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29)

#1

“아버지!”

레슬리의 간절한 외침은 저 다리 끝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닿지 않았다.

“어머니, 엘리 언니……!”

연이어 가족의 이름을 전부 불러 보았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불구덩이로 끌려가는 레슬리를 그저 덤덤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시선은 칼날이 되어 레슬리의 작은 몸에 날아와 꽂혔다.

양쪽 절벽을 잇는 다리 가운데 놓인, 검은 불꽃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타오르고 있는 정자로 한 발 한 발 레슬리는 끌려가고 있었다.

“아흐흑…….”

다리 난간을 잡고 버텨 보려 했지만, 얇은 난간은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했다.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몸에, 매질로 약해진 다리로 버티는 건 애당초 무리였다.

거기다 ‘오늘’을 위해 아름다워야 한다며 어머니가 몇 날 며칠을 약간의 수프와 물만 먹인 탓에 하인의 힘에 속수무책이었다.

‘아름다워야 해. 알겠니? 아름다워야 한다고.’

끊임없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어머니를 보며 레슬리는 무언가 전환점이 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드디어 나를 좋게 봐 주시는 건 아닐까? 가능성은 적었지만, 달콤한 희망을 작게 기대했다. 그런데 그 오늘이 설마 엘리 언니를 위한 제물이 되는 날일 줄이야.

“어머니……. 아버지…….”

다시 외쳐 보았지만, 역시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되레 이젠 짜증 섞인 눈길이 날아와 꽂혔다.

“……뭐 하는 거람.”

화려한 레이스로 장식된 부채를 팔랑이며 엘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한마디를 내뱉자, 스페라도 후작이 큰 목소리로 레슬리를 끌고 가는 하인들을 독촉했다.

“어서 집어넣어! 이러다가 해가 진다면 네놈을 저 불구덩이에 집어넣겠다!”

“아, 안 돼. 제발, 제발요…….”

익숙한 얼굴의 하인을 애처롭게 바라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녀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레슬리 아가씨.”

그렇게 말하면서도 목에 걸린 줄을 잡아당기는 하인의 무식한 힘에 레슬리는 반항할 수 없었다.

지이익― 마지막 수단으로 바닥에 손톱을 박아 보았으나 돌덩이에 손톱이 박힐 리가 만무했다. 오히려 괴상한 소리만 울려 퍼져, 다리 건너편에 서 있던 세 사람의 미간에 주름만 만들어 냈다.

“순순히…… 따라오십시오!”

싫어! 불구덩이가 가득 찬 정자 입구에 도달한 레슬리는 마지막 힘을 내 필사적으로 기둥을 끌어안았다.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엘리 언니만을 위한 삶이었어도, 오직 자신의 존재 이유가 언니였어도. 그래도.

“살고 싶어요…….”

울먹임은 결국 목을 타고 흘러나왔고 간절함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발…….”

결국, 하인은 거칠게 정자 안으로 밀어 넣던 손을 멈추었다. 겨우 열두 살이 된 아이가 살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모습에, 자리에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개를 돌렸지만, 후작과 후작 부인 그리고 엘리는 제외였다. 오히려 그 모습은 그들의 화를 돋웠다.

“쯧, 쓸모없는 것들.”

옆에 서 있던 경비병에게서 창을 빼앗은 스페라도 후작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버지…….”

자신을 간절히 바라보는 레슬리를 보며 후작은 거침없이 창을 높게 들었고.

퍽! 창끝으로 제 딸을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네 언니를 위해 죽는 게 다 너를 위한 길인 것도 모르고! 한심한 것, 쓸모없는 것 같으니라고!”

혹시나 자신을 데리러 오는 건 아닐까. 혹시나, 혹시나 하고 가지고 있던 미약한 희망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함께 사라졌다.

“꺄아악!”

마치 기다리고 있다는 듯 자신을 잡아끄는 불길에 레슬리는 비명을 내질렀다. 이대로 죽나? 엘리 언니를 위한 제물이 돼서, 이렇게 죽어서, 영원히 이 불길 속에 살게 되는 걸까.

‘싫어!’

레슬리는 마지막 힘을 짜내 도망가려고 몸부림쳤지만, 치렁치렁한 옷에 붙은 불길은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몸에 걸린 수많은 리본은 순식간에 불길을 머금고 세차게 타올랐다. 전신에 불길이 몰려들고 뜨거움과 고통에 정신을 놓으려 할 때, 갑자기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얘, 너라도 도망가.」

뭐지, 이건 무슨 소리지? 생각을 가지기도 전에 불 속에서 나타난 작은 손들이 그녀를 떠밀었다.

삐걱. 몸부림치는 레슬리의 미약한 힘과 불 속에 들어온 레슬리를 밀어내는 그 힘에, 정자를 감싸고 있던 거대한 유리창 하나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악취미적으로 제물이 죽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려고 설치된 거대 유리창은 생각보다 손쉽게 틈을 벌려 주었다.

그리고 그 틈으로 마른 레슬리의 몸이 빠져나갔다. 며칠간 수프와 물만 먹었던 것이 용케도 그녀를 살렸다.

“안 돼!”

레슬리의 마지막을 지켜보려던 가족들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은 자신의 막내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쓸모 있는 제물’이 쓸모를 다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안타까움과 절박함에 대한 비명이었다.

절벽을 가득 메우는 비명을 들으며 레슬리는 고통 속에서도 섧게 웃고 말았다.

그동안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던가? 언니를 위한 삶, 철저하게 언니를 받쳐 주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후작은 언제나 그녀를 쓰레기처럼 취급했고, 그녀는 그 이유조차 알 수가 없었다.

‘네 언니에게 말대꾸를 했다지. 쓸모없는 것. 오늘 밥은 없다. 네 방에서 나올 생각 마라.’

언제나 레슬리를 볼 때마다 지난 일을 트집 잡는 통에 일주일에 사흘은 식사를 걸러야 했다.

그녀를 괴롭히는 건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인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레슬리의 자존감을 긁어먹었다.

‘레슬리, 가정교사가 말하길 이번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지?’

‘아직 그 부분은 배운 곳이 아니라서요…….’

‘말대답, 말대답하지 마! 네가 그나마 네가 쓸모 있는 부분이 공부인데! 이렇게라도 네 언니를 받쳐 줘야지! 그럴 생각은 안 하고 저 놀기만 바빠서!’

그러면서 부채가 부러질 때까지 그녀를 때린 적도 많았다.

거기다 엘리 언니는 그런 집안의 분위기를 빠르게 파악하고 그녀를 괴롭혔다. 엘리가 어쩌다 넘어져도, 음식을 먹다 혀를 깨물어도, 수를 놓다 바늘에 찔려도, 소풍을 가기로 한 날에 비가 와도 그건 모두 레슬리의 탓이 되었다.

한 번은 레슬리가 해석한 신어를 가지고 모임에 참여했던 엘리가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왔다. 엘리가 잘못 답한 것이었지만, 그건 모조리 레슬리의 잘못이 되었다.

‘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창피 주려고 일부러 신어를 엉터리로 해석해서 나에게 준 거지?’

‘아, 아니에요. 언니 아니에요. 실수였어요. 정말이에요.’

제 실수는 아니었지만, 레슬리는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반항한다면 더 큰 벌을 받을 게 뻔했으니까.

‘실수이든 아니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란다, 레슬리. 내가 창피를 당했고, 그것만으로도 너는 벌을 받을 이유가 충분해. 네 가치를 다하지 못했잖니? 너는 나를 위한 것이니까.’

부모님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하며 머리카락을 잡고 마구잡이로 흔드는 탓에 뭉텅이로 머리가 뽑혔고, 레슬리는 머리 한쪽이 비어 버렸지만 억센 손아귀는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잘못했다고 수없이 빌고 빌어서 엘리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나아져야 레슬리는 조금 쉴 수 있었다. 한없이 작고 낡은 다락방에서.

분풀이를 위한 아이. 그게 레슬리였다. 어느 순간 언니를 위한 제물이 돼 버린 것 같지만.

‘바보 같았어.’

희망이라는 거, 가지지 말걸. 그랬다면 난 죽지 않았을 텐데. 곧 땅에 떨어져 죽을 텐데도 행복했던 순간은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잼과 버터를 듬뿍 바른 빵을 처음 먹어 본 기억만이 추억으로 떠올랐다. 그게 전부였다.

한없이 밑으로 떨어지는 감각.

눈물이 솟구쳐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레슬리는 눈을 감았다. 살고 싶다. 그 생각만이 레슬리의 머릿속을 지배했고, 그에 응답하듯 기묘한 어둠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작은 몸을 감싸 안았다.

쿠웅!

커다란 굉음과 함께 레슬리의 몸은 절벽 밑에 안착했다.

***

“…….”

눈을 뜨니 가장 낯익은 천장, 익숙한 방이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의 가장 좁고 작은 다락방인 레슬리의 방. 곰팡이와 먼지의 냄새가 훅 코에 닿았고 그게 제일 먼저 현실감을 일깨워 주었다.

살았구나. 살아남았구나. 레슬리는 자꾸만 흐르는 눈물에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무서운 경험이었고, 다신 겪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레슬리는 이번 일로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정말로 이 집안에서 가족이 아니었어.’

눈물이 절로 흘러 베개를 적셨고, 곧 이어서 끅끅거리는 소리가 작은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다.

참으려고 애써 봐도, 막으려고 입술을 깨물어 봐도 흘러나오는 소리에 레슬리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던가. 스페라도 후작가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엘리 언니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쳤었던가.

모든 희망과 품어 왔던 기대가 전부 산산조각이 나 심장에 꽂히는 듯, 가슴이 너무도 아려 왔다.

제물. 분명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제 손을 바라보았다. 돌로 만들어진 다리에 손톱을 박아 넣어 모든 손톱이 흉하게 깨져 있었다. 그 손으로 조심스레 등을 쓸자 욱신거리는 부분이 있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시퍼런 멍이 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스페라도 후작이 레슬리를 창끝으로 찔러 넣은 그 자국이었다.

그 모든 상처가, 그리고 아픔들이 레슬리에게 ‘너는 필요 없는 아이야.’라고 속삭였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 이상 부정할 곳도 희망을 가질 구석도 없어 레슬리는 한참을 베개에 얼굴을 박고 눈물을 흘렸다.

안쓰러운 울음소리가 분명 방문을 타고 흘러 나갔는데도 아무도 그녀의 방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홀로 울고, 울고 울다가, 눈물이 마른 후에야 레슬리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선택할 시간이었다. 여기에 남아 제물 취급하는 가족들과 같이 지낼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삶을 살 것인지.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마지막 눈물을 훔쳐 낸 레슬리는 두 손을 꼭 쥐었다. 다른 삶을 살자. 그게 레슬리가 내린 답이었다.

옛날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만큼 가족들의 사랑이 절실했고 그들만이 레슬리 세계의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로 레슬리는 가족들에게서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을 완전히 버렸고, 그 빈자리를 대신할 것을 찾았다.

어둠의 힘. 그것이 틀림없었다.

본디 르카디우스 제국의 고위 귀족들은 마력, 신력, 정령술 등 다양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했던 것이 스페라도 가문의 비법으로 보유하고 있던 어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스페라도 후작가에서는 어둠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고, 그렇게 후작가는 자연스레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힘을 가진 자가 나타나지 않은 지 100년은 넘었다고 들었는데…….’

그 힘이 어째서 자신에게 나타났는지는 몰라도 레슬리는 그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내가 들었던 목소리와 관련된 게 아닐까.’

너라도 도망가라며 자신을 밀어내던 또래들의 손. 분명 한두 명이 아니었지.

‘몰래 서고를 조사하면 알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언제 후작이 다시 자신을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을지 모르니 지금은 움직일 때였다. 자신을 불구덩이 속에 넣은 이유는 분명 엘리 언니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렇게 외쳤으니까.

쓴웃음을 지으며 레슬리는 팔을 들어 가장 먼저 불이 붙었던 왼팔을 바라보았다. 화상의 흔적. 그리고 그 위에 붕대가 어설픈 솜씨로 감겨 있었다. 제대로 상처를 가려 주지도 못하는 서툰 솜씨를 보아하니 하녀나 하인이 대강 감아 놓은 듯 보였다.

‘힘이 필요해.’

자신을 지켜 줄 힘이 필요했다. 아무리 강한 무력이 있어도 자신은 고작 열두 살이었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 자신의 아버지를 막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르카디우스 제국에서는 모든 아이는 부모의 보호하에 있어야만 했다. 무사히 도망치더라도 스페라도 후작은 그 법을 핑계로 자신을 다시 이 소름 끼치는 저택으로 끌고 들어올 게 뻔했다.

그러니 그 법과 후작에게서 자신을 보호해 줄 어른이 무엇보다도 간절했다. 스페라도 후작은 자신의 삶도, 죽음도 오롯이 엘리 언니를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믿고 있으니까.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못해도 6년은 걸렸고, 성인인 척 속이려 해도 적어도 4, 5년은 더 흘러야 했다. 그 긴 시간을 이 후작가에서 보낼 수는 없었다. 거기다 언제까지 자신을 살려 둘 거란 보장도 없었다.

‘방법을 찾아보자.’

잠깐 제 팔을 바라보던 레슬리가 얇고 찢어진 실내화에 발을 넣고 움직이자,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무언가가 한 발짝 따라왔다.

“……괜찮아.”

살짝 웃어 보이자 어둠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끼이익―

후작가의 딸이 머무는 방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름한 방을 나서 밑으로 걸음을 옮기니 그녀를 감싸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포근하다.

낡은 실내화로 밟기 미안할 정도로 깨끗한 복도와 비싼 유리로 달아 놓은 창. 그곳으로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엘리의 방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복도에 있는 조각상과 세밀한 초상화가 늘어났다. 더럽고 초라한 자는 발도 들이지 말라는 분위기가 풍겼지만, 거침없이 발을 내밀었다.

예전이었다면 이 복도에 발을 내디딜 생각 따위 하지도 못하고 빙 돌아갔을 것이다. 엘리 언니는 자신이 언니 방 앞 복도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화를 내곤 하였으니까. 더러워진다고 했던가? 자신이 있는 곳에 음침한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했었지.

‘그러고 보니, 나와 어울리는 힘이네.’

스페라도 가문이 그늘진 곳. 그리고 그곳에서 자라는 이끼 같은 음습한 아이. 그게 자신이었다. 언니는 따사한 빛, 그리고 레슬리는 그걸 좀 먹는 그늘. 그건 사람들이 중얼거리던 말이었으며 언제나 후작 부인이 자신에게 세뇌하듯 매일 하던 말이었다.

‘레슬리, 거울을 보렴. 거울 보고 너와 시선을 맞춰! 자, 이제 말해 보렴. 너는 어떤 아이라고?’

‘쓸모없는 아이…….’

‘그래, 그나마 네가 쓸모 있어지는 길이 어떤 길이라고 했었지?’

‘언니를 위해 사는 삶이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대답하면 아주 드물게 후작 부인은 자신을 보며 웃어 주었다. 그게 기뻐서, 어머니가 자신을 보며 웃어 준다는 거, 그것 하나가 너무도 기뻐서 그렇게 매일 거울을 보며 어머니의 뜻대로 쓸모없다는 말을 되새겼다.

그게 자신의 자존감을 깎아 먹고, 계속 억누르는 계기가 되는지도 모르고.

‘이젠 듣지도 말하지도 않을 거야.’

작게 고개를 까딱이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어디선가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년이라고요?”

부드러운 바람이 소리로 표현되면 이런 느낌이 들까 싶을 정도로 맑고 고운 목소리는 엘리의 것이었다.

“어떻게 제가 반년을 기다려요!”

“아가, 내 사랑스러운 엘리야.”

짜증을 부리듯 칭얼거리는 목소리 뒤로 곧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가 되어야 가장 적당한 날이 되는 걸 어떡하겠니. 네가 참아라.”

“아휴, 속상해요. 저 멍청한 건 왜 거기서 튕겨 나와서 제대로 불에 먹히지 않은 것인지.”

그 뒤를 이어 볼멘 목소리로 엘리가 투덜거렸다.

“덕분에 저는 어둠을 깨우치지 못했잖아요. 제물을 바쳐야 제가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텐데. 이런 희미한 힘만 사용한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이런 힘으로 가문의 부흥을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겠죠?”

……뭐?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살짝 열린 틈으로 방 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언니 엘리 역시도 어둠의 힘을 깨웠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미약한 힘이라 제대로 쓸 수조차 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저 애를 아끼시는 거죠, 그래서 일부러 살리신 거죠!”

누가 봐도 억지스러운 말이었다. 후작은 그녀를 창끝으로 눌러 찍으면서까지 불길 속에 집어넣지 않았던가.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말은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말이었다.

“아가, 저건 오직 너를 위해 낳은 자식이란다. 네가 혹여라도 힘을 깨우치지 못한다면 황궁에서 살 널 위한 시녀로, 네가 힘을 깨우친다면 네 힘을 증폭시킬 제물로 계획해서 낳은 거지.”

레슬리는 제 귀를 의심했다. 도무지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저게 힘을 깨달으면 어떻게 해요.”

“그럴 리가 없어. 자, 보렴. 너의 아름다운 밀색 머리카락도, 이 녹음을 담은 눈동자도, 모두 스페라도 가문의 특성이지. 하지만 저건 둘 중 하나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어. 가장 쓸모 있는 제물이 가지고 태어나는, 새하얗게 새어 버린 노파를 닮은 머리카락이지 않니.”

“……제가 아렌도 님을 만날 때 같이 만나게 하셨잖아요?”

제 아비의 말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엘리가 말을 내뱉었다.

“그건 저것이 제물이 되지 않았더라면, 네 뒤를 따라 시녀처럼 움직여야 하니 그랬던 거지. 황자님께 차를 엎는 바람에 사교계에 데뷔시킬 일은 없어졌다만.”

“사교계에도 내보내실 작정이셨나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니. 저건 너를 위한 거라니까. 사랑스러운 내 딸, 엘리야. 사교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다. 슬슬 드레스를 새로 맞출 때가 되지 않았니?”

그 뒤로 다정한 부녀의 대화가 들려왔지만, 레슬리는 도망치듯 다락방으로 올라왔다. 대화가 마치 괴물이 크르륵거리는 소리같이 역겨워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 탄생도, 내 삶도, 내 죽음도……. 다 엘리 언니를 위한 거였다고?’

그걸 계획해서 나를 낳은 거였어. 모든 게 다 처음부터 계획된 거였어. 만약, 엘리 언니가 힘을 깨우치지 못했더라면 황궁에 들어갈 엘리의 시녀 역할로, 그리고 엘리가 힘을 깨우친다면.

“제물로 나를 불에 넣을 계획이었구나…….”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들으니 그 충격이 너무도 강해서 레슬리는 간신히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흐르는 걸 느꼈다. 후작가의 인간들은 그녀에게 밑바닥을 보여 주었다. 절벽에 떨어졌을 때 느꼈던 분노가, 절망이 다시 한 번 그녀를 덮쳤다.

***

“이 아침부터 어디를 가는 거냐.”

레슬리는 덤덤한 눈으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머리까지 꼼꼼히 뒤로 넘기고 멀끔한 차림을 한 후작은 평범한 중년 귀족 남성이었지만, 레슬리의 눈에는 괴물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이젠 대답도 하지 않는 거야? 쓸모없는 것.”

자신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은 일은 아무 일도 아니지만, 제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건 중요한 일이라는 듯 후작이 낮게 혀를 찼다. 그 모습을 잠시 보고 있다가 레슬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쓸모없다고요?”

분명 사과를 할 줄 알았는데 되레 물음이 돌아왔다. 도망갈 줄 알았는데 한 발짝 더 다가오는 레슬리를 보며 후작은 눈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요. 잘 생각해 보세요, 스페라도 후작님.”

생긋,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어딘가 섬뜩한 미소에 후작이 오히려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제가 없으면 가장 곤란할 사람은 당신…… 아닐까요?”

“뭐, 뭐?”

평소와는 다른 행동, 다른 말투에 후작은 미간을 좁혔다. 죽다 살아나더니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네가 그 불길 속에 한 번 들어갔다 왔다고 태도가 건방져졌구나. 다시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릴 참이냐?”

까드득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후작이 낮은 목소리로 레슬리를 위협했다.

“그게 다 네 언니를 위한 일이고, 다 이 가문을 위한 일인데.”

“그럼 들어가 보세요.”

“뭐?”

레슬리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다시 후작의 말을 받아쳤다.

“들어가시라고요, 직접. 저는 이제 안 들어갈 거예요.”

거기까지 말한 레슬리는 이제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너, 거기 안……!”

후작은 말을 잇지 못하고 괴상한 신음을 흘렸다. 갑자기 까맣게 시야가 점멸한 탓이었다.

“흐어억.”

후작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비틀거리는 사이 레슬리는 문을 빠져나갔다. 후작의 눈을 가렸던 어둠이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왔다. 레슬리는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새하얀 마차에 거침없이 올라탔다.

“레슬리 아가씨, 이건 엘리 아가씨를 위한 마차입니다.”

하인과 마부가 당장 내리라는 듯 무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레슬리는 단 한 번도 혼자서 후작가에서 마차를 이용해 본 적이 없었다. 외출은 거의 용납이 되지 않았고, 어쩌다 한 번 나갈 수 있을 때는 후작가의 여식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걸어 다녔다. 그나마 신전에 기도를 올리러 갈 때에나 하인들이 타는 마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거기다 이 새하얀 마차는 엘리가 가장 아끼는 마차로 수도에 단 두 대뿐이었고, 엘리의 자랑이었다. 그녀 외엔 후작조차 감히 타지 못했던 마차였다.

그런데 레슬리가 당당하게 엘리를 위한 마차에 올라탄 것이다.

“알아. 신전으로 가자.”

가볍게 두 사람의 말을 무시한 레슬리는 머리를 정리해 귀 뒤로 넘겼다.

“미치셨습니까? 엘리 아가씨가 금방 나오실 거란 말입니다. 당장 내리…….”

하인 하나가 성급히 다가와 그녀를 끌어 내리려는 듯 팔을 꽉 잡았다. 엘리를 유독 잘 따르는 이 하인은 평소에도 레슬리를 거칠게 다루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잠시 그 하인을 바라보다 레슬리는 손을 들었다.

짝―

매서운 소리와 함께 레슬리의 팔을 잡았던 하인의 뺨이 그대로 돌아갔다. 평소에는 하인과 눈도 못 마주치던 레슬리의 행동에 뺨을 맞은 하인조차도 현실감이 들지 않는지 멍한 눈으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아프다기보다는 레슬리가 자신을 쳤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감히 지금 누구 팔을 잡는 거지? 거기다 그 무례한 태도는 누구에게 배운 거야?”

사실 이건 레슬리의 말대로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어떤 하인이 후작가의 영애 몸에 함부로 손을 올린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쓸모없는 레슬리였고 이 정도는 가볍게 용인되었었는데…….

정말 지금 눈앞에 있던 사람이 그들이 알던 그 쓸모없는 아가씨가 맞는 걸까?

며칠 전 가족 여행을 갔다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고 들었는데, 그때 머리를 다친 걸까.

라일락색 눈동자가 그저 말없이 바라보는 모습에 하인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언제나 멍하거나 아니면 울고 있던 눈동자는 어느새 사람의 고개를 조아리게 만드는 힘을 가진 듯 보였다.

“언제부터 저택의 하인들이나 마부가 주인을 무시하게 된 거지?”

“아, 저……. 하지만 레슬리 아가씨, 이건 엘리 아가씨를 위한 마차고…….”

“몰 생각이 없어 보이네. 좋아. 내가 직접 몰겠어.”

“네?”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옆에 서 있던 마부는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만약 레슬리가 직접 몰다가 사고라도 난다면, 그래서 엘리의 자랑인 이 새하얀 마차가 망가진다면 그 책임은 전부 마부가 물 것이 뻔했다. 물러설 생각이 없는 레슬리를 보며 마부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모, 몰겠습니다. 신전으로 가시는 거지요?”

“맞아,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마차가 출발하고 레슬리는 아늑한 마차 의자에 몸을 기댔다.

‘……사람을 때려 버렸네.’

레슬리는 잠시 제 손을 바라보았다가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늘 맞기만 하던 자신이 자신을 무시하고 손을 올렸던 남자를 걱정하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거기다 앞으로 자신은 더한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레슬리는 창문 커튼을 걷고 잠시 밖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좋은 마차를 타 보는 건 처음이라 조금 마음이 들떴지만, 곧 가라앉았다.

지금 레슬리는 제국의 괴물 공작이라 불리는 셀바토르 공작을 만나러 신전으로 가는 길이었고 그녀의 손에 자신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셀바토르 공작가. 제국이 건국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황실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셀바토르 공작가를 다들 뒤에서는 괴물들의 공작가라고 은밀하게 불렀다. 이유는 그 어떤 가문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마력과 무력 때문이었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자연스레 선봉에 설 정도로 강한 셀바토르 공작가의 무용담은, 한 번도 저택 다락방을 벗어난 적이 없는 레슬리조차 알고 있었다.

‘소문에선 초대 셀바토르 공작이 홀로 적진으로 들어가 왕의 목을 맨손으로 뜯어냈다고 했었지.’

거기다 스페라도 가문처럼 특색이 점점 옅어지거나 사라져 버린 고위 가문들과 다르게 셀바토르 공작가의 힘은 더욱더 강해지고 있었다.

현 셀바토르 공작 역시 얼굴에 화상을 입고 현역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떨친 무용담이 한두 개가 아니었고, 셀바토르 공작의 두 아들도 공작을 닮아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그럼 지금은 도대체 어느 정도라는 걸까.’

레슬리는 몸을 잘게 떨었다. 그런 힘이 더 강해지다니, 어느 정도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그런 공작을…… 내가 잘 설득할 수 있을까.’

절로 손에 식은땀이 나 레슬리는 몇 번이고 치맛자락에 손을 문질러 닦았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아니지.’

무서울 건 없지. 레슬리는 작게 후작과 후작 부인, 그리고 엘리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작은 웃음이 터지며 두려움이 점차 옅어져 갔다. 지금까지 자신은 인두겁을 쓴 진짜 괴물들 사이에서 살았으니까.

적어도 셀바토르 공작은 자신을 죽일 사람이 아니었다. 설사 적들의 목을 맨손으로 부러트려도, 불구덩이로 끌려 들어가기 싫어 기둥에 매달린 열두 살짜리 아이를 창끝으로 밀어 넣는 그런 괴물은 아니었다.

“아가씨, 신전에 도착했습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데 마부가 마침 신전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마차 문이 열리고 스스로 폴짝 마차에서 뛰어내린 레슬리는 어색하게 손을 내밀고 있는 마부와 눈이 마주쳤다.

‘아.’

내릴 때 잡으라고 손을 내민 거구나.

레슬리의 다락방은 정문이 보이지 않는 위치여서 후작 부인이나 엘리가 어떻게 마차를 타고 내리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거기다 이 일은 시녀나 하녀가 아니라 마부나 풋맨이 해 주는 일이었기에 누군가가 레슬리에게 가르쳐 준 적도 없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여기서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예, 아가씨.”

마부나 다른 사람이 볼까 봐 고개를 획 돌린 레슬리는 성큼성큼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예절을 좀 익혀야겠어.’

붉어진 볼을 두 손으로 가리며 레슬리는 중얼거렸다. 아예 익히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주로 그녀가 익힌 것은 한 귀족 집안의 영애가 익힐 만한 것이 아니라 시녀가 윗사람을 모실 때의 예절이었다.

후작 부부는 엘리가 황실에 들어갔을 때를 대비해 레슬리를 철저하게 엘리의 시녀로 교육했기 때문에, 그녀는 귀족가의 영애라면 누군가의 손을 잡고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얼굴을 굳힌 레슬리가 신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두 사람의 대화가 그녀의 귀를 스쳐 지나갔다.

“오늘 셀바토르 공작님은 대기도에 참석하지 않으셨나 봐요.”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걸까요? 대기도에 참여한 사람들 대다수는 공작님을 뵈러 일부러 발걸음을 했는데, 다들 아쉬워하더라고요.”

스쳐 지나가는 두 부인의 대화를 듣고 레슬리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셀바토르 공작가는 손님을 받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누군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찾아가도 대문은 늘 굳게 닫혀 있었다. 설사 그 사람이 고위 귀족일지라도. 심지어 황족조차 공작가에서 셀바토르 공작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늘 대기도에는 참석한다고 해서 여기로 왔던 건데.’

다음 대기도가 언제 열리더라? 한 달 후? 두 달 후?

‘괜찮아.’

레슬리는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반년이라고 했었다. 다음에 그녀를 제물로 바칠 날이 반년 후에 돌아온다고 후작은 엘리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은 적어도 6개월 동안은 레슬리는 후작가에서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나에겐 능력도 있고.’

믿을 구석이 있다는 게, 모두가 내 편이 아닐 때 나를 지켜 주는 힘이 있다는 게 레슬리를 안정시켰다. 그리고 아예 헛걸음을 한 건 아니었다. 공작을 만나는 것 외에도 다른 목적이 하나 더 있었다.

한 사제에게 조심스레 다가간 레슬리는 그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실례합니다. 저어, 스페라도 가문의 책을 확인하고 싶은데요.”

신전에서 보관하는 가문의 책. 그건 그 가문 일원의 장례를 적어 놓은 책이었다. 귀족의 장례는 주로 신전을 통해 이뤄졌기에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물론 후작가에도 남아 있겠지만, 레슬리가 그걸 보는 걸 후작이 허용할 리가 없었다.

“가문의 책 말인가요. 으음…… 실례지만 영애, 혹시 가문의 일원임을 증명할 만한 물건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녀의 용건을 들은 사제가 난감한 표정으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레슬리는 그 말에 멍하니 사제를 바라보았다. 가문의 일원임을 증명할 만한 거라니.

“가문의 일원임을 증명하지 못하시면 가문의 책은 열람이 불가합니다. 거기다…….”

사제가 다시 곤란하다는 눈빛으로 레슬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옷차림이라도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면 괜찮았으련만, 레슬리의 옷차림은 계절에 맞지 않은 얇은 옷감으로 만들어진 여름옷이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 맞춘 옷이라 소매는 깡총해 손목이 전부 드러났고, 치마에 달린 레이스는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혹시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물건을 가지고 계시는가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습니다. 가문의 인장이 찍힌 신분증명서라도 보여 주신다면 바로 열람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자신이 한 생각이 부끄러운 생각임을 깨달은 사제가 더 친절한 미소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가문의 인장이 찍힌 신분증명서? 구경도 못 해 본 물건이었다.

“제가 급하게 나오느라 깜빡 잊었는데, 마차로는 어려울까요? 거기에도 가문의 인장이 박혀 있어요.”

“마차 말입니까…….”

곤란한 듯 말끝을 흐리면서도 사제는 레슬리를 따라 마차를 세워 둔 신전 앞까지 따라 나왔다. 신전 앞마당에 세워진 여러 마차 중 단연 엘리의 새하얀 마차는 바로 눈에 들어왔다.

은은한 광택까지 흐르는 하얀 마차를 보고 사제의 얼굴이 단박에 밝아졌다. 거기다 마부석에 앉아 있는 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마부의 인사를 받은 사제는 웃으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엘리 데아른 스페라도 영애의 마차로군요! 저거면 충분하지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인 사제가 레슬리를 보며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럼 영애가 스페라도 가문의 차녀시군요. 건강이 아주 좋지 않아 저택 밖으로는 나오시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자신에 대해 저렇게 이야기해 놨구나. 레슬리는 쓴웃음을 흘렸다. 어찌 되었든 엘리의 마차 덕에 레슬리는 가문의 책을 볼 수 있었다. 방까지 내어 주면서 사제는 편히 보라고 두꺼운 책 몇 권을 내려놓았다.

“최근 기록은 제국어로 되어 있습니다만, 두 권은 고어로 적혀 있습니다. 해석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저는 고어를 해석할 줄 알아요.”

레슬리의 대답에 사제의 눈이 놀라움으로 동그랗게 되었다.

“세상에. 굉장히 어려 보이시는데 고어를 해석할 줄 아시다니. 굉장하시군요. 보통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 배우는 건데!”

그저 그런 칭찬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레슬리는 아까 마부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지 않았을 때보다 더 뺨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가, 감사합니다.”

칭찬이다. 마음 한편이 간질간질했다.

후작 부부는 엘리가 사교계와 황실 쪽에만 신경을 쓸 수 있도록 고어와 신학, 역사, 정치학 같은 어렵고 힘든 건 전부 레슬리가 배우게 했다. 시녀로 주어질 아이였으니 그녀의 지식은 곧 엘리의 지식이 된다고 믿고 혹독하게 그녀를 다그쳤다.

덕분에 레슬리의 지식은 웬만한 아카데미 고학년 못지않았지만, 후작 부부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칭찬 비슷한 말조차 해 준 적이 없었다.

오늘 처음으로 칭찬을 들은 레슬리는 붉어진 뺨을 잡고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사제는 편히 보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나섰다. 사제가 방을 나가고 숨을 고른 레슬리는 가까이 있는 책 한 권을 잡고 펼쳤다.

‘어린 나이에 죽은 사람들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제물 이야기. 그게 사실이라면, 그게 스페라도 가문의 비법이라면, 분명 이상할 정도로 이른 나이에 죽은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레슬리의 예상은 적중했다. 힘이 사라지기 시작한 최근 권에는 비교적 적었지만, 제국이 건설될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자신 또래의 죽음이 많았다.

[제국력 231년 4월 3일. 레아 스페라도 삼녀 열두 살의 나이에 실족사로 사망. 이틀간 장례식이 치러짐.

제국력 263년 1월 23일. 르튼 스페라도 차남 열다섯 살의 나이에 병환으로 사망. 이틀간 장례식이 치러짐.

제국력 301년 12월 7일. 페다른 스페라도 차녀 열한 살의 나이에 익사. 이틀간 장례식이 치러짐.]

실족사, 뱃놀이 중 익사, 강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치병……. 이유는 다양했지만,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은 아이들의 기록이 책을 뒤덮고 있었다.

‘거기다 장례도 단 이틀.’

귀족의 장례는 보통 일주일간 치러졌다. 스페라도 후작 가문 같은 고위 귀족은 보름까지도 그 기간을 늘려,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고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책에 적힌 기록은 단 이틀이었다. 책장을 더 넘기자 심지어 당일에 묻힌 기록도 찾을 수 있었다.

보다 못한 레슬리는 소리 나게 책을 덮어 버렸다. 살아서도 자신처럼 차별받고, 죽어서까지 그 차별이 뒤따라왔다. 스페라도 가문의 일원으로 가문을 위해 죽었지만, 제대로 된 장례는 단 하루, 이틀이었다. 평민들도 사흘인데!

이 수많은 사람은 분명 자신처럼 불구덩이에 던져졌을 것이다. 살고 싶다고 울부짖었지만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 그 살벌한 풍경 속에서 죽어 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힘을 각성한, 엘리 같은 이들을 위한 거였겠지.

‘……먼저 죽은 아이들이었을까?’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을 훔치며 불구덩이에서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얘, 너라도 도망가.’

그리고 자신을 밀었던 무수히 많은 작은 손들. 그중의 누군가가 더 작은 목소리로 ‘살아남아.’ 그렇게 말해 줬던 것도 같았다.

‘그리고 왜 내가 이렇게 강한 힘을 가지게 됐는지도 알겠어.’

원한. 제국이 건국되고 자그마치 1천 년간 제물로 바쳐진 아이들의 원한. 그게 틀림없었다.

“복수해 줄게.”

한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계속 훔치며 레슬리는 중얼거렸다. 꽉 깨문 잇새로 눈물에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드시 스페라도 후작가를 무너트려 너희의 복수를 해 줄게.”

셀바토르 공작을 만나야겠다는 레슬리의 바람이 더 강해졌다. 더는 책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힘이 점점 약해지기 시작한 때의 기록이 이 정도면, 건국 초기에 쓰인 것들은 죄다 제물로 바쳐진 아이들의 기록으로 덮여 있을 게 뻔했다.

책을 사제에게 돌려주고 레슬리는 조금 빠르게 걸었다. 눈물이 아직도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공작가로 가자.’

몇 날 며칠을 애원해서라도 셀바토르 공작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 그 순간.

‘아!’

레슬리는 휘청거렸다. 너무 빠르게 걸음을 옮긴 탓에, 눈물로 앞이 가려졌던 탓에 누군가 떨어트린 손수건을 발견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미끄러운 대리석 바닥 위에 놓인 손수건을 밟아 버린 레슬리는 속절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괜찮으십니까?”

아슬하게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누군가 레슬리를 받아 냈다. 놀란 레슬리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받아 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따스한 색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짙은 회색 머리카락이 햇빛에 섞여 바람과 함께 가볍게 흔들렸고, 태양을 닮은 듯한 황금빛 눈동자가 곧게 레슬리를 응시했다.

“다치시지 않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레슬리보다 두어 살 많아 보이는 소년은 가뿐히 레슬리를 일으켰다. 무릎까지 꿇고 드레스 자락에 붙은 먼지를 손수 털어 내 준 소년은 레슬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레슬리는 간신히 그 말 한마디를 꺼내고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소년이 귀엽다는 듯 작게 웃음 지었다.

“인사를 들을 정도로 어려운 일도 아녔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닦으라는 듯 자연스럽게 레슬리에게 자신의 손수건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손수건을 받아 든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이런 호의는 처음이라 생소했다. 어떻게 화답하면 되는 거지?

“바닥이 많이 미끄럽습니다. 부디 조심하세요, 영애.”

레슬리가 곤란해하는 걸 알았는지 소년은 작게 웃으며 레슬리를 지나쳐 사라졌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슬리도 몸을 돌려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레슬리!”

마차를 타고 후작가에 도착하자마자 레슬리의 예상대로 엘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레슬리, 내 사랑하는 동생!”

뭐?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레슬리는 빠르게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지만, 엘리가 먼저 그녀를 꼭 껴안았다. 얼굴에는 가증스러운 그 미소를 띤 채였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레슬리는 엘리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그제야 왜 엘리가 자신에게 이러는지 알 수 있었다.

검은 머리에 옅은 푸른 눈동자를 자신과 엘리에게 고정하고 있는 남자, 아렌도 페레 르카디우스. 제1황자인 그가 자신의 약혼녀를 보러 후작가에 와 있었다.

“갑자기 마차를 타고 나갔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오, 나의 사랑스러운 레슬리. 몸은 이제 괜찮은 거니?”

가식적이다. 역겨워. 레슬리는 자신을 껴안고 있는 엘리를 밀쳤다. 엘리의 몸이 휘청거리며 그녀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레, 레슬리…….”

힐끗, 시선만 뒤로 해 아렌도 황자를 바라본 엘리가 빠르게 눈물을 떨궜다. 그리고 보란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레슬리!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어쩜 나에게 이럴 수가 있니.”

엘리는 작게 몸을 떨더니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주저앉고는 살짝 고개를 들어 레슬리와 눈을 마주쳤다.

솔직히 아름다웠다. 최고급 에메랄드를 어떻게 가공해도 저 눈동자를 대신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런 눈에 눈물이 고이고 긴 속눈썹 사이사이로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새하얗던 뺨이 붉어지고, 흐려지는 목소리에는 안쓰러움이 뚝뚝 묻어났다.

그 모습을 보던 저택의 사용인들은 마치 자신이 부당한 일을 당한 듯 안타깝게 엘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곧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버러지를 보는 눈으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사용인들의 한숨 소리를 들은 엘리의 눈에 희열이 지나갔다. 엘리는 이 이후로 레슬리가 어떤 대접을 받을지를 잘 알고 있었다.

후작은 뺨을 때리고, 뒤이어 부인은 그녀에게 식사를 굶기라고 할 것이다. 억척스러운 하인들은 반항도 없는 레슬리를 질질 끌며 다락방에 가둘 것이고, 하녀들은 지나가면서 다락방 문을 두드리며 잠도 자지 못하게 밤새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그리고 엘리는 그걸 보며 가장 화려하고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짓겠지.

거기다 오늘은 아렌도 황자까지 와 있는 상황이었다. 엘리는 황자의 관심을 받고 레슬리는 평소보다 더 악랄한 벌을 받겠지.

사실은 저들도 레슬리는 잘못이 없으며, 잘못한 이는 엘리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엘리의 신경질을 피하기 위해 레슬리를 제물 삼아 그녀에게 던진 것이다. 그러면서 엘리 편에 붙어 레슬리를 괴롭히고 또 즐거워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엘리가 된 양 행동하며 레슬리를 깔보고 때리는 사람도 생겨났다.

아침에 레슬리가 뺨을 때린 하인이 그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후작이, 엘리가 매질을 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 남자는 매를 들었다. 그리고 레슬리를 보며 이렇게 말했었다.

‘명령이라 저희도 어쩔 수가 없네요. 다 아가씨 잘못이잖아요?’

그때 남자는 정말 즐겁다는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똑같아.’

너희도, 스페라도 후작가와 지금 자신을 안고 연기를 하고 있는 가증스러운 엘리와 똑같아. 그러니 이제 나도 너희에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거야.

“정말 저를 걱정하셨나요, 언니?”

레슬리는 몸을 숙여 그런 엘리와 시선을 맞췄다. 엘리의 에메랄드색 눈동자에 당황스러움이 서렸다. 평소의 레슬리라면 분명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리며 몸을 떨거나, 조금이라도 체벌을 약하게 하기 위해 엘리에게 맞춰 자신의 가짜 범행을 인정했을 것이다.

“그럼, 이 언니는 언제나 너를 걱정하고 있었지.”

하지만 엘리는 이 정도로는 본색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듯 더욱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레슬리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모든 걸 다 용서하겠다는 화사한 미소와는 다르게 엘리의 손톱이 레슬리의 마른 등을 파고들었다.

“세상에나.”

레슬리는 등에 파고드는 아픔을 느끼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더 작은 목소리로 엘리의 귀에 속삭였다.

“저를 아끼셔서 불구덩이에 처집어넣으셨군요, 엘리 언니.”

“닥쳐. 황자가 듣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야.”

자매가 서로를 토닥이는 훈훈한 광경이었지만, 주고받는 대화는 그렇지 못했다. 엘리는 입술을 뒤틀며 미소 지었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 레슬리에게만 보여 주는 그녀의 본색이 스며든 미소였다.

“네가 그깟 일을 가지고 지금 나에게 생색을 내려나 본데…….”

“어쩜 후작과 하는 말이 이렇게 똑같을까.”

엘리의 말을 잘라먹은 레슬리는 웃으며 엘리와 시선을 맞췄다. 가까운 거리에서 제대로 레슬리의 눈을 본 엘리의 눈동자가 커다래지고, 붉었던 뺨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너. 어, 어떻게 네가 그 힘을…….”

힘이 안쓰러울 정도로 미약한 엘리는 레슬리의 눈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고 나서야 레슬리가 어둠을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으로 엘리가 절망하는 표정을 본 레슬리는 방긋, 미소를 머금었다.

“쉬이, 언니만 알고 계세요.”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여 엘리의 귀에 속살거렸다.

“혹여나 후작이 저를 가문의 영광을 가져다줄 아이라며 제게 사랑과 관심을 쏟으면 어떻게 해요.”

레슬리는 몸을 일으켰다. 레슬리의 등에 박혀 있던 엘리의 손이 떨어지며 팔이 툭, 하고 땅에 닿았다. 생각보다 더 충격이 큰지 엘리는 어느새 자신이 레슬리를 올려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눈을 껌뻑거렸다. 레슬리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쉿 하고 작게 속삭였다.

“저는 그 괴물들에게 사랑받을 생각이 없는데, 그러면 언니나 나나 곤란하잖아요?”

넋이 나간 듯 눈에 초점도 맞지 않는 그 모습이 우스워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녀를 스쳐 지나가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너! 잠깐……!”

어느새 레슬리를 하대하는 평소 말투가 나온 것도 모르고 엘리는 손을 뻗어 자신 동생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찌이익―

낡은 드레스는 엘리의 억센 손아귀를 견딜 수가 없었다. 레슬리의 드레스 소맷자락이 찢어졌고, 며칠 전 팔에 입은 화상이 아렌도 황자의 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짓무르고 터져 버린 안쓰러운 화상 자국.

자신의 팔과 아렌도를 한 번 번갈아 가며 바라본 레슬리가 황자를 보며 살짝 웃음 지었다.

“언니가 저에게 남겨 준 선물이랍니다. 어여쁘지요?”

그리고 이번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저택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

“아가씨!”

다락방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있는데, 거칠게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들이닥쳤다. 엘리와 자신을 키워 준 여자, 르아 유모였다. 저택에서 그나마 레슬리에게 신경을 써 주는 사람이기도 했고, 후작 부인 다음으로 레슬리의 자존감을 가장 많이 깎아 먹은 인물이기도 했다.

“미치신 거죠!”

버럭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더니 누워 있던 레슬리의 이불을 빼앗고 억지로 레슬리를 일으켜 세웠다.

“도대체 엘리 아가씨에게 그러시면 어떻게 해요! 하마터면 아렌도 황자님께서 엘리 아가씨를 오해하실 뻔했잖아요!”

바로 얼굴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귀가 아플 정도라 레슬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 오해라니?

“오해?”

“다아 들었어요. 이 르아가 다 들었다고요. 그 화상은 가족 여행 갔을 때 멍청하게 주전자를 막 만지다가 아가씨께서 직접 낸 거라면서요!”

흐응! 크게 콧방귀를 낀 르아는 억센 손으로 몇 번이나 레슬리의 등을 때렸다. 한 번 때릴 때마다 레슬리의 마른 몸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것보다 레슬리는 르아가 내뱉은 말이 더 거슬렸다.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그래요, 아가씨! 이제 와 발뺌하시려 해도 소용없어요! 엘리 아가씨는 간절하게 말렸는데 아가씨가 사고를 쳤다고 얼마나 서글프게 이야기하시던지!”

거기까지 말한 르아는 레슬리의 팔을 확 잡아당겼고, 저절로 작은 비명이 터졌다.

“자아, 가요! 엘리 아가씨에게 가서 거짓말해서 죄송하다고 싹싹 비세요! 분명 엘리 아가씨는 착하셔서 봐주시겠지만, 그래도 벌은 받아야 해요! 그래야 거짓말이나 해 대는 성질을 고치지.”

레슬리의 의지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방을 나서려는 르아의 손아귀에서 레슬리는 손을 비틀어 빼낸 후 그녀의 팔을 쳐 버렸다.

“놔.”

“……아가씨?”

레슬리를 바라보는 르아의 갈색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가지 않아. 이 화상은 엘리 언니가 입힌 게 맞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레슬리는 입가를 뒤틀며 르아에게 웃어 보였다.

“아니, 이 스페라도 가문 전체가 입혔다고 보는 게 맞으려나?”

레슬리의 말을 들은 르아는 레슬리가 감히 제 팔을 쳤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고개를 흔들었다.

“세, 세상에나……. 미치셨어. 미치신 게 틀림없어.”

르아가 제 입가를 틀어막으며 중얼중얼 말을 흘렸다. 르아는 그 누구보다 이 저택에서 레슬리를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순종적인 아이. 아무리 싫은 말을 들어도 뭐라 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이다가 고개를 숙이는 여자아이. 그녀와 후작 부인께서 만든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레슬리였다.

요즘은 주체적이니 뭐니 하는 괴상한 여자들이 나오고 있었다. 특히 여자이면서도 전쟁터에도 나가는 셀바토르 공작이 그 선두주자였고 르아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 역시 아주 어릴 적부터 집안사람들에게서 여자는 순종적이고 조신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살았고, 그걸 진리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운 좋게 수도로 올라와 많은 것을 접했지만,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다 후작 부인이 레슬리를 그렇게 키웠으면 좋겠다는 한탄을 듣고 자신과 같은 생각하는 이가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보답하고자 레슬리를 말대답 하나 않는 인형 같은 순종적인 아이로 키웠는데…….

“이 일은 전부 후작 부인께 말씀드리겠어요. 감히 저에게 말대답했다고 말이죠.”

마음은 아프지만, 다시 회초리를 들어야겠다. 레슬리 아가씨는 지금 때려서 바로잡지 못하면 셀바토르 공작같이 조신하지 못한 여자가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르아는 씩씩거리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용서를 빈다면, 스스로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울며 르아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면, 조금은 봐줄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레슬리는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놨다.

“말해.”

“뭐라고요?”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레슬리를 보며 르아는 눈을 깜빡거렸다.

“말하라고. 귀 먹었어? 가서 다 말해. 너에게 말대답을 했다고, 너에게 귀를 먹었다고 내가 말했다고 다 말하라고. 후작에게 가든가, 부인에게 가든가 그건 네 마음대로 하고.”

거기까지 말한 레슬리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오늘 신전도 다녀오고 여러 일이 있어서 휴식이 간절했다. 아까부터 졸음이 쏟아져 머리가 몽롱했다.

“알아들었으면 이제 나가. 난 쉴 거야.”

이불까지 덮고 눈을 감아 버리는 레슬리를 보고 르아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크게 소리 질렀다.

“레슬리! 감히 지금 나에게 무슨 태도를 보이는 거야!”

후작가가 울릴 정도로 성큼성큼 다가온 르아는 레슬리를 다시 침대 밖으로 끌어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레슬리에게 르아가 손을 뻗기도 전에 무언가가 그녀의 발에 걸렸다.

“끄악!”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며 르아가 크게 바닥에 엎어졌다. 이번엔 후작가가 울렸음이 확실할 정도로 아주 큰 소리와 함께. 르아의 발을 잡은 어둠은 슬그머니 레슬리의 발치로 돌아왔다.

“아고고……. 아이고, 르아 죽네, 죽어…….”

잘못 넘어졌는지 르아가 침대 밑에서 죽는소리를 냈지만, 레슬리는 그저 어서 저 짜증 나는 사람이 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입을 열기도 귀찮아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르아. 시끄럽게 하지 말고 당장 나가.”

내가 속마음을 소리 내어 말했나? 레슬리가 몸을 일으키자 언제 온 건지 엘리가 독기 어린 눈을 하고 레슬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엘리 아가씨…… 르아는 일어날 수가 없어요. 저 못된 레슬리가…….”

“시끄러! 일어날 수 없다면 기어서라도 나가라고!”

엘리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르아가 그렇게 원하던 여자아이와는 전혀 달랐으나 르아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기다시피 방을 나갔다.

사실 르아는 엘리에게는 조신하라든가 얌전하라든가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후작 부인이 그녀의 뺨을 때릴 게 뻔했으니까.

르아가 앓는 소리를 하며 방을 나가자 작은 다락방에는 엘리와 레슬리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참 거지 같은 곳에서 사네.”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긴 엘리는 자신의 품에서 곱게 접힌 손수건을 꺼내, 악취가 난다는 듯 코와 입을 막았다. 이 방의 공기를 단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죽을 것 같다는 엘리의 얼굴을 보다 레슬리는 다시 침대에 누우려고 했다. 그녀가 무슨 일로 왔든 그건 자신과 상관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레슬리를 엘리가 막았다.

“너, 나랑 이야기 좀 해.”

“싫어. 할 이야기도 없어.”

가볍게 엘리의 말을 무시했지만, 그 행동에 더욱 화가 난 엘리는 그녀의 이불을 땅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오늘만 해도 두 번이나 땅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이불을 보며 레슬리는 작게 한숨을 흘렸다. 이 방은 2주에 한 번만 청소를 해 주기에, 바닥에는 먼지가 좀 쌓여 있었다.

“가증스러운 것. 여태 힘을 숨겼단 말이지. 그래, 그래서 네가 그 절벽에서 떨어져도 살아남았구나.”

엘리는 레슬리를 보며 이를 까득까득 갈았다. 그 말을 듣고 레슬리는 여태 후작가의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난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는 게 한숨이 나올 정도로 웃겼다.

그 정도의 굉음이 울렸는데. 설마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눈을 가린 것일까. 그런 레슬리를 보며 엘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다시 소리쳤다.

“그 힘은 내 것이야. 내 것이라고! 어떻게 네년이 그 힘을 손에 넣었는진 모르겠지만 네 힘도 아니니 쓰지 말고 방에 박혀 있어. 알았어?”

“이 힘이 언니 거라고……?”

레슬리의 반문에 엘리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을 보듯 레슬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게 당연한 거 아니니? 난 스페라도 후작가의 장녀고 우리 가문을 나타내는 연록빛 눈동자에 이렇게 아름다운 금발이지만, 너는 그 쥐 죽은 듯한 백발 머리잖아?”

바보 같은 말을 늘어놓던 엘리는 더욱 거지 같은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거기다 난 너보다 아름답잖아. 이 정도면 네 멍청한 머리로도 누가 그 힘을 가져야 하는지 알 수 있지 않니?”

그러면서 보라는 듯 윤기가 흐르는 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보이며 사르르 웃어 보였다. 제1황자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은 미소는 확실히 사랑스러웠고.

‘가증스러워.’

예전에,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엔 아름다운 언니가 마냥 좋았다. 자신도 저렇게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에 빤짝이는 눈동자, 정리가 잘된 손톱을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 수모를 당하면서도 아름다운 언니를 졸졸 쫓아다녔고, 늘 그녀를 따라 자신의 머리를 다듬어 봤었다.

하지만 레슬리가 그녀를 따라갈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머리끝을 다듬어 주는 하녀가 따로 존재할 정도로 엘리는 수십 명의 하녀를 몰고 다녔다. 날마다 비싼 향유로 목욕했고, 마사지를 받았다. 하루 대부분을 아름다움을 위해 투자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날은 종일 상점가를 돌며 매일 새로운 유행의 드레스와 보석들을 사들였다.

햇빛 아래를 걸을 때면 혹여나 하얀 살결이 타지 않을까, 거대한 양산을 들어 주는 하인이 둘이나 있었다. 거기에 십여 명의 전속 기사까지. 그녀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저 아름다움이 뭐로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었다. 피다. 그동안 죽은 아이들의 피를 먹고 스페라도 가문은 부와 명예를 쌓았다. 그리고 그것들의 결과물이 엘리였다.

“…….”

역겨워서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레슬리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엘리는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늘 그랬듯 자신의 입맛에 맞게 레슬리의 행동을 이해했다.

“잘 알아들은 모양이구나. 이 언니는 기쁘네.”

계산적으로 작게 웃음을 흘린 후 엘리는 살짝 고개를 기울여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반년밖에 살날이 남지 않은 제물을 이제는 조금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반년은 그냥 쥐 죽은 듯 저택에 박혀 살면…….”

그러면 좀 더 자비롭게 대해 줄 수 있어. 하루에 한 번쯤은 널 보며 웃어 줄게. 그 정도면 행복하지?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엘리의 말은 레슬리의 말에 끊어져 버렸다.

“내려가서 이야기해 볼까?”

“뭐?”

레슬리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슬슬 추워지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얇고 거친 잠옷은 움직일 때마다 작은 소리를 냈다.

“르아나 너나 요즘 귀가 잘 안 들리나 봐. 내려가서 후작한테 말해 보겠다고. 내가 힘을 가졌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이 힘을 보여 주면, 과연 후작은 어떻게 움직일까?”

레슬리는 당장이라도 후작을 찾아 내려갈 듯 문 앞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그 발걸음을 엘리는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 반년 후 불구덩이 속에 다시 처박힐 건 나일까, 너일까. 어떻게 생각해?”

거기까지 말한 레슬리는 거칠게 문을 열었다. 문과 벽이 부딪히면 강한 소리를 냈고, 엘리는 그 소리 때문에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사실은, 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엘리가 이 상태로 내려가 정말 말한다면 후작이 어느 쪽을 내칠지, 그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간 키운 것이 아깝고, 황자랑 약혼까지 했으니 불구덩이 속에 넣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건 모르는 일.

후작은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어둠의 힘을 바랐다. 점점 약해져 가는 가문의 부와 명성을 버티지 못했으니까. 황실과의 약혼만으로 지금의 위세를 유지하는 데에도 슬슬 위기가 오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후작에게 있어서는 힘을 가진 아이가 황실과 약혼한 아이보다 더 우위였다. 그걸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저지를 수 있었다. 황실과 약혼했던 아이가 병으로 죽는 일도 드물지 않았으니까. 그랬던 집안이니까.

거기까지 깨달은 엘리는 침을 삼켰다.

“자, 나가. 지금 내 잠을 방해하지 않으면 비밀로 해 줄게.”

내 마음이 바뀔 때까지는. 레슬리는 엘리를 선택하라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작게 이를 갈던 엘리는 몸을 돌려 큰 소리와 함께 방을 나섰다.

그제야 아무의 방해도 없이 침대에 누운 레슬리는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

‘배고파.’

레슬리는 꼬르륵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얼마나 잤을까? 오랜만에 악몽도 꾸지 않고 달콤한 잠을 잔 것 같았다. 평소엔 꿈에서마저 늘 후작과 후작 부인에게 혼났는데 오늘은 그런 것도 없이 정말 푹 잠들었었다.

덕분에 늘 일어나던 시간보다 늦게 잠에서 깬 레슬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세숫물이…….”

늘 르아가 가져다 뒀던 세숫물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어제 그 꼴을 당했으니 며칠 동안 씩씩거리며 이 방 근처에는 오지도 않을 것이다.

르아는 그나마 말을 걸어 주는 자신에게 레슬리가 매달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매를 들기도 했지만, 레슬리가 자신의 기준에서 크게 잘못한 때에는 아예 그녀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유일한 말상대였던 르아가 몇 날 며칠을 완벽하게 무시하면 레슬리는 사람의 말이 그리워서라도 그녀의 뜻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는 늘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말했었지.’

사랑. 너무도 자신이 약해지던 단어. 레슬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에 매달린 걸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매달릴 사람을 보고 매달려야 했다. 차라리 밖에 나가 아무나 붙잡고 구걸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포기하니 이렇게 편하네.’

전엔 이런 생각이 들면 스스로 내 머리를 내리쳤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문을 열었다. 지나가던 하녀 하나가 그녀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너, 세숫물을 가져와.”

“저요?”

하녀가 어이없다는 듯 뒤를 한번 바라보더니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금 저한테 한 말이세요?”

“그래. 지금 여기에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니?”

몇 번이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던 하녀는 레슬리가 자신을 지목한 게 맞다는 걸 깨닫자마자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하! 아가씨, 그건 르아한테 말하세요.”

“그 르아가 없잖아.”

“저는 엘리 아가씨를 모시는 사람이지, 아가씨를 모시는 사람이 아닌걸요.”

하녀는 당당하게 레슬리를 쏘아보며 말했다. 아아, 그래서 이렇게 짜증 나게 굴었구나.

“그래서?”

그 말에 하녀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엘리 아가씨만 모시는 사람이니 아가씨 세숫물을 가져올 수 없다고요.”

“지금 어느 이름으로 봉급을 받지?”

레슬리의 말에 뭔가 이상하다는 걸 그제야 느낀 하녀가 눈을 찡그리며 그제야 목소리를 조금씩 낮추기 시작했다.

“스페라도 후작 가문의 이름이지요.”

“잘 아네. 그럼 내가 누구지?”

“……레슬리 스페라도 아가씨요.”

잠시 눈을 또르륵 굴리던 하녀는 이대로 질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하지만?”

고작 열두 살짜리 여자애의 눈이 저렇게 무서워도 되는 건가? 어제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말이 떠돌고는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는데. 레슬리는 하녀를 무덤덤한 눈으로 바라보며 머리를 쓸어 귀 뒤로 넘겼다. 그리고 짤막하게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세숫물 가져와.”

그리고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 뒤에서 짜증 난다며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곧 그 하녀는 세숫물을 가져왔다. 초겨울에 맞는 따듯한 물이 가득 담긴 사기그릇에 손을 조심스레 담가 세안을 끝낸 레슬리는 엘리의 방이 있는 복도를 지나 곧장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너무 당당하게 중앙 복도를 이용하는 걸 보고 사용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레슬리가 식당에 나타나자 웅성거림은 정점을 찍었다.

“레, 레슬리 아가씨?”

주방 하녀 한 명이 당황스럽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식당은 밥 먹는 곳 아니야? 배고파.”

그러더니 레슬리는 가끔 그녀가 식당을 이용할 때 앉았던 구석지고 추웠던 자리가 아닌, 햇빛도 잘 들어 가장 따듯한 자리에 털썩 앉았다. 폭신한 벨벳의 느낌이 등 뒤로 느껴졌다. 자신의 자리에 놓여 있던 의자는 하인들조차 이용하지 않는 딱딱한 나무 의자였는데.

“뭐 해? 나 배고프다니까.”

다시 사용인들을 보며 재촉하자 그제야 하녀 한 명이 주방으로 내려가 건더기가 하나도 없는 멀건 수프 한 그릇과 레슬리의 주먹보다 더 작은 딱딱한 호밀 빵 한 덩이, 거기에 물 한 컵을 가져왔다. 이 스페라도 가문에선 사용인들도 먹지 않는 딱딱한 빵을 잠시 내려다보던 레슬리는 그릇을 옆으로 치웠다.

“이거 말고 딴 거. ‘사람’이 먹을 만한 걸 가져와.”

“어…… 그렇지만 요즘엔 이걸 드셨잖아요. 데리엘 마님께서도 절대 다른 건 아가씨에게 먹이지 말라 하셨는데요. 살찌신다고…….”

옅은 갈색 머리의 하녀는 주저하면서 레슬리에게 다른 음식을 주려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하녀가 레슬리에게 빵에 버터를 듬뿍 발라 줬다는 이유로 추천장도 받지 못하고 저택에서 쫓겨난 이후로, 주방 하인들은 더욱 레슬리에게 민감했다.

“그 일은 끝났어. 그러니까 다른 걸 가져와. 이번엔 제대로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으로.”

그 말에 하녀는 불안하다는 듯 다른 하녀와 같이 힐끗힐끗 눈치를 보더니 재빠르게 다시 주방으로 내려가 음식을 가져왔다. 이번에 그녀가 가져온 건 늘 후작 부부와 엘리가 먹는 음식들이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작은 새고기는 먹기 좋게 썰려 있었고, 그 주변엔 구운 채소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거기다 식욕을 돋워 줄, 상큼한 레몬즙을 뿌린 샐러드에는 이름 모를 작은 과일들이 올라가 있었고, 보기만 해도 부드러운 갓 구운 흰 빵 옆에는 버터와 각종 잼이 놓여 있었다.

“저, 이거 저희가 줬다고 후작님과 마님께는…….”

“말 안 해. 가.”

그제야 환해진 하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혹여나 꼬투리가 잡힐세라 재빠르게 식당을 벗어났다. 레슬리는 그러든 말든 조심스레 포크를 들어 새고기 한 점을 입에 물었다.

“……!”

맛있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고 싶었는데 자꾸만 헤실헤실 웃음이 떠올랐다. 처음 먹는 이름 모를 새고기는 레슬리를 자꾸만 웃게 했다. 자신이 늘 먹던 음식과는 전혀 다른 음식.

레슬리는 이번에 흰 빵을 들어 조심스레 반으로 찢었다. 빵 결이 갈라지면서 아까부터 코를 찌르던 고소한 냄새가 짙어졌다. 레슬리는 조심스레 버터나이프를 들어 버터를 듬뿍 바르고 한 입 조심스레 물었다.

‘맛있어.’

그 불 속에 들어갔을 때, 생각하던 단 하나의 따스한 기억이 이런 흰 빵을 먹었던 것이었다. 비록 자신에게 빵을 준 하녀는 저택에서 쫓겨났지만, 레슬리는 그녀에게 고마웠다. 그녀마저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오직 고통스러운 기억만이 남았을 테니까.

레슬리는 나머지 빵에 다른 잼들을 하나하나 바르고 입에 집어넣었다. 먹을 때마다 새로운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이번엔 새고기 옆에 놓여 있던 구운 채소를 포크로 콕 찍어 입에 집어넣었다. 엘리는 이런 건 먹고 싶지 않다며 늘 남겼던 음식이었다. 하지만 이조차 레슬리에게는 처음 먹는, 정말 맛있는 것이었다.

허겁지겁 새고기를 입에 넣고 목이 막힐 때면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들이켰다.

오늘은 악몽을 꾸지도 않고 푹 잔 데다가 따듯한 세숫물을 받았고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을 받았다. 이것만으로도 레슬리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막기가 힘들었다.

“하아.”

결국 나온 음식을 전부 먹어 치운 레슬리는 작은 숨을 흘리며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조금 과하게 먹은 듯했지만, 오늘은 조금 무모한 짓을 벌일 예정이었다. 어찌 될지 모르니 이 정도로 배를 채워 두는 게 맞겠지.

“……레슬리?”

이제 방으로 돌아가 준비를 할 요량으로 몸을 일으키는데, 경악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지막이 일어나 브런치를 즐기러 온 후작 부인과 엘리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지금 일어난 거니? 거기다 저걸 너 혼자 다 먹은 거야?”

후작 부인이 놀란 듯 그녀를 바라봤다. 레슬리와 똑같은 라일락색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언제나 자신들은 느긋이 일어났지만, 레슬리는 억척같이 새벽에 일어나게 했다. 그리고 식사는 아까 하녀가 가져왔던 것에 감자가 더해진 것으로 두 번.

신을 받기 위해 가장 높은 강도로 자신들을 다스린다는 루렌의 사제들의 식단과 일과를 고려한 것이었다. 루렌의 사제들이 기도를 올릴 때 그녀는 엘리를 위한 공부를 했다는 게 사뭇 다르긴 했지만.

“…….”

잠시 말없이 후작 부인을 바라보던 레슬리는 몸을 일으켜 후작 부인 옆을 지나쳤다. 딱히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그녀는 어머니란 이름으로 자신을 상처 입혔으니까.

무슨 일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늘 책잡혔고 부족하고 모자란 딸이 되었다. 아니, 딸이 아니라 제물이었지.

“잠깐, 너 지금 내 말을…….”

“어머니!”

엘리가 후작 부인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저것이 미쳐서 그래요. 건드리지 마세요. 저 미친것이 얼마나 어제 저에게 악독하게 굴었는지 아세요? 혹시 물리기라도 하면 어머니만 다치는 거예요.”

“뭐, 뭐? 미친 거야? 그럼 가둬 놔야 하는 거 아니니?”

어이없는 대화를 가볍게 무시하며 레슬리는 저택 밖으로 나섰다. 마차가 있는 곳으로 가 아무 마차나 타자, 마부가 이번에도 곤란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슬리가 덤덤하게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한 번 흘리더니 곧 마차를 출발시켰다.

“저어…… 아가씨, 다 왔습니다.”

부드럽게 굴러가던 마차가 멈추고 마부는 마부석과 연결된 작은 창을 열고 주저하며 레슬리에게 도착을 알렸다.

“그런데 왜 이런 위험한 곳에…… 오시려는 건지…….”

마부는 불안하다는 듯 힐끗힐끗 마차 앞 저택을 바라보았다. 거대해 보이는 셀바토르 공작가가 위용을 뽐내며 마부와 레슬리 앞에 서 있었다.

“전쟁 영웅이자 이 제국의 공작저가 위험해?”

“그렇고말고요! 셀바토르 공작가가 힘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지는 게 괴물과 피가 섞였기 때문이란 말도 있어요.”

재밌네. 레슬리는 저보다 몇 배는 나이가 많을 마부를 바라보았다. 진짜 괴물들은 아까 떠나온 스페라도 가문의 인간들이 아니던가. 마부는 정말로 겁을 먹은 듯 레슬리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현 공작은 그 피가 강하게 드러나서 얼굴 절반이 비늘로 덮여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가씨…… 그냥 저택으로 돌아가심이 어떨까요.”

“됐어. 여기서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그 이상 마부의 말을 들어 주기 힘들어, 레슬리는 직접 문을 열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때마침 정문 앞을 지나가던 하인을 하나 붙들고 말을 전했다.

“스페라도 가문의 차녀, 레슬리 스페라도가 셀바토르 공작님을 뵙고 싶다고 전해 주세요.”

***

“누가 왔다고?”

셀바토르 공작은 집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다 집사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부터 셀바토르 공작을 모셔 온 집사는 포근한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슬리 스페라도 양입니다. 지금 정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집사의 말에 셀바토르 공작은 몸을 일으켜 창가로 향했다. 창문을 반쯤 가리고 있던 마른 장밋빛과 금빛이 어우러진 커튼을 걷자, 정문 앞에 서 있는 작은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작네?”

“작죠.”

흐음. 셀바토르 공작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한 아홉 살쯤 되었을까? 아니, 열 살? 잘 모르겠다. 그녀의 아들들은 어렸을 적부터 굵직굵직해서 보통 아이들보다 두 배는 더 컸기에 저렇게 저 조그마한 아이가 몇 살쯤 되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스페라도 가문이라……. 예전 멍청이처럼 날 만나겠다고 제 딸을 보낸 건 아닌 것 같고.”

워낙 만나기 힘든 셀바토르 공작을 만나기 위해 한 귀족은 꾀를 내었다. 자기의 어린 딸을 추운 날씨에 셀바토르 공작저 앞에 세워 둔 것이다. 그 아이를 보고 불쌍히 여겨 문을 여는 순간 그 틈으로 들어가기 위해 본인은 마차에서 기다린 채였다.

하지만 되레 수도 치안을 담당하는 기사단이 오고,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단이 나타나자 재빠르게 줄행랑을 쳤던 일이 있었다.

“스페라도 가문에 차녀가 있었던가.”

공작이 작게 말을 흘리자 바로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있습니다. 제1황자 약혼녀인 스페라도 양과 같이 만났을 때 황자에게 차를 쏟는 실수를 한 아이입니다. 그 후로는 저택을 나서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원래부터 몸이 좋지 않다는 말도 여러 번 들려왔습니다만.”

스페라도 후작.

겉은 멀쩡한데 속은 문드러진 인간들이 귀족들 사이에선 많았다. 그중 한 명이 스페라도 후작이었다. 괜스레 자신에게 경쟁심을 불태우던 스페라도 후작이 언젠가 자신의 딸을 자랑하던 걸 한번 지나가는 소리로 들은 적이 있었다.

‘우리 사랑스러운 엘리는 스페라도 가문의 봄날을 돌려줄 아이입니다!’

여간해선 목소리를 높이지 않던 후작이 그날따라 목소리를 높였던 걸 셀바토르 공작은 떠올렸다. 뭔가 좋은 일이 있었는지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다른 귀족들에게 자신의 딸을 자랑하고 있었다.

‘엘리 양이 아름답긴 하지요.’

‘그렇지요, 하지만 엘리의 값어치는 아름다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큰 것을 가지고 있지요. 이번에 그걸 알게 되어 얼마나 기쁘던지!’

의미심장한 말에 다른 귀족들이 어서 이야기해 보라고 그를 재촉했지만, 스페라도 후작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슬그머니 셀바토르 공작을 시선만 움직여 바라보았다.

‘힘……인가?’

유일하게 건국 때부터 내려오던 힘을 잃지 않은 셀바토르 공작가에 적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았다. 스페라도 후작도 평소에 알게 모르게 셀바토르 공작을 불편해했으니 아예 가망이 없는 말은 아니었다.

거기다 네 개의 후작 가문은 원래 셀바토르 공작가와 아이테라 대공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이 없어져야 자신들이 더 큰 이익과 권력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아직도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를 내려다보던 공작은 다시 커튼을 닫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공작은 쉽게 만나 주지 않았다.

“어쩔까요?”

집사는 깃펜을 드는 공작을 보고 물었다. 저렇게 작은 아이인데.

“마차도 뒤에 서 있고, 날도 추우니 곧 가겠지. 신경 쓰지 마.”

공작은 서류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엔 레슬리는 없었다. 처리해야 할 서류와 안건들, 그 외의 중요 문제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네, 알겠습니다.”

집사는 공작 몰래 한숨을 흘리며 대답했다.

셀바토르 공작이 깃펜을 놓은 건 한참 후였다. 마지막 서류까지 꼼꼼히 검토를 끝낸 공작은 눈가를 꾹 누르며 집무실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할 일이 태산같이 많았다. 곧 벌어질 일을 위한 적당한 아이를 찾는 일부터 공작령의 저수지 보수를 하는 일까지. 모든 일이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적당한 사람 잡아다가 좀 쉬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두 아들놈은 그다지 미덥지 못했다. 제 성격을 꼭 빼닮아 무뚝뚝한 첫째와 어디서 튀어나온 성격인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둘째를 생각하니 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잠시 고민을 하는 사이 시간은 더 흐르고, 커튼 사이로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밤이 찾아올 것이다.

“어머나.”

저도 모르게 창가로 다가간 공작은 아직도 정문 앞에 서 있는 레슬리를 보며 창문틀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저 작은 것이 아직도 문 앞에 있었다. 마차는 돌려보냈는지 사라졌고, 아이는 덜덜 떨면서도 곧게 정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겨울 하늘에서 내리는 눈 같은 은빛 머리카락 때문에 더욱 추워 보였다.

‘이상할 정도로 스페라도 가문은 둘째와 셋째의 죽음이 많은 가문이라고 하셨었지.’

공작은 어릴 적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말해 줬던 말을 떠올렸다. 조금이지만 흥미가 생겨났다. 무엇 때문에 저리 작은 아이가 이토록 필사적이 되는 건지.

이야기를 조금 들어 보아도 괜찮겠지.

“공작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공작은 몸을 빙글 돌려 때마침 들어오는 집사를 바라보았다.

“식사는 조금 이따가 하지. 손님을 먼저 만나 보려고. 저 스페라도 양을 저택으로 모셔 오렴.”

급작스러운 공작의 태도 변화에 집사는 조금 놀랐지만, 짐짓 티를 내지 않고 살짝 미소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1층에 있는 응접실로 모실까요?”

1층의 응접실은 그나마 공작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응접실이었다. 어쩌다가 있는 만남은 거의 다 거기서 끝났고, 3층에 있는 응접실은 황족과 친분이 두터운 몇몇만을 위해 문을 열었다.

어느새 창가로 다시 간 공작인 레슬리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을 이어 갔다.

“아니. 3층에 있는 응접실에서 만나 볼까.”

***

3층 응접실로 안내된 레슬리는 붉어진 뺨을 비볐다.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던 시간부터 밤이 거리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시간까지 정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더니 온몸이 꽁꽁 얼어 버렸다.

이럴 상황을 대비해 가장 두꺼운 옷을 입고 왔으나, 불행히도 코트도 없는 가을 드레스는 그 추위를 다 막아 주진 못했다.

어쩌다 셀바토르 공작의 관심을 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붉어진 홍당무 같은 얼굴로 공작을 뵐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붉은 기를 없애 보고자 마구 문지르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나이가 있어 보이는 한 여자가 들어왔다.

“많이 추우시죠?”

얼핏 보면 르아를 닮은 여자는 웃으며 그녀 앞에 따스한 차 한 잔을 내려놓았다.

“아가씨처럼 아직 어리신 분에게는 코코아가 더 좋을 텐데……. 이 공작저에는 그런 걸 드시는 분이 남아 있지 않아 이런 차밖에 없네요. 대신 설탕을 듬뿍 넣었답니다. 어서 드셔 보세요.”

“감사합니다.”

따듯하다. 레슬리는 조심스레 찻잔을 감싸 쥐었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온기가 좋아 잠시 잡고 있다가 달큼한 향기를 이기지 못하고 마시려 드는 순간, 그만 놓치고 말았다. 너무 오랫동안 밖에 서 있는 바람에 얼어 버린 손이 제대로 찻잔을 잡지 못한 탓이었다.

챙― 다행히도 깨지진 않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러그 위에 차가 쏟아지면서 흉한 흔적을 남겼고, 찻잔은 데구르르 굴러 저편까지 가 버렸다.

“죄, 죄송해요!”

레슬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만 그대로 굳어 버렸다. 혼난다. 혼날 거야!

아무리 가족의 사랑을 포기했다지만 여태 받았던 상처는, 잘못 들인 버릇은 그대로였다. 레슬리는 고작 찻잔을 떨궜을 뿐인데 죽을죄를 지은 사람처럼 덜덜 떨기 시작했다.

스페라도 후작가에선 이 정도 실수면 체벌이 뒤따랐다. 종아리를 주로 맞았는데, 곧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습관처럼 몸이 멋대로 굳어 버리기 시작했다.

“제가 치울게요!”

급기야 울먹거리며 자신의 치맛자락으로 러그를 닦아 내려는 레슬리를 보던 여자가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이건 별일 아니랍니다. 러그는 빨면 되는 거고 차는 다시 내오면 되는 거예요.”

그러더니 손을 뻗어 레슬리의 작은 두 손을 꼭 잡았다.

“이렇게 손이 얼었으니 당연한 일이죠. 자, 여기 따듯한 담요를 가져왔어요. 이걸 덮고 소파에 앉아 계세요. 곧 새로 차를 내올 테니까요.”

그러더니 레슬리가 진정할 수 있게 토닥이며 그녀를 다시 소파에 앉혔다. 여성은 곧 그녀의 무릎 위에 새하얀 담비 털로 만들어진 담요를 덮어 주었다. 레슬리는 그 담요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레슬리도 아는 물건이었다. 이걸 가지고 싶다고 엘리는 열흘 동안 아버지를 조르며 울었으니까. 하지만 너무 비싼 가격 때문에 결국 구하지 못했던 물건이었다.

레슬리는 손을 뻗어 쓸어 보았다. 마치 구름을 만지듯 부러운 감각에 절로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후후, 마음에 드시나요?”

“네, 네에…….”

여자가 귀엽다는 듯 그녀를 보며 웃음 지었다. 레슬리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있는 사이 문이 열리며 셀바토르 공작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미안해요, 스페라도 양.”

레슬리는 처음 보는 셀바토르 공작을 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길고 검은 머리를 가슴까지 기르고 얼굴을 반쯤 가린 하얀 가면을 쓴 여자는 여태 봐 왔던 그 어떤 여자보다도 컸다.

‘이 정도면 후작보다 클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레 레슬리는 머릿속으로 후작과 공작을 비교했다. 아니, 이름 모를 스페라도 기사보다도 크겠어. 레슬리는 머릿속으로 가장 큰 사람으로 알고 있던 기사를 떠올렸다.

눈을 크게 뜨고 깜빡거리는 레슬리가 퍽 귀여웠는지 차를 내온 여자와 공작이 동시에 미소를 흘렸다.

“이런, 정말 귀여운 아가씨네. 우리 집사 마음도 한 번에 훔친 것 같고.”

공작은 웃으며 레슬리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집사님이요?”

레슬리의 물음에 셀바토르 공작이 시선을 던지자 살짝 고개를 돌려 레슬리를 바라본 여자가 방긋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의 단발이 보기 좋게 흔들렸다.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집사장을 맡고 있는 제나 도란테스입니다.”

‘하녀가 아니었구나.’

당연히 차를 내오고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하녀라고 생각했던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거렸다. 사과를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넘어가도 괜찮은 걸까. 역시, 사과해야겠지?

“후후, 괜찮아요. 집사가 여자라니 좀 신기하지요? 하녀장도 아니고 말이죠.”

눈앞에 핑핑 도는데 먼저 제나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러는 사이 하녀가 은빛 쟁반 위에 두 잔의 차와 각설탕 그리고 약간의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 두 잔의 차가 두 사람 앞에 놓이고 공작은 레슬리를 보며 나른하게 웃어 보였다.

“자아, 스페라도 양. 이 괴물 공작가라고 불린 이곳까지 어찌한 일로 온 건지 이제 용건을 들어 봐도 될까?”

레슬리는 공작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마음을 정리하듯 크게 심호흡을 하고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님에게 제안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까까지 부끄러움과 창피함과 감사함, 제 감정을 날것으로 드러내던 아이가 순식간에 얼굴을 굳히고 단호한 표정으로 제 앞에 앉은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한 점 흔들림 없는 시선에 공작은 호기심이 더 강해지는 걸 느꼈다.

“그게…….”

힐끗. 레슬리가 조심스럽게 제나 집사장을 바라보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제나는 곧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부디 좋은 대화를 나누시길.”

제나가 확실히 문을 닫고 나가는 것까지 확인한 레슬리는 다시 공작을 바라보았다. 조그만 아랫입술을 살짝 물더니 곧 엄청난 제안을 터트렸다.

“저를 입양해 주세요.”

그 말에 셀바토르 공작의 눈이 아까보다 커지고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생전 처음 듣는 황당한 제안이었다. 제 아들들과 계약 결혼을 하고 싶다고 찾아온 허무맹랑한 영애들을 몇 명 보긴 했지만, 그녀들을 가뿐히 뛰어넘는 제안에 셀바토르 공작은 헛웃음까지 흘릴 뻔했다.

거기다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는 후작가의 딸이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셀바토르 공작에게 레슬리는 한 번 더 말을 꺼냈다.

“저를 셀바토르 공작가의 유일한 공녀로 만들어 주세요.”

만약 이런 제안을 들은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전부 자신의 앞에 있는 아이를 쫓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은 그저 말없이 레슬리의 라일락빛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눈. 뭔가를 결심한 저 눈은 셀바토르 공작도 잘 알고 있는 눈이었다. 더는 피할 곳 없는 궁지에 몰린 자가 살아남고 싶어 발버둥 치는 눈이다.

“내가 왜 그래야 할까?”

“그러면 공작님이 원하시는 걸 손에 넣으실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쿠웅!

거대한 굉음과 함께 찾아온 칠흑 같은 어둠이 공작저를 감싸 안았다. 여기저기서 작은 비명이 터지고 여러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셀바토르 공작은 눈을 빛내며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어둠, 어둠, 어둠.

특히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응접실은 레슬리와 셀바토르 공작만 보일 정도로 어둠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셀바토르 공작은 이 힘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둠술사!’

셀바토르 공작은 웃음이 터지려는 걸 억누르지 못했다. 이 정도로 강력한 어둠술사는 건국 때나 있었음이 분명했다. 한때는 셀바토르 공작가와 견줄 만큼 강력했지만 이제는 그 힘을 받은 자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귀한 어둠술사가 자신의 앞에 앉아 있었다.

“제국, 아니 대륙 최고의 어둠술사를 얻으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레슬리가 눈을 감자, 공작저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순식간에 그녀의 그림자 속으로 돌아갔다.

“아하하.”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린 셀바토르 공작은 머리를 쓸어 뒤로 넘기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졌던 가면이 잠시 불빛 아래 드러났다.

“스페라도 양. 내가 원하는 게 뭔지는 알고는 있는 건가?”

“모릅니다.”

레슬리는 당당하게 공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고아원을 돌아다니며 여자아이를 찾고 계시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낮은 존재로 인식되는 것 앞에서는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레슬리는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하녀, 하인보다 못한 최약체였다.

그래서 후작도, 후작 부인도 종종 그녀 앞에서는 늘 실수를 저지르곤 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셀바토르 공작이 고아원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비밀스러운 이야기였다.

“어머나, 우리 집에 쥐가 있나 보네. 고마워요, 스페라도 양.”

그렇게 대답하며 셀바토르 공작은 웃음을 머금었다. 레슬리의 말만 들었는데도 이미 범인을 대강 파악했다는 미소였다.

“그럼 스페라도 양은 왜 나를 찾아와 공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네. 스페라도 후작가니 밥을 굶거나 심한 노동을 하지도 않을 텐데 말이야.”

셀바토르 공작의 말에 레슬리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심한 노동은 하지 않았으나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매일 입었고, 밥을 굶는 일도 허다했다. 끝은 엘리를 위한 제물이었고.

레슬리는 공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를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해 주세요. 제가 자립할 수 있는 나이인 열여덟 살까지만, 이 공작저에서 공녀로 살기를 바라고 있어요. 열여덟 살 생일이 지나면 제 발로 이 공작저를 나가겠습니다. 상속권도, 계승권도 깔끔하게 포기하겠어요.”

거기까지 말한 레슬리의 라일락색 눈동자가 물기로 촉촉해지더니 결국, 툭 하고 눈물 한 방울을 떨궜다.

“저는 그저 성인이 돼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철저하게 남을 위한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엘리를 위한 제물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저런 평범한 삶. 나를 위해서 살 수 있는, 내가 선택하는 나의 삶이 가지고 싶었다. 레슬리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셀바토르 공작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니 부디 저를 이 공작가에 받아 주세요.”

그런 레슬리를 보며 셀바토르 공작은 가볍게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공작은 레슬리의 말이 진심임을 알아챔과 동시에 저 눈 뒤에는 다른 무언가를 더 감추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나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어서 말해 봐요, 레슬리 양.”

공작에 말에 소매로 눈물을 훔친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엔 아까의 간절한 표정과는 전혀 다른, 분노로 차가워진 눈동자를 공작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까득, 작게 이를 가는 소리가 응접실에 울려 퍼지고 레슬리는 한 자 한 자 분노에 찬 대답을 꺼냈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이름 아래 스페라도 가문을 몰락시켜 버리고 싶습니다.”

사실 성인이 될 때까지 목숨을 부지하는 여러 방법이 있긴 했다.

그래도 레슬리가 굳이 셀바토르 공작가를 선택한 이유는, 셀바토르 공작이 어린 여자아이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이기도 했지만, 셀바토르 공작가가 스페라도 후작가의 우위에 있는, 몇 안 되는 가문이어서였다. 아래에서 위를 치는 것보단, 위에서 아래를 찍어 누르는 게 더 가능성이 높으니까.

흐응. 작게 비음을 낸 셀바토르 공작이 깍지를 끼워 제 무릎 위에 올리더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좋아, 레슬리 양. 몇 가지 더 질문을 할 수 있을까?”

어느새 스페라도 양에서 레슬리 양으로 호칭이 바뀐 것도 모른 채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를 찾아왔죠? 위의 두 이유는 잘 알겠어. 하지만 황실을 찾아갈 생각은 해 보지 않았나? 분명 그 힘을 가지고 있다면 황실에서 레슬리 양의 보호를 마다할 일은 없을 텐데. 거기다 가문의 벌을 주기에도 황실 쪽이 더 적격이지 않나?”

“황실은 벌을 주더라도 그 벌이 미약할 거예요. 갑자기 명문가를 몰락시켜 균형을 흔드는 건 황실 쪽에서 원하지 않을 테니까요. 거기다 황실 역시 스페라도 가문의 비법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커요.”

그래, 모를 리가 없었다. 레슬리는 그렇게 확신했다.

자그마치 1천 년을 이어 온 일이었다. 오직 힘을 얻을 아이 한 명을 위해 다른 형제자매들을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는 그 끔찍한 방법을 황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여태 모른 척해 준 거겠지.

황실은 거대한 힘을 거느릴 수 있고, 스페라도 가문은 명성과 권력을 얻을 수 있으니 나쁜 제안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걸 혼자서 다 파악하고 떠올린 건가? 실례지만, 몇 살이나 되었지, 레슬리 양?”

“올해 열두 살이 되었어요. 부족하지만 배운 것이 있고, 살고 싶어 발버둥 치다 보니 떠올랐고요.”

셀바토르 공작은 다시 한 번 레슬리를 훑었다. 새하얀 눈이 내린 듯한 은발도, 연보라 다이아몬드를 닮은 눈도 마음에 들었다.

셀바토르 공작가는 검은 머리, 짙은 회색빛 머리, 고동빛 머리에 암녹색 눈동자가 주를 이었다. 그 때문인지 저렇게 새하얗고 말랑해 보이는 아이가 이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바뀐 것처럼 느껴졌다. 거기다 아는 것도 많고, 눈치도 빠른 것 같고.

자존감이 낮아 보이기는 하지만 그건 그녀가 일으켜 주면 되는 부분이었다. 비록 지금은 바짝 마르고 초라했지만, 토닥여 주고 다듬어 주면 누구보다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 아이.

‘그리고 어둠술사.’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아이였다. 셀바토르 공작은 그런 그녀를 보며 방긋 미소를 흘렸다. 하지만 아직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천천히 레슬리 쪽으로 걸어갔다.

“레슬리 양, 혹시 내 소문을 들은 적이 있나?”

급작스러운 공작의 질문에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괴물의 피가 섞인 공작가라는 것과…….”

말해야 하나? 레슬리가 머뭇거리자, 어서 말하라는 듯 공작이 시선으로 재촉했다.

“……얼굴의 절반이 비늘로 덮여 있다고 들었어요.”

“후후, 역시 들었구나.”

덧붙인 말은 굉장히 안 좋은 말일 텐데도 공작은 작게 웃었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톡톡 자신의 가면을 두드렸다.

“이걸 내가 벗을 생각인데, 많이 끔찍할 거야. 괜찮겠나, 레슬리 양?”

“네.”

주저 없이 나오는 대답이 마음에 들어 공작은 가면을 벗었다. 그녀의 흰 가면 밑을 본 레슬리는 크게 눈을 뜨고 작게 몸을 떨었다. 심각한 화상 자국이 그녀의 얼굴을 절반이나 덮고 있었다.

전쟁 중에 입은 상처라 바로 제대로 된 조처를 하지 못했고 사제를 너무 늦게 만난 탓에 괴기하게 뒤틀려 남아 버렸다.

“레슬리 양이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전쟁에서 입은 상처야.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했지.”

그렇게 말하며 셀바토르 공작은 레슬리의 표정을 자세히 관찰했다.

어떤 아이들도 이 얼굴을 보고 말짱한 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대부분 울음을 터트리거나 도망갔다. 심지어는 기절하는 아이들까지도 있었다.

자신의 아이가 되려면 이 상처를 보고 적어도 울지는 말아야 했다.

“아프지는 않으세요……?”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에 셀바토르 공작은 눈을 크게 떴다. 레슬리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무서움에 의한 것이 아닌, 되레 자신이 아파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파 보여요.”

그렇게 레슬리는 셀바토르 공작의 상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며칠 전의 자신이라면 비명을 지르다 기절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불이 얼마나 무서운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팔에도 그 고통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니까.

“무섭지는 않은가?”

“네, 저도 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레슬리는 팔을 걷어 흉측한 흉터로 남아 버린 제 팔을 보여 주었다. 그 팔을 본 공작은 다시 웃으며 가면을 쓰더니 맞은편 제자리도 돌아가 다시 몸을 앉혔다.

“이제 아프지는 않은 상처야. 입은 지 오래되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공작은 레슬리를 다독였다. 그리고 허무맹랑한 소녀가 제안한 계약의 결론을 내렸다.

“좋아, 레슬리 양. 내 이야기를 해 볼…….”

꼬르르륵―!

“……꼬르륵?”

순식간에 분노로, 허무로, 아픔으로 덮여 있던 아이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레슬리가 급하게 배를 감싸 쥐어 봤지만, 고작 그 행동으로 우렁찬 소리가 멈출 리가 없었다.

꼬륵, 꼬르르륵!

오히려 어서 밥을 넣어 달라는 듯 더 거세게 울려, 레슬리의 얼굴이 귀 끝까지 붉어졌다. 톡 하고 건들면 터져 버릴 것 같은 레슬리의 뺨을 보며 셀바토르 공작은 작게 웃었다.

“이런, 내가 실수를. 레슬리 양, 우리 저녁 식사에 함께해 주지 않겠나요?”

***

신세계다. 레슬리는 입에 들어 있는 음식을 오물거리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이건 신세계야!

오늘 아침에 먹은 음식들도 너무도 맛있었는데,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먹게 된 이 음식들은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세계로 레슬리를 인도했다.

처음엔 셀바토르 공작의 눈치를 보며 조금씩 먹던 레슬리는 어느새 양 뺨 가득히 음식을 넣고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레슬리를 셀바토르 공작을 포함한 제나 집사와 하인, 하녀들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저 아가씨는 공작님이 어디서 납치해 오신 걸까?”

“납치해 온 거야? 왜 납치한 거야?”

“귀엽잖아!”

“아하!”

이런 실없는 대화가 식당 한편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레슬리는 열심히 양 볼따구니를 움직여 음식을 먹었다.

셀바토르 공작가에서는 아이의 웃음이 사라진 지도 오래되었고, 공작가 특유의 냉담하고 잔인한 성격 덕에 사용인들은 늘 긴장 상태였다. 손님이라도 와 주면 좋으련만, 공작은 이상할 정도로 손님을 받는 걸 꺼렸고 덕분에 늘 살얼음 위를 걷는 듯했는데.

“맛있어…….”

입을 손으로 막고 오물거리는 작고 하얀 아이를 보며 다들 미소 지었다. 거기다 공작님마저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분명 이유는 저 작은 손님 덕이겠지.

제나를 포함한 사용인들은 부디 저 귀여운 손님이 오래오래 공작가에 머물러 주기를 바랐다.

“어머니.”

그런 분위기를 깨트리는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190은 되어 보이는 키에 검은색에 가까운 잿빛 머리를 한 남자가 성큼성큼 식당으로 들어왔다. 셀바토르 공작의 첫째 아들, 베스라온 라엔 셀바토르였다.

최연소 황실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베스라온은 손님이라는 말에 갑옷도 벗지 않고 성큼성큼 식당으로 들어왔다가 제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집에서 절대 볼 수 없는 하얗고 작은 것이 뺨을 오물거리며 밥을 먹고 있다가 자신을 보자 놀라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아까 입구에서 하인이 말한 그 손님인가? 베스라온이 다시 식탁 중앙에 앉아 느긋이 포도주로 목을 축이고 있는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이 손님은…….”

“아아.”

공작은 입에서 와인 잔을 떼더니 손을 뻗어 레슬리의 은발을 매만졌다. 그녀의 거친 손가락 사이로 은발이 반짝이며 빛을 냈다.

“내 딸.”

“히끅!”

“……뭐라 하셨습니까?”

공작의 말에 두 곳에서 반응이 가장 강하게 튀어나왔다. 하나는 아직 음식을 오물거리며 필사적으로 빨리 삼키려는 레슬리였고, 하나는 베스라온이었다. 언제나 무뚝뚝한 아들이 저런 소리를 내다니.

“저도 모르는 동생이 있었군요.”

“지금 막 생겼지.”

귀엽지? 그렇게 시선을 제 아들에게 던지며 공작은 손가락으로 베스라온을 가리켰다.

“자아, 레슬리 양. 저게 네 첫째 오라버니가 될 거란다.”

그것이 베스라온 오라버니와 레슬리의 첫 만남이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돌았고 그 침묵을 깬 건 베스라온이었다.

“저거라니요.”

순식간에 사람도 아닌 물건이 되어 버린 기분에 베스라온은 눈을 찡그리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아끼는 와인까지 꺼내 마시고 있었다.

“자아, 베스. 인사해야지?”

“어머니!”

어린 여자아이에게나 붙일 법한 어릴 적 제 애칭까지 부르는 걸 보니 정말 기분이 좋기는 좋으신 모양이었다.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던 베스라온은 아직도 제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필사적으로 입을 오물거리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하아.”

그래, 인사를 하긴 해야지. 성큼성큼 아이 앞으로 다가간 베스라온은 레슬리라고 불렸던 아이 위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이의 라일락색 눈동자가 더 동그래지더니 히끅! 하고 작게 딸꾹질을 터트렸다.

“……린체의 기사단장, 베스라온 라엔 셀바토르다.”

무뚝뚝의 극치를 달리는 인사를 듣고 뒤편에 서 있던 사용인들과 제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안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머리가 두 개나 큰 거구가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저렇게 인사를 하다니. 거기다 베스라온은 선이 굵은 미남이라 아이들이 보기엔 굉장히 무섭고 거칠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아이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전혀 모르는 베스라온다운 행동이었지만, 뒤편에 서 있던 사용인들은 그 행동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울려나?’

‘우시겠지.’

사용인들은 잠시 수군거리더니 잽싸게 눈물을 훔칠 손수건과 짓물린 눈매를 닦아 줄 따스한 물을 축인 수건, 그리고 마음을 달래 줄 달콤한 사탕이 든 상자를 들고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제나 집사마저 포근한 담요를 들고 와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만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와인으로 입을 축이고 있었다.

꿀꺽.

이제야 간신히 제 볼때기에 들어 있는 음식을 삼킨 레슬리는 재빠르게 입가를 정리하더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베스라온 앞에 섰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화답했다.

“스페라도 가문의 차녀, 레슬리 스페라도입니다.”

안 운다! 거기다 귀여워! 사용인들은 울지도 않고 예의 있게 인사하는 레슬리를 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사탕을 들고 있던 하인은 제 손에서 상자가 떨어져 비싼 사탕이 데구르르 바닥을 구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그런 사용인들의 표정에 작게 웃은 셀바토르 공작은 와인 잔을 손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말을 꺼냈다.

“이런, 남매간의 대화라 보기에는 너무 딱딱하지 않니?”

그러자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공작에게 닿았다.

“베스, 레슬리 양의 나이가 몇 살일 것 같니?”

“…….”

오늘은 종일 베스라고 불리겠구나. 일찌감치 제대로 이름을 불리기를 포기한 베스라온은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레슬리는 다시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에 치맛자락을 꽉 잡고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몇…… 살일까?

이런 작은 아이를 본 적이야 종종 있었지만 그 아이들의 나이까지 알 정도는 아니라 베스라온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점점 깊어졌다. 한참 동안 침묵이 식당에 내려앉았고, 간신히 베스라온은 대답했다.

“다섯 살.”

“……?”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베스라온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열두 살이나 되었는데 다섯 살 꼬꼬마 취급하다니!

“큰 도련님, 적어도 열 살은 돼 보이시지 않나요.”

“그래, 다섯 살은 너무 적다.”

“난 아홉 살 정도로…….”

뒤에 사용인들이 웅성거리는 걸 보니 레슬리가 나이에 비교해 작긴 작아 보이는 모양이었다. 레슬리는 입술을 쏙 내밀었다. 오직 진짜 나이를 알고 있는 공작과 제나만이 작게 웃을 뿐이었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베스라온은 그 웅성거림을 멈추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낮고 거친 목소리가 식당을 가득 메웠다.

“엔티가 네 살 때 이 정도였지요. 여자아이고 하니…… 그보다 한 살 더 많게 해서 다섯 살이 틀림없습니다.”

자신의 집안사람들 평균 크기가 남들의 거의 두 배는 되는 걸 잊어버린 베스라온은 제 동생을 떠올려 대답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제 종아리쯤 되는 위치에서 원망이 조금 섞인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열두 살이에요.”

레슬리는 아직도 입을 빼죽 내민 채 슬그머니 베스라온을 올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올해 열두 살이 되었어요.”

살짝 섞인 원망스러운 눈빛에 베스라온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펴지고 당황함이 눈가에 서렸다. 아니, 이렇게 작은 애가 열두 살이라고? 아무리 높게 쳐줘 봤자 여섯 살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베스라온의 기준이 높은 탓도 있었지만, 레슬리가 워낙 잘 먹지 못하고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강한 압박을 받으며 자라온 탓에 키가 자라지 못한 탓도 있었다. 거기다 너무 마른 몸도 베스라온의 시야를 흐리는 데 한몫했다.

“푸하하-”

드물게도 제 아들이 당황한 모습을 보던 셀바토르 공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레슬리를 불러 다시 제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다시 아까 하던 대로 레슬리의 길고 구불거리는 은발을 매만지며 베스라온을 바라보았다.

“첫 만남인데 인상이 그다지 좋지 않구나, 베스라온.”

‘나는 좋은데.’라는 뒷말이 들리는 것 같아 베스라온은 다시 눈을 찡그린 채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일부러다. 일부러 나이를 물어본 게 틀림없었다.

“미안해요, 레슬리 양. 아들놈의 안목이 형편없네. 저놈 말고도 다른 놈이 한 명 더 있는데 오늘은 늦는 모양이야.”

셀바토르 공작이 살짝 웃으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어때, 우리 공작가의 요리는 입에 좀 맞았나요?”

“네에……. 정말 맛있었어요.”

식사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라일락색 눈동자에 빛이 돌더니 뺨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 먹어 봐요. 천국에서 먹는다는 요리 같았어요.”

그러면서 눈을 살짝 접고 사르르 웃어 보이자 식당에 있던 사용인들은 그 귀여움에 어쩔 줄 몰라 작게 숨을 흘렸고, 소식을 듣고 귀중한 손님을 구경하러 온 요리사는 아예 가슴을 붙잡고 신음을 흘렸다.

“크흑……!”

황실에서도 실력자로 뽑히던 그는 16년 전에 이 셀바토르 공작가의 정식 요리사가 되었는데, 그동안 서러운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재료를 공수해 정성껏 요리해도 맛있다고 말해 주는 사람 따윈 없던 저택이었다. 차라리 황실의 반응이 더 좋았다.

어떻게든 자신의 고용주에게서 맛있다는 말을 듣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 왔지만 가장 열렬했던 반응은 ‘응, 맛있네.’ 정도였다.

장단의 높낮이 없는 단 한마디. 참으로 사람 서글프게 만드는 그 한마디가 전부였는데……! 저 웃음 한 번에 그동안의 서러움을 보상받는 듯해 요리사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여태 쌓인 그 서러움과 지금 몰려드는 기쁨을 이해하는 주방 식구들은, 주저앉은 그를 토닥이며 일으켜 세웠다.

자신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레슬리는 다 먹은 접시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레슬리 양. 밤이 늦었는데 스페라도 후작이 그댈 찾진 않을까?”

공작이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달이 길을 비추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달을 보며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생각해 보면, 저녁노을이 길에 깔려 펴질 때쯤 공작저로 들어왔으니 밤이 돼 버린 것이 당연했다.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간 적은 처음이야.’

공부를 할 때도, 혼날 때도, 혼자 방에 갇혀 아무도 만나지 못했을 때도, 시간은 늘 느리게 흘러갔다. 그래서 레슬리는 종종 엘리가 드레스 가게를 순방하고 돌아온 저녁에 ‘아아,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다니. 아쉬워라.’라고 말하며 한탄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알 수 있었다.

“레슬리 양, 원한다면 마차를 빌려 드리죠.”

셀바토르 공작의 말에 레슬리는 작게 고개 저었다.

“아니요. 마차를 집으로 보낼 때 신전에서 밤새 기도를 올리고 가겠다고 그렇게 말해 놨어요.”

그나마 레슬리가 다닐 수 있었던 신전. 거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겠노라고 마부랑 말을 맞춰 놨었다.

“레슬리 아가씨, 이제 가 보죠. 춥지 않습니까?”

레슬리가 정문 앞에서 공작이 자신을 만나 주기를 기다릴 때, 마부는 계속해서 그녀를 재촉했다.

“이러다간 혼나지 않겠습니까. 후작님은 무서운 분이시지요.”

얼핏 듣기엔 레슬리를 걱정하는 듯 보였으나, 사실은 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레슬리는 알고 있었다. 자신을 태워 줬다는 것도 후작에겐 마뜩잖은 일인데, 거기다 장시간 자리를 비웠으니. 아마 후작은 머리끝까지 화가 솟아 있을 것이다.

“가.”

“어……. 하지만 마차도 없이 어떻게 오시려고……. 거기다 날도 추운데…….”

레슬리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마차가 고삐를 바로 붙잡았지만, 바닥을 박박 긁어 한 줌도 안 되게 나온 양심이 마지막으로 말 한마디를 꺼내게 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가. 대신 후작에겐 내가 신전에서 부정을 씻기 위해 밤샘 기도를 올리고 간다고, 그렇게 전해. 셀바토르 공작가 이야긴 절대 꺼내지 마.”

“하지만 그러면 주인님을 속이게 되는 건데…….”

“괜히 셀바토르 공작가 이야기를 꺼내서 경을 치는 것보단 낫겠지. 잘리고 싶지 않다면 조용히, 내가 한 말만 후작에게 전해.”

레슬리의 말에 요리조리 눈을 굴리던 마부는 결심을 내린 듯 고삐를 꽉 쥐고 모자를 고쳐 썼다.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저는 분명 아가씨를 말렸습니다! 저는 이제 이 일은 모르는 일이에요!”

혹여나 저에게 불똥이 튈까 거듭 못을 박더니 재빠르게 레슬리를 셀바토르 공작가 앞에 내버려 두고 스페라도 후작가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레슬리는 살짝 씁쓸하게 웃으며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 웃음에 공작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더니 곧 입가에 서린 미소가 짙어졌다.

“잘됐네. 그럼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요, 레슬리 양. 손님이 잘 오지 않는 누추한 곳이지만, 손님방은 언제나 잘 정돈되어 있거든.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공작이 손을 뻗어 레슬리의 이마를 짚었다가 다시 화상을 입은 팔로 내렸다.

소매를 걷어 화상 자국을 본 셀바토르 공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뒤에 서서 그 화상을 본 베스라온 역시 믿을 수가 없는지 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심각하네. 화상을 입고 나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죠?”

그 말에 레슬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에게도 보이지 않은 팔이었다. 그나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약초를 으깨 만든 괴상한 고약뿐이었다. 효과는 미미하고 냄새만 고약한 약이었지만, 가진 것이 그것뿐이라 그 약만 바르고 있었다.

“아팠을 텐데…….”

작게 말을 흘린 셀바토르 공작이 조심스레 소매를 내려 주더니 레슬리의 은빛 머리카락을 손수 정리해 뒤로 넘겨 주며 방긋 웃어 보였다.

“사제를 불러 줄 테니, 이것도 치료하고 가요, 레슬리 양.”

***

‘꿈같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손님방으로 안내된 레슬리는 이불을 코까지 끌어 올리고 눈만 내놓은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세밀한 명화가 그려진 공작저의 천장은 레슬리가 의자에 아니, 책상 위에 올라가 까치발을 들고 팔을 쭉 뻗어도 닿지 않을 만큼 높아 보였다. 거기다 방 안에 놓여 있는 네모난 신식 난로는 얼마나 따듯한지, 금세 몸이 노곤해져서 잠이 자꾸만 몰려들었다.

레슬리는 다시 이불을 끌어 올렸다. 부드러운 이불이 뺨에 닿을 때마다 기분마저 간질간질해졌다. 이렇게 부드러운 이불은 아마 엘리도 가지고 있지 않겠지.

‘정말 꿈같아.’

졸음에 눈을 깜빡이던 레슬리는 천장을 향해 팔을 쭉 뻗어 보았다.

평소에 자신이 입던 잠옷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잠옷이 밑으로 스르륵 내려가면서 새하얀 팔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보기 싫은 물집과 고름으로 가득하던, 아픔만이 존재했던 팔은 흔적 하나 없이 깨끗했다.

심지어 엘리가 던진 장식물에 맞아 푹 파여 버렸던 곳마저 부드러운 살이 올라와 있었다. 레슬리는 괜스레 그곳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보았다. 부드럽다. 제 살결인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뽀얗고 부드러웠다.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저절로 아까 만난 사제님이 떠올랐다.

‘세상에…… 어떤 극악무도한 인간들이 팔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제대로 된 치료조차 해 주지 않은 겁니까?’

공작의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온 사제는 레슬리의 팔을 보더니 제가 다 아프다는 듯 괴로워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최소한의 조치만 해 놨군요. 많이 아프셨을 텐데…….’

그렇게 말한 사제는 이제 아프지 않아도 된다는 뜻인지, 그동안 잘 참았다는 칭찬인지,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마도 둘 다인 것 같아 보였다.

한참이나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은 사제는 조심스레 레슬리의 팔을 잡고 힘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따스한 금색 빛이 레슬리의 몸을 감싸더니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더불어 차디찬 길거리에서 오래 서 있던 탓에 몰려드는 피로감과 감기 기운도 점점 옅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 따스한 황금빛 힘에 레슬리는 눈을 떼지 못했다.

와아아. 레슬리는 점점 가벼워지는 몸 상태가 신기해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빠르게 몸이 나아질 줄은 몰랐다. 사제에게 성력으로 치료받는다는 건 엄청난 돈을 지급해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레슬리에게는 머나먼 세계의 일이었다.

후작 부부와 엘리는 약간의 몸살로도 돈을 내고 치료를 받았지만, 그녀는 구경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아 사제가 방문할 때면 언제나 다락방에 숨어야 했다. 후작 부부는 레슬리를 손님에게 보이는 걸 원치 않았으니까.

치료 후 레슬리는 따듯한 물이 가득 찬 개인 욕조로 안내받았다. 거기서 난생처음으로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했다.

그리고 완전히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마지막으로 온 곳이 이 손님방이었다. 얼마나 넓고 화려하던지.

레슬리는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다물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입을 벌리고 방을 구경한다면 바보처럼 보일지도 모르니까.

자신의 새하얀 팔을 보다 레슬리는 손톱으로 시선을 옮겼다. 살기 위해 돌바닥에 박아 넣었던 손톱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깨지고 부러졌었는데, 오늘 하녀분들이 목욕하면서 손톱 정리까지 도와준 덕에 조금 더 짧아졌지만 괜찮아 보였다.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좋은 냄새를 맡고 있는데도 이게 꿈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레슬리는 결국 제 뺨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

“아얏.”

밀려오는 고통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꿈이 아니야. 다시 폭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레슬리는 작게 웃었다. 오늘은 좀 웃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오늘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아침에 따듯한 세숫물도 받았고, 맛있는 식사를 했다. 거기다 오래 기다리긴 했지만 공작을 만나는 데 성공했고.

‘계약도 성공했어.’

내 딸이라고 불러 주셨지. 레슬리는 자꾸만 몰려오는 졸음에 눈을 깜빡였다. 아는 것이라곤 소문뿐이던 공작은 생각보다 더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도 방심은 하지 말자.’

아직 공작이 자신에게 뭘 요구할지도 몰랐고, 무엇보다 셀바토르 공작이 성년이 된 후에 자신을 순순히 놓아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스페라도 가문의 어둠술사는 그 맥이 끊긴 지 1백 년이 넘었지만, 아직 그 힘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어둠술사의 힘은 강력하고도 매혹적이었다.

건국사와 역사서를 전부 읽고 외운 레슬리는, 강한 힘을 가졌지만 아직은 어린 이들이 권력욕에 물든 인간들에게 어떻게 이용되는지 알고 있었다. 1천 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자신처럼 어리지만 힘을 가진 이들이 종종 나왔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레슬리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이리저리 이용당하는 삶. 레슬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삶이었다.

공작저에 남든 아니면 황실로 가든,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셀바토르 공작에게 말한 대로 지금 자신이 원하는 평범한 삶을 살든, 그 모든 걸 자신의 선택대로 하고 싶었다. 여태까지 살아온 것처럼 남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아암.”

내일 셀바토르 공작을 만나 확정을 지어야 하는데……. 할 이야기도 정말 많은데…….

하지만 목욕이 끝난 몸은 노곤했고, 방은 따듯했으며 침대는 더없이 보드라웠다. 곧 넓은 손님방에는 도로롱, 도로롱 코 고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

“내일이면 가시겠지……?”

한 하녀가 저택 복도에 있는 초를 밝히며 작게 한숨 쉬었다.

단연 오늘의 최고 화제는 레슬리 스페라도 양이었다.

사람은 종종 맛있는 걸 먹어 줘야 했고, 좋은 음악도 들어 줘야 했으며 귀여운 것도 봐 줘야 했다. 하지만 이 공작가는 그 귀엽다는 것과는 거리가 가장 먼 곳 중 하나였다.

다른 저택에 비교해 일도 힘들지 않았고, 봉급도 많았으며 주인들도 좋았다. 하지만…….

“다들 좀 무섭단 말이야.”

사다리를 잡아 주던 하녀가 말하자 위에 올라가 초를 켜던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이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 더 컸고, 대부분이 검을 잡았던, 그리고 잡는 기사였다. 그 압박감은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조그맣고 하얀 손님이 그 사이에 뿅 나타나더니, 라일락색 눈을 깜빡이며 움직였다. 입을 오물거리기도 하고 다섯 살이라던 베스라온 도련님 말에 입술을 쭉 내밀기도 했으며, 손님방으로 안내했더니 눈에서 별이 떨어질 정도로 신기해했다.

“귀여웠어.”

두 하녀는 몰려드는 귀여움에 작게 몸을 떨었다. 그 두 사람 사이에 있다 보니 더욱더 하얗고, 작고, 귀여웠다. 만성 귀여움 부족이던 공작가의 사용인들에게는 단비 같은 손님이었다.

“그런데 있잖아, 분명 공작님이…….”

“거기 둘.”

초를 켜며 한참 이어지던 대화는 낮은 목소리에 끊겼다. 뒤를 바라보니 갑옷을 벗고 편한 튜닉으로 갈아입은 베스라온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베스라온 도련님.”

둘은 재빠르게 베스라온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혹여나 방금까지 대화가 들렸을까 슬금슬금 숙인 고개 밑으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어머니와 대화를 할 건데, 차를 집무실로 가져오도록 해.”

다행히도 못 들었구나. 작게 한숨 쉰 한 하녀가 재빠르게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다과도 같이 올릴까요?”

베스라온은 고개를 젓더니 곧 몸을 돌려 집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베스라온의 뒷모습에 안도감으로 가슴을 쓸어내린 두 사람은 재빠르게 자신들이 가져온 장비를 챙겨 주방으로 향했다.

‘부산스럽군.’

베스라온의 미간에 약한 주름이 잡혔다. 언제나 들뜸이 없이 자신들의 할 일을 하던 사용인들이 오늘따라 부산스러웠다.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

‘아이를 찾고 있던 건 알고 있었지만, 왜 하필이면 스페라도 후작가지?’

그 작은 아이를 집에 들인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그 작은 아이가 떠올랐다. 몽실몽실해 보이는 머리카락에 연보라색 눈동자. 귀엽다는 것을 잘 모르는 자신이 봐도 귀여웠다.

‘……설마, 정말 귀엽다는 이유로 선택한 건 아니겠지.’

설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까 어머니의 행동이 불안감을 부추겼다.

방금처럼 저택 사용인들은 물론 제나 집사마저도 그에게 웃으면서 ‘작은 드레스를 사야겠지요?’ 하고 말을 걸었다.

집무실 문 앞에 선 베스라온은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흘렸다.

“베스라온입니다.”

노크와 함께 집무실 문을 열자, 의자에 앉아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공작이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니?”

“그 아이에 관해 물어보려고 왔습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베스라온은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가면에 절반 정도 얼굴이 가려져서인가 표정을 읽기 힘들었다.

아니, 저 가면 때문이 아니더라도 어머니는 늘 속마음을 알기 힘들었다.

“왜 스페라도 가문의 딸을 선택한 것인지 말해 주십시오. 다른 곳도 아니고 후작가의 딸이라니. 분명 잡음이 심할 겁니다.”

“그래, 데려오는 게 참 힘들겠지.”

공작은 작게 웃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친부모가 멀쩡히 살아 있는 후작가였다. 몰락 귀족의 아이도 데려오는 데 상당한 처리가 필요했는데, 명문가 중 한 곳인 스페라도 가문의 아이라면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데려오는 데 걸리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분명 황실 쪽이나 스페라도 후작가 쪽에서 자신을 귀찮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복잡 미묘해 보이는 어머니의 표정을 본 베스라온은 조심스레 다시 어머니에게 물었다.

“정말로 그 모든 잡음을 누르고서라도 데려올 만한 아이입니까?”

“정말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야. 그건 내가 보증하지.”

거기까지 말한 공작은 가볍게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렸다. 생각에 빠진 듯 일정하게 이어지던 그 소리는 곧 끊겼다. 공작의 암녹색 눈동자가 다시 소파에 앉아 있는 베스라온을 향했다.

“그리고 어쩌겠니.”

후, 작게 한숨까지 쉬는 어머니를 베스라온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어머니가 저러시는 걸까.

“저 어린 게 살고 싶다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외치는데, 어른이라면 응당 도와줘야지.”

조금은 서글퍼 보이는 공작의 미소 위로 환한 달빛이 내려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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