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레슬리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여기는 어디지? 처음 보는 듯한 풍경이 레슬리를 반겼다.
두엇이 같이 누워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커다란 침대에는 하늘하늘한 캐노피가 달려 있었고, 그 너머로 보이는 방에는 처음 보는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레슬리는 눈을 뜨자마자 몰려오는 두통에 눈을 찡그렸다. 가장 또렷한 마지막 기억은 마차에 불이 났고,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 줬다는 것이었다. 아니지, 셀바토르 공작님을 뵌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을 더듬어 보려다가 레슬리는 작게 몸을 떨었다. 자연스레 마차에서 난 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무서웠다.
너무도 무서워서 꿈에서조차 불에 쫓겼다. 어둠을 이용해 빠져나올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불은 레슬리가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맹렬하게 쫓아왔었다. 그래서 꿈속에서 레슬리는 울면서 쫓기고 쫓겼다.
‘아니야. 난 살았고, 그건 꿈이야. 어린애도 아닌데 꿈 때문에 울지는 말아야지.’
자신도 모르게 흘린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레슬리는 코를 훌쩍거렸다. 혹시라도 울음이 새어 나갈까 봐 입술을 꼭 닫았다.
꿈의 끝은 무섭지 않았다. 어디선가 들려온 작은 노랫소리에 불이 점점 사그라들었으니까.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레슬리는 나름 차분히 자신이 있는 방을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방이 아니었다. 지금 레슬리가 있는 곳은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자신이 예전에 하룻밤 머물렀던 그 방이었다.
그제야 베스라온에게 구해져 이리로 온 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깨달았다. 중간에 셀바토르 공작님이 자신을 내려다보던 것도 현실이었다. 분명 공작님이 옆에 있어 줬으면 해서 뭔가를 중얼거렸는데 뭐였지?
뺨이 달아올랐다. 그런 짓은 대여섯 살 어린아이들이나 할 법한 일인데! 제발 이상한 말만 하지 않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일어났나?”
그런데 갑자기 방문 쪽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게 이 방으로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공작가의 사람이니 일어나 인사를 하면 될 것을, 당황한 레슬리는 그만 침대에 도로 누워 눈을 꼭 감았다. 일부러 코까지 고롱고롱 골았다.
“아직 자는 모양입니다.”
베스라온 님 목소리다!
“그래? 아구, 이 작은 눈가가 짓물렀네. 얼마나 무서웠으면 이렇게 됐을까.”
그런데 베스라온 목소리를 뒤따라 처음 듣는 목소리가 레슬리의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낮고 중후한 목소리. 누구지?
“스페라도 후작, 이 미친 새끼. 전쟁터에는 안 나오려나? 나오기만 하면 실수인 척 모가지를 확 따 버릴 텐데.”
“한창 분란이 일어났을 때도 용병과 기사를 사서 내보냈던 자가 전쟁터에 나올 리가요.”
두런두런 말소리가 이어지자 레슬리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반쯤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일어났구나!”
커다란 남자였다. 레슬리는 여태 베스라온을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 전까지는 스페라도 후작가의 기사 중 한 명이었고. 하지만 지금 레슬리가 눈을 뜨자 난리를 떨기 시작한 남자는 베스라온보다 조금 더 컸고 선이 굵었다.
커다란 덩치에 붉은 기가 도는 주홍빛 머리를 뒤로 넘긴 사람. 거기다 구레나룻과 이어진 주홍빛 턱수염에, 뺨엔 긴 상처까지 나 있었다. 두꺼운 눈썹 밑에서는 청록빛 눈동자가 번뜩여서 금방이라도 레슬리를 잡아먹을 듯 보였다.
그러니까, 아이가 보기엔 조금 많이 무서운 인상의 남자가 저를 보며 뺨을 씰룩거리며 웃자, 레슬리는 자신도 모르게 베스라온에게 덥석 안겼다. 라일락색 눈동자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베스라온이 그런 레슬리의 머리를 토닥이며 아이를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말을 덧붙였다.
“우리 아버지야.”
“아, 아버지…….”
그 말에 레슬리는 용기를 내 베스라온 품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상처를 입은 듯 어깨가 추욱 처진 남자가 불쌍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내 얼굴이 많이 무서운가……?”
그 말과 함께 번뜩이던 청록빛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잠시 그러더니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재빠르게 자신의 솥뚜껑 같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레슬리 양, 이러면 좀 괜찮은가……? 아, 망토를 뒤집어써 볼까?”
다 큰 어른이 자신의 눈치를 보며 맞춰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레슬리는 작게 키득거렸다.
난생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에선 다들 자신의 기준에 레슬리를 맞췄고, 그 기준에 따라가지 못하면 쓸모없는 아이란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저렇게 큰 사람이 자신에게 맞추려고 해 주었다.
레슬리의 웃음소리에 망토를 뒤집어쓰려던 남자의 움직임이 멈추었고 소중히 레슬리를 품에 안고 있는 베스라온도 눈을 깜빡거렸다. 레슬리가 살짝 고개를 들어 베스라온을 바라보자, 그 뜻을 이해한 베스라온이 조심스레 레슬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레슬리는 두꺼운 카펫 위를 맨발로 걸어 그 남자 앞에 섰다. 이미 절반 정도 망토를 뒤집어쓴 남자가 푸른 망토 사이로 레슬리와 다시 눈을 맞췄다.
“안녕하세요. 레슬리 스페라도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과는 이름을 소개하며 인사. 그렇게 책에서 배웠다. 레슬리가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하자 다시 남자가 그 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자신과 시선을 맞추려는 듯 몸을 숙였다. 남자가 얼마나 컸던지 주저앉을 정도로 몸을 숙이고 나서야 간신히 둘의 시선이 같은 선에 놓였다.
“나는 사이레인 델파 셀바토르란다.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의 남편이자, 베스라온과 루엔티의 아버지지.”
감동한 듯 망토를 꼬옥 쥐고 있는 남자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첫인상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자신을 사이레인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다시 방긋 웃었다. 정말로 순수한 웃음이었다.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한다, 레슬리 양.”
***
레슬리는 조심스레 눈앞에 놓인 오믈렛을 한 입 오물거렸다. 막 일어난 레슬리를 위해서 작게 다진 채소와 버섯 그리고 치즈가 가득 들어간 오믈렛이 준비되었다. 위에는 레슬리가 처음 보는 이름 모를 진한 갈색 소스가 뿌려져 있었는데, 너무도 맛있어서 정신을 꽉 붙잡지 않으면 입안 가득 넣을 것 같았다.
자꾸만 마구 움직이려는 수저를 꼬옥 잡고 레슬리는 나름 천천히 오믈렛을 먹기 시작했다.
“잘 먹는구나.”
그런 레슬리를 보며 사이레인이 웃음을 흘렸다. 얼마나 흡족해 보이는지, 지금 레슬리가 먹고 있는 오믈렛이 레슬리의 배가 아니라 사이레인 배 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래도 막 일어났으니 좀 더 영양가 있는 것을 먹으면 좋을 텐데……. 지금이라도 고기 몇 점을 가져다줄까?”
“사이레인 님.”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이기라도 하면 바닥을 뚫고 식당으로 직통하는 길을 내 고기를 가져오겠다는 듯 몸을 벌떡 일으키는 사이레인을, 집사인 제나가 제지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레슬리 양은 이제 막 일어나셔서 고기 같은 기름진 걸 드시면 탈이 나실 겁니다.”
“나나 저놈이나 다쳤을 때 고기를 먹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건 사이레인 님하고 큰 도련님이시니까 가능한 일이지요. 레슬리 아가씨는 평범한 여자아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하시고 앉으세요.”
‘평범한’에 강조가 들어간 제나의 날카로운 말에 다시 어깨가 추욱 처진 사이레인이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런 아버지의 꼴을 처음 본다는 듯 레슬리의 옆에 앉아 있는 베스라온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저 근데 이것도 너무 맛있어서 좋아요. 치즈도 들어가 있고……. 소스도 너무 맛있고 속에 버섯도 들어 있어서 너무 맛있어요.”
그런 사이레인을 위로하듯 레슬리가 말을 걸자 다시 사이레인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럼 내가 내려가서 오믈렛을 좀 더 가지고 올까?”
“……아버지.”
결국 베스라온이 그를 부르자, 사이레인이 덤덤한 얼굴로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뭐, 이놈아.”
자신을 대할 때와 베스라온을 볼 때 사이레인의 표정이나 목소리뿐 아니라, 그를 감싸는 분위기마저 바뀌었다. 다시 청록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사흘이나 쓰러져 있던 아이에게 좋은 것 좀 먹이겠다는데.”
“지금 제나 집사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베스라온은 익숙한 듯 그를 마주 보고 대화를 이어 갔다. 하지만 레슬리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버렸다. 사흘?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사흘이라고 하셨나.
“저기, 제가 사흘이나 잠들어 있었단 말인가요?”
레슬리는 오믈렛을 먹던 수저마저 놓은 채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사이레인이 다시 웃음꽃을 만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머리가 아파지는지 베스라온은 눈가를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그래, 사흘을 좀 넘게 잠들어 있었단다.”
사흘, 사흘이라니. 그렇게 오래 잠들어 본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레슬리는 아까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것을 이해했다. 사흘이나 잠들어 있던 탓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구나. 덕분에 다시 베스라온의 품에 안겨 식당까지 움직여야 했기에 부끄러움으로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렇지만 지금 레슬리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동안 스페라도 가문에서 아무 일도 없었나요?”
분명 스페라도 후작은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되찾으려고 발악할 남자였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남자가 아닌가? 갑자기 마차를 뒤덮던 불길이 다시 떠올라 레슬리는 몸을 작게 떨었다.
“아무 일도 없었단다.”
하지만 그 떨림과 다시 찾아오던 공포는 이어지는 사이레인의 말에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 어여쁜 부인께서 직접 가서 손수 조지고 왔거든.”
“사이레인 님!”
“아버지…….”
사이레인의 말에 제나 집사는 기겁한 듯 그를 말렸고, 베스라온은 미간을 좁히며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사이레인은 자신이 뭘 잘못한지 모르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건 레슬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금 사이레인이 한 말은 레슬리에게 있어선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조지다. 이게 무슨 뜻일까? 문맥상 좋은 뜻은 아닌 게 뻔했지만, 그래도 그 뜻을 정확히 모르니 답답하긴 했다. 살그머니 눈치를 보던 레슬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기선 질문해도 괜찮겠지? 후작가에서는 가정교사를 제외하곤 아무도 그녀의 물음에 답해 주지 않았지만, 여기서는 괜찮겠지?
“저어, ‘조지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레슬리의 물음에 사이레인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초리가 더욱 매서워졌다. 그제야 사이레인 역시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지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필사적으로 제 말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어……. 그러니까, 내 말은 모가지를 똑 부러트린다는…….”
마치 성냥을 부러트리는 듯한 손동작과 수습한답시고 바꾼 표현도 문제였지만.
혹여나 레슬리가 말을 들을까 옆에 앉아 있던 베스라온이 잽싸게 레슬리의 두 귀를 막았고, 제나는 자신의 손을 희생해 사이레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레슬리는 너무 커서 자신의 귀뿐만 아니라 눈까지 가려 버린 베스라온의 손가락을 잡아 살짝 벌렸다. 베스라온의 굵은 손가락 사이로 호기심에 가득 찬 라일락색 눈동자와 당황한 암녹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베스라온 님, 조지다는 게 모가지를 똑 부러트리는 거예요? 모가지는 목을 나쁘게 말하는 거 맞죠?”
결국 사이레인은 베스라온과 제나에 의해서 식당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식당 밖에서 앞으로 조심하겠다며 외치는 구슬픈 곰의 소리를 무시한 채 매정하게 문을 닫아 버린 베스라온이 식탁 쪽으로 걸어오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쁜 말은 잊어라. 알았지?”
그러면서 자연스레 의자를 빼 다시 옆에 앉으며 말을 이어 갔다.
“음……. 아버지는 용병 출신이기 때문에 때때로 말이 좀 거칠게 나가시는 분이야.”
그렇구나. 레슬리는 그 말에 수저를 입에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용병이라니, 용병은 귀족 출신이 아닌데. 어떻게 하다 공작님과 결혼하게 된 걸까? 잠시 의구심이 들었지만, 레슬리는 그걸 머리 한쪽 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럼 공작님이 후작의 목을 따…… 아니, 잘라 버린 건가요?”
“아니, 아니!”
베스라온은 질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무덤덤한 베스라온이었는데, 오늘따라 아버지와 이 작은 아이 때문에 많이 망가진 모습을 보였다. 골치가 아픈 듯 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꾹 누르던 베스라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처음부터 말하자면, 스페라도 후작이 너를 찾으러 이 저택에 왔었다.”
셀바토르 공작이 다녀간 이후, 스페라도 후작은 공작이 레슬리를 돌려주지 않을 거라는 강한 확신을 뒀다. 그리고 그 확신은,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공작은 자신이 레슬리를 학대한 흔적을 찾아 재판에서 자신을 이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뻗어 갔다.
안 될 말이다. 그건 절대 일어나면 안 될 말이었다. 힘을 간신히 내보이는 엘리보다 그래도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레슬리가 더 쓸모 있었으니까. 그래서 후작은 결투, 재판 같은 정상적인 범위를 넘어서 ‘납치’라는 비정상적인 방법까지 고려하게 된 것이다.
당당하게 셀바토르 공작가 앞까지 찾아온 후작은 납치한 자신의 딸을 내놓으라며 공작가 앞에서 난동을 부렸다. 문이 열리고 후작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면, 미리 길드에서 고용한 전문가들이 레슬리를 납치하는 계획이었다.
그게 스페라도 후작이 가장 빠르게 레슬리를 되찾을 방법이었으니까.
거기다 그때 셀바토르 공작의 남편과 두 아들은 집을 비운 상태였다. 빈집에 공작 한 명이니 공작의 주의만 돌리면 쉬우리라. 그렇게 확신한 스페라도 후작은 더욱더 난동을 피웠다.
사실 후작의 방법은 나쁜 방법이 아니었다. 후작이 단 하나 간과한 게 있다면 지금 그의 상대가 셀바토르 공작이라는 점이었다. 그녀가 직접 그 힘을 보여 줬지만, 조급한 마음이 후작의 눈을 가렸다.
한참을 난동을 피우니 드디어 공작저의 문이 열렸다. 하지만 문 안에서 걸어 나온 사람은 자신을 저택 안으로 안내할 집사나, 사용인이 아니라 셀바토르 공작 본인이었다.
훈련용 봉을 가지고 나온 공작은 손수 스페라도 후작이 데려온 길드원들과 기사들을 봉으로 내리쳐 기절시키더니, 질겁하고 도망가는 후작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또 이딴 더러운 짓을 벌이면 다음엔 목이네, 스페라도 후작.’
그 말과 동시에 잡힌 후작의 팔을 가볍게 반대 방향으로 비틀었고, 공작가 앞을 구슬픈 후작의 비명이 가득 메웠다.
“……그랬다는 소리다.”
챙! 그 소리에 레슬리는 입에 물고 있던 수저가 떨어진 것도 모르고 눈을 깜빡거렸다. 후작의 팔을 부러트렸다고? 그 공작님이 손수?
“헹, 그 멍청이는 우리 부인이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고 까분 거지.”
어느새 식당 창문을 열고 사이레인이 소리치자 레슬리는 더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후작을 멍청이라고 한 건가?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레슬리는 그 일이 있기 전까지 후작을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존재로 보았다.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후작.
그리고 슬프게도 여태까지 레슬리의 세계는 후작가가 전부였다. 후작은 언제나 거대해 보이고 엄청나 보였는데. 오늘 그 밑바닥에 아주 조금 남아 있던 생각들이 다시 쓸려 가는 걸 느꼈다. 셀바토르 공작님에게 팔이 꺾여 구슬픈 비명을 지른 후작, 그리고 사이레인 님에게 멍청이라 불리는 후작이라니.
레슬리가 새로운 충격에 머리가 멍해진 동안 베스라온은 아버지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창문을 거칠게 닫아 버렸다. 다시 곰의 구슬픈 목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어머니는 집 앞이 소란스러운 걸 아주 싫어하시지.”
마치 집 앞의 이상한 쓰레기를 치웠을 뿐이라는 듯 가벼운 말투였다.
레슬리는 덤덤한 얼굴의 베스라온을 보며 웃음이 터지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작게 키득거림이 새어 나오자 베스라온이 암녹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젠 쓰레기 취급인 거구나. 그렇구나, 후작은 후작가 안에서만 왕이었어. 그 저주받은 저택을 한 발짝 나오기만 해도 후작은 이런 대접을 받았다.
레슬리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환하게 웃어 보이자 제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다 따라서 미소를 흘렸다. 베스라온은 커다란 손으로 목덜미를 문지르더니 하녀가 가져온 새 수저를 집어 들었다.
“어서 먹어. 먹고 약도 먹고 자야지.”
그러더니 손수 오믈렛을 한 수저 떠 주었다. 레슬리는 방긋방긋 웃으며 그 오믈렛을 덥석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처음 먹는 오믈렛은 정말로 맛있었다.
식사 후 레슬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있던 방이 아니라 다른 방으로 안내되었다. 제나 집사가 직접 안내해 줬는데, 사이레인은 혹여나 다시 말실수할까 자신의 입을 막고 따라왔다.
“우와!”
방에 들어온 레슬리는 눈을 반짝거렸다. 여태 자신이 머물던 방이 가장 좋은 방인 줄 알았는데, 그 방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거대한 방에는 커다란 침대와 레슬리가 보기엔 베스라온이 누워도 될 것 같은 넓은 붉은색 소파, 그리고 하늘하늘한 캐노피에 천장까지 가득 찬 책들이 있어 레슬리의 눈을 사로잡았다.
난로는 마법으로 작동해서 불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고, 바닥에는 섬세한 문양으로 짜인 카펫이 깔려 있었다.
여러 개나 되는 창문에 달린 커튼 역시 레슬리가 처음 만져 보는 고급스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계속 창가의 커튼을 매만졌다.
“마음에 드시나요, 레슬리 아가씨?”
그런 레슬리가 귀엽다는 듯 제나가 웃으며 물었고, 뒤에 서 있는 사이레인은 기대된다는 듯 눈을 빛냈다. 레슬리는 그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부끄럽다는 듯 볼을 살짝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자신의 다락방은 의자에 올라 까치발을 들고 손을 쭉 뻗으면 천장에 손가락 끝이 닿았다. 키가 더 큰다면 분명 의자도 없이 손이 닿을지도 몰랐다. 르아는 그나마 키가 좀 작은 편이라 괜찮았지만, 다른 하녀들은 불편하다며 괜스레 레슬리를 보고 투덜거렸으니까.
하지만 이 방은 손을 뻗어 봐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층고가 높았고, 창문조차 넓고 커서 따스한 햇볕이 잘 들 것 같았다.
창문 앞에 소파를 가져다 놓으면 기분 좋은 낮잠을 잘 수 있을 거라고 레슬리는 생각했다. 거기다 부드러운 카펫은 관리하지 않아 거칠어져 버린 레슬리의 맨발로 걸어 다니기 미안할 정도였다. 구름 위를 걷는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그런 생각에 레슬리는 괜스레 발을 쭉 내밀어 꾹 카펫을 밟아 보았다.
이 정도면 스페라도 후작가에 있는 엘리 방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아니, 엘리 방보다 훨씬 좋은 방인 게 틀림없었다.
“정말 좋아요…….”
카펫의 몽실몽실한 감각을 느끼며 레슬리가 다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웃자, 제나는 다행이라는 듯 두 손을 꼭 잡고 웃었고 사이레인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거대한 몸을 떨었다.
“큭. 귀, 귀여워…….”
웃는 거 봐. 이래서 사내놈들보단 딸이 좋다니까. 사이레인의 작은 중얼거림을 가볍게 무시한 제나가 갑자기 몸을 빙글 돌려 방문을 보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렴.”
그녀의 말에 문이 열리고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송송 박혀 있는 하녀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레슬리의 것으로 보이는 잠옷이 몇 벌이나 들려 있었다.
“레슬리 아가씨, 앞으로 아가씨를 담당할 마델입니다. 마델, 네가 앞으로 모시게 될 레슬리 아가씨께 인사하렴.”
“안녕하세요, 레슬리 아가씨. 마델 델피엔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더니 허리를 숙여 레슬리에게 인사했다. 저보다 큰 어른이 자신에게 이렇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레슬리는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유모도 아닌 전속 하녀가 생긴 것은 처음이라 더욱 당황했지만, 곧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잘 부탁해요, 마델.”
***
“여보.”
달이 뜨고 한참이 지나서야 공작저로 돌아온 셀바토르 공작을 사이레인이 반겼다.
“이상한 놈들을 상대하느라 피곤했지?”
덩치에 맞지 않게 잽싸게 움직여서 셀바토르 공작의 겉옷을 받아 낸 사이레인은 웃으면서 소파에 앉는 공작에게 손수 차까지 따라 주더니 맞은편에 앉아 생글생글 웃음을 흘렸다.
덩치에 맞지 않은 귀여움을 뿜어내는 자신의 남편을 셀바토르 공작은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따스한 찻잔을 매만졌다.
“레슬리 양을 봤구나, 사이.”
“그럼 봤지. 하……. 이 세상 귀여움이 아니었어. 어떻게 그렇게 작고 하얀 것이 살아 움직이는 건지. 맨날 베스라온이나 루엔티 같은 놈들을 보다가 레슬리 양을 보니까 어찌할 줄을 모르겠더라고. 아까 어떻게 웃었는지 알아? 여보는 상상도 못 할걸?”
그러더니 레슬리가 어떻게 입을 움직여 웃었는지, 작은 눈을 얼마나 열심히 이리저리 굴렸는지 말해 주었다. 그리고 이어 오믈렛을 한 입 먹고 커다래진 눈을 필사적으로 감추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 딴에는 천천히 먹으려 안간힘을 썼다는 등의, 레슬리에 대한 거의 모든 감상을 이야기하던 사이레인은 다시 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크흐……. 우리 딸이 되는 거지? 그치, 여보야?”
“되겠지. 조금 골치는 아프지만.”
덤덤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셀바토르 공작을 보던 사이레인이 뭔가를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아까 들뜬 목소리와 다른 낮고 어두운 목소리였다.
“또 그 후작 새끼가 뭔 짓을 벌이고 있구나.”
남편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셀바토르 공작이 대답했다.
“재빠르게 학대의 증거를 없애고 있어. 대다수 증거가 저택에 남아 있어서 내가 뭘 어떻게 하기도 어렵더군. 그자는 레슬리 양을 아예 저택 밖으로 내보내질 않았으니까.”
그나마 내보낸 곳이 신전이었지만 늘 하녀들 틈에서 이동했기에 레슬리의 모습을 제대로 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기도를 드릴 때도 하녀들 사이에 있어서, 심지어 사제들 중에서도 그녀가 다녀갔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분명 마주쳤는데도 자신은 스페라도 가문의 차녀를 만난 적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렇게 증거를 없애고 나에게 재판을 걸 모양이던데.”
팔을 부러트린 것까지 합쳐서 말이야. 셀바토르 공작의 낮은 웃음소리가 찻잔 속에서 흩어졌다.
“미친 새끼. 여보, 여보야는 황실에서 권력이 강하니까 그놈 단 하루라도 분쟁 지역으로 보내 주면 안 돼?”
“왜?”
이상한 부탁에 셀바토르 공작이 드물게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자, 사이레인이 씩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내가 실수인 척 모가지를 따 버릴 거야.”
레슬리를 만나러 갈 때 했던 말이 진심이었다는 듯 사이레인은 웃었다. 자신의 도끼날을 번쩍번쩍하게 닦아 놨다며 자랑까지 하는 남편을 보고 셀바토르 공작은 귀엽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진지해진 눈으로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여보.”
“응?”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공작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웃었다.
“레슬리 양 앞에선 말조심하도록 해. 나는 아직도 베스라온이 어렸을 적 황제 앞에서 조져 버린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니까.”
“…….”
순식간에 말이 많던 남자가 침묵에 빠졌다.
***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마델의 인사를 시작으로 잠에서 깨어난 레슬리는 비몽사몽인 얼굴로 식당으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아직도 약 기운이 남아 있어 마델이 세수도, 머리를 빗는 것도 전부 도와주었는데, 그동안에도 레슬리는 꾸벅꾸벅 졸았다. 결국, 마델이 머리를 빗겨 주는 동안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레슬리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자, 마델은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거라며 좋은 징조라 말하고 웃었다. 정말 이게 좋은 징조일까? 마델이 괜찮다며 몇 번이나 레슬리를 다독였지만, 레슬리는 부끄러워 눈을 꼭 감아 버리고 말았다.
“좋은 아침, 레슬리 양.”
준비가 다 끝나자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에 내려간 레슬리는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난 듯한 셀바토르 공작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언제나 단정했던 긴 머리카락은 살짝, 아주 살짝 부스스했고 암녹색 눈에는 졸음기가 가득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레슬리가 고개 숙여 인사하자 공작은 졸음이 가득한 얼굴로 옅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를 시작으로 사이레인과 아침 훈련을 마치고 들어온 베스라온이 차례로 식당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나는 어디에 앉아야 하는 거지?’
대부분의 귀족 집안 식탁에는 앉는 곳이 정해져 있었다. 가주는 가장 좋은 곳에, 그다음 좋은 자리는 가주의 남편이나 아내가, 그리고 다음은 장남, 장녀 아니면 사랑받는 아이의 순서였다. 그래서 레슬리는 한꺼번에 식사하는 오늘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가 가장 끝에 자리에 앉으면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셀바토르 공작가에는 상석이라 불릴 만한 자리가 없었다. 다 같이 긴 테이블에 앉아 얼굴을 맞대고 먹는 그런 자리 배치를 보며, 레슬리는 치맛자락을 잡고 머뭇거렸다.
“레슬리.”
그 모습을 본 베스라온이 제 옆을 가리켰다. 베스라온의 덩치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는데, 베스라온 안쪽에 의자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레슬리가 조심스레 다가가자 베스라온이 앉으라는 듯 의자를 빼 주고 방석까지 손수 깔아 주었다.
“감사합니다.”
레슬리가 작게 감사 인사를 전하자,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레슬리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서 베스라온은 식사를 시작했다.
“의자를 하나 사야겠구나.”
가볍게 샐러드를 먼저 오물거리는 레슬리를 보며 사이레인이 말을 흘렸고, 옆에 앉아 있는 셀바토르 공작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셀바토르 공작가의 모든 가구는, 당연하지만, 셀바토르 가문의 사람들 키와 덩치에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레슬리는 식탁에 앉을 때마다 서너 겹의 방석을 깔지 않으면 음식을 먹기 힘들 정도였다.
워낙 셀바토르 공작가 사람들이 크고, 워낙 레슬리가 작아서 생긴 일이었다.
“드레스도 사야 하겠어.”
이번엔 셀바토르 공작이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레슬리는 제나가 사 온 옷을 입고 있었는데, 기성품을 사 온지라 레슬리에겐 조금 커서 소매를 접어 입고 있었다. 그걸 이제 깨달았냐는 듯 접힌 소맷자락이 수프에 퐁 빠질 뻔했다.
셀바토르 공작과 사이레인이 어디서 물건을 살지 대화를 나누는데 레슬리가 슬그머니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공작님, 사이레인 님. 의자는 사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 말에 묵묵히 거대한 양고기를 입에 집어넣고 있던 베스라온마저 의문스러운 눈길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왜지, 레슬리 양? 돈 같은 걸 걱정하는 건가?”
공작의 물음에 레슬리는 라일락빛 눈동자를 그녀에게 고정하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저 이거 다 먹고 금방 키 클 거니까, 그러니까 의자는 안 사셔도 괜찮아요. 아깝잖아요.”
어서 커서 자신도 어엿한 이 공작가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다들 큰데 자신 혼자 작으니 조금 부끄럽기도 했고. 그 다짐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레슬리는 자신 앞에 놓인 고기 한 점을 입에 물고 오물거렸다.
잘 먹고 잘 자면 자신도 엘리처럼 금방금방 크지 않을까? 엘리는 늘 다른 또래 아이들보다 크다고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잘 먹어서 금방 커 버리면 지금 자신의 키에 맞춰 산 의자가 아까울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던 셀바토르 공작이 스테이크 옆에 올라온 구운 채소를 한 입 먹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레슬리 양. 지금이 편해야지, 안 그런가? 뭐 의자야 나중에 사용인들이 써도 되는 거고.”
그러더니 셀바토르 공작은 무언가를 생각하듯 톡톡 식탁을 긴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제 레슬리는 셀바토르 공작의 저 행동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행동임을 알고 있었다.
“마델트 부인을 공작저로 부르지. 드레스 카탈로그와 천을 가져오라고 해야겠어.”
“모만도 불러야지. 가구는 모만이 최고니까.”
공작의 말에 스테이크를 통으로 물어뜯고 있던 사이레인이 거들었다. 두 사람은 어떤 사람을 공작저로 불러야 할지 진지하게 의논했다.
“저…… 제가 번화가로 가면 안 되나요?”
레슬리는 두 사람을 보며 간절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흘렸다.
“제가 아직 번화가를 구경해 본 적이 없어서요.”
언제나 엘리나 어머니가 다녀오는 걸 바라만 보았었다. 기분이 나쁘다며 나간 두 사람은 번화가에만 다녀오면 수많은 상자를 들고 들어왔고, 기분 좋은 듯 얼굴에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서 레슬리는 번화가가 궁금했다. 하지만 언제나 신전을 가는 길목에서 살짝 구경만 했을 뿐, 가 본 적은 없었다.
잠시 셀바토르 공작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머물렀지만 아주 잠시였고, 레슬리는 그걸 보지 못했다.
“그래, 그럼 그래야지. 구경도 하다 와요, 레슬리 양.”
순순히 번화가 나들이를 허락해 준 셀바토르 공작은 이번엔 통으로 구워져 나온 새고기를 뜯고 있는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네가 같이 가 주렴, 베스라온. 제나와 마델도 데려가고. 아, 오늘 기사단에 가야 하던가?”
공작이 뒤늦게 생각난 듯 말을 덧붙이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제 아들을 보며 웃음 지었다. 그 미소에 베스라온은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앉아 있는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잠깐 라일락색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하루쯤 휴가를 내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그러더니 다시 시선이 마주칠까 봐 고개를 돌려 제 식기에 올라와 있는 음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사이레인도 같이 가고 싶다고 했으나, 공작이 가볍게 그를 제지했다.
“우리 여보는 공작 대리로 처리해야 할 서류가 많이 남아 있지 않나?”
그 말에 사이레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처음엔 정말 무서운 인상이었는데 보면 볼수록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레슬리는 작게 웃었다.
그 뒤로도 즐거운 식사 시간은 계속되었다. 사이레인은 계속해서 레슬리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물었고, 레슬리는 생각보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잘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괜찮아. 이제 천천히 경험해 보고 싫은지 좋은지 알아 가면 되니까.”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는 레슬리를 사이레인이 웃으며 토닥여 주었다. 언제나 가족과 가장 멀리 떨어진 의자에 앉아 대화에 끼지 못하고 밥을 먹거나, 혼자 방에서 하는 식사가 전부였던 레슬리에게 이런 식사 자리는 처음 가지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행복한 시간이 거의 그러하듯, 식사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공작님.”
식사가 끝나고 몸을 일으키는데 제나가 작게 공작을 불렀다.
“작은 도련님이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아이테라 경도 같이 오셨습니다.”
“이런, 아침부터 손님인가?”
셀바토르 공작과 사이레인은 손님맞이를 하러 식당을 먼저 떠났고, 베스라온은 레슬리를 방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저기 있군. 레슬리.”
복도를 지나는데 갑자기 베스라온이 레슬리를 번쩍 들어 안았다. 시야가 바뀌어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자신의 키로 볼 수 있는 창가 풍경은 나무 끄트머리가 전부였는데, 베스라온에게 들리니 창문틀에 올라가 몸을 최대한 빼고 바라보는 것처럼 공작저의 풍경이 전부 눈에 담겼다.
“저기 저놈이 루엔티다. 네 둘째 오라버니가 될 놈이지.”
베스라온이 두꺼운 손가락으로 정원에 있는 한 사람을 가리켰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이레인을 닮은 붉은빛이 도는 짙은 주홍색 머리카락에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을 한 남자가 누군가를 바라보며 뭔가를 떠들고 있었다.
“그럼 저기 저분은 누구예요?”
레슬리의 시선이 바로 루엔티 옆에 있는 남자에게 닿았다. 짙은 회색빛 머리의 남자는 뒤를 돌아서 루엔티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더라?
“콘라드 아페 아이테라. 아이테라 대공가의 장남이자, 루엔티의 친구지.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생각이 깊어, 까불거리는 루엔티와 균형이 맞더군.”
아까 제나 집사님이 왔다고 이야기한 그 사람이구나. 이름을 중얼거리며 바라보는데 갑자기 뒤를 돈 남자와 시선이 맞았다. 아니, 맞은 듯 보였다. 레슬리는 셀바토르 공작가의 수많은 창문 중 하나로 남자를 보고 있었고 거리도 어느 정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황금색 눈동자가 정확히 저를 바라보는 것 같아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황금색 눈동자……?’
짙은 회색빛 머리에 황금색 눈동자, 그리고 손수건. 기억났다. 신전에서 넘어질 뻔한 레슬리를 잡아 주었던 소년이었다.
“콘라드 아페 아이테라…….”
잠시 그 이름을 다시 중얼거리던 레슬리는 뭔가가 생각난 듯 고개를 획 돌려 자신을 아직도 번쩍 들고 있는 베스라온과 시선을 맞췄다.
“아이테라라면 아이테라 대공가 말인가요?”
“그래, 그 아이테라.”
놀란 레슬리의 목소리에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담담한 베스라온의 대답이 들려왔지만, 레슬리의 라일락빛 눈동자는 아직도 동그랗게 되어 베스라온을 향하고 있었다.
르카디우스에는 권력의 4구도가 있었다. 황실과 그 피를 이어받아 황실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아이테라 대공가, 그리고 황실 전부터 존재해 왔다던 셀바토르 공작가와 세 개의 후작가가 그것이었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사실은 더 복잡하고 비밀스러운 사정들이 숨겨져 있다지만, 겉으로는 이 네 개의 세력이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이테라 대공가와 셀바토르 공작가는 사이가 나쁜 게 아니었나요?”
레슬리가 알기로는 황제파인 아이테라 대공가와 반황제파인 셀바토르 공작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알아서 셀바토르 공작가 앞에 ‘반황제파’라고 붙여 놓은 것이지만. 셀바토르 공작가는 언제나 황실과도, 다른 귀족 가문하고도,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존재하고 있던 가문이니까.
“언제나 교과서적인 지식과 현실이 일치하는 건 아니지.”
베스라온은 제 품에 안겨 눈을 깜빡이는 레슬리를 보며 자신 나름대로는 자상하게 대답해 주었다. 레슬리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구나. 책에서 본 게 전부가 아니었어.
“베스라온 님, 듣기로는 아이테라 대공가는 신력이 강한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던데 정말인가요?”
레슬리의 질문 공세에도 베스라온은 귀찮은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설명까지 덧붙여 주었다.
“아직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는 가문이라 특색이라 부르긴 애매하지만 전 아이테라 대공도 그렇고, 공자도 신력이 강력한 편이야. 지금 본 아이테라 공자도 테센트루아 신전 기사단 소속이지.”
“사제가 아니라 성(聖)기사인가요?”
“사제가 되면 가문의 이름을 버려야 하기도 하고, 아이테라 공자는 검 실력이 뛰어나니까. 굳이 사제가 될 필요가 없지.”
성기사! 레슬리는 베스라온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황실의 검이 린체 기사단이라면, 신전에서는 신의 가장 강력한 검인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이 있었다. 신력과 검 실력, 두 가지가 받쳐 주지 않으면 신청서조차 내밀 수 없었고, 혹독한 훈련으로 도중에 도망가는 사람이 많기에 그 수는 늘 다른 기사단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처음 보는 성기사가 신기해 레슬리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지만, 저택 안으로 들어온 건지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살짝 실망감이 들어 레슬리는 작게 입을 삐죽거렸다.
“이제 방으로 가자. 번화가를 둘러보려면…….”
“형!”
잠시 베스라온과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저택 정원에서 두 사람이 있는 복도까지 걸어온 루엔티가 자신의 형을 크게 부르다가 눈을 찡그렸다.
“에엥?”
언제나 무뚝뚝하고 다정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베스라온의 품에 하얀 뭔가가 들려 있었다. 절대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나올 수 없는 밝은 은색 머리카락과 라일락색 눈동자를 발견한 루엔티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이레인보다 좀 더 짙은 붉은색에 가까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암녹색 시선과 라일락색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부딪혔다.
“……형, 그거 뭐야?”
루엔티의 질문에 베스라온은 그저 대답 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주먹을 쥔 채 긴 팔을 올리더니 그대로 루엔티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으악!”
맞지 않은 레슬리조차 뒤통수에 아픔이 느껴져 눈을 움찔거릴 정도의 큰 소리와 구슬픈 비명이 셀바토르 공작가의 복도에 울려 퍼졌다. 정말 아팠는지 루엔티의 암녹색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한참을 제 머리통을 매만지던 루엔티가 고개를 번쩍 들고 제 형을 쏘아보았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사람보고 이거라니. 말버릇을 고치도록 해, 루엔티.”
“아니, 그래서 그게……. 악!”
두 번째 꿀밤에 루엔티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작게 떨리는 붉은 머리통을 내려다보던 레슬리는 시선을 올리자마자 루엔티 뒤에 서 있던 한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눈을 살짝 휘며 루엔티를 보며 웃고 있던 황금색 눈동자가 레슬리에게 닿았다. 아까까지 신기한 성기사라며 다시 보고 싶었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신기함 대신 신전의 일이 떠올랐다.
혹시 기억하는 건 아니겠지? 부끄러운 과거가 떠올라 레슬리는 시선을 내려 그 눈동자를 피했다. 레슬리가 저 아이테라 공자를 처음 만났을 때는 낡은 여름옷을 입고 있었던 데다 펑펑 울고 있던 상태였다. 거기다 넘어지기까지.
그때 일을 생각하니 절로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부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라는데, 시선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눈길이 부담스러워 레슬리는 자신도 모르게 베스라온의 옷깃을 꼭 잡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베스라온이 콘라드를 나지막이 불렀다.
“아이테라 공자, 신전 일 때문에 온 겁니까.”
그제야 황금빛 시선이 레슬리에게 떨어져 베스라온에게 닿았다. 나긋한 목소리가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네. 신전에서 전해 달라 부탁한 것은 셀바토르 공작님에게 전달해 드렸습니다. 저는 이제 가 보려고 하는데, 셀바토르 공작가에 손님이 계셨군요.”
신기하다는 듯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루엔티를 지나쳐 레슬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콘라드는 황금색 눈동자를 접으며 웃어 보였다. 그런 콘라드를 무시할 수 없어 레슬리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태양의 색. 레슬리는 콘라드를 처음 봤을 때도, 그리고 지금 다시 봤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테라 대공가의 장남, 콘라드 아페 아이테라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성함을 여쭤봐도 괜찮으실까요?”
“……레슬리예요.”
레슬리는 제 성까지 말하고 싶지 않아 무례한 짓임을 알면서도 성을 빼고 이름만 말해 버렸다. 자신의 성이 셀바토르라면 좋을 텐데.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레슬리 셀바토르’라고 자신을 소개하게 되면 정말 좋을 텐데.
하지만 슬프게도 아직 스페라도 후작은 레슬리를 놔주지 않았기에, 레슬리는 아직도 ‘레슬리 스페라도’였다.
그 사실이 눈물로 가득한 얼굴을 보였다든가, 신전에서 넘어질 뻔했다든가, 겨울에 얇은 여름옷을 입었다던 그 사실보다 레슬리를 더 참담하게 만들었다.
“레슬리, 좋은 이름이네요.”
다행히도 그런 레슬리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아니면 무덤덤한 시선 속에서 뭔가를 경고하고 있는 베스라온을 알아챈 것인지, 콘라드는 더 뭔가를 묻지 않았다. 그저 다시 웃음을 띠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을 뿐이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부디 다음번엔 신전에서 뵙기를.”
가벼운 인사가 흩어지고,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레슬리는 고개를 들었다. 레슬리의 시야에서 더는 짙은 잿빛 머리카락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루엔티가 그런 레슬리를 다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가, 베스라온의 흉흉한 시선을 보고 재빠르게 제 손가락을 감췄다.
“형, 그래서 그거 아니, 그 아이는 뭔데?”
작은 한숨과 함께 루엔티가 경악할 만한 대답이 돌아왔다.
“네 여동생이다.”
***
이게 원래 이렇게 예쁜 모양이었구나.
레슬리는 제 앞에 놓여 있는 두툼하고 포근해 보이는 팬케이크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달콤한 소스가 잔뜩 뿌려진 팬케이크는 커다란 접시 한가운데에서 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팬케이크 주변에 놓인 설탕을 입힌 작은 과일들이 반짝임을 더했고, 팬케이크 위에 올라가 있는 딸기 한 조각과 새하얀 생크림은 너무 예뻐 손을 대기 어려워 보였다.
후작가에서도 팬케이크를 먹어 본 적이 있었다. 어쩌다 한 번씩 먹는 음식이었는데, 만들다 실패한 것을 주었기에 레슬리는 언제나 팬케이크라는 게 찌그러지고 아무런 소스도 없으며 가끔은 어설픈 밀가루 맛이 나는 것인 줄 알았다.
보들보들해 보이는 팬케이크 한 점을 포크로 콕 찍어서 입안에 넣자마자, 레슬리의 눈동자가 커졌다.
“……!”
팬케이크를 먹는 두 뺨에는 홍조가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이내 가라앉았다.
‘맛있긴 한데.’
조금 슬프다. 베스라온이 황궁으로 불려간 탓에 번화가로 가는 일정이 취소된 탓이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다른 곳도 아니라 황실의 검이라 불리는 린체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갑자기 아침에 ‘오늘 쉬겠습니다.’라고 하면 ‘아, 쉬세요.’라고 쉽게 허락할 리가 없었으니까.
베스라온 앞에서는 애써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아쉽고 슬펐다. 레슬리는 포크를 입에 물고 오물거렸다. 팬케이크의 단맛이 입안 가득 퍼졌지만, 기분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베스라온은 미안하다고 말하며 내일은 꼭 데려가 주겠다고 새끼손가락까지 걸어 주었다. 그래도 오늘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기대감이 소리를 내며 꺼지자 가라앉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야.’
고개를 세차게 저은 레슬리는 일부러 팬케이크를 크게 잘라 입안에 넣었다. 다시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며 밑도 끝도 없이 가라앉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게다가 생각해 보면 자신은 아직 셀바토르 공작가의 일원도 아닐뿐더러, 공작님과의 계약으로 들어온, 진짜가 아닌 가짜 임시 공녀였으니까 이 정도는 참는 게 당연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들어온 거지 진짜 셀바토르 공녀가 되려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다들 너무 친절해서 자꾸만 진짜처럼 떼를 부리고 예쁨받고 싶어졌다.
‘이러면 안 되는 건데.’
그래,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나는 진짜 셀바토르가 아니라 가짜인데.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레슬리가 포크를 몇 번 더 움직이자, 팬케이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입에 단맛이 돌고 과일도 열심히 집어 먹어 배도 부르건만, 이상하게 텅 빈 기분이 들어 레슬리는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새끼손가락은 왜 건 걸까?’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베스라온이 손가락을 걸어 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을 거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잠시 그렇게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드니 얼굴을 찌푸린 루엔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짧은 말과 함께 긴 꽁지머리가 루엔티의 몸짓을 따라 흔들거렸다.
“뭐야.”
적의를 머금은 암녹색 눈동자가 위협하듯 날카롭게 레슬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들이라면 저 눈빛에 겁을 먹을 테지만, 라일락색 눈동자는 그런 기색 하나 없이 자신보다 훨씬 큰 루엔티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레슬리. 레슬리 스페라도예요.”
거기다 한참 만에 들려온 대답은 어이없을 정도였다. 레슬리의 대답에 어이없다는 듯 하, 하고 짧게 웃은 루엔티가 다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가 그 일 때문에 아이를 한 명 데려오려고 한 건 알아. 하지만 내 말은 왜! 스페라도 가문의 인간인 네가 그 자리에 있냐는 거야!”
쾅! 한 손으로 루엔티가 세게 식탁을 내리치자, 큰 소리와 함께 팬케이크가 있었던 그릇이 크게 달그락거렸다. 잠시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울려나?’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나서 놀란 건 되레 루엔티 쪽이었다. 루엔티의 암녹색 눈동자가 양옆으로 또르르 굴러다녔다.
형에게 안겨 있던 아이. 도대체 이게 뭔가 싶어서 형에게 물어봤다가 두 대나 맞았다. 어찌나 아픈지 아직도 머리가 띵해 루엔티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어머니께 여쭤보러 달려가니 중요한 일로 아버지랑 이야기 중이라 한참을 서성거리기만 하다가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렇게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레슬리를 발견하고 식당으로 들어온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스페라도가의 인간이 여기 있는 건지.
조금 겁을 주면 술술 불 거라 생각해 무섭게 노려봤지만, 전혀 겁을 먹는 기색이 없었다. 그래서 식탁을 내리친 건데, 생각보다 더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엔티조차 귀가 얼얼할 정도였고 복도를 다니던 사용인들마저 놀라 밖에서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으니까.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어머니의 얼굴을 조금 닮긴 했지만, 그보다는 아버지의 얼굴을 훨씬 더 닮은 자신은 아이에게 있어선 조금 무서운 인상이라는 것을 루엔티는 잘 알고 있었다. 무서운 인상의 사람이 와서 갑자기 노려보고 윽박지르고 식탁까지 쳤으니 분명 울겠지.
‘너무 심하게 했나?’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루엔티의 걱정과는 정반대되는 대답이었다. 자신의 행동에 얼굴에 전혀 겁먹지 않았다는 듯 또박또박한 대답이 짧게 들려왔다.
“제가 공작님께 저를 선택해 달라고 했고, 공작님이 알았다고 해 주셨으니까요.”
“……?”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루엔티는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열 살쯤 되었을 법한 아이, 팬케이크를 보며 눈을 빛내는 요 작은 아이가 먼저 어머니를 찾아와 거래를 제안했고 어머니는 그 거래를 승낙했다고?
루엔티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루엔티에게 있어서 셀바토르 공작은, 그러니까 그의 어머니는 감정보다 늘 이성이 한발 앞서는 분이었다. 그런 분이 이렇게 중요한 일에 스페라도 가문의 여식을 끼워 넣었다니.
스페라도, 그 가문이 어떤 가문이던가. 분란이 일어나던 시절에도 제 몸 하나 다치지 않기 위해 사람을 사서 전쟁에 보낸 건 물론, 제 형제들까지 전쟁터로 내몰아 죽게 했다. 그 보고에 루엔티는 우리 셀바토르 가문이 아니라 스페라도 가문을 괴물 후작가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했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 스페라도 가문의 아이. 분명 스페라도 가문에선 쉽게 이 아이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욕심이 지나친 자들이 늘 그러하듯 아주 조그마한 것도 빼앗기려 들지 않을 테니까.
막말로 스페라도 가문에서 타격을 입히려고 보낸 아이일 수도 있었다. 스페라도 가문은 언제나 셀바토르 가문을 싫어했으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야!’
루엔티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하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흘렀다. 시선을 돌리니 덤덤한 표정의 레슬리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몇 겹이나 되는 방석 중 하나가 톡 하고 의자 밑으로 떨어졌다.
“루엔티 님.”
루엔티의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오자, 오히려 루엔티 쪽에서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저는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될지 셀바토르 공작님에게 듣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제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건 저는 이 공작가의 공녀가 될 거란 사실이에요. 나머지는 부디 셀바토르 공작님께 들어 주세요.”
아무런 흔들림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라일락빛 눈동자에 루엔티는 당황했다. 이게 보통 아이가 보일 만한 반응인가? 겁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아니야, 이건 겁이 없다기보다는…….’
이런 시선에 익숙한 얼굴이다. 모멸, 억압, 비웃음, 분노. 그런 감정을 담은 시선에 익숙한 거야. 이 아이는.
루엔티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레슬리가 식당을 빠져나갔고, 루엔티는 그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
“마델.”
“네, 레슬리 아가씨.”
넓은 창문틀에 폭신한 벨벳을 깔고 몇 개의 쿠션을 올려 마치 소파처럼 꾸며놓은 자리에서 밤하늘을 구경하던 레슬리가 나지막이 침대를 정리하는 마델을 불렀다.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들어와 은빛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있지. 손가락을 거는 건 무슨 의미야?”
품에는 가장 좋아하는 작은 쿠션을 꼬옥 끌어안은 채 레슬리는 라일락빛 눈을 깜빡거렸다. 급작스러운 질문에 마델의 눈동자가 잠시 천장을 향했다가 다시 레슬리를 향했다.
“손가락을 거셨어요?”
“응.”
레슬리는 제 손을 바라보며 작게 끄덕거렸다.
“베스라온 님이 손가락을 걸어 주셨어.”
“어머, 베스라온 도련님이요?”
베스라온의 이름이 나오고 나서야 마델은 레슬리가 물어보는 손가락을 걸었다는 게 어떤 상황인지 알아챘다.
“아아, 오늘 번화가에 못 간 일 때문에 손가락을 걸었다는 거지요?”
마델의 얼굴에 잠시 의아함이 떠올랐지만, 곧 환한 웃음으로 가려졌다.
“그건 약속하는 거예요.”
“약속?”
두꺼운 푸른 담요로 레슬리를 포근히 감싸 주며 마델이 웃었다. 별을 바라보느라고 계속 창문을 열어 놔서 레슬리의 볼은 붉어져 있었다. 혹여나 감기에 걸릴까 마델은 난로도 창문 의자 쪽으로 가까이 가져왔다.
“네, 꼭 지키는 약속은 이렇게 손가락을 걸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마델은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레슬리의 손가락과 걸며 방긋 웃어 보였다. 손가락이 걸린 모습이 신기한 듯 레슬리는 제 손과 마델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아까 사실, 이렇게 마델과 하듯 손가락을 걸지는 못했다. 베스라온의 손가락이 워낙 굵었던 탓에 베스라온의 손가락을 레슬리가 손으로 꼭 쥐는 형태가 되어 버렸다. 그것도…… 약속한 게 맞겠지?
“베스라온 님이 내일 번화가에 데려다준다고 하고 손가락을 거셨군요.”
마델의 물음에 레슬리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저 먼 곳에 보이는 번화가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왜일까, 번화가의 불빛들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거리상으로는 스페라도 저택이 번화가와 더욱 가까웠고, 셀바토르 공작가는 저택의 규모상 번화가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스페라도 저택에 있을 때보다 지금 이 셀바토르 저택에서 보는 번화가의 불빛이 더 가까워 보였다.
괜스레 레슬리는 창밖으로 손을 쭉 뻗어 보았다가 마델에게 제지당했다. 마델은 위험하다고 했지만, 정말 저 불빛들이 조금만 손을 내밀면 잡힐 것 같았다. 스페라도 후작가 다락방에서 볼 때는 뻗어도 닿지 않을 것 같아 바라만 봤었는데.
그러다 뭔가가 생각난 듯 레슬리는 고개를 돌려 마델을 바라보았다.
“맞다, 마델. 나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
“그럼요. 무엇이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그 대답이 뭐가 좋다고 레슬리는 기쁘게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 모두 예의상 하고, 듣는 그런 평범한 대답일 뿐인데.
“있지, 계약과 손가락을 거는 건 무슨 차이야? 둘 다 중요한 약속을 하는 데 사용하는 거잖아.”
질문이 묘하게 이상했다. 손가락을 거는 작은 행동도 모르다가 갑자기 ‘계약’이라는, 아직 레슬리 나이 때는 잘 접해 본 적 없을 듯한 단어를 사용해 질문했다. 마델은 잠시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레슬리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으음, 계약은 어른들이 주로 하고요. 아니면 공적으로 하는 거고……. 손가락을 걸고 하는 건 아이들에게 주로 하는 거지요!”
조금 어설픈 대답이었지만. 레슬리는 용케도 뭔가를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고마워, 마델.”
“뭘요. 이 정도야.”
휴, 레슬리 모르게 작은 안도의 숨을 흘린 마델이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밤하늘과 불 켜진 번화가를 더 바라보고 싶은지 레슬리의 시선은 다시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겨울 밤바람이 걱정돼 창문이라도 닫고 싶었지만, 쿠션을 꼭 끌어안은 레슬리가 싫다는 듯 고개를 강력히 저었기에 마델은 창문을 닫는 걸 포기해야 했다.
“레슬리 아가씨, 그럼 코코아라도 한 잔 드시겠어요?”
“코코아?”
“네, 코코아요. 마시멜로도 넣어서 진하게 타서 가져올게요.”
싫으신가? 마델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팬케이크도, 다른 단것도 잘 드셔서 단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차를 가져온다고 말해 볼까. 그렇게 고민하는데 레슬리가 작게 입을 열었다.
“코코아가 뭐야?”
이번에는 마델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초콜릿이 비싸긴 하지만, 평민들도 마음먹으면 먹을 수 있는 게 코코아였다. 그런데 귀족 집안의 아가씨가 코코아를 모르다니.
“어……. 초콜릿으로 만든 음료수예요. 달~콤하고 따듯해서 추울 때 먹으면 정말 좋아요. 지금 좀 추우시죠?”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마델은 일부러 더 크게, 그리고 활짝 웃으며 레슬리에게 코코아를 설명했다.
초콜릿과 달콤하다는 말에 라일락색 눈동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제가 지금 가서 한 잔 가져올게요. 그거 마시면서 같이 밖을 구경해요, 아가씨.”
마델의 말에 레슬리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기쁜 모양이었다. 그 웃음은 코코아 때문인 것도 같았고, 같이 구경하겠다는 말 때문인 것도 같았다. 아니면 둘 다 너무 기뻐서 저렇게 웃는 걸지도 몰랐다. 마델이 씁쓸하게 웃음을 흘리는데 레슬리가 작게 마델을 불렀다.
“마델, 마델도 같이 마시자.”
살짝 그녀의 소맷자락을 잡고 올려다보는 레슬리를 보며 마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코코아 두 잔을 가지러 식당으로 걸음을 옮기다, 이제야 서류를 다 처리하고 한숨 돌리는 셀바토르 공작과 제나 집사를 보았다.
“마델.”
제나가 먼저 마델을 발견하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마델은 두 사람 앞에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래, 레슬리 양은 좀 어떻지?”
마델의 이름을 듣고 레슬리의 전속 하녀로 붙여 준 아이라는 걸 바로 떠올린 셀바토르 공작이 질문을 던졌다. 마델은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마델?”
제나 집사가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다시 부르고 나서야 마델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조금…… 이상하세요.”
“이상해?”
“네. 손가락 걸기도 모르시고, 코코아도 모르세요. 거기다 오늘 주방 쪽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팬케이크를 가져다 드렸더니 팬케이크가 이렇게 예쁜 건 처음 봤다고 눈을 빛내셨다는 거예요.”
그 지엄한 공작의 앞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듯 마델은 입을 열었다. 안 열고 버틸 수가 없었다. 그만큼 레슬리는 뭔가가 이상했다.
“그런데 이야길 하는 걸 보면 계약이나 그런 단어도 잘 이용하시고……. 거기다 묘하게 아니, 그냥 어른스러우세요. 아까 베스라온 도련님이 갑자기 못 가겠다고 하니까, 그냥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하셨다고 하더라구요. 보통 레슬리 아가씨 나이 때의 아이들은 안 그러잖아요. 그런데 또 먹을 때는 제 나이답게 방싯 웃으시는데…….”
홍수처럼 쏟아지는 마델의 말에 셀바토르 공작은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스페라도 가문에서 봤던 엘리 양은 제 나이보다 훨씬 크고 성숙해 보였다. 하지만 레슬리는 제 나이보다 더 작았다.
그 모습과 음식을 먹을 때 자꾸 웃음을 터트리고 눈을 빛내는 모습에서, 레슬리가 그만큼 여러 음식을 먹어 보지 못했다는 게 쉽게 유추되었다. 아니, 아예 배불리 먹어 본 적이 없을지도.
거기다 가정교사와 책으로 배운 지식은 풍부했지만, 제 나이 또래 아이들이 사람들을 만나고 그 관계 속에서 습득해야 할 지식은 부족하다 못해 없었다.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건 체념에 익숙해졌다는 말이고, 보통 아이들이 울 정도의 무서움 앞에서도 덤덤한 건 그보다 더 큰 무서움을 겪었다는 뜻.
“사정이 있는 아이야.”
셀바토르 공작의 말에 마델은 홍수 같은 대답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잘해 주렴.”
거기까지 말한 셀바토르 공작과 제나는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고, 마델은 주방에 내려가 코코아 두 잔을 타 왔다. 아주 진하게 타서 달콤한 데다가 마시멜로까지 평소의 몇 배는 더 넣은, 완벽한 레슬리 취향으로 탄 코코아 두 잔을 들고 방으로 돌아온 마델은 작게 웃었다.
마델을 기다리다 잠들었는지 레슬리가 쿠션 속에 몸을 묻은 채 창문틀 의자 위에서 잠들어 있었다. 코코아 잔을 내려놓고 가까이 가자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행복한 꿈을 꾸는지 레슬리의 얼굴에는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레슬리를 품에 안고 조심히 침대로 옮긴 마델은 이불을 덮어 주며 레슬리의 둥근 이마를 손으로 쓸었다. 코코아를 먹는 꿈일까, 아니면 내일 번화가를 가는 꿈일까.
뭐가 되었든 부디 좋은 꿈을 꾸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델은 조심스레 코코아를 들고 방을 나섰다.
‘이건 어떻게 하지.’
버리기는 아까운데. 아, 서올리가 방에 있겠구나. 친구를 떠올린 마델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때마침 들어온 서올리에게 코코아를 건넸다.
“맛있다.”
레이스가 잔뜩 달린 캡을 벗으며 그녀가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비록 좀 식긴 했지만, 진하게 탄 데다가 마시멜로까지 잔뜩 들어간 코코아는 정말 맛있었다. 한겨울에 이렇게 진한 코코아라니. 거기다 일과가 전부 끝난 후 마시는 거라 그런지 더 달콤했다.
예상치도 못한 사치에 절로 입에 미소가 흘렀다. 신나 코코아를 마시는 하녀를 보며 마델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맛있지? 그거 아주 진하게 탄 거거든.”
“짠순이가 웬일이래?”
곱슬곱슬한 짧은 호박색 머리를 매만지며 코코아를 마시던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맞은편에 앉아 숄을 걸치는 마델을 바라보았다.
“너 이거 비싼 거라고 한 달에 한 번만 마셨잖아?”
그녀의 말에 마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코코아는 마델의 개인품이었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람들은 단것을 즐겨 찾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단것을 좋아하는 마델은 늘 코코아와 사탕을 갖추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외출을 허락받아 번화가에서 유명한 제과점의 디저트를 먹는 건 마델의 가장 큰 행복 중 하나였다. 특히 이번에 사 온 코코아는 일주일 치 봉급을 훌쩍 넘는 최고급 상품이라, 같은 방을 쓰는 저 서올리에게도 단 한 번도 나눠 준 적이 없었다.
입가에 묻은 코코아를 핥으며 마델은 코코아 잔을 내려다보았다.
“아가씨가 뭔가 슬퍼 보였단 말이야.”
겨우 번화가에 가는 것인데도 엄청나게 들떴다가 실망한 그 뒷모습은 마델에게 슬픈 인상으로 남았다.
“아가씨? 아, 이번에 그 레슬리 아가씨?”
“맞아.”
“흐응.”
서올리는 뭔가를 생각하듯 눈동자를 위로 살짝 올리면서 남은 코코아를 마셨다.
“뭔가 좀 다른 아가씨들이랑은 다르다고 해야 하나……. 팬케이크 사건도 그렇고.”
“그치. 그래서 그걸 공작님에게 다 말했다, 나?”
“…….”
그 말을 들은 서올리는 창가에 자신이 마시던 코코아 컵을 내려놓더니 빠르게 자신의 방 친구에게 다가가 그녀의 안부를 확인했다.
“너 괜찮아?”
딱 필요한 용건만 간단히 말할 것. 그리고 늘 조용한 상태를 유지할 것.
누구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다들 그 룰을 따르고 있었다. 일단 가주인 셀바토르 공작님은 시끄러운 상태나 무언가가 흐트러지는 상태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 게 아니더라도 180이 넘는 장신의 공작 앞에선 다들 입을 꽉 다물게 되었다. 그 위압감이란 일반 사람들에겐 견디기 힘든 것이었으니까.
다른 귀족들이나 기사들마저 그 앞에서 입을 다무는데 일반인들은 오죽할까. 사이레인의 경우도 셀바토르 공작 앞에서만 웃음꽃을 피웠고 제 두 자식 앞에서는 냉담한 모습을 유지했다. 그런 두 사람에게서 나온 베스라온과 루엔티 역시 비슷한 성향이었다.
그래서 이 저택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모두가 깨달았다. 여기선 모두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자신의 할 일만 하며 지내야 한다는 것을.
거기다 손님이 찾아오는 일은 전혀 없는, 마을과는 멀리 떨어진 저택. 그런 저택이니 괴물 공작가라 소문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괜찮아. 오히려 공작님이 아가씨 잘해 주라고 하시더라.”
“공작님이?”
자신들의 고용인이 언제 그런 따스한 말을 하시던 분이던가? 하지만 그 대상이 레슬리라고 생각하니 또 바로 이해가 갔다. 레슬리 아가씨는 그럴 만한 분이지.
“잘해 드리자.”
“그래.”
조용히 코코아를 마시며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아가씨……. 어머?”
평소처럼 레슬리를 깨우러 온 마델은 눈을 깜빡거렸다. 어느새 일어난 건지 레슬리가 일어나 창밖을 보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으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닥치고 있었다.
“마델.”
자신을 보자 눈꼬리를 접으며 웃어 보였다. 언제부터 창밖을 보고 있던 건지, 얼굴이 붉게 얼어 있었다.
“세상에, 아가씨! 언제부터 이러고 계셨던 거예요.”
가까이 다가가 마델은 급하게 레슬리의 얼굴을 매만졌다. 마델의 따듯한 손이 좋은지 레슬리가 그 손에 뺨을 문질렀다. 붉게 물든 뺨이 위로 살짝 올라가고, 레슬리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
“모르겠어. 그냥 일어났을 때부터 보고 있었어.”
“몸이 너무 차가우시잖아요.”
“그냥 기대돼서…….”
헤실헤실 웃음을 터트리며 레슬리는 마델을 바라보았다. 사실, 너무 기대돼서 새벽녘에 잠이 깨 버렸다. 다시 자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오라는 잠은 오지 않고 별의별 생각만 몰려들었다.
‘혹시 이게 꿈은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자 레슬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하지? 이게 정말 꿈은 아닐까? 침대도, 이불도, 하필 방에 깔린 카펫마저도 너무도 폭신했기에 이게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레슬리는 당황해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다 보인 것이 어제 잠들기 직전까지 앉아 있던 창문 의자.
그 의자로 다가간 레슬리는 폴짝 올라 창문을 활짝 열었다. 순식간에 차가운 바람이 따스한 방 안으로 몰려들며 레슬리의 뺨을 간지럽혔다. 은빛 머리카락마저 마구잡이로 흐트러졌고, 라일락빛 눈동자에는 지금 막 떠오르는 일출이 가득 찼다.
‘꿈이 아니야.’
레슬리는 쿠션을 꼭 끌어안으며 서서히 퍼지는 새벽빛을 바라보았다. 그 위로 내리는 눈이 너무도 아름다워 보였다. 차가운 바람은 지금이 꿈이 아님을 알려 주었고, 시야에 가득 찬 빛은 베스라온과 번화가에 가는 내일이 정말 다가오고 있음을 레슬리에게 속삭여 주었다.
그런데도 믿기지 않아 계속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 새벽부터 쭉 이러고 계셨던 거예요?”
마델이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묻자, 레슬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베스라온의 손을 잡고 번화가에 간다고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는데, 마델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몸이 너무 차가우신데…….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찌하시려고요.”
“괜찮아.”
자신을 걱정해 주는 마델을 보며 레슬리는 다시 웃었다. 이렇게 많이 웃은 날은 아마 처음일 듯싶었다. 어서 나가고 싶다. 얼마나 즐거울까, 얼마나 행복할까.
“정말 괜찮아. 나 어서 가고 싶어. 도와줘, 마델.”
레슬리의 웃음에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마델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레슬리에게 맞는 옷이 없어 제나와 함께 한참 소란을 떨긴 했지만, 제시간에 준비는 끝이 났다. 준비가 끝나자마자 방에서 나온 레슬리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한 사람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베스라온 님!”
레슬리는 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베스라온을 보고 그에게 달려갔다.
레슬리가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베스라온과 제나는 아침 식사도 번화가에서 하기로 했다. 그는 새벽부터 떨어진 눈 때문에 몰려든 추위를 피하고자 두꺼운 망토를 두르다가, 자신을 향해 오는 레슬리를 보고 끈을 묶던 손을 멈칫했다.
털공. 그것 외에 지금 레슬리를 설명할 다른 말이 있을까?
사실 레슬리 털공은 마델의 작품이었다. 혹여나 새벽부터 찬바람을 쐰 레슬리가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한 마델은 레슬리가 입을 수 있을 만큼 옷을 껴입게 했다.
거기에 정점은 루엔티의 옷이었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람들은 너무 컸고, 사용인들의 옷을 레슬리에게 입힐 수 없어서 마델과 서올리는 제나와 함께 레슬리가 입을 만한 옷을 찾아 새벽부터 한 차례 소란을 피웠다.
그러다 간신히 찾은 게 루엔티가 열 살 때쯤 입었던 옷이었다. 그마저도 너무 커서 질질 끌렸지만 없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 생각해 레슬리에게 입혔고, 그 결과 레슬리는 완벽한 털공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레슬리가 제 발치에 다가오자 자동으로 베스라온은 레슬리를 안아 들었다. 그제야 새하얀 털옷은 바닥에 끌리지 않고 허공에서 추욱 늘어졌다.
“이건……?”
당황한 눈으로 레슬리가 입고 있는 털옷을 가리키자 마델이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루엔티 도련님이 열 살쯤에 입었던 털 코트입니다. 그게 가장 작은 옷이라서 일단 그걸 입혀 드렸어요.”
열 살? 마델의 말에 되레 레슬리가 충격받아 눈을 깜빡였다. 그럼 루엔티 님이 자신보다 어렸을 때 입었던 옷인데 자신에게는 이렇게 크다는 건가? 레슬리는 슬쩍 고개를 내려 쭉 늘어진 털옷을 바라보았다.
이게 열 살 때 입었던 옷……. 레슬리가 멍하게 옷을 보자, 레슬리의 상태를 용케도 알아챈 베스라온이 레슬리의 머리를 토닥였다. 사실, 레슬리와 첫 만남에서 했던 실수가 베스라온이 빠르게 눈치챌 수 있게 도와주었다.
“너는 여자애라 더 작은 것뿐이야.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하지만 레슬리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레슬리를 다독이는데 갑자기 허리에서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은 그대로 두고 시선만 돌리니 제나가 겉보기엔 다정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베스라온을 보고 작게 속삭였다.
“베스라온 도련님, 원래 어릴 때는 여자아이들이 더 큰 법입니다.”
“…….”
실제로 말하진 않았지만, 입을 다물라는 의미가 담긴 것 같았다. 베스라온은 눈을 찡그리다 시선만 돌려 다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제나의 말까지 듣고 나니 레슬리가 축 늘어진 게 마치 모두 제 탓인 것만 같았다.
베스라온은 몇 번 헛기침하고는 레슬리를 안은 채 그대로 발을 옮겼다. 키가 커서 그런지, 아니면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저택 문에 도착했다.
“어쨌든 곧 클 거야.”
“그럴 수 있을까요?”
베스라온의 옷깃을 꼭 잡은 채 레슬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스페라도 후작가에서도 가장 작았는데, 여기서는 더욱더 작아졌다. 가장 나이가 비슷한 엘리조차 자신보다 키가 훨씬 컸으니까. 두 저택에서 어딜 봐도 자신보다 작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크고말고.”
기분이 점차 바닥으로 떨어지는데, 귓가에 들려온 베스라온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루엔티 녀석도 작은 편이었지만, 고기를 열심히 먹어서 그런가? 금방 컸지. 너도 그렇게 될 거야.”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진지하게 대답하는 베스라온을 보고 레슬리는 조심스레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공작님만큼 클 수 있을까요?”
“어머니만큼?”
이번엔 베스라온의 암녹색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곧 매끈한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으음…….”
정말로 레슬리가 셀바토르 공작만큼 클 수 있는지 가늠해 보는 듯 점점 주름이 깊어져 갔다.
“될 수 있어.”
아직 미간엔 주름이 잡혀 있는 채로 베스라온이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곧 주름은 사라지고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며 미소를 그렸다.
“어머니만큼 될 수 있어.”
그 말이 셀바토르 공작처럼 키가 클 것이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그만큼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둘 다처럼 들려 레슬리는 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자신이 지금 베스라온에게 안겨 마차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햇빛이 쏟아지는 정원에서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다리를 바동거렸다.
“저, 내려서 걸을게요. 불편하시잖아요.”
“새벽부터 눈이 많이도 내렸지.”
내려 달라는 것과 눈이 많이 내렸다는 게 무슨 상관일까? 의문에 눈을 깜빡이다 제 발에 시선이 닿았다. 레슬리의 눈동자 색을 닮은 예쁜 신발은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신발도 제나가 급하게 사 온 기성품으로, 조금 커서 걷기 힘든 데다가 이런 눈밭을 걷는다면 순식간에 젖어 버릴 게 분명할 정도로 얇았다.
주변을 보니 아직도 눈을 치우고 있는 셀바토르 공작가 사용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생각보다 많이 눈이 내렸는지 군데군데 덜 치워진 눈 뭉치가 남아 있었다.
“아.”
그제야 얌전해진 레슬리를 보며 베스라온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가 긴 다리를 이용해 성큼성큼 걷자 곧 마차가 서 있는 곳에 도착했다.
마차마저도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람들의 크기에 맞춘 것인지, 다른 마차보다 훨씬 더 커 보이는 마차는 독특하게도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거기다 마차를 이끄는 거대한 말 두 마리마저 검은색이었다.
푸르릉거리며 눈빛을 번뜩이는 말 두 마리가 앞발을 구를 때마다 땅에서 자욱한 눈안개가 일었다. 마치 지금이라도 전쟁터에 내보내야 할 것 같은 말 두 마리를 보며 레슬리는 입을 크게 벌렸다.
여태 봐 왔던 말들과는 전혀 다른 말들. 크기나 빛깔이며 뭐 하나 평범해 보이는 게 없었다. 이게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본인가?
그런 레슬리를 보고 베스라온 뒤에 서서 총총걸음으로 간신히 두 사람을 따라오던 제나가 포근한 웃음을 흘렸다.
“크죠? 하지만 저 정도가 되지 않으면 사이레인 님이나 큰 도련님이 타고 다니기 힘들 거거든요.”
아. 그렇구나. 레슬리는 다시 베스라온을 바라보았다. 사이레인 님도 여태 봐 왔던 어떤 사람보다 컸으니 두 사람이 타고 다니는 마차를 이끄는 말도 저 정도는 되어야 하는구나.
“아쉽게도 저는 오늘 같이 가지 못합니다. 급한 일이 생겼거든요.”
베스라온에게서 레슬리를 넘겨받은 제나가 그녀를 마차에 태우며 아쉽다는 미소를 흘렸다.
“마델에게 레슬리 아가씨께 필요한 물건을 전부 말해 놓았으니 가서 번화가 구경을 즐기다 오세요, 아가씨.”
“가서 맛있는 아침 먹을까요, 아가씨.”
베스라온 다음으로 마차에 오른 마델이 웃으며 레슬리의 옆자리에 앉았다. 마델이 앉자마자 문이 닫히고 마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마델, 창밖 봐도 될까?”
“그럼요! 얼마든지 구경하셔도 괜찮아요.”
마델이 손을 뻗어 직접 마차 창을 가리고 있던 푸른 커튼을 걷어 주었다. 커튼을 걷자마자 환한 햇빛이 마차 안으로 들어오며 새로운 풍경을 보여 주었다.
레슬리는 마차 벽에 붙다시피 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덜컹거릴 때마다 흘러내리는 레슬리의 털옷을 다시 제대로 올려 주며 마델은 작게 키득거렸다.
“아가씨는 창밖을 구경하는 걸 좋아하시는군요.”
“응.”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고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을 볼 때면 답답하지 않아서 좋아.”
레슬리는 작게 대답하며 스페라도 저택에 있는 다락방을 떠올렸다. 본래는 사용인들이나 쓸 법한 작은 방은, 가장 위층인 데다 가장 구석에 있는 방이라 그런지 답답한 느낌을 자주 받았다. 그때마다 레슬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가 가장 숨쉬기 편할 때였다.
그렇게 대답하는 레슬리를 보며 베스라온과 마델은 눈을 찡그렸다. 마델이 이를 까득거리며 입 모양으로 작게 엄청난 말을 쏟아 냈지만, 베스라온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마델, 마을까지는 얼마나 걸려?”
“곧이요. 걸으면 조금 걸리지만, 마차를 타면 금방이지요.”
레슬리가 창밖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을 때는 그녀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만이 남아 있었다.
“가면 먼저 맛있는 아침을 먹도록 해요, 아가씨. 배가 많이 고프시죠? 어제 못 먹어 본 코코아도 먹어요.”
“코코아.”
코코아. 그 단어에 레슬리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마델이 어제 말해 주었을 때 정말 먹어 보고 싶었는데, 너무 졸려서 자신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 눈을 떴을 땐 창문 의자 위가 아니라 침대 위였다.
“제가 번화가에 있는 비밀 맛집은 다 알고 있거든요. 코코아도 먹고, 옷도 사고, 신발도 산 후에 달콤한 거 먹으러 가요, 아가씨.”
마델이 신나게 자신만 알고 있던 케이크 맛집을 레슬리에게 말하면서 레슬리의 눈을 반짝거리게 하는 동안, 마차는 어느덧 번화가에 도착했다. 먼저 마델이 추천한 맛집에서 아침 식사를 끝낸 세 사람은 제일 급한 옷과 신발을 사러 가게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파렝클 가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를 보는 그 순간부터, 그리고 베스라온이 가게에 들어온 그때부터 주인은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세 사람을 맞이했다.
과할 정도의 환대를 받으며 셋은 개인실로 안내받았다. 커다란 개인실에는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옷을 갈아입기 위한 작은 방과 전신거울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레슬리는 방을 둘러보다 소파에 조심스레 베스라온과 앉았다. 폭신한 소파 앞 테이블에는 레슬리가 좋아할 만한 과자들과 홍차 그리고 따듯한 우유가 놓여 있었다. 내심 코코아가 아닌 걸 아쉬워하며 레슬리는 조심스레 우유를 홀짝였다.
“먼저 아가씨께서 입으실 만한 실내복과 드레스, 그리고 보닛과 겨울용 망토와 겉옷을 보여 주시고요.”
마델이 급하게 달려 나온 가게 주인을 보면서 하나하나 집어 가기 시작했다. 주인은 머리가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뭔가를 급하게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가씨가 입으실 만한 셔츠와 바지, 그리고 장갑도 같이 주문을 넣을 거예요. 아! 잠옷도요.”
“셔츠와 바지 말입니까…….”
한참 손을 놀리던 주인이 곤란하다는 듯 펜 끝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에……. 소년분들이나 남자분들을 위한 셔츠와 바지는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저 체구의 아가씨를 위해서는 따로 준비된 셔츠가 없습니다. 그리고 드레스 역시 기성품 중에서는 맞는 옷이 몇 벌 없을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조심스러운 주인의 물음에 마델이 이미 각오하고 왔다는 듯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이런 고급스러운 가게에는 미리 만들어 놓은 옷보다는 맞춤옷을 주력으로 하니까.
“일단 있는 걸 전부 보여 주세요. 옷을 고른 후에 치수를 잴 거구요. 그리고 부족한 것들을 차례로 주문 넣을 거예요. 카탈로그도 보여 주시고요.”
마델의 말에 주인이 정말 환한 미소를 짓고 방을 나가자 레슬리의 옆에 앉아 과자를 먹여 주던 베스라온이 마델을 보고 입을 열었다.
“바지와 셔츠?”
“네. 제나 집사님이 아가씨를 위한 바지와 셔츠도 몇 벌 주문하라고 하셨습니다.”
흐음. 그 말에 베스라온의 시선이 레슬리를 향했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너를 직접 가르치시려나 보군.”
“네? 공작님이 저를요?”
레슬리의 물음에 베스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아이, 어린아이를 잘 모르는 자신은 그렇다 하더라도 동생이나 자식이 있는 사용인들마저 아이의 나이를 착각할 정도로 레슬리는 작았다. 그리고 어머니께 듣기로는 이 아이는 위험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체력을 키워 놓는 게 좋겠지.
“체력은 중요하니까.”
그 말을 하며 베스라온은 어서 크라는 듯 레슬리의 입에 딸기잼이 듬뿍 들어간 쿠키를 하나 더 물려 주었다. 자신을 키워 준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몰라 레슬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안에 든 쿠키를 오물거리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개인실 문이 열렸다.
수많은 옷과 가게 직원으로 보이는 두 사람과 함께 돌아온 주인은 레슬리에게 어떤 옷이 어울릴 것인지 빠르게 마델과 함께 고르기 시작했다. 레슬리는 마델이 시키는 대로 여러 옷을 입었다가 벗고, 수많은 보닛과 모자를 썼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그렇게 한참 만에 세 벌의 드레스와 어울리는 두 개의 보닛, 한 벌의 털 망토 그리고 두 벌의 겉옷을 골랐다. 루비가 박힌 가볍지만 따듯한 신발과 레슬리의 몸에 꼭 맞는 잠옷은 덤이었다.
“이거 마음에 무척 들어요.”
레슬리는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남색 드레스를 보며 볼을 붉혔다. 짙은 남색에 금실로 화려한 수가 놓여 있는 드레스는 비록 장식은 적었지만, 안감이 두껍게 들어가 있어서 따듯했다. 거기다 드레스와 세트로 만들어진 망토에는 황금색 리본이 달려 있었다.
레슬리는 괜스레 남색으로 예쁘게 염색된 털 망토를 만져 보았다. 보들보들한 감촉이 정말 좋아 꼭 끌어안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이 드는 인형이 하나 있어도 괜찮겠다.
“저희 가게에서 자랑하는 최고급 상품 중 하나이죠. 마음에 드신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아가씨.”
주인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드레스 한 벌만 팔아도 하루 수익의 3분의 1을 올리는 것인데, 이 일행의 주문은 한 벌로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미 고른 것만 해도 여러 벌. 거기다 마델의 기세를 보면 못해도 열 벌은 넘는 옷들을 추가 주문할 듯 보였다.
주인은 웃으면서 잠옷, 드레스, 셔츠와 바지 그리고 거기에 어울리는 신발들이 예쁘게 그려진 카탈로그들을 내려놓았다. 가게의 모든 카탈로그를 다 쓸어 왔다고 해도 믿길 정도로 많은 카탈로그의 산이 테이블 위에 생겼다. 주인은 그중 하나를 펼치며 마델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카탈로그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일단 아가씨를 위한 드레스부터…….”
마델이 주인과 함께 다른 옷들과 신발을 위한 카탈로그를 보는 동안 레슬리는 자신의 옆에서 옷 입는 걸 도와주는 직원을 바라보았다.
“저, 화장실이 어디 있죠?”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그 말에 주근깨가 송송 박혀 있는 직원이 웃으며 레슬리 앞에 섰다. 그리고 먼저 문을 열고 화장실이 있는 복도까지 그녀를 안내했다. 번화가에서도 큰 드레스 가게라 그런지 화장실까지는 조금 걸어야 했다.
“저기가 바로 화장실입니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가씨.”
직원이 가리킨 곳의 꺾여 있는 모퉁이 부분에 화장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레슬리는 천천히 걸어 모퉁이를 꺾었고.
“너.”
누군가에게 팔목을 붙잡혔다.
고개를 돌리자 예전보다 윤기를 잃은 밀색 머리카락이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온 겨울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짜증과 분노가 섞인 연두색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고 그와 동시에 레슬리의 눈동자에도 짜증이 일었다.
엘리였다.
“……네가 왜 여깄어?”
레슬리는 엘리를 노려보듯 바라보며 눈을 찡그렸다. 조금 전까지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을 치는 게 느껴졌다. 왜 자신은 여기까지 와서 엘리를 봐야 하는 걸까.
그건 엘리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엘리는 갑자기 황실에서 거지라도 만난 눈길로 레슬리를 훑었다.
“내가 할 말이야.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이 가게가 얼마나 비싼 가겐지 알아?”
짜증 난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대며 둘러보더니 엘리는 거칠게 레슬리를 벽 쪽으로 밀었다. 이국적인 커다란 화분과 장식장 사이로 두 아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억센 힘에 밀려 세게 등을 벽에 부딪친 레슬리가 작은 신음을 흘렸다.
“거기다 이 가게는 손님을 가려 받는 가게로 유명한데. 네까짓 것이 들어오다니, 이 가게도 망해 가는구나. 다음부턴 다른 가게로 가야겠어. 훨씬 더 기품 있고, 제대로 된 손님을 알아보는 가게로 말이야.”
화려한 장미 레이스로 만들어진 부채 뒤에서 자신을 조롱하는 엘리를 올려다보며 레슬리는 웃음을 흘렸다.
“이 가게가 비싸거나 손님을 가려 받는다든가 그런 것보다는 ‘감히’ 나 따위가 너와 같은 가게를 이용해서 화난 거 아냐?”
정답이었는지, 엘리의 눈가에 작은 경련이 일어났다.
스페라도 후작 저택에서 엘리는 자신의 방 앞조차 레슬리가 지나다니지 못하게 했다. 그 복도를 지나지 못하면 자신의 방으로 가기 위해서 빙 돌아야 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런 지시를 내린 것이다. 거기다 응접실은 물론 책이며 공부방마저 같은 곳을 쓰지 않았고, 정원을 거닐 수 있는 곳도 정해져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택에서 가장 천대받는 레슬리와 가장 우대받는 자신이 감히 같은 공간을 쓸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 어이없는 이유를 후작 부부는 들어주었고 레슬리는 쭉 지정된 몇몇 공간에서만 살아야만 했다.
그 사실을 말하며 레슬리는 엘리를 훑었다.
엘리는 말 그대로 귀족적인 삶을 사랑하던 아이였다.
느긋하게 일어나 고급스러운 식사를 조금만 먹고, 산책한 후에는 어머니와 손잡고 번화가에 와서 옷을 구경하거나 디자이너를 집으로 불러 옷과 보석을 구매하는, 그런 삶을 살던 아이였다.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레슬리 앞에서 아주 우아한 삶을 산다며 엘리를 칭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작 레슬리는 그런 삶을 누려 보게 할 기회도 주지 않았으면서 늘 언니를 본받으라고 거울 앞에 세워 두고 레슬리 스스로 엘리와 비교하게 하였다. 그런 엘리가 이렇게 일찍 일어나 가게에 온 이유는 뻔했다.
“후작가가 많이 안 좋은 모양이지?”
이번엔 레슬리가 입꼬리를 올리고는 엘리를 바라보았다. 엘리의 머리카락은 윤기를 많이 잃었고 피부는 거칠어 보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아름다운 그녀였지만, 레슬리가 저택을 나오기 전에 봤던 엘리보다는 초췌함이 엿보였다.
이유야 뻔하겠지. 셀바토르 공작님 때문일 것이다.
스페라도 후작이 셀바토르 공작 저택 앞에서 소란을 피우다 팔이 부러졌다는 소문은, 어떻게든 막아 보려는 후작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슬금슬금 귀족들에게 퍼졌다.
명예와 자신의 위상을 중시하던 스페라도 후작은 그 소문에 미쳐 날뛰었을 것이고, 저를 사랑해 주지 않는 아버지와 뒤숭숭해진 집안 분위기, 그리고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엘리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겠지.
약혼녀로서 황실은 자주 드나들어야 하는데, 엘리 성격에 몇 번 입은 드레스를 다시 입고 황실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새 드레스는 사야겠고, 사람을 집에 부를 수는 없으니 일부러 사람이 없는 시간대를 노려 드레스를 사러 온 게 뻔했다.
레슬리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부채를 들고 엘리가 파르르 떨었다. 죽일 듯 레슬리를 바라보던 엘리는 뭔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너…… 설마 네가 그런 거야?”
“뭘?”
“네가 그랬구나, 그게 틀림없어!”
뭔지도 모르겠는데 저 혼자 물음을 던지고 저 혼자 답을 찾은 엘리가 이를 까득 갈며 레슬리를 쏘아보았다. 아까보다 더 날카로운 눈초리가 레슬리에게 날아와 꽂혔다.
“네가 셀바토르 공작에게 말했지! 아버지의 팔을 부러트려 달라고! 그래서 나와 아버지를 부끄럽게 만들어 복수하려고 그런 거지!”
엘리의 분홍빛 입술에서 튀어나온 말에 레슬리는 이번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이없이 숨을 흘렸다. 어떻게 생각이 그렇게 흘러갈까? 엘리 정도라면 스페라도 후작이 먼저 셀바토르 저택을 찾아왔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을 하다니.
“하.”
“그래, 그런 게 틀림없어. 전부 네 탓인 거야!”
엘리의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들으며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자신들의 잘못은 조금도 인정하지 않은 채 모든 잘못을 그녀에게 전가했다.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자신은 늘 화풀이 대상, 잘못을 전가할 편리한 것, 그리고 언니를 위한 물건이나 다름없었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자기에게만 완벽한 답을 내놓은 엘리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뒤로 뭔가를 중얼거렸는데, 고개를 숙인 채 웅얼거리는 거라 잘 들리지는 않았다.
그나마 ‘내가’, ‘셀바토르 공작가에 네가 갈 수 있게 도와서’ 그런 말이 들렸던 것 같은데 레슬리는 가볍게 무시했다. 어떻게 자신이 셀바토르 공작가에 가는 걸 엘리가 도왔단 말인가.
‘도운 걸 수도 있겠구나.’
엘리를 위해 그 불구덩이 속에 던져지지 않았더라면 멍청하고 어리석었던 자신은 지금도 그 후작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은 쓸모없다고 중얼거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르아의 말도 안 되는 협박에 덜덜 떨고 있을지도 몰랐고, 엘리 때문에 다락방에 갇히고 후작 부인 때문에 밥을 온종일 굶어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움켜쥐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후작 때문에 쭉 그런 삶을 살았겠지.’
그래, 엘리. 네 덕분이 맞아. 레슬리는 아직도 뭔가를 중얼거리는 엘리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를 스쳐 지나가 베스라온과 마델이 기다리고 있는 개인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더는 엘리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으니까.
“야!”
하지만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레슬리를 엘리가 거칠게 잡아끌었고, 레슬리의 손목 안쪽에 작은 생채기가 났다.
“너, 셀바토르 공작에게 가서 말해. 가서 말해서 이 소문을 어떻게든 수습하라고! 응당 네가 이 상황에 책임져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왜?”
저번에도 이러지 않았었나. 생각보다 학습능력이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거칠게 엘리의 손을 쳐 냈다. 그런데 독기가 바짝 오른 엘리는 이번엔 쉽게 레슬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두 손으로 레슬리의 팔을 꽉 잡고, 예전의 우아함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연둣빛 눈동자로 레슬리를 노려보았다.
“네가 저지른 짓이니까 그렇지. 지금 이 일로 아버지나 어머니가 얼마나 괴로워하시는지 알아? 심지어 어머니는 식음도 전폐하고 방에서만 계셔!”
“그래서?”
“그래서라니? 너는 어머니가 밥도 안 먹고 계신다는데 걱정되지도 않는 거야?”
“나는 매일 굶었는데.”
레슬리는 덤덤한 눈으로 엘리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늘 맞고, 매일 굶다시피 했고, 후작가에서조차 나설 수 없었어. 심지어 저택에서도 다닐 수 있는 곳은 제한돼 있었지. 누구 덕분에.”
거기까지 말하며 다시 레슬리는 엘리를 밀쳤다. 이번엔 엘리의 큰 몸이 뒤로 쉽게 물러났다.
“그리고 네가 정말로 걱정하는 건 스페라도 후작이나 후작 부인 따위가 아닌 너 자신이잖아.”
혹여나 이 일로 자신의 데뷔탕트가 망쳐지지 않을까. 더 나아가 언제나 아름답고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할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아렌도와의 약혼이 파기되지는 않을까. 그래서 황실에서 명예롭고 안락한 삶을 살지 못할까. 정말로 걱정하는 건 그거겠지.
레슬리의 말이 정확히 정곡을 찌르자, 엘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복숭아색 입술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망발을 쏟아 냈다.
“그게 지금 내 탓이라는 거야? 애당초 네가 쓸모없이 태어난 잘못이잖아. 그러니까 누가 그 거지 같은 머리를 타고 태어나래? 누가 제물의 운명을 타고 태어나라고 했냐고.”
끝까지 레슬리 탓. 마치 남에게 모든 잘못을 넘기지 못하면 살지 못한다는 듯 필사적인 엘리의 태도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너도 나같이 스페라도 가문의 밀색 머리와 연둣빛 눈동자를 타고 태어났으면 나만큼 사랑받을 수 있었어!”
마지막 발악하듯 소리치는 엘리의 옆을 지나치며 레슬리는 낮게 속삭였다.
“정말? 내가 지금 네가 말한 걸 타고나기만 했어도 네가 지금 누리는 것들을 나와 나누려고 했을까?”
이번엔 입마저 굳어 버린 듯 순식간에 엘리는 조용해졌다. 스스로도 알고 있는 거겠지. 자신이 뭔가를 나눌 위인이 아니라는 걸.
“거짓말쟁이.”
레슬리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다시 직원이 있는 쪽으로 걸어 나갔다.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한 직원이 그녀와 독기가 올라 레슬리를 쏘아보는 엘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다 레슬리 손목의 긁힌 자국을 발견하고는 놀라 입을 가렸다.
“아, 아가씨!”
귀중한 손님이 가게 안에서 다쳤다. 비록 손님들끼리 싸우다 일어난 일이지만, 셀바토르 가문에서 가게에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직원은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괜찮아요. 그리고 저건 무시하세요.”
레슬리는 소매를 잡아 내리며 먼저 앞서 걸어갔다. 직원은 잠시 못 박힌 듯 자리에 서 있더니 곧 레슬리를 따라 개인실로 돌아왔다.
개인실에서 아직도 마델은 수많은 카탈로그를 보며 옷을 고르고 있었고, 베스라온은 폭신한 소파에 앉아 나른하게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혹여나 다쳤다고 말할까 조마조마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직원을 무시하고 레슬리는 다시 베스라온 옆에 앉았다.
베스라온은 아침 훈련 때문에 이른 기상이 익숙하긴 했지만, 폭신한 소파에 누워 있다 보니 절로 졸음이 몰려온 모양이었다. 베스라온은 레슬리를 보더니 다녀왔냐는 듯 씩 입꼬리를 올려 웃음 짓더니 졸음에 찬 목소리로 엉뚱한 소리를 뱉었다.
“미안하다.”
밑도 끝도 없는 사과에 레슬리는 베스라온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베스라온은 말수가 적은 데다가, 필요한 말 중에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 한 마디만 던지는 경향이 있어서 베스라온과 대화를 나누려면 많은 추리력이 필요했다.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저 말이 튀어나온 걸까. 레슬리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다시 베스라온이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제 루엔티 녀석이 너를 협박했다 들었어.”
“루엔티 님이요?”
“식당에서 그랬다던데.”
베스라온이 자신의 회색빛 머리를 위로 쓸어 올리며 대답했고, 그제야 레슬리는 베스라온이 어떤 상황을 말하고 있는 건지 깨달았다. 그리고 놀라 눈을 깜빡였다.
‘어제 그게 협박이었나?’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무섭지 않았는데. 루엔티가 눈을 무섭게 뜨고 자신을 노려보긴 했지만, 무섭거나 두렵거나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후에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니까,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아직 어린 녀석이라 종종 실수하거든.”
베스라온은 어제 식당에서 레슬리가 엄청나게 놀랐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말에 레슬리는 우유가 든 컵을 꼭 쥐고 고개를 저었다.
“저는 무섭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그럴 리가. 그 녀석도 작긴 하지만, 셀바토르 가문의 일원이야.”
확실히, 루엔티는 사이레인을 상당히 닮았기에 그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본다면 다들 무서워할 것 같았다.
“음, 그렇지만요.”
어제 식당에서 자신을 위협하던 루엔티의 눈과 방금 마주친 엘리의 눈을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여태 자신을 봐 왔던 스페라도 가문 모든 이들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분노, 무시, 혐오. 후작 부부와 엘리를 포함한 수십 쌍의 눈동자들은 집 안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거기다 사용인들에게 일어나는 개인적인 나쁜 일까지 전부 레슬리의 탓인 양 그녀를 나무랐다. 레슬리가 크게 숨만 쉬어도, 복도를 걷기만 해도 사방에서 비난의 시선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 감정을 고스란히 내뱉던 입들은 덤이었다. 레슬리는 베스라온의 대답에 시선을 맞추며 생긋 웃어 보였다.
“저를 정말 싫어하거나 미워한다면 그보다 더 끔찍한 눈을 하거든요.”
엄청난 대답을 하고선 아무렇지도 않게 남은 우유를 마시는 레슬리를 보며 베스라온은 얼굴을 굳혔다.
“예전에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네?”
눈꺼풀을 깜박이는 레슬리를 보며 베스라온은 고개를 젓고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옷을 다 맞추면 상점가를 돌며 구경하자는 말이었어.”
“구경해도 되나요?”
“그럼.”
짧은 대답에 레슬리는 배시시 웃었다. 종종 후작 부인이 엘리와 함께 번화가에 다녀오지 못할 때면, 엘리는 유모인 르아를 번화가에 데리고 갔었다. 그럼 그날 밤은 르아의 자랑 대회였다.
‘오늘은 화려한 극장에 다녀왔답니다. 얼마나 별세계던지! 수많은 아름다운 레이디들과 멋진 신사분들에! 거기다 화려한 배우들은 어찌나 아름답던지요. 하지만 그중에서 엘리 아가씨는 더욱 빛났어요. 당연하지요. 제1황자님의 약혼녀이신걸요.’
레슬리는 르아의 말을 두 눈을 빛내며 경청했다. 책이라곤 공부를 위한 책만 주어졌기에 르아의 자랑은 레슬리에게 어떤 책보다 흥미로웠고, 번화가를 꼭 가 보고 싶은 장소로 만들었다. 하지만, 늘 르아의 자랑 끝은 똑같았다.
‘뭐, 저와 다르게 아가씨는…… 평생 그런 곳에 갈 일이 있을까 싶긴 하네요.’
그리고 돌아오는 비웃음과 시선. 그게 너무도 슬퍼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다정한 목소리로 그 옆에 앉아 레슬리를 다독였다.
‘엘리 아가씨가 아렌도 황자님과 결혼하셔서 황궁으로 들어가면 아가씨도 어쩌면 구경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자리는 시녀들을 대동해서 들어가거든요. 엘리 아가씨는 착하고 아름다우시니까 다른 시녀들보다는 아가씨를 데리고 다니실 게 분명해요!’
다독이는 척 레슬리의 눈을 가린 거지만.
“다 끝났어요!”
레슬리의 쓸쓸한 회상은 마델의 명랑한 목소리에 의해 깨졌다. 카탈로그를 전부 확인한 마델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레이스가 예쁜 게 많이 들어왔더라고요. 자세한 모양을 보느라 그런지 눈이 아프네요.”
마델은 눈을 비비며 두 사람을 향해 웃어 보았다.
“그럼 총 드레스 다섯 벌, 셔츠와 바지 네 벌, 신발과…….”
마델이 마지막으로 주문서를 확인하는 작업이 끝나자, 베스라온과 레슬리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고, 주인의 환대를 받으며 가게를 나올 수 있었다. 가게를 나서자마자 자신을 다시 안아 들려는 베스라온에게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레슬리는 웃으며 천천히 번화가 거리를 걸었다.
걸을 때마다 신발에 박힌 루비 장식이 이른 햇빛에 반짝거렸다. 딱 맞고, 부드럽고 따듯한 신발.
요즘 마델이 매일 뭔가를 발라 줬지만, 오랫동안 찬 다락방에서 지내서 갈라진 발은 걸을 때마다 미약한 고통을 레슬리에게 주었다. 그런 발이 폭신한 신발 덕분에 아무리 걸어도 아프지 않았다.
그게 신기하고 즐거워 레슬리는 잘 정돈된 돌길을 신나게 걸었다. 베스라온과 마델은 흐뭇한 미소를 띠고 레슬리의 뒤를 천천히 뒤따랐다. 마치 전 제국을 다 걸어 돌파할 것 같은 레슬리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추더니 한 가게 유리창 안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인형 가게네요.”
마델이 레슬리와 같은 가게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레슬리가 멈춘 곳은 한 유명한 인형 가게 진열창 앞이었다. 귀엽게 생긴 곰과 토끼 같은 여러 동물 인형에, 매끈한 도자기로 만들어져 섬세한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입은 인형까지.
여러 종류의 인형이 레슬리의 발길을 붙잡았다. 정신없이 인형을 구경하는 레슬리를 지나쳐 베스라온이 인형 가게 문손잡이를 잡았다.
“레슬리.”
그러고는 무뚝뚝하게 문을 열더니 레슬리를 바라보며 가게 안쪽으로 턱짓했다. 레슬리는 눈을 한 번 크게 뜨더니 활짝 웃고는 조심스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어서 오세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세 사람을 맞이했다. 가게 안에는 생각보다 더 많고 다양한 인형이 진열되어 있었고, 레슬리는 입도 다물지 못한 채 가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거 너무 예뻐요.”
레슬리의 발이 멈춘 최종 도착지에는 한 무리의 토끼 인형이 놓여 있었다. 다양한 색의 토끼 인형들은 안 데려가고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귀여운 표정이었다.
“이게 마음에 들어?”
어느새 레슬리 뒤에 다가온 베스라온의 물음에, 시선은 토끼 인형에 고정한 채로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인형을 전부 골라 봐.”
금방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인형을 고를 것 같던 레슬리는 베스라온의 허락에도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레슬리.”
“아니, 아니에요. 그냥 예뻐서 봤던 것뿐이에요.”
그러면서 미련이 뚝뚝 남은 눈동자로 고개를 젓고는 생긋 웃으며 베스라온을 바라보았다.
“그만 돌아가도 괜찮아요.”
이 나이면 가지고 싶은 것을 보면 떼를 부릴 만도 하건만. 옷이나 신발은 꼭 필요한 것이니 어쩔 수 없이 받았지만, 필수품이 아닌 인형은 꿈도 꾸지 않는다는 레슬리를 보며 베스라온은 팔을 뻗었다. 레슬리를 들어 안자, 순식간에 선반 위에 놓여 잘 보이지 않던 인형들까지도 레슬리의 시야에 들어왔다.
“원하는 인형을 골라 보렴.”
“아, 아니에요.”
“정말로?”
베스라온의 물음에도 레슬리는 고개를 저을 뿐 쉽사리 하나를 고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쩔 수가 없지. 가게에 있는 인형을 몽땅 사야겠다.”
베스라온의 곤란하다는 말에 레슬리는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고 베스라온을 바라보았다.
“셀바토르 가문의 사람이 이런 가게에서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갔다고 하면 이상한 소문이 날 테니까.”
능청스러운 베스라온의 말에 레슬리는 머리가 핑 도는 걸 느꼈다. 그……그런가? 셀바토르 가문이라면 가게에 들어가면 뭔가를 사야 하는 건가?
“누군가 우리 가문의 재력을 의심할지도 모르니까. 네가 뭔가를 하나 집으면 그것만 사면 되겠지만,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니 어쩔 수 없지.”
가게 주인 옆에 서 있던 마델도 작게 웃음을 흘릴 만큼 말도 안 되는 말이었지만, 레슬리에겐 아니었다. 언제나 무뚝뚝하고 진중한 베스라온이 그렇게 말하자 그 말이 진실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동공이 떨리는 레슬리를 보다 베스라온이 고개를 돌려 주인을 바라보았다.
“이 가게에 있는…….”
“베, 베스라온 님!”
다급히 그의 말을 막은 레슬리가 작게 웅얼거렸다.
“……만.”
“응?”
베스라온이 다시 묻자 레슬리가 부끄러운지 볼을 붉히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검은 토끼 인형 하나만…….”
“그래.”
드디어 원하는 걸 말한 레슬리를 보며 베스라온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잘했다는 듯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도 돼. 먹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모두 말해.”
그리고 직접 선반 위에 있는 연보라색 리본을 맨 검은 토끼 인형을 집어 레슬리의 품에 안겨 주었다.
“너는 이젠 그 저택에 있는 게 아니니까. 참지 않아도 돼. 알았지?”
그 저택. 분명 스페라도 후작가를 말하는 거겠지.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일부러 더 꼬옥 토끼 인형을 끌어안았다.
“네……. 그럴게요.”
베스라온이 사 준 토끼 인형을 끌어안고 레슬리는 바쁘게 번화가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비록 시간이 안 맞아 르아가 그렇게 자랑하던 극장은 가지 못했지만, 아주 즐거웠고 행복했다. 번화가 구경의 마지막은 그렇게 기대하던 코코아였다.
“……!”
가장 유명한 디저트 집에 앉아 막 나온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신 레슬리가 얼굴을 붉혔다. 눈은 반짝거리다 못해 반짝임이 밑으로 떨어질 정도였다. 새로운 달콤함에 테이블 밑에서 절로 짧은 다리를 동동거렸다.
“맛있죠?”
레슬리의 간곡한 부탁으로 같은 테이블에 앉은 마델이 생글생글 웃으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마델 역시 그녀 앞에 놓여 있는 여러 개의 케이크 조각들로 인해 기분이 상당히 좋은 상태였다.
마델이 안내한 이 가게는 맛뿐만 아니라 가격으로도 유명한 가게였다. 케이크 한 조각이 못해도 마델의 하루 치 급여와 맞먹었기에 마델과 서올리는 언제나 이 가게를 꿈처럼 여겼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많이 시키는 날이 올 줄이야!’
돌아가서 서올리에게 자랑해야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부러워할 게 뻔한 서올리가 너무도 쉽게 상상되었고, 그건 마델에게 환한 웃음을 가져다주었다. 괴상한 웃음을 흘리며 마델은 레슬리에게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을 먹여 주었다.
“너무 맛있어.”
아예 녹아 없어질 듯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레슬리가 대답하자 졸음에 잠겨 있던 베스라온이 작게 웃음 지었다. 어머니는 여러 이유를 대며 아이를 받아들였다고 했지만, 지금 광경을 보면 그냥 귀여워서라 해도 믿을 만했다.
케이크 한 입, 코코아 한 잔 그리고 인형 하나에 이렇게 사람이 행복해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는 아이.
‘도대체 스페라도 후작가는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어떤 짓을 했기에 애가 저 모양이 된 걸까. 베스라온이 치밀어 오르는 온갖 상상을 억누르며 작게 한숨 쉬는데, 마델이 레슬리 앞에 뭔가를 내려놓았다. 작은 배를 타고 있는 예쁜 눈사람 모양의 쿠키. 아까 케이크와 코코아를 주문할 때 따로 주문한 쿠키였다.
“같이 드셔 보세요. 이 쿠키는 단 편이 아니라서 코코아랑 먹으면 잘 어울려요.”
마델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입으로 쿠키를 가져가려다가 멈칫했다. 그러고는 제 손에 쥐여진 눈사람 쿠키를 빤히 바라보았다. 배를 탄 눈사람 쿠키, 그리고 하얀 마시멜로가 가득 들어간 진득한 코코아.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코코아 위에 쿠키를 올렸다. 마시멜로 덕분인지, 코코아가 듬뿍 들어가 진득해서 그런 건지, 마치 원래 있던 장식처럼 눈사람 쿠키가 예쁘게 코코아 위에 동동 띄워졌다.
“어머.”
마델이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레슬리는 제가 만든 작품이 만족스러워 작게 웃음을 흘렸다.
“베스라온 님, 베스라온 님!”
잠시 황홀한 눈으로 코코아 위의 쿠키를 바라보던 레슬리는 눈을 찡그리며 짜증 나는 상상 속에 빠져 있던 베스라온의 팔뚝에 손을 올리고 그를 불렀다.
“이거 보세요.”
작은 흔들림에 그제야 상상에서 벗어난 베스라온을 바라보며 레슬리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코아를 가리켰다.
“너무 예뻐요!”
자랑하듯 눈을 반짝이고는 어서 보라는 듯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
레슬리와 베스라온이 본 것은 처참하게 코코아 속으로 침몰해 사라지는 눈사람이었다. 당근 색으로 입혀진 코는 떨어져 이미 녹고 있었고, 간신히 얼굴의 반만 떠 있는 눈사람의 한쪽 눈은 처연해 보였다.
마치 풍랑을 만나 난파된 눈사람의 모습을 보며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 버렸다.
“아, 안 돼!”
마델이 수습해 보려 긴 수저를 들고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눈사람은 안타까움을 남기고 코코아 속으로 사라졌고, 세 사람 사이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날은 베스라온과 마델이 처음으로 레슬리의 눈물을 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