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196화 (196/242)

196. 과팅 (4)

“……?!”

때아닌 노크 소리에 놀란 아이들이 일제히 철문 쪽을 돌아봤다.

철컹!

누군가 허락 없이 열린 문틈으로 낯선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 사장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정체를 알아본 나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알은척을 했다.

“재밌게 노는데 방해해서 미안.”

나리와 눈이 마주친 제일 포차의 강 사장이 멋쩍게 웃으며 수용거실 안으로 들어섰다.

“어? 그게 뭐예요?”

고개를 쭉 뺀 나리가 강 사장의 손에 들린 커다란 접시를 보며 물었다.

“서비스.”

“네? 서비스요?”

“오전부터 고생했는데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한 거 같아서.”

강 사장은 선배와 함께 교도관 모형을 제작해 준 나리에 대한 고마움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아이고, 전 그냥 옆에서 거들기만 했는데. 그럼 잘 먹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리가 강 사장이 들고 온 접시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넘겨받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 이거 해물 떡볶이네요?”

메뉴를 확인한 나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선배 기다리면서 혼자 메뉴판 보고 있을 때 그랬잖아. 해물 떡볶이가 제일 맛있겠다고.”

“오오, 이 섬세함. 얘들아, 뭐해. 인사 안 하고.”

강 사장의 센스 넘치는 보답에 감동한 나리가 신호를 보내자 눈치 빠른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냈다.

- “와아, 잘 먹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짝! 짝! 짝! 짝!

“어휴, 민망하게 무슨 박수까지. 그럼 계속 재밌게들 놀아.”

익숙지 않은 환대에 황급히 손사래를 친 강 사장이 수용거실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철컹!

“으음! 대박! 완전 맛있어!”

조급한 젓가락질로 집은 쌀떡 하나를 얼른 입에 넣은 나리가 황홀한 표정으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 “야, 나도 나도.”

- “나리야, 그거 가운데에 놓으면 안 돼?”

30만 구독자를 거느린 먹빵여신 임지수에 버금가는 나리의 군침을 유발하는 리액션에 아이들의 젓가락질이 덩달아 바빠졌다.

“아 참, 우리 사진 찍다 말았지?”

떡볶이에 잠시 정신이 팔렸던 나리가 젓가락을 휴대폰으로 바꾸며 팔을 쭉 뻗었다.

“잠깐 친한 척 좀 할게.”

인증 샷을 핑계로 태주에게 어깨를 밀착한 나리가 손가락 하트와 함께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찰칵!

“오오, 잘 나왔다. 너도 보내줄까?”

저장된 사진을 아버지에게 전송하던 나리가 태주의 연락처를 우회적으로 물었다.

“그래.”

나리의 휴대폰을 가져간 태주가 자신의 메신저로 직접 사진을 전송했다.

알아 둬서 나쁠 게 인맥과의 유일한 연결 고리이기도 했지만, 호의적인 상대에게 무작정 거리를 두는 것 또한 예의는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

전송을 마친 태주가 나리에게 휴대폰을 돌려줬다.

지이잉!

“어? 아빠다.”

인증 샷을 보내기 무섭게 답장이 온 것을 확인한 나리가 태주에게 직접 아버지가 보낸 메시지를 보여줬다.

[우리 딸 오늘 계 탔네. 술값은 네가 내야겠다. 대신 아빠 카드 말고 엄마 카드 써.]

“봤지? 우리 아빠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러게. 네가 나 대신 감사하다고 꼭 전해 드려.”

“어. 지금 바로 보낼게.”

초등학교 동창인 세준과는 멱살잡이까지 했던 나리지만, 태주의 앞에서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운 언행으로 이미지 관리를 하고 있었다.

“아, 근데 여기 이벤트 있는 거 알아?”

아버지에게 답장을 보내고 있던 나리가 휴대폰 화면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태주의 얼굴로 옮겼다.

“이벤트?”

회귀 전후를 통틀어 단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곳이라 이벤트의 존재 또한 모르는 게 당연했다.

“제일 포차의 방이 총 8개인데, 그 방이 다 차면, 이벤트가 열린대. 일명 사장님을 이겨라.”

“사장님을 이겨라? 조금 전에 오셨던 그분?”

태주가 스페셜 안주와 함께 얼굴을 내비친 강 사장의 통통한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어. 각 방에서 딱 한 명씩만 참여할 수 있는데, 토너먼트를 거쳐 사장님까지 이긴 사람한테는 상품으로 양주 한 병을 주신대.”

“양주 한 병이라……. 정확히 무슨 게임을 하는데?”

“아까 여쭤보긴 했는데, 그때그때 다르대. 오늘도 어김없이 비밀이고.”

목장갑 안에 감춰져 있던 희고 긴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갖다 댄 나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태주의 참가를 부추겼다.

“그래서 말인데, 태주 네가 나가 보는 건 어때?”

“내가? 뭐가 나올 줄 알고.”

“뭐가 나오든 너라면 문제없지 않을까? 솔직히 여기서 네가 제일 믿음직스럽잖아.”

세준이 있는 곳을 힐끗 쳐다본 나리가 태주에게 확신에 찬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야, 근데 이 타이밍에 왜 날 쳐다보냐? 난 뭐 못 믿겠다는 거야?”

자신을 향한 나리의 못 미더운 시선을 느낀 세준이 어금니로 뜯고 있던 먹태를 접시 위에 내리치며 발끈했다.

물론 이번에도 역시 세준의 목소리는 나리의 주의를 끌지 못했지만.

“오오, 그럼 태주 덕분에 오늘 양주 먹는 거야?”

파트너 성사 이후 줄곧 기분이 좋은 철용이 태주가 참가하는 분위기로 몰아갔다.

- “양주! 양주! 양주! 양주!”

그러자 취기와 흥이 동시에 오른 아이들이 손바닥과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양주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이래도 안 나갈 거야?”

나리가 태주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콕콕 찌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야, 알았어. 대신 떨어져도 원망하지 마라.”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긴 태주가 결국 참가를 수락하며 소란을 진정시켰다.

“에이, 재미 삼아 나가는 건데 지면 또 어때. 어차피 네가 떨어질 정도면 누가 나가도 안 되는 건데. 자, 한잔 받아.”

태주의 한쪽 어깨를 토닥인 나리가 빈 잔을 채워주며 마음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나리야, 우리 그냥 마시기 심심한데 게임이나 할까?”

철용의 파트너인 안나가 평균 주량인 반병을 넘긴 시점에서 술 게임을 제안했다.

“게임? 그래. 뭐 할까?”

“귓속말 게임 어때?”

“귓속말 게임? 그래. 그럼 누구부터 할래?”

안나의 의견을 수용한 나리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지원자를 모집했다.

“어, 그럼 내가 먼저 할게.”

게임의 제안자인 안나가 가장 적극적인 자세로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 너 먼저 해.”

“오케이. 그럼 시작한다.”

귓속말 게임의 첫 번째 주도자가 된 안나가 파트너인 철용이 아닌 오른쪽에 있던 정웅의 귀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야, 왜 나한테 안 하고 걔한테 해? 원래 게임은 시계 방향 아니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등진 안나의 냉정한 뒷모습에 서운함을 느낀 철용이 그 즉시 이의를 제기했다.

물론 이 모든 건 질투심을 유발해 철용의 본심을 확인하려는 안나의 계획적인 선택이었지만.

“왜. 안나가 다른 사람한테 귓속말해서 삐졌어?”

안나의 의도를 눈치챈 나리가 표정 관리에 실패한 철용의 섭섭한 눈빛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며 놀리듯이 물었다.

“야, 삐지긴 누가 삐졌다고 그래.”

정곡을 찔린 철용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커졌다.

“아아, 근데 여기 좀 덥지 않냐? 홀이 아닌 룸이라 그런가?”

턱밑까지 올라가 있던 지퍼를 배꼽까지 내린 철용이 얇은 바람막이 점퍼를 손으로 펄럭이며 딴소리를 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얼굴도 좀 빨개진 거 같은데? 혹시 화난 거 아니지?”

질투하는 모습이 귀여웠던 안나가 귀까지 달아오른 철용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배시시 웃었다.

“술 마셔서 그래. 술. 아시안 플러시 신드롬.”

안나의 질문에 당황한 철용이 인터넷에서 얼핏 본 용어까지 인용해 가며 끝까지 잡아뗐다.

“그래? 그럼 나 다시 시작한다.”

왼손을 초승달 모양으로 오므려 입가에 갖다 댄 안나가 미션의 내용을 정웅의 귀에 은밀히 속삭였다.

“뭐?!”

안나의 귓속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정웅이 안경의 브리지 부분을 검지로 밀어 올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벌주를 마신 사람만이 미션의 내용을 들을 수 있다는 귓속말 게임의 규칙상 다른 이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기 위한 약간의 오버액션은 미션 수행자의 필수 덕목이었지만.

“아아, 또 술 마시게 하려고 오버하네.”

남몰래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철용이 정웅의 과도한 리액션을 비웃으며 손가락질을 했다.

“하아. 미안해.”

깊은 한숨을 내쉰 정웅이 철용을 향해 맥락 없는 사과를 한 뒤 안나의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 “어어! 이게 무슨 그림이지?”

- “야, 이거 파트너가 바뀐 거 아니야?”

- “그러게. 뭔가 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 뭐 이런 느낌인데?”

- “야, 철용아, 너 안 궁금해? 궁금하면 빨리 마셔.”

정웅의 돌발 행동에 궁금증이 폭발한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철용의 벌주를 재촉했다.

물론 미션의 내용과 관련이 없는 제삼자라도 벌주만 마시면 언제든지 비밀을 공유할 수 있었지만.

“야, 안 되겠어. 나부터 들을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리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술잔을 비운 뒤 정웅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야, 진짜야? 어떡해.”

정웅의 귓속말을 들은 나리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야, 진짜 술 게임 사기단이야 뭐야.”

벌주를 마시게 하려는 조직적인 연기라 확신한 철용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근데 이번엔 네가 안 마시는 게 낫겠다.”

귓속말을 듣기 전까진 벌주를 강요하던 나리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입장을 바꿨다.

“뭐래 또.”

물론 속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참을성에 한계를 느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자 이 게임의 가장 큰 묘미였지만.

“알았어. 마실게. 마시면 될 거 아니야.”

결국 벌주를 택한 철용이 단숨에 술잔을 비운 뒤 한쪽 귀를 들이밀었다.

“자, 됐지. 뭔데 그래?”

“오오, 그래도 궁금하긴 한가 보네?”

철용을 안달 나게 하는 데 성공한 나리가 신이 난 얼굴로 비밀을 공유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야 이 씨,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나리의 귓속말을 듣고 있던 철용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미션의 정체를 떠벌렸다.

“그냥 술 좀 대신 마셔 달라는 거였네.”

- “야, 그걸 얘기하면 어떡해. 아직 안 마신 사람도 있는데.”

- “아아, 게임 하루 이틀 해 보나.”

- “중간에 저러면 벌주 마셔야 되는 거 아니야?”

- “벌주가 아니라 다음 판부터 빼고 해야지.”

순간, 멋대로 스포를 해버린 철용에게 아이들의 원성이 빗발쳤다.

“야, 야, 텐션 떨어지지 않게 바로 이어서 하자.”

철용의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힌 나리가 곧바로 다음 게임을 진행했다.

“아, 그리고 내가 마지막에 들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이번 판은 나부터 할게. 다들 이의 없지?”

아이들의 의사를 확인하며 자리로 돌아간 나리가 곁에 앉은 태주에게 귓속말을 하던 바로 그때.

“……?!”

미션 수행자로 지목된 태주의 두 눈이 나라의 속삭임에 번쩍 뜨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