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195화 (195/242)

195. 과팅 (3)

소지품 뽑기는 원래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이 궁금증과 흥미를 동시에 유발하는 핵심 포인트였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누구의 것인지 알리려는 듯한 결정적인 힌트를 저마다 품고 있었다.

‘그냥 봐도 누구 건지 다 알겠는데?’

소지품의 종류는 머리끈, 안경, 보라색 매니큐어, 이니셜이 찍힌 휴대폰 케이스, 그리고 목장갑.

머리끈을 낸 여학생은 머리가 풀어져 있었고, 안경을 쓰고 있던 여학생은 시력이 안 좋은 나머지 가늘게 눈을 뜬 채 남학생들의 선택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며, 보라색 매니큐어를 낸 여학생은 술잔을 쥔 손을 의도적으로 테이블 위에 드러내고 있었다.

‘이니셜이 일치하는 건 한 명밖에 없고, 목장갑의 주인이야 뭐.’

누구를 염두에 두고 힌트를 남긴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공교롭게도 여학생들의 시선은 모두 중앙에 앉은 태주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왜 다 나만 쳐다보지? 부담스럽게.’

순간, 과팅을 하기로 한 조소과 여학생들이 자신의 얘기를 많이 했으며, 자신이 나가지 않을 경우 파투가 날 수도 있다고 했던 세준의 말이 떠올랐다.

“자, 그럼 태주부터 골라.”

나리가 선수를 치듯 태주의 순서를 첫 번째로 정했다.

“태주부터? 무슨 기준으로?”

눈치가 없어도 알 수 있는 명백한 힌트로 인해 마음에 두고 있는 여학생의 소지품이 보라색 매니큐어라는 것을 알게 된 철용이 나리의 결정에 반기를 들었다.

“하다못해 가위바위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경쟁자의 유무는 알 수 없었지만, 후순위로 밀릴 경우 마음 속 그녀를 다른 녀석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기 때문이다.

“어? 이건 그냥 각성 등급으로 정한 건데?”

태주가 1순위이길 원하는 나리가 반박의 여지가 없는 기준을 제시하며 철용의 말문을 막았다.

“……?!”

아직은 간단한 통성명밖에 나누지 못한 상태라 개개인의 클래스나 각성 등급까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태주의 각성 등급이 가장 높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넌 무슨 등급인데?”

“나? 난 A급.”

“그럼 태주 다음으로 해.”

태주의 선택 이후엔 누가 되든 관심이 없던 나리가 선심을 쓰듯 철용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다.

“어? 그렇게 따지면 나도 A급인데?”

물론 같은 A급인 정웅의 입장에선 자신보다 입학 성적이 낮은 철용이 먼저 뽑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지만.

“그래? 그럼 태주가 뽑을 동안 둘이 가위바위보나 하고 있어. 태주야, 빨리 뽑아.”

신속하게 교통정리를 한 나리가 기대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태주의 선택을 재촉했다.

“어? 어, 그래.”

테이블 위에 놓인 소지품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태주가 목장갑을 집어 들었다.

나리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은 없었지만, 나리를 통해 새로운 인맥을 얻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교도관도 아니고 살리도 교도소의 교도관이면 알아 둬서 나쁠 게 없지.’

특히, 회귀 전 있었던 살리도 교도소의 첫 번째 방문 당시, 흥미로운 소문 하나를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섬에 갇힌 재소자들이 알고 있는 은밀한 정보들이 뭍에 있는 익명의 헌터들에게 꾸준히 팔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의외의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진실과 마주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윤나리와의 친분이 곧 윤 교도관과의 친분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어! 지금 뽑은 거야? 한 번 손대면 끝인데.”

선택의 이유를 알 리 없는 나리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태주의 의사를 재확인했다.

“태주야, 너 그거 왜 뽑았어. 쟤 성격 장난 아닌데.”

조금 전까지도 나리와 티격태격했던 세준이 태주의 손에 들린 목장갑을 낚아채며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야, 임세준, 아직 네 차례 아니거든?”

나리가 세준의 손으로 옮겨진 목장갑을 빠르게 낚아채 태주에게 내밀었다.

“근데 이거 왜 뽑았어?”

태주의 속마음이 궁금했던 나리가 선택의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냥 존재감이 너무 압도적이라 이거 밖에 안 보였어.”

본심을 숨긴 태주가 나리가 내민 목장갑을 건네받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아, 너처럼?”

농담을 가장한 나리의 직설적인 호감 표시에 수용거실 안이 술렁였다.

“우와, 미쳤다. 너 취했어? 갑자기 적응 안 되게 왜 그래? 정신 차려.”

자신의 두 귀를 의심한 세준이 데코로 나온 깻잎 한 장을 맞은편에 앉은 나리의 얼굴 앞에 부채처럼 흔들며 말했다.

“야, 나 지금 술 한 잔도 안 마셨거든?”

나리가 자신의 코앞에서 알짱거리는 깻잎을 빼앗아 한 입에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이야, 몇 년 만에 먼저 연락해서 과팅을 하자고 한 이유가 있었네. 태주가 빠지면 안 한다고 했던 이유가 있었어.”

어긋나 있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나리의 이상 행동에 대한 모든 의문이 풀린 세준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혀를 내둘렀다.

“그나저나 기대하던 만남치곤 너무 털털하게 나온 거 아니야? 누가 보면 싫은 거 억지로 나온 줄 알겠어.”

세준이 혼자만 작업복 차림으로 온 나리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야. 나 옷 싸왔어. 봐봐.”

나리가 테이블 밑에 있던 쇼핑백 하나를 세준에게 들어 보였다.

“어? 근데 왜 지금까지 안 갈아입었어?”

“분위기가 별로면 그냥 이대로 마시려고 그랬지.”

태주의 반응에 따라 옷차림을 결정하려 했던 나리가 쇼핑백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옷 좀 갈아입고 올 테니까 나머진 너희들끼리 알아서 뽑고 있어.”

소지품 뽑기의 결과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던 나리가 태주를 힐끗 쳐다본 뒤 서둘러 문을 나섰다.

철컹!

잠시 후.

파트너 선정 이후 자리를 재배치한 아이들이 서로의 잔을 채워주며 어색함을 풀어가고 있었다.

“자, 일단 한 잔씩 하자.”

나리가 자리를 비운 동안 헌터학과측 주선자인 세준이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며 과팅을 주도했다.

“오오, 술 좀 하는데? 주량이 어떻게 돼?”

정웅과의 가위바위보 대결에서 승리한 철용이 자신의 파트너이자 보라색 매니큐어의 주인인 안나의 원샷을 호감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으음. 평소엔 소주 반 병, 기분 좋으면 한 병 반?”

잠시 고민하는가 싶었던 안나가 곁에 앉은 철용에게 빈 잔을 내밀며 배시시 웃었다.

“어? 그럼 오늘은 내가 있으니까 한 병 반이겠네?”

소주를 따라주던 철용이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안나의 마음을 떠보았다.

“놀고 있네.”

물론 그 모습을 눈꼴사납게 지켜보던 세준의 입에선 실소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근데 넌 실제로 몬스터를 본 적이 있어?”

의대생에게 수능 점수를 묻고, 컴공과 학생에게 노트북 수리를 부탁하듯 학과마다 자주 받게 되는 질문의 유형들이 있었는데, 헌터학과의 경우 몬스터를 본 적이 있냐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몬스터? 아니, 뭐, 아직 배우는 단계라…….”

몬스터라곤 증강현실 속에서 본 것이 전부인 철용의 목소리가 안나의 순수한 궁금증에 급격히 줄어들었다.

물론 살아 있는 몬스터를 마주한 유일한 인물인 태주마저 회귀 전의 기억이라는 시간적 특수성으로 인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지만.

철컹!

“I’m back.”

철문을 활짝 연 나리가 180도 달라진 러블리한 스타일링으로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했다.

“야, 너 그 옷차림은 또 뭐냐? 진짜 볼수록 적응이 안 되네?”

남자아이들을 휘어잡던 선머슴 같은 모습만 기억하고 있던 세준이 작업복에 가려져 있던 나리의 아름다운 자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 벌써 다 자리를 바꿨네?”

세준의 헛소리를 한쪽 귀로 흘린 나리가 작업복이 담긴 쇼핑백을 한쪽 구석에 던져둔 뒤 태주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여기 앉아도 되지?”

형식적인 허락을 구한 나리가 태주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엉덩이를 붙였다.

“근데 다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자신이 없는 동안 어떠한 대화가 오갔는지 궁금했던 나리가 흩어진 친구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네 욕.”

세준이 혼잣말처럼 장난을 쳤지만, 이 역시 나리의 귀엔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난 철용이한테 실제로 몬스터를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고 있었어.”

나리와 눈이 마주친 안나가 조금 전에 나눈 대화의 내용을 흔쾌히 공유했다.

“몬스터? 학생 땐 던전에 들어가지 못할걸?”

각성자인 아버지 덕분에 헌터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귀동냥에 가까운 겉핥기식 수준이라 수업 또는 인턴십의 형태로 던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까진 모르고 있었지만.

“아닌데? 태주는 1학기 때만 두 번 들어갈 예정인데?”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나리의 대화에 꿋꿋하게 끼어든 세준이 깐족거리는 말투로 딴지를 걸었다.

“어? 진짜? 어떻게?”

태주에 대한 관심을 숨김없이 표현했던 나리가 세준의 말을 처음으로 귀담아들었다.

“지금 4학년이랑 던전 실습 강의를 같이 듣고 있거든. 조만간 신입생의 신분으론 처음으로 여름 인턴십까지 참여할 예정이고.”

아버지인 임경준 대표로부터 태주의 인턴십을 맡게 될 두 번째 길드가 풍림이라는 것까지 듣고 온 세준이 앞으로의 행보를 비서처럼 열거했다.

“와아, 말도 안 돼. 그게 가능해? 4학년이 총 몇 명인데?”

두 눈이 휘둥그레진 나리가 곁에 앉은 태주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100명.”

저항 스킬로 인해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술을 분위기상 입에 대고 있던 태주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덤덤하게 말했다.

“100명? 그래도 안 불편해? 난 3학년 선배랑 단둘이 있어도 불편하던데.”

선배랑 둘이 작업하는 게 껄끄러워 친구들까지 일찍 오게 한 나리로선 듣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선배들도 내가 불편한 건 마찬가지라.”

“하긴, 선배들의 관점에서 보면 또 그렇겠네. 아무튼 대단해. 역시 우리 아빠가 좋아할 만해.”

“뭐?”

나리의 입에서 뜻밖의 고백을 듣게 된 태주가 잠시 술잔을 내려놨다.

“우리 아빠가 유일하게 팬심을 드러낸 사람이 너거든. 심지어 심심할 때 네 윷튜브 채널까지 보신대. S급의 재능 낭비.”

“어? 진짜?”

새로운 인맥을 기대하는 태주의 입장에선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어젯밤에도 아빠랑 통화했는데, 너랑 과팅한다고 하니까 본인이 더 좋아하셨어. 다른 교도관들한테 자랑할 거니까 인증 샷 찍어 보내라고.”

아버지와 친구처럼 지내는 나리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슬그머니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귀찮게 해서 미안한데, 같이 사진 한 장만 찍으면 안 될까?”

“사진? 그래, 뭐.”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태주가 나리의 조심스러운 부탁을 흔쾌히 승낙했다.

“아, 진짜? 그럼 잠깐만 필터 좀 고를게.”

태주의 허락에 신이 난 나리가 분주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던 바로 그때.

텅! 텅! 텅!

누군가 수용거실의 철문을 예고도 없이 두드렸다.

물론 더 이상 올 사람도 없고, 주문한 술과 안주도 모두 세팅이 된 상황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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