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위계질서 (3)
문의 크기에 비해 명예의 전당이라 불리는 공간의 규모는 기대 이상으로 넓었다.
특히 학사모를 쓰고 가운을 입은 역대 회장들의 졸업 사진은 실제 사이즈에 가깝게 현상되어 눈높이에 맞게 걸려 있었는데, 액자 옆엔 해당 인물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 붙어 있었다.
‘20대 초반에 찍은 사진이라 그런지 확실히 어려 보이……, 어?!’
시계 방향으로 방을 구경하기 시작한 태주의 발걸음이 첫 번째 사진 앞에서 멈춰 섰다.
[제1대 회장 천 인 국]
‘뭐야, 이분이 1대 회장님이었어?’
흔치 않은 이름과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얼굴.
태주를 흠칫하게 한 인물의 정체는 대한헌터협회의 부회장이자 송기철 협회장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업계의 숨은 실세 중 한 명이었다.
‘정말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구나.’
주로 협회장과의 만남만 이루어지다 보니 회귀 전후를 통틀어 천인국 부회장과는 따로 대면할 기회가 없었다.
‘미리 귀띔이라도 좀 해주지.’
심지어 아레나의 이동규나 태동의 오승훈처럼 태주와 안면이 있는 피크닉 출신들마저 다른 회원들의 존재에 대해선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는데, 이러한 비밀스러움은 어디까지 업계를 장악하고 있는지 쉽게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역시 피크닉 테이블에 가입이 안 돼서 그런가?’
프로의 자격이 있어야 등록이 가능한 회원 전용 커뮤니티 사이트인 피크닉 테이블에선 모든 회원의 명부와 프로필 등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태주의 경우 재학생 신분인 탓에 로그인조차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준프로는 안 받아주겠지? 아니야. 혹시 모르니까 나중에 문의라도 해 봐야겠다.’
푸드 체인 테스트를 앞둔 태주가 다음을 기약하던 바로 그때.
“우리 동아리를 처음 만드신 분이야.”
태주의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온 현우가 미술관의 도슨트처럼 사진 속 인물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현재는 대한헌터협회의 부회장님이신데, 듣기론 퍼스트 에이드를 비롯한 피크닉의 거의 모든 시스템을 구축하셨대.”
“아아, 네.”
천인국 부회장에 대해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태주가 현우의 입에서 나온 흥미로운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이분은 어디서 뵌 것 같지 않아?”
두 번째 사진 앞으로 자리를 옮긴 현우가 2대 회장의 졸업 사진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분을요?”
[제2대 회장 노 형 래]
얼굴과 이름을 번갈아 보던 태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1대 회장 못지않은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을 것이란 생각은 들었지만, 현우의 힌트를 듣고 난 이후에도 딱히 떠오르는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따로 뵌 기억이 없어서.”
“그래? 그럼 이 사진은?”
태주의 대답을 들은 현우가 자신의 휴대폰을 2대 회장의 졸업 사진 옆에 비교하듯이 갖다 댔다.
“……?!”
졸업 사진과 화면 속 사진이 나란히 놓이는 순간, 정답을 깨달은 태주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닮았다.’
현우와 같은 27기 선배인 노영상의 이목구비가 사진 속 대선배와 상당히 흡사했기 때문이다.
“설마 영상 선배의 아버님이세요?”
“어, 맞아. 신기하지?”
물론 태주보단 도제식 트레이닝의 사제지간인 서윤이 더 놀랄 만한 인연이었지만.
“네?! 영상 선배 아버님이 2대 회장님이시라고요?”
두 번은 양보할 수 없다는 생각에 태주의 뒤에 바짝 붙어 명예의 전당으로 들어선 서윤이 뜻밖의 부자 관계에 두 귀를 의심했다.
“어. 나도 작년 이맘때쯤에 영상이한테 들어서 처음 알았어. 바로 이 자리에서.”
현우가 자신이 서있는 바닥을 검지로 콕콕 찌르듯이 가리키며 말했다.
“와아, 대박. 그럼 한 집에서 한 명도 나오기 힘든 피크닉의 회원 자격을 2대에 걸쳐 얻은 거네요?”
한국대 헌터학과에서 피크닉으로 이어지는 일명 HP 라인은 각성자가 밟을 수 있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였기에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서윤이 이토록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물론 대를 이어 회장이 되는 건 좀 어렵겠지만.”
태주와 같은 수석 합격자이자 27기 유일의 S급 각성자인 현우가 가장 유력한 회장 후보인 자신을 우회적으로 어필하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방에 허창민의 사진이 걸려 있었겠지?’
현우의 개인적인 바람을 들어주고 있던 태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창민을 향했다.
전통에 따른 입장 순서만 봐도 알 수 있듯 지금으로선 태주의 회장 역임이 기정사실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사실 회귀 전까지만 해도 그 자리가 허창민의 차지였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원주인에게 양보하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참고로 영상이 아버님은 국내 최대 규모의 아티팩트 제작 업체인 마스터 앤 피스(Master & Peace)의 대표님이셔. 너희들도 이름은 다 들어 봤지?”
걸작을 뜻하는 마스터피스(Masterpiece)에 평화를 뜻하는 피스(Peace)가 합쳐진 이 대표적인 중견 기업은 시장 점유율에서부터 이미 적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어? 나 얼마 전에 거기서 단검 하나 샀는데.”
무심코 쇼핑을 했던 대엽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단순한 구매 이력만으로는 마스터 앤 피스와의 친밀감을 자랑할 수 없었지만.
‘마스터 앤 피스의 대표님이 영상 선배의 아버지였다니.’
사실 태주에게 레이드 보우 다섯 장(張)을 협찬한 국내 업체가 바로 마스터 앤 피스였다.
‘그나저나 입이 너무 무거운 거 아니야?’
길드가 아닌 탓에 영입의 의지를 드러낼 순 없어도 회사 차원에서의 광고 효과 등을 노려 태주와의 남다른 친분을 강조할 법도 했지만, 노 대표는 그 어떤 공감대도 태주에게 어필하지 않았다.
물론 HP 라인으로 들어온 태주에게 내색을 하지 않은 건 아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어? 그럼 혹시 영상 선배를 통하면 좀 더 싸게 살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직원 할인가를 적용한다든지 아님 추가 할인을 해주는 방식으로요.”
태주나 서윤과는 살짝 결이 다른 놀라움을 느낀 건우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뭐, 가능하긴 한데, 아무리 친해도 자주 부탁하면 좀 눈치가 보이겠지? 영상이가 무슨 구매 대행도 아니고.”
이미 동기 찬스를 사용한 적이 있는 현우가 수많은 지인들에게 같은 질문을 받고 있을 영상의 말 못 할 고충을 헤아리며 양심적인 의뢰를 당부했다.
바로 그때.
지이잉!
영상의 사진을 보여 주느라 쥐고 있던 휴대폰의 요란한 진동을 느낀 현우가 얼른 발신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어? 성호 선배네?”
‘성호 선배?’
순간, 웨더 트레이닝 센터에서의 신고식 당시 근석으로부터 들은 임성호의 특징들이 태주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3학년이자 근석과는 도제식 트레이닝의 사제지간인 A급 궁수 임성호는 선한 인상과 달리 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한번 아니면 끝까지 아닌 성격 탓에 자칫 미운털이 박히거나 눈 밖에 나는 순간 학교생활이 피곤해진다는 평이 있었다.
물론 소문에 밝은 태주마저 동기들과 2학년 후배들을 가디언 하우스로 불러낸 임성호가 태주의 신고식 영상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잘나가는 신입생이 선배들을 우습게 여기지 못하도록 최대한 칭찬을 자제하라 입단속을 시킨 사실까진 모르고 있었지만.
“네, 선배님.”
후배들의 귀를 의식한 현우가 전화를 받자마자 2대 회장의 졸업 사진 앞을 벗어나 명예의 전당을 나섰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현우의 뒷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태주가 무의미한 호기심을 뒤로한 채 세 번째 사진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부턴 한눈에 알아보겠네.’
졸업생들의 사진만 걸린 관계로 아는 얼굴이 거의 없을 것이란 현우의 예상과 달리 태주의 시야에 반가운 얼굴들이 들어왔다.
[제3대 회장 박 윤 기]
[제4대 회장 이 동 규]
[제5대 회장 오 승 훈]
5대 길드 중 무려 3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SP, 아레나, 태동의 수장들이 4년의 대학 생활 중 절반에 해당하는 2년이란 시간 동안 함께 캠퍼스를 거닐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놀라울 따름이었다.
‘으음. 6대 회장님은 또 잘 모르겠네.’
방 안에 걸린 24개의 졸업 사진 중 4분의 1 지점을 지난 태주가 현우의 부연 설명 없이 옆으로 이동하던 바로 그때.
“……?!”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마주하게 된 파렴치한 이름 석 자.
[제7대 회장 백 승 걸]
낯선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편안함마저 느꼈던 태주가 부끄러운 선배의 등장에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회장 출신이었어?’
하재룡 납치 사건의 배후이자 퍼스트 에이드로 면죄부를 받은 백승걸이 PH 라인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동아리 회장을 역임할 만큼 전도유망했던 인물이란 건 꿈에도 생각지 못한 태주였다.
‘한 번 벽에 걸린 사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떼지 않나 보네.’
백승걸의 생김새를 처음으로 확인한 태주가 아름다운 액자 속에서 따스한 간접 조명과 함께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대선배의 가식적인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20년도 더 된 사진이라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질 나이로 들어선, 다시 말해, 그동안의 삶과 인품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을 현재의 인상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혹시 모르니까 이따가 젊었을 때 사진이라도 찍어가야겠다.’
피크닉 테이블을 이용할 수 없는 태주는 방 안이 비는 시점을 노려 백승걸을 비롯한 낯선 선배들의 졸업 사진들을 신분 확인의 용도로 저장해 둘 작정이었다.
바로 그때.
“야, 28기.”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현우가 갑자기 사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후배들을 방에서 내보내려 했다.
“이제 나가서 청소해야지.”
“네.”
방 구경을 핑계로 잠시 쉬어가고 있던 아이들이 현우의 달갑지 않은 재촉에 늘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그리고 태주야, 너는 잠깐만 남아 있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던 후배들을 각자의 자리로 돌려보내고 있던 현우가 동기들의 틈에 섞여 있던 태주를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어? 설마 방에서 제일 늦게 나가는 것도 전통이에요?”
입장 순서에 대한 앙금이 여전히 남아 있던 서윤이 태주를 향한 현우의 예외적인 부름에 발끈하며 물었다.
“아니요. 그냥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후배님.”
현우가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서윤을 명예의 전당 밖으로 정중하게 밀어낸 뒤 문을 닫아 버렸다.
띠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