 자신은 이 제국에서 몇 안 되는 포식자라는 사실을, 그리고 스페라도 가문은 이미 힘을 다해 버린 가엾은 사냥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곧 다가올 즐거움과 딸이 생긴 즐거움으로 셀바토르 공작은 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