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과팅 (2)
“……?!”
낯선 여자의 참신한 등장에 일순간 주선자를 비롯한 모든 남학생들의 말문이 막혔다.
“아, 내 목소리가 너무 컸나? 아무튼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내려와.”
목장갑을 낀 손등으로 코를 쓱 닦은 여학생이 멋쩍은 미소를 남긴 채 계단을 내려갔다.
“야, 누구냐?”
시작부터 기선을 제압당한 듯한 묘한 심리적 위축에 어안이 벙벙해진 철용이 주선자인 세준에게 여학생의 정체를 물었다.
“조소과 윤나리. 내 초등학교 동창이야.”
당황한 나머지 아는 척할 타이밍을 놓쳤던 세준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근데 옷차림이 왜 저래? 오늘 과팅 하는 거 맞아?”
누구보다 옷차림에 힘을 주고 온 재룡이 윤나리의 작업복 패션에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물었다.
“그러게. 왜 저러고 있지?”
물론 윤나리 일행이 미리 도착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세준이 상황에 맞지 않는 옷차림의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리 없었지만.
“야, 그걸 네가 모르면 어떻게 해. 우린 따로 단톡방도 안 팠는데.”
타 학교 학생들과의 미팅이나 같은 학교에 속한 타 학과 학생들과의 과팅이 성사되는 경우 만남에 앞서 단톡방을 개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양측 주선자들이 동창 관계로 허물없이 지내다 보니 과팅 일정을 조율하기 위한 단톡방마저 과감히 생략된 상태였다.
“그리고 저건 우리를 무시하는 행동 아니야?”
과팅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던 재룡이 상황 파악조차 안 된 세준의 무책임한 대답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래. 어디 매너를 중시하는 네가 한번 설명해 봐.”
재룡과 같은 심정인 철용의 지퍼가 가슴을 지나 턱밑까지 올라갔다.
“미안. 내가 일단 먼저 내려가서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고 올게.”
아이들의 눈총에 마음이 다급해진 세준이 수습을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려던 바로 그때.
턱!
“그냥 같이 내려가. 그래도 되지?”
세준의 한쪽 어깨를 덥석 붙잡은 태주가 다른 멤버들의 동의를 구했다.
“어? 어, 뭐.”
태주의 동행 제안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철용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뭔가 사정이 있는 거 같으니까 내려가기 전에 다들 얼굴 좀 풀어. 임세준 너도 일부러 그런 거 아니니까 너무 자책하지 말고.”
“고, 고마워, 태주야.”
정신이 한차례 나갔다 들어온 세준이 자신을 멈춰 세운 태주를 돌아보며 멤버들을 진정시켜준 것에 대한 짧지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됐으니까 그만 앞장서. 무슨 사연인지는 네가 눈치껏 물어보고.”
“어? 어, 알았어.”
태주의 배려 덕분에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세준이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
*
*
-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하얀색 명찰이 부착된 파란 죄수복을 입은 알바생이 포차 안으로 들어선 태주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다섯이요.”
제일 포차는 처음인 세준이 교도소 콘셉트로 꾸며진 인테리어를 둘러보며 왼손을 활짝 펼쳤다.
- “네. 그럼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니요. 먼저 온 일행이 있어요.”
세준이 빈 방을 가리키는 알바생에게 합석 사실을 알렸다.
- “아아, 네. 그럼 그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리로부터 미리 언질을 받은 바 있는 알바생이 세준의 대답을 즉각적으로 이해했다.
“여긴 홀이 없이 다 방인가 봐.”
세준을 뒤따르던 재룡이 철문 상단에 난 작은 방범창 너머로 보이는 손님들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홀에서 과팅하면 쪽팔리잖아.”
세준의 말대로 미팅이나 과팅의 경우 다른 손님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룸 형태의 공간에서 이루어져야 좀 더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하긴, 5 대 5로 떠들면 좀 민폐긴 하겠네.”
멤버의 구성은 3 대 3이 가장 이상적이었지만, 인원수의 제안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당사자들 간의 합의에 따라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었다.
철컹!
-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손수 철문을 열어준 알바생이 정중한 인사와 함께 카운터 쪽으로 돌아갔다.
“네, 감사합니다.”
덩달아 고개를 숙인 세준이 제일 포차에서 가장 넓은 수용거실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야, 너 정확히 10분 늦었다.”
세준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마주한 나리가 휴대폰을 확인하며 말했다.
“입구에 도착한 건 20분 전이거든? 그리고 왔으면 왔다고 해야지 왜 연락을 안 해.”
지각을 인정할 수 없었던 세준이 도착 시간을 강조하며 나리의 지적을 맞받아쳤다.
“야, 내가 제일 포차에서 보자고 그랬지 언제 입구에서 보자고 그랬어?”
“네가 나보다 일찍 올 줄 몰랐지.”
“뭐야, 그럼 안 들어오고 있었던 게 다 내 탓이라는 거야?”
“뭐, 어느 정도는?”
“우와, 역시 초딩 때랑 똑같네. 아주 한마디를 안 져.”
“변하지 않은 건 너도 마찬가지인 거 같은데? 너 원래 사람 당황시키는 게 특기였잖아. 그래서 혼나기도 많이 혼나고.”
“야, 너 자꾸 헛소리하면 죽인다?”
“정웅아, 힐 좀 준비해라. 나 말고 내 앞에 있는 애한테.”
서로를 향해 유치한 말싸움을 하며 다가가던 두 사람이 결국 서로의 멱살을 잡은 채 으르렁거렸다.
바로 그때.
“……?!”
마지막으로 들어온 태주와 눈이 마주친 나리가 세준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륵 내렸다.
“야,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냐?”
나리가 여전히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세준의 손등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아! 뭐야, 너 각성했어? 손이 예전보다 더 매워졌어!”
벌에 쏘인 듯한 아픔에 황급히 손을 뗀 세준이 벌게진 손등을 반대편 손으로 문지르며 짜증 섞인 말투로 물었다.
“시끄럽고. 일단 앉자. 네 친구들 다리 아프겠다.”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던 나리가 태주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 일단 앉자. 근데 너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왔냐? 복장은 또 그게 뭐고.”
나리의 맞은편에 자리 잡은 세준이 무슨 사연인지 눈치껏 물어보라던 태주의 지시대로 자연스럽게 이유를 물었다.
“아, 이거. 너 오기 전까지 일하고 있었거든.”
나리가 자신의 꼬질꼬질한 작업복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해맑게 웃었다.
“일? 너 여기서 알바해?”
“아니. 알바는 아니고. 우리 과 3학년 선배가 여기 사장님이랑 친해서 교도관 모형을 하나 만들어 주기로 했는데, 조금 전까지 그걸 설치하고 덧칠하느라 어쩔 수 없었어.”
“아, 그래? 근데 친구들은 왜 일찍 온 거야?”
나리와 달리 나머지 4명의 여학생들은 제법 신경을 쓰고 나온 티가 역력했다.
“선배랑 둘만 있으면 좀 불편해서 그냥 일찍 불렀어.”
“하긴, 3학년이면 그럴 만도 하지. 그럼 그 교도관 모형은 어디 있어? 들어올 때 못 본 거 같은데.”
고개를 끄덕이던 세준이 포차의 인테리어를 떠올리며 물었다.
“화장실 앞에 세워놨으니까 당연히 못 봤겠지.”
“화장실 앞에? 그럼 인증샷을 찍기 좀 그렇지 않아?”
“냄새가 빠지면 입구 쪽으로 옮길 거야. 마스코트처럼.”
“아아, 마스코트. 근데 그걸 왜 신입생인 너한테 부탁했지? 공짜로 부려먹기 편해서 그런가?”
“내가 교도관의 외적인 특징에 대해 고증을 좀 해줬거든.”
“네가? 너 뭐 안 본 사이에 무슨 일 있었냐?”
두 사람이 초등학교 동창이긴 하지만, 예중, 예고를 진학한 나리와는 상당히 오랜만에 연락이 닿게 된 상태였다.
“왜. 안 본 사이에 빨간 줄이라도 그어졌을까 봐?”
장난기가 발동한 나리가 황당한 의심을 하고 있는 세준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어? 아니, 뭐, 난 그냥 네가 교도관에 대해 잘 안 다고 하니까.”
“하여간 생각하는 수준하고는. 우리 아빠 지금 교도관이잖아.”
“교도관? 초등학교 땐 우리 아버지처럼 헌터라고 하지 않았어?”
“지금은 교정직 공무원이셔.”
“오오, 의외네? 그럼 지금 어디서 근무하시는데?”
“살리도 교도소.”
“……?!”
순간, 나리의 대답을 들은 헌터학과 학생들의 두 눈이 일제히 커졌다.
“살리도 교도소? 거긴 각성자들만 가는 곳이잖아.”
친구 아버지의 근황을 별생각 없이 물었던 세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맞아. 범죄를 저지른 각성자들 중에서도 가장 흉악한 녀석들만 모아둔 곳이지. 그래서 쉽게 도망치지 못하게 서해에 위치한 무인도였던 살리도에 교도소를 지은 거고.”
나리의 표현대로 살리도 교도소는 헌터로서의 본분을 저버린 빌런들 중에서도 죄질이 무겁고 개전의 정이 없는 자들만 수용된 요새 같은 곳이었다.
‘살리도 교도소라…….’
2회차 신입생인 태주는 1학년 2학기 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한 현장 학습의 목적으로 살리도 교도소에 방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와아, 대박. 그럼 집에도 잘 못 오시겠네?”
“규정상 일주일에 한 번은 나오실 수 있어. 비상이 걸렸을 땐 한 달에 한 번도 힘들고. 문제는 그 비상이 아주 자주 걸린다는 거지만.”
아버지에 대해 소개하던 나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아이고. 어쩌다 보니 우리 둘만 떠들고 있었네.”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낀 나리가 커다란 메뉴판을 펼치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띵동!
“일단 술부터 시킬까? 안주는 뭐 먹을래?”
테이블에 부착된 호출 벨을 누른 나리가 5 대 5로 마주 앉은 아이들의 얼굴을 쭉 한번 둘러보며 의견을 물었다.
잠시 후.
이름 쌓기 게임을 통해 간단한 통성명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테이블 위에 한상 가득 술과 안주가 차려져 있었다.
“자, 지금부터 존댓말 하면 벌주 마시는 거 알지?”
주선자이자 분위기 메이커로 참석한 나리가 소주의 뚜껑을 현란한 동작으로 따며 원활한 소통을 위한 작은 규칙을 정했다.
“당연히 알지. 근데 본격적으로 마시기 전에 자리 배치부터 다시 하면 안 될까? 마주 보고 있으니까 뭔가 더 어색한 거 같아서.”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었던 철용이 어색함을 핑계로 파트너 정하기를 유도했다.
“그래? 그럼 간단하게 소지품 뽑기로 정할까?”
철용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나리가 고전적이지만 궁금증을 유발하는 방식을 재량껏 선정했다.
“그래. 뭐, 마음대로 해.”
본심을 숨긴 철용이 애꿎은 뒷머리만 쓸어내리며 사심이 없는 척 대답했다.
“으음. 딱 봐도 너희들은 지갑하고 휴대폰만 들고 온 거 같으니까 소지품은 우리 쪽에서 꺼낼게. 일단 눈부터 감아. 실눈 뜨다 걸리면 알지?”
“오케이.”
나리의 경고에 대한 철용의 대답을 시작으로 다섯 명의 남학생들 모두 양심적으로 눈을 감았다.
탁! 탁! 툭! 탁! 톡!
여학생들이 내려놓는 소지품 소리가 남학생들의 귓가에 적막을 깨며 들려왔다.
“자, 다 끝났으니까 눈 떠.”
눈을 질끈 감고 있던 남학생들이 나리의 신호에 따라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던 바로 그때.
‘어? 뭐야, 이거.’
테이블 중앙에 모아둔 소지품의 구성을 본 태주의 시선이 나리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