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매니지먼트 (3)
“올리비아 현 씨가 어느 분이시죠?”
커다란 박스를 든 배달원이 테이블 주위에 모여 있던 세 사람을 둘러보며 물었다.
“네. 저예요.”
샴페인 잔을 내려놓은 승화가 기다렸다는 듯이 배달을 온 남성을 향해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물건은 어디에 둘까요?”
“일단 저쪽에 놔주세요.”
물건이 놓일 위치를 미리 봐 두었던 승화가 아무것도 없는 빈 벽을 검지로 가리켰다.
‘뭐지?’
태주가 승화의 들뜬 뒷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수고하셨습니다.”
배달원을 보낸 승화가 이번엔 캐비닛을 향해 분주한 발걸음을 옮겼다.
“뭐가 왔는데 그렇게 바빠?”
이 교수가 박스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다트 판.”
캐비닛 속에 있던 작은 공구함을 들고 나타난 승화가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답했다.
“다트 판? 사무실에서 게임이나 하게?”
자신의 두 귀를 의심한 이 교수가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 그냥 다트 판은 아니고, 내가 특별히 주문한 실적 확인용 다트 판이야.”
허리를 굽힌 승화가 커터 칼을 이용해 박스를 오픈하며 말했다.
“실적 확인용 다트 판?”
“어. 짜잔!”
박스 안에 든 물건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꺼낸 승화가 품에 안은 지름 약 50cm의 원형 다트 보드를 태주와 이 교수에게 번갈아 보여주었다.
“어때? 예쁘지?”
“어? 근데 다트 판에 글씨가 적혀 있네?”
눈치 빠른 이 교수가 특수 제작된 다트 보드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맞아. 1부터 20까지의 숫자가 특유의 순서로 배열된 건 똑같은데, 대신 싱글에 해당하는 두 개의 면에 각각 콘택트(Contact)와 서포트(Support)란 단어를 추가했어.”
다트 보드의 경우 5, 20, 1, 18, 4와 같이 큰 숫자의 양옆에 작은 숫자를 배치해 리스크를 주는 독특한 구조였다.
특히, 각 숫자는 피자 조각처럼 생긴 영역을 가지고 있었으며, 피자의 크러스트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부터 중심부로 각각 더블(×2), 싱글(×1), 트리플(×3), 싱글(×1)의 순서로 점수를 획득할 수 있었는데, 승화는 비교적 넓은 면에 해당하는 두 개의 싱글 부분에 실적을 확인할 수 있는 문구를 하나씩 새겨 넣은 상태였다.
“예를 들어, 제일 처음 연락이 온 해외 길드에겐 숫자 1을 배정하고, 두 번째로 연락이 온 길드에겐 숫자 2를 배정하는 형태인데, 단순히 교섭 중일 땐 트리플 부분의 바깥쪽 싱글인 콘택트 부분에 다트를 꽂아 두고, 금전적인 지원까지 약속했을 때만 안쪽 싱글인 서포트 부분에 다트를 꽂아 두는 거지.”
“그러다 찔러만 보고 지원을 안 하면?”
“만약 첫 번째 길드와의 교섭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는데, 두 번째 길드에서 서포트를 약속하면, 1번에 있던 다트를 뺀 다음 2번에 있던 다트를 1번의 서포트 자리로 옮길 거야.”
“근데 다트의 위치를 바꾸면 너무 헷갈리지 않을까? 다트 판에 따로 이름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니고.”
승화의 설명을 듣고 있던 이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일은 절대 없어.”
이 교수에게 다트 보드를 맡긴 승화가 다시금 허리를 굽혀 박스 안을 뒤적였다.
“이 다트 핀의 끝에 달린 화살 깃에 길드의 이름을 쓸 거거든.”
굽혔던 허리를 편 승화의 오른손엔 무려 40개의 다트 핀이 든 투명한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스무 곳의 해외 길드라……. 다 감당할 수 있겠어?”
이 교수가 다트 보드에 들어갈 수 있는 다트 핀의 최대치를 가늠하며 물었다.
“당연하지. 심지어 예비 등록으로 컨택이 폭발하기 전에 몇 개 더 주문할 생각이었는데?”
이미 20곳이 넘는 국내 길드가 용돈을 제공하고 있는 만큼 빅 사이닝을 통해 해외 활동의 의지를 엿보이는 순간, 국경을 초월한 잠재적 파트너들로부터 폭발적인 관심을 받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이야, 이번 기회로 아주 팔자를 고칠 생각인가 보네. 역시 교수실까지 찾아온 이유가 있었어.”
태주에게 명함을 전해 달라 부탁했던 적극적인 모습을 떠올린 이 교수가 승화의 원대한 목표에 혀를 내둘렀다.
“그나저나 이건 여기에 걸면 돼?”
이 교수가 빈 벽에 다트 보드를 대보며 물었다.
“어. 딱 봐도 거기밖에 없지?”
“근데 임대로 얻은 사무실 벽에 못질을 해도 되나?”
“거긴 어차피 회의실을 만들 때 세운 가벽이야. 소재도 철근 콘크리트가 아니고.”
“아, 그래? 그럼 가서 망치랑 못이나 가져와. 내가 금방 설치해 줄 테니까.”
다트 보드의 높이를 고민하고 있던 이 교수가 공구함이 있는 곳을 힐끗 쳐다보며 선심을 쓰듯 지시했다.
“못을 왜 써.”
“못을 왜 쓰냐고? 그럼 뭐로 걸 건데?”
다트 보드를 벽에서 뗀 이 교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화살.”
“뭐? 화살?”
“어. 화살. 태주 씨, 해줄 수 있죠?”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 승화의 시선이 제삼자처럼 떨어져 있던 태주를 향했다.
“어쩐지. 못이 들어가는 부분이 좀 넓다 했다.”
이 교수가 다트 보드의 윗부분에 달린 커다란 걸이용 구멍에 검지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네. 그러죠 뭐.”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오승훈 대표로부터 받은 활 대신 함께 자리한 이종도 교수에게 받은 활을 꺼낸 태주가 화살을 고른 뒤 목표물을 응시했다.
▶ 체이싱 애로우[C]를 선택하셨습니다.
“근데 이거 내가 계속 잡고 있어야 되는 거야?”
목표물과의 거리도 약 3미터로 가깝고, 걸이용 구멍의 지름도 화살촉이 충분히 통과할 수 있게 넉넉한 사이즈로 주문하긴 했지만, 가벽에 붙인 다트 보드를 어정쩡한 자세로 잡고 있는 이 교수의 입장에선 왠지 모르게 마른침이 삼켜졌다.
“뭐야, 지금 태주 씨의 정확도를 의심하는 거야?”
“의심하긴 누가 의심을 했다고 그래. 태주의 실력을 제일 먼저 알아본 게 난데. 저 활도 그래서 선물한 거야.”
승화의 농담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반박한 이 교수가 태주가 소환한 활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때아닌 생색을 냈다.
“태주야, 그냥 평소대로 편하게 쏴. 가벽이 무너지지 않게 힘 조절만 잘하고.”
“네, 교수님.”
대답과 동시에 활시위를 당긴 태주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화살을 발사했다.
쉬이익! 딱!
태주의 손끝을 떠난 체이싱 애로우가 걸이용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명중했다.
“우와!”
다소 무리한 부탁을 했던 승화가 모두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태주의 깔끔한 활 솜씨에 환호성을 질렀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구멍에만 쏙 들어갔지?”
태주가 활을 쏘는 모습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인 승화가 다트 보드를 고정시킨 화살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태주 씨, 푸드 체인이든 뭐든 걱정할 게 없겠는데요?”
“네? 아니요, 뭐, 이 정도는 누구나 하는 거라.”
▶ 착용한 장비를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활을 거둔 태주가 승화의 극찬에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전 지금껏 종도, 아니, 이 교수님이 가장 활을 잘 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청출어람이 따로 없네요.”
“야, 이 타이밍에 내 얘기가 왜 나와.”
졸지에 비교를 당한 이 교수의 표정에선 황당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니요. 다 훌륭한 교수님 밑에서 배운 덕분입니다.”
활쏘기만큼이나 사회생활에도 능한 태주가 겸손한 대답과 함께 이 교수를 높였다.
“역시 실력이면 실력, 인성이면 인성. 뭐 하나 버릴 게 없으시네요.”
“과찬이십니다.”
“에이, 겸손하시긴. 자, 그럼 우리 기분도 좋은데 한 잔씩 더 할까요? 어차피 내일 두 분 다 수업도 없는데.”
뒷정리를 미룬 채 테이블로 뛰어간 승화가 한껏 흥이 오른 목소리로 빈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 참, 그건 그렇고, 토요일엔 무슨 선약이 있길래 안 된다고 한 거예요? 혹시 미팅이나 소개팅?”
“으음. 뭐, 비슷한 거예요.”
조 중장과의 대면을 앞둔 태주가 승화의 질문에 말을 아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틀 뒤, 토요일.
입학 후 맞이한 첫 번째 중간고사는 끝이 났지만, 태주에겐 아직 시험보다 까다로운 절차가 남아 있었다.
“아직 멀었나요?”
조 중장이 보낸 차량의 뒷좌석에 앉은 태주가 기사에게 물었다.
왕복 2시간 거리라 했던 말이 떠올라 차에 탄 직후부터 한 번씩 시간을 체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 중장이 이동 시간을 언급할 당시엔 태주의 정확한 집 주소를 모르는 상태였지만.
“아니요. 이제 곧 도착합니다.”
대각선에 위치한 운전기사가 룸 미러를 통해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나저나 내비게이션도 안 찍고 가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성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심지어 코로만 숨을 쉬는 듯 태주가 질문을 하기 전까진 입을 떼는 법이 없었다.
‘마력이 없는 걸로 봐서 각성자는 아닌데……. 설마 군인인가?’
삼강의 하도철 대표가 3차 각성에 성공한 S급 전사인 염경섭을 재룡의 기사 겸 보디가드로 채용했듯 조 중장 역시 운전면허만으로 사람을 고용했을 리 없다고 판단한 태주였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기사님께서 수고해 주시는 건가요?”
“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럴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댁에서 타지 않으시거나 일정이 바뀌었을 땐 아까 받으신 제 업무용 번호로 연락을 주시면 됩니다.”
“아, 네. 그럼 호칭은 뭐라고 불러야 될까요? 번호를 저장하려면 이름이 있어야 돼서.”
통화 목록을 연 태주가 기사의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들어가 연락처 추가를 누르며 물었다.
“그냥 김 기사라고 저장해 주시면 됩니다.”
“아, 김 기사님이요. 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뒤늦은 통성명이 끝나자 다시금 어색한 정적이 찾아왔다.
그로부터 몇 분 후.
“저기인가요?”
허리를 살짝 굽힌 태주가 전방에 보이는 2층짜리 저택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맞습니다.”
“어? 근데 그냥 들어갈 수 있네요?”
별장도 별장 나름이라는 말과 함께 택시가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라 했던 조 중장의 설명과 달리 별장에 오는 내내 신분 확인을 비롯한 그 어떤 검문 절차도 거치지 않은 태주였다.
“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왜 날 속였지?’
당사자에게 직접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로 한 태주가 차창 밖으로 펼쳐진 탁 트인 정경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배산임수의 형태를 갖춘 한적한 곳인 건 맞네.’
“도착했습니다.”
차를 세운 김 기사가 태주를 돌아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좀 이따 봬요.”
어색하긴 해도 어쩔 수 없이 귀가를 함께해야 하는 사이였다.
“하아. 공기 하나는 끝내주네.”
차에서 내린 태주가 신선한 바람을 한껏 들이키며 별장으로 향하던 바로 그때.
탕!
어디선가 산등성이를 울리는 커다란 총성이 들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