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206화 (206/242)

206. 매니지먼트 (2)

‘뭔데 그러지?’

태주의 시선이 승화의 오른손에 들린 A4 용지로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딸랑 종이 한 장이라 실망한 건 아니죠?”

태주에게 다가온 승화가 가벼운 농담과 함께 종이를 건넸다.

“이게 뭐죠?”

종이를 받아든 태주가 영어로만 작성된 문서를 빠르게 훑어보며 물었다.

“국제헌터협회에서 발급한 푸드 체인 테스트의 지원 확인서예요.”

“어? 푸드 체인 테스트면.”

“맞아요. 준프로의 자격을 얻기 위한 첫걸음이자 해외 길드의 컨택을 위한 초석이죠.”

승화는 매니지먼트 계약서를 작성할 당시에 기재된 태주의 개인 정보를 토대로 대리 접수를 마친 상태였다.

“테스트 날짜는 5월 마지막 주 토요일이에요. 장소는 전에 말씀드린 대로 싱가포르고요.”

국제헌터협회의 본부는 스위스에 있었지만, 푸드 체인 테스트는 지원자의 국적이 속한 대륙별 지부에서 이루어졌다.

“테스트가 주말이라니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학기 중이라 신경이 좀 쓰였는데.”

“어차피 11월에 있는 시험도 학기 중에 치러지는 거라 큰 차이는 없어요. 물론 연기도 가능하니까 준비 기간이 필요하면 지금이라도…….”

“아니요.”

6개월의 기다림을 원치 않았던 태주가 짧고 단호한 대답으로 승화의 말문을 막았다.

“연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역시 태주 씨는 제가 듣고 싶은 대답만 해주시네요.”

태주의 의사를 확인한 승화가 샴페인 잔을 건네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싶은 대답? 하긴, 태주가 테스트를 미루면 출혈이 크긴 하지.”

승화의 속마음을 눈치챈 이 교수가 묘한 미소와 함께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5월 테스트를 예상하고 개업을 했을 텐데, 이대로 6개월이 미뤄지면, 아무런 진전도 없이 임대료에 직원 월급만 나갈 거 아니야. 안 그래?”

“하아. 저기요. 눈치 없는 이 교수님, 성공과 번창을 기원해야 할 개업식 자리에서 굳이 그런 쓸데없는 소리로 분위기를 잡칠 필요가 있을까요?”

이 교수의 농담에 깊은 한숨을 내쉰 승화가 한쪽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말조심을 하라 경고했다.

“알았어, 알았어. 이제부터 요 입은 술 마실 때만 벌릴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이 교수가 샴페인을 들이키며 예민해진 승화를 진정시켰다.

“아니. 아직 확답을 받을 게 있으니까 완전히 닫지는 마.”

“확답? 무슨 확답?”

입술에서 잔을 뗀 이 교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시차는 1시간이지만, 적어도 금요일 오전엔 출국을 해야 컨디션을 조절할 수 있거든. 가능하다면 목요일 오후에 떠나는 게 더 좋고.”

“아아, 이래서 태주랑 같이 불렀구나?”

태주의 유일한 금요일 수업인 던전 실습을 맡고 있는 이 교수가 승화의 속마음을 또 한 번 눈치챘다.

“한마디로 태주의 수업을 하루만 빼달라는 거지? 출석이 인정되는 예외적인 결석 사유를 적용해서.”

“어머, 눈치 빠른 이 교수님, 어떻게 아셨어요?”

긴말이 필요 없는 이 교수의 속 시원한 정리에 손뼉을 치며 호응하는 승화였다.

“뭐지 그 어색한 존댓말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눈치 없다고 하지 않았어?”

“에이, 이해심 많은 이 교수님께서 오늘따라 왜 그러실까? 설마 태주 씨 일인데, 눈치 없……, 아니, 이제 와서 모른 척하려는 건 아니지?”

학기 중에 한두 번 결석한 것만으로 학점이 급락하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사유도 아닌 국제헌터협회에서 주관하는 테스트에 응시할 목적으로 수업에 불참하는 만큼 이왕이면, 학과의 승인을 받아 여유롭게 일정을 소화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글쎄. 너 하는 거 봐서.”

수강생의 출결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이 교수가 거들먹거리는 말투로 승화의 굽실거림을 즐겼다.

“나? 나야 당장 무릎도 꿇을 수 있지.”

“야, 야, 알았어, 알았어.”

당황한 이 교수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려는 승화의 팔뚝을 잡아 얼른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설마하니 내가 태주 일을 모른 척하겠어? 막말로 모든 교수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4학년 수업을 듣게 한 게 난데?”

“알아, 알아. 나도 그냥 액션만 취한 거야.”

태주의 편의를 봐주리라 확신하고 있던 승화가 이 교수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토닥이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하여간 종잡을 수가 없어. 헌터 일도 그렇게 하루아침에 그만두더니.”

같은 길드에 속해 있던 승화의 갑작스러운 은퇴를 떠올린 이 교수가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교수님, 저도 한 가지 여쭤볼 게 있는데요.”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 주고 있던 승화의 센스 있는 부탁을 가만히 듣고 있던 태주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어, 그래. 뭔데?”

승화가 궁금증을 유발했을 때와는 달리 의욕적인 눈빛으로 태주의 질문에 귀를 기울이는 이 교수였다.

“다름이 아니라 푸드 체인 테스트의 날짜는 5월 마지막 주 토요일인데, 그러다 5월 중순부터 6월 중순 사이에 있을 던전 실습의 평가일과 겹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

강의 시간에 고지된 대로 중간·기말의 구분 없이 단 한 번의 레이드로 성적이 평가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커리큘럼의 자율권이 걸린 태주로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구제의 가능성을 남겨둘 필요성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변수는 담당 교수이자 태주의 성장을 누구보다 바라고 있는 이 교수 역시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였지만.

“으음. 안 그래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야.”

테스트 날짜를 들었을 때부터 이미 희박한 확률이지만 간과할 수만은 없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던 이 교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물론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는 시점이 게이트 생성 후 최소 72시간 이후라 웬만하면 네가 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진입 시점을 조절해 보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10퍼센트 이상의 결시자가 발생하지 않는 한 한국대에 배정된 게이트를 다른 학교에 양보하긴 어려울 거야. 다음 게이트가 또 언제 열릴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고.”

평가 방식을 설명할 당시, 재시험 여부는 교수의 재량이지 학생들이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며, 테스트 불참으로 F가 뜨는 건 매정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 못을 박아두었던 이 교수라 태주에게만 예외를 적용하는 것에 더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 태주 씨가 목요일 오후에 출발해서 빠르면 일요일 새벽에 입국할 건데, 설마 어떤 눈치 없는 게이트가 딱 목요일 오후에 열려서 일요일 새벽에 닫히겠어. 안 그래?”

금요일로 예정된 수업을 빠지는 것과 달리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끌어다 미리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승화가 태주와 이 교수의 우려를 기우라 여기며 말했다.

“아 참, 그리고 태주 씨가 따로 찾아봤는지는 모르겠지만, 푸드 체인 테스트의 검증 방식은 증강 현실을 기반으로 한 2시간짜리 모의 던전이에요. 이미 수업 시간에 많이 해보셨죠?”

“네. 근데 제가 알아보기론 공대 형식의 솔플이라고.”

“맞아요. 근데 다른 지원자들과 공대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증강 현실로 구현된 가상의 동료들과 함께 레이드를 하면서 개별적인 평가를 받는 구조예요.”

국제헌터협회는 개개인의 실력을 5개의 레벨로 정확히 분류하기 위해 응시자를 제외한 모든 조건을 동일하게 설정하고 있었다.

“참고로 태주 씨가 받아야 할 성적표는 최상위 레벨이자 포식자라는 의미를 지닌 프레데터 등급이고요.”

“알고 있습니다. 프레데터 등급을 한 번에 획득하지 못했을 때 벌어질 리스크의 파장도 알고 있고요.”

매직 아처의 특별함에 거는 높은 기대감으로 인해 재도전의 기회마저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네. 이렇게 전망 좋은 사무실을 얻은 의미도 무색해지지만, 무엇보다 태주 씨의 이미지 타격을 피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리스크죠.”

두 팔을 벌린 승화가 사무실 전체를 쭉 한번 둘러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냉정한 검증의 자리가 될 거예요. 물론 태주 씨의 활동 영역을 넓히기 위한 좋은 승부처이기도 하고요. 아시죠? 위기가 곧 기회라는 거.”

“네. 적어도 방심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함 교수가 만든 저격용 던전에서도 번번이 살아남은 터라 난이도적인 측면에선 큰 부담감이 없었지만, 회귀 전후를 통틀어 처음 응시하는 테스트인 만큼 결과를 증명하기 전까진 최대한 말을 아끼기로 한 태주였다.

“와아, 그런 신중함이 오히려 더 믿음직스럽게 보이는데요? That’s a good attitude. 아주아주 바람직한 태도예요.”

매니저로서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승화가 경솔함이 느껴지지 않는 태주의 차분한 마음가짐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나저나 한국에서 저만 나가는 건 아니겠죠? 어차피 솔플이라 상관은 없지만, 그냥 궁금해서요.”

회귀 전, 동기들의 참여 소식을 들은 바가 없던 태주가 승화에게 다른 한국 참가자의 존재 여부를 물었다.

자신의 경쟁력을 미리 가늠해 보고 싶은 예비 헌터들을 대상으로 한, 다시 말해, 헌터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들에게만 지원 자격이 부여된 이례적인 제도인 만큼 예비 등록의 의지가 없더라도 참여할 수 있는 길 자체는 언제나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누가 등록을 했는지는 저로서도 알 수 없지만, 아마 거의 없지 않을까요? 특히 신입생들 중에선?”

태주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린 승화가 응시율이 저조한 이유를 덧붙였다.

“아시다시피 준프로를 딴다고 해서 특별한 메리트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뭐, 태주 씨처럼 우회적인 루트를 통해 예비 등록을 노리는 거면 또 모를까.”

“으음. 내가 보기에도 그래.”

한참을 듣고만 있던 이 교수가 승화의 의견에 동조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주 너처럼 프로가 되기 전부터 이미 퀸스맨이나 캘리포니아 불리스 같은 세계적인 길드의 주목을 받고 있지 않는 이상 빅 사이닝에, 그것도 준프로의 신분으로 프로필을 등록해 봤자 소리 소문 없이 묻힐 가능성이 더 크거든. 자존심 상하는 현실이지만, 솔직히 말해, 한국 헌터들에 대한 영미권 길드의 관심이 그렇게 높은 것도 아니고.”

이 교수의 분석대로 승화가 택한 전략은 그 대상이 태주이기에 가능한 맞춤형 전략이었다.

“들었죠? 태주 씨는 그런 부정적인 인식을 뒤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게임 체인저예요. 한국 헌터들이 절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

태주의 독보적인 행보가 비단 개인적인 성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 승화가 이 교수의 아쉬움에 공감하며 오른쪽 검지를 세워 보였다.

바로 그때.

“실례합니다.”

퀵서비스 복장의 한 남성이 사무실 안으로 인기척을 내며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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