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매니지먼트 (1)
“여보세요?”
강의실 문을 나선 태주가 한산한 복도를 두리번거린 뒤 휴대폰을 귀에 밀착시켰다.
[“여보세요? 태주 씨?”]
시험을 앞둔 태주가 자리를 비우게 만든 장본인은 이종도 교수의 친구이자 베테랑 헤드헌터인 라스트 피스의 대표 올리비아 현이었다.
[“그동안 연락이 뜸했었죠? 미안해요.”]
올리비아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승화가 형식적인 안부에 앞서 진심 어린 사과의 말부터 전했다.
“그러게요. 바쁘신 것 같아 따로 연락을 드리진 않았지만, 계약서를 작성하자마자 연락이 뜸해져서 살짝 당황스러웠습니다.”
얼마 전, 라스트 피스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한 태주가 세심한 관리를 약속했던 승화의 방치에 가까운 처신에 불만을 표출했다.
[“정말 미안해요. 사실 잡은 물고기란 심정으로 태주 씨를 대한 건 아닌데,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본격적인 매니지먼트 업무를 위한 세팅을 좀 하다 보니 이래저래 정신이 없었어요.”]
거듭 사과의 뜻을 밝힌 승화가 한동안 연락이 없었던 이유를 솔직하게 해명했다.
“본격적인 세팅이요?”
[“네. 최근에 라스트 피스의 한국 지사를 설립했거든요. 물론 해외 길드를 꼭 한국에서 관리해야 되는 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태주 씨를 가까운 곳에서 서포트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운영 중인 본사는 뉴욕에 있었지만, 태주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심리적인 거리감 못지않게 물리적인 거리감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승화였다.
“어? 그럼 이제 정말 매니저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네. 저와 계약하신 걸 후회하지 않게 결과로 보답하겠습니다. 물론 연락도 자주 드릴 거고요.”]
“네. 그럼 전 매니저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해외 길드와의 교섭을 대리해 줄 든든한 조력자를 얻게 된 태주로선 이번 계약을 계기로 국내 길드와의 교류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아 참, 그리고 오늘이 중간고사 마지막 날 맞죠?”]
“네, 근데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에이, 태주 씨도 참. 제 친구가 누군지 벌써 잊었어요?”]
“아아, 이종도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셨구나.”
[“네. 더구나 내일이 종도, 아니, 이 교수님 수업이라 휴강이란 얘기도 들었거든요.”]
이 교수가 맡은 던전 실습1의 경우 5월 중순부터 6월 중순 사이에 발생한 E급 게이트 중 한 곳에서 중간·기말의 구분 없이 단 한 번의 레이드로 성적이 평가되는 방식이었다.
“네. 대신 5분 뒤가 시험이라 아직 끝났다는 기분은 안 드네요.”
실기와 달리 필기시험의 경우 출제 교수가 아닌 조교들이 나타나 시험을 감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강의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한중연 학과장의 특성상 조교들 역시 한 교수의 지시를 받아 정시에 시험을 진행할 가능성이 높았다.
[“어머, 제가 정작 중요한 건 확인을 못 했네요. 미안해요. 갑자기 전화해서 공부할 시간이나 뺏고.”]
태주의 금요일 스케줄만 체크했던 승화가 눈치 없이 행동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뭐, 공부야 이제 와서 해 봤자 달라질 게 없지만, 매니지먼트 과정에서까지 놓치는 부분이 생기면 좀 곤란할 것 같네요.”
한국 지사의 설립 등 본격적인 매니지먼트 업무를 위해 정신이 없었다는 것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실수가 곧 신뢰와 직결될 수 있는 분야인 만큼 상대의 경력을 떠나 경각심을 심어줄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태주였다.
[“그럼요. 당연히 실수가 없어야죠.”]
태주의 지적에 정신이 번쩍 든 승화가 결연한 목소리로 앞으로의 각오를 다졌다.
[“그나저나 이거 시작부터 체면이 말이 아니네요. 그래도 나름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태주 씨에게 깎인 점수를 만회하려면 정말 두 배로 열심히 해야겠는데요?”]
“네. 대신 열심히 해주시는 만큼 저도 의심 없이 믿고 따르겠습니다.”
[“고마워요. 너그러이 이해해 줘서.”]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지금 시험지를 들고 오는 조교랑 눈이 마주쳐서요.”
발자국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린 태주가 승화와의 통화를 적당히 마무리 지으려 했다.
[“네. 그럼 시간이랑 약도는 톡으로 보내둘 테니까 얼른 들어가서 준비하세요.”]
“네? 시간이랑 약도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강의실 문으로 향하던 태주가 승화의 알 수 없는 대답에 발걸음을 멈췄다다.
[“그래도 명색이 한국 지사인데, 조촐하게나마 개업식은 해야 되지 않겠어요?”]
“개업식이요? 정확히 언제인데요?”
[“일단 이 교수님과는 토요일 점심때 보기로……, 어? 설마 이번 주 토요일에 선약이 있는 건 아니죠?”]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 승화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아아, 이거 어쩌죠? 안 그래도 12시부터 선약이 있는데.”
조 중장과의 약속은 오후 1시였지만, 이동 시간까지 고려해 봤을 땐, 적어도 점심 무렵인 12시부터 만남을 준비해야 했다.
[“어? 정말요? 하아. 오늘 진짜 왜 이러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기 무섭게 개업식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태주의 스케줄과 또 한 번 엇갈린 승화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럼 언제가 괜찮아요?”]
불가피하게 일정을 조절하게 된 승화가 더 이상의 차질을 막기 위해 태주의 의사를 물었다.
“이번 주는 토요일만 빼고 다 괜찮아요. 뭐, 오늘도 별다른 약속은 없고요.”
- “안 들어올 거예요?”
강의실 문 앞에 다다른 조교가 통화 중인 태주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 금방 들어가겠습니다.”
- “정시에 바로 시작합니다.”
시간을 확인한 조교가 태주의 예상대로 칼 같은 시작을 예고한 뒤 강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럼 오늘 저녁에 보는 건 어때요? 한 9시쯤.”]
휴대폰 너머로 조교와의 대화를 들은 승화가 당사자인 태주보다 더욱 조급해진 목소리로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네. 그럼 그때 뵙는 걸로 하시죠.”
[“그래요.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해 놓을 테니까 차분하게 시험 잘 보세요. 저처럼 실수하지 마시고요.”]
평소보다 두 배로 말이 빨라진 승화가 잠시 후에 있을 태주와의 만남을 기약하며 짧은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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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안녕하세요.”
늦지 않게 사무실에 도착한 태주가 문을 열고 들어서며 인사를 가장한 인기척을 했다.
“어, 태주 씨, 왔어요?”
문을 등진 채 통창 너머로 보이는 야경을 감상하고 있던 승화가 태주의 목소리에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네. 교수님도 일찍 오셨네요?”
가벼운 눈인사를 주고받은 태주가 승화의 곁에 있던 이종도 교수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승화가 일찍 와서 상 차리는 것 좀 도와 달라 그랬거든. 거기 있는 그 돼지머리 케이크도 내가 대신 찾아온 거야.”
이 교수가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공치사를 늘어놓았다.
“확실히 진짜 돼지머리보단 덜 살벌하네요. 웃는 모습도 더 귀엽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간 태주가 코가 부각된 핑크색 돼지머리 케이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근데 다른 분들은 안 계세요?”
태주가 썰렁한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물었다.
“직원 두 명을 뽑긴 했는데, 9시까지 붙잡아두는 게 더 곤욕일 것 같아서 그냥 퇴근들 하라고 그랬어요. 태주 씨가 주인공인데 제 지인들만 우르르 부르는 것도 좀 아닌 거 같고.”
“아, 네. 근데 전망이 되게 좋네요. 사무실에서 한강도 보이고.”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긴 태주가 두 사람이 보고 있던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네. 대신 그 전망이 보증금과 임대료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어요.”
라스트 피스의 한국 지사를 강남에 위치한 초고층 빌딩에 입주시킨 승화가 태주의 감상에 찬물을 끼얹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어? 그럼 왜 굳이 이런 곳으로…….”
“일종의 투자예요. 뭐, 늘 그런 건 아니지만, 가끔 명함 앞에 찍힌 주소만 보고 회사의 수준을 판단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제가 뉴욕에 본사를 차린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고요. 일종의 이미지 메이킹.”
“으음.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겉으로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태주 역시 승화와의 첫 통화 당시 라스트 피스의 본사가 뉴욕에 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신뢰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자, 그럼 다 모였으니 이제 본격적인 개업식을 시작해 볼까요?”
현실적인 고민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 승화가 샴페인 한 병을 집어 들어 아래위로 흔들기 시작했다.
“야, 그거 그러다 맞는 거 아니야?”
코르크 마개의 방향이 불안했던 이 교수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상체를 내뺐다.
“그래도 각성자인데 설마 죽기야 하겠어? 왜. 불안하면 실드라도 쳐줘?”
헤드헌터이기 이전에 A급 법사인 승화가 이 교수의 엄살에 코웃음을 쳤다.
“태주 씨, 일찍 터뜨린 샴페인이 무색하지 않게 앞으로 잘해 봐요.”
뻥!
승화가 오픈한 코르크 마개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화살처럼 발사됐다.
“와아!”
텐션이 올라간 승화가 거품과 함께 뿜어져 나온 샴페인을 사방에 뿌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앗, 차가워! 야, 무슨 술이 버리는 게 더 많아.”
샴페인 분수에 맞은 이 교수가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젖은 옷을 털어냈다.
“원래 고사 지낼 때 술 뿌리는 거 몰라?”
사무실 바닥 곳곳을 흥건하게 적신 승화가 3분의 1 정도 남은 샴페인을 세 개의 빈 잔에 똑같이 나누며 말했다.
“다 의미가 있어서 그런 거니까 잔소리 그만하고 가서 복돈이나 좀 꽂아 봐.”
“참 나, 어쩐지 돼지 콧구멍이 크다 했다.”
돼지머리 케이크 앞으로 다가간 이 교수가 지갑에서 꺼낸 5만 원권 한 장을 세로로 길게 만 뒤 오른쪽 콧구멍에 꽂아 넣었다.
“뭐야, 설마 5만 원으로 끝내려는 건 아니지?”
샴페인 병을 내려놓은 승화가 돼지 코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알았어, 알았어. 자. 됐냐?”
이 교수가 따로 준비해 둔 봉투를 꺼내 케이크 앞에 내려놓았다.
“오오, 역시 경우가 있어.”
봉투가 두둑한 것을 확인한 승화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샴페인 잔을 건넸다.
“그럼 이제 제 차례인가요?”
이 교수의 뒤를 이어 지갑을 연 태주가 허전한 왼쪽 콧구멍에 5만 원권 한 장을 꽂아 넣은 뒤 인벤토리를 열어 화분을 소환했다.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개업식 땐 보통 화분을 선물한다고 해서요.”
“어머, 이거 금전수 아니에요? 부와 번영의 상징.”
식물의 종류를 단번에 알아본 승화가 반색을 하며 화분을 받아들었다.
“진짜 너무너무 고마워요. 사무실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둬야지.”
“별건 아니에요.”
“별게 아니라니요. 태주 씨한테 선물을 받은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된다고.”
햇살을 받을 수 있는 곳에 화분을 내려놓은 승화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을 집어 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오는 게 있으니 가는 것도 있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