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위계질서 (4)
도어 록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찾아온 어색한 정적.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지? 혹시 성호 선배랑 관련된 건가?’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현우의 달라진 태도에 합리적인 추측을 해 본 태주였다.
“넌 지금 트레이닝 돔으로 가.”
잠시 뜸을 들이던 현우가 밑도 끝도 없는 지시로 태주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네? 지금 이 시간에요?”
“어. 가면 성호 선배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성호 선배가 갑자기 왜…….”
다 같이 자리를 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개인적으로, 심지어 약속도 없이 급작스럽게 만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훈련실 한 곳을 업그레이드 했는데, 아무래도 성능을 시험해 줄 테스터가 필요한가 봐.”
“성능 테스트요?”
“어. 옆에서 도와줄 사람이 한 명 필요하다는데, 지금 당장 올 수 있는 동아리 회원이 우리밖에 없대.”
“그럼 저보다 선배님이 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경험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
“난 여기서 청소 검사를 해야 되잖아. 뭐, 다른 애들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솔직히 네가 28기에서 제일 뛰어나기도 하고.”
그럴듯한 핑계를 댄 현우가 굳게 닫힌 문을 힐끗 쳐다본 뒤 태주를 추켜세웠다.
물론 태주를 보내려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후배에 대한 칭찬을 자제하라 했던 성호의 지침을 어기고 말았지만.
“저를 보내는 건 선배님의 뜻인가요?”
태주는 자신을 차출한 게 누구의 의견인지 궁금했다.
“내 뜻이기도 하지만, 성호 선배의 뜻이기도 해.”
“아, 네. 그나저나 되게 급한 테스트인가 보네요. 웬만하면 내일 해도 될 거 같은데.”
“오늘은 그냥 작동 여부만 간단하게 체크하는 건가 봐. 네 말대로 본격적인 테스트는 내일부터 시작되고.”
“으음.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가면 되나요?”
“어. 그리고 청소는 우리끼리 알아서 할 테니까 넌 끝나는 대로 집에 가. 괜히 여기로 돌아올 생각하지 말고.”
“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이렇게 흔쾌히 수락해 줘서 내가 더 고맙지. 그럼 성호 선배한테 지금 바로 간다고 얘기한다?”
휴대폰을 들어 보인 현우가 성호에게 전화를 걸며 문을 나섰다.
“여보세요? 네, 선배님. 네. 이제 막 보내려고요. 네.”
‘이왕 이렇게 된 거 가기 전에 사진이나 찍고 가야겠다.’
명예의 전당에 홀로 남겨진 태주가 백승걸의 졸업 사진이 걸린 7번째 액자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찰칵!
*
*
*
잠시 후.
트레이닝 돔에 도착한 태주가 현우가 알려준 약속 장소로 익숙하게 나아갔다.
‘업그레이드했다는 훈련실이 서바이벌 룸이었구나.’
4년의 시간을 보낸 곳인 만큼 방의 위치만 들어도 어떤 훈련이 이루어지던 공간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빨리 끝내고 집에나 가야겠다.’
간단한 작동 여부 테스트라 알고 있는 태주가 깍지 낀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기지개를 켠 뒤 임성호가 기다리고 있는 서바이벌 룸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태주가 문을 등지고 있던 성호의 뒤통수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어, 생각보다 빨리 왔네? 혹시 순간 이동으로 왔어?”
태주의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 성호가 현우와의 통화 시점을 떠올리며 물었다.
“기다리기 지루하실 것 같아서요.”
치유의 숲을 점멸 스킬로 빠르게 돌파한 건 맞지만, 사실 선배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집에 일찍 가고 싶은 마음에 이동 시간을 단축한 것뿐이었다.
“생각해 줘서 고맙네.”
태주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성호가 선배의 시간을 배려하는 바람직한 태도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현우한테 얘기는 들었지? 네가 오늘 뭘 해야 되는지.”
“그냥 선배님 곁에서 테스트를 돕는다는 정도만 듣고 왔습니다.”
“맞아. 넌 지금부터 나랑 업그레이드된 서바이벌 룸의 작동 여부를 체크할 거야.”
“네? 서바이벌 룸이요?”
태주가 모른 척 훈련실의 정체를 되물었다.
“어. 던전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본적인 생존 지식을 배우는 곳이거든.”
증강 현실을 주로 사용했던 그동안의 훈련 방식과 달리 불투명한 벽으로 구분된 각기 다른 규모의 부스 안엔 생존과 관련된 미션들을 수행할 수 있는 다양한 체험 환경이 실감나게 구현되어 있었다.
“아아, 네.”
신입생 연기를 이어가던 태주가 낯선 장소를 대하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로 시작해 볼까?”
간단한 설명을 마친 성호가 업그레이드를 마친 여러 개의 부스들 중 한 곳을 향해 꼿꼿한 자세로 앞장섰다.
“네.”
“아 참, 이번 여름에 인턴십을 한다고?”
성호가 한 발짝 떨어져 걷고 있던 태주와 보폭을 맞추며 물었다.
“네.”
“원래 인턴십은 3학년 때부터 하는 게 일반적인 건 알지?”
“네. 안 그래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내게 주어진 기회가 모두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감사해야지. 그게 교만과 오만으로부터 초심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고.”
피크닉의 위계질서를 공고히 하는 것이 목적인 성호가 태주의 근황을 핑계로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동행하던 태주가 때아닌 설교에 눈치껏 대꾸했다.
“자, 일단 여기부터 체크하자.”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선 성호가 ‘무기 제작’이라고 적힌 부스의 문을 열었다.
‘어? 여긴.’
성호와 대화를 주고받는 틈틈이 서바이벌 룸에서의 기억을 더듬어 보던 태주가 익숙한 생존 미션에 반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놀랍지 않아? 증강 현실이 없이도 이렇게 리얼한 조건을 연출했다는 게?”
마치 게이트를 통해 던전 내부로 들어간 것처럼 부스 안은 전혀 다른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그러게요. 이렇게 나무들까지 심어져 있는 게 마치 숲속을 걷는 기분이네요.”
태주가 업그레이드를 통해 한층 더 사실적인 모양새를 갖춘 부스의 인테리어에 놀라워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근데 지금처럼 두 손이 가벼운 상황이라면 어떨까?”
발걸음을 멈춘 성호가 태주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부스의 이름을 봐서 알겠지만, 여긴 던전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중 하나인 무기가 없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훈련 공간이야.”
던전의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돌발 상황을 마주할 확률 또한 정비례했는데, 특히 무기가 파괴되거나 분실될 경우 몬스터의 사체나 주변에 있는 여러 가지 재료들을 활용해 간단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임기응변이 요구됐다.
“무투가들이야 원래 맨손으로 싸우지만, 우리처럼 활과 화살 중 어느 하나라도 사라지면 멘탈이 나가는, 다시 말해, 2 빼기 1은 1이 아닌, 0이 되는 클래스에게 있어 무기가 없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은 것과 마찬가지거든.”
물론 이때 만들어지는 무기는 전진을 위한 것이 아닌 무사히 게이트를 빠져나가기 위한 일종의 호신용 무기였지만.
“그러니 생존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게이트 입장 전의 완벽한 모습으로만 트레이닝을 하면 안 돼. 인턴십이 아무리 E급 던전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맨손으로 몬스터를 때려잡는 것만큼 무모한 선택지도 없으니까.”
무기 제작 부스의 존재 목적을 설명하던 성호가 몬스터의 사체를 그대로 재현한 실습 모형 앞에 멈춰 섰다.
“이런 건 처음 보지?”
“네. 진짜 리얼하게 만들었네요.”
“분리와 조립이 가능하도록 만든 무기 제작용 교보재인데, 보시다시피 이 안엔 이런 가짜 몬스터의 사체가 곳곳에 놓여 있어.”
주위를 돌아보던 성호가 모형 앞으로 바짝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물론 몬스터가 쓰던 무기를 줍는 것도 한 방법이고, 재료를 모으고 무기를 만들 시간에 차라리 한 발짝이라도 더 멀리 도망가는 게 나을 때도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우린 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둬야 하거든. 뭐, 너처럼 인벤토리 능력이 있는 경우엔 크게 와닿지 않겠지만.”
성호의 말대로 가방이나 짐꾼의 도움 없이 여러 개의 활을 보관할 수 있는, 더구나 화살을 자유자재로 생성할 수 있는 태주의 입장에선 크게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다.
“자, 이건 던전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미 몬스터야. 성인 남성의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무시무시한 강도의 이빨 끝엔 독이 묻어 있고, 엉덩이 쪽에 있는 방적돌기에선 순간접착제보다 끈끈하고 빨랫줄보다 굵은 다량의 거미줄을 구할 수 있는데, 이 두 개를 손잡이로 사용할 수 있는 나무나 뼈 등에 접합시키면 맹독 공격이 가능한 단검을 제작할 수 있어. 가늘고 긴 가지로 손잡이를 대체하면 창으로도 활용할 수 있고.”
2학년 때 이미 해당 수업을 수강했던 성호가 마치 교수님으로 빙의해 강의를 하듯 무기의 재료가 될 수 있는 부위를 검지로 일일이 짚어가며 친절하게 설명했다.
경험의 차이.
사실 태주의 신고식 영상을 계기로 실력적인 우위를 점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성호는 2년이라는 경험의 차이를 통해 선배로서의 체면을 살릴 작정이었다.
“이번엔 네가 한번 해볼래?”
자리에서 일어난 성호가 태주의 서툴고 어설픈 측면을 부각시킬 요량으로 2학년 때부터 배우는 서바이벌 수업의 미션을 넌지시 권했다.
“네? 제가요?”
“어. 이 안에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간단한 무기를 만들어 봐.”
태주의 얼떨떨한 반응에 더욱 자신감을 얻은 성호가 우월감이 느껴지는 얼굴로 도전을 부추겼다.
“아직은 아티팩트 제작에 사용되는 재료의 종류나 성질에 대해 따로 배운 적이 없는 상태니까 무기의 형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답답해하진 말고.”
첫 수업 당시의 우왕좌왕했던 모습을 떠올린 성호가 미숙한 결과물을 확신하며 성급한 위로를 건넸다.
물론 웨더 트레이닝 센터에서의 신고식과 마찬가지로 새로울 것이 없는 도전을 받게 된 태주에겐 경험으로 밀어붙이려는 성호의 전략이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지만.
“으음. 혹시 시간제한이 있나요?”
“글쎄. 현시점에서 과연 시간을 재는 게 의미가 있을까? 뭐, 시험 땐 보통 재료 수집에서 제작까지 10분 이내로 끊으면 완성도에 따라 A+까지 받을 수 있었지만.”
태주의 질문을 무의미하게 여긴 성호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구체적인 평가 기준을 밝혔다.
“아, 네. 그럼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해보겠습니다.”
“그래. 대신 다른 부스들도 테스트해야 되니까 20분이 넘으면 바로 중단할게. 난 그동안 업그레이드된 부분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까.”
태주의 도전을 유도하는 데 성공한 성호가 휴대폰의 타이머를 맞추며 말했다.
“자, 그럼 지금부터 각자의 미션을 수행해 볼까?”
“네.”
“좋아. 그럼 20분 뒤에 보자.”
타임 오버를 맞이하거나 조악한 무기를 들이밀 것이 뻔하다고 판단한 성호가 태주의 실수를 지적할 생각에 뿌듯해하며 타이머의 시작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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