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공성전 (9)
팀워크 지수가 분열 단계로 내려가자 시스템의 예고대로 조원들의 사기와 능력을 약 5분간 최상 단계로 끌어올릴 수 있는 강제 각성 버프인 마지막 불꽃의 발동권이 떠올랐다.
‘어차피 기회는 한 번.’
▶ 『마지막 불꽃』이 발동되었습니다.
흐름상 벨지오스의 군대를 상대로 5분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태주가 마지막까지 후회 없는 전투를 펼칠 수 있도록 Y를 선택했다.
▶ 조원들의 모든 능력치가 100% 향상되었습니다.
“……?!”
그 순간, 한없이 위축되어 있던 조원들의 눈이 번쩍 떠지면서 설명할 수 없는 힘과 자신감이 폭발적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자, 이제 내가 할 일은…… 어?!’
조원들을 각성시킨 태주가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있던 창병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던 바로 그때.
“막아!”
대화 내내 여유를 부리던 벨지오스가 사색이 된 얼굴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원들이 자신을 노리지 않는, 심지어 일개 창병에게 겨눈 화살에 흥분하는 벨지오스의 이상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쉬이익!
벨지오스의 외침과 동시에 출발한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시원하게 뻗어 나갔다.
텅! 푹!
‘맞네.’
아쉽게도 화살촉이 관통한 건 목표물의 앞으로 뛰어든 다른 하수인의 투구였지만, 이번 공격으로 벨지오스의 속임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태주의 입장에선 실패라고 볼 수 없는 긍정적인 시도였다.
‘벨지오스.’
태주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만고의 진리.
간파 스킬이 전한 데이터는 드래곤 위에 타고 있는 녀석을 분신으로, 무리 속에 숨어 있는 창병을 본체로 지목하고 있었다.
‘생각으로 조종하고 있는 건가?’
흑마법의 원리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부하 하나하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보호를 지시한 게 아님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체이싱 애로우[C]를 선택하셨습니다.
장애물에 구애를 받지 않는 타격이 절실했던 태주가 노출된 부위를 100% 명중시키는 유도 화살로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저놈을 죽여라!”
드래곤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른 벨지오스의 분신이 태주를 지목하며 전 병력을 움직였다.
‘각이 안 나오네.’
태주가 하수인들을 방패 삼아 몸을 웅크린 본체의 빈틈을 찾아 화살의 조준점을 수정했다.
쿵! 쿵! 쿵! 쿵!
“꼬꼬로! 입구!”
비테론 4세의 등장이 임박했다는 것을 느낀 태주가 철벽 스킬의 발동을 한 번 더 주문했다.
“꼬꼬로!”
눈치 빠른 꼬꼬로가 태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문 앞에서 방어막을 생성했다.
바로 그때.
쿠오오오!
간발에 차이로 입구가 막힌 몬스터가 거칠게 포효를 하며 연신 방어막을 들이받았다.
쿵! 쿵!
“일단 티마란과 게르딘 씨는 오른쪽을 뚫어 주세요.”
포위는 곧 패배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에 동료들로 하여금 한 점 돌파를 시도하도록 오더를 내린 태주였다.
“보르가넨 씨와 피렐레 사제님께선 버프부터 걸어 주시고, 테테 너는 은신 상태로 서포트를 해.”
마지막 불꽃으로 인해 두려움이 사라진 동료들이 태주의 구체적인 역할 분배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벨지오스를 잡을 테니까.”
오크를 제외한 대부분의 하수인들이 플레이트 아머로 완전 무장을 하고 있다 보니 파이어 애로우의 화염이나 아이스 애로우의 블리자드처럼 광역 대미지가 들어가는 특수기들의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길부터 트자.’
▶ 노멀 애로우[N]를 선택하셨습니다.
기본 화살의 증폭 효과를 이용한 넉백, 다시 말해, 상대를 뒤로 밀어내는 전략과 속사를 섞는 방식을 통해 벨지오스를 둘러싼 화살받이부터 걷어내겠다고 판단한 태주가 활시위를 당겨 차징 시간을 기다렸다.
바로 그때.
‘보르가넨 씨가 설명한 그대로네.’
크아아아!
전방에선 벨지오스의 기사와 창병들이 인간의 움직임이라고는 볼 수 없는 점프력과 스피드로 맹렬하게 들이닥치고 있었고.
쉬이익! 쉬이익! 쉬이익! 쉬이익!
후방에선 벨지오스의 궁수들이 태주를 향해 화살을 퍼부었다.
‘5초의 시간을 안 주네.’
긴박한 순간엔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퇴로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선 차징 시간을 버는 것이 쉽지 않았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결국 태주가 선택한 안전지대는 꼬꼬로의 방어막 안.
외부에선 내부를 공격할 수 없었지만, 그 반대는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단 방어막이 형성되면, 태주처럼 점멸로 이동을 하지 않는 이상 제아무리 아군이라도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지만.
크아아아!
팅! 팅! 팅! 팅!
삽시간에 몰려든 적들이 늑대 인간들이 그랬듯 방어막의 표면을 미친 듯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됐다.’
쉬이익!
화살촉에 은은한 빛이 감도는 것을 확인한 태주가 시야를 가리고 있는 녀석의 가슴 정중앙에 화살을 발사했다.
텅! 푹!
순간, 증폭 효과가 발동된 노멀 애로우가 상대의 플레이트 아머를 찢어버리듯이 관통하더니 이내 추진체가 달린 로켓처럼 엄청난 관성의 힘으로 뒤에 있던 녀석들까지 도미노처럼 쓰러뜨렸다.
터덩텅텅텅텅!
판금 갑옷끼리 부딪치는 요란한 소음과 함께 꽤 많은 병사들이 나자빠졌지만, 상대의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간신히 트인 화살길이 순식간에 메워지고 있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돌파구를 찾기 위한 극단적인 방법을 떠올린 태주가 꼬꼬로를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 펫을 회수하시겠습니까? (Y/N)
“꼬꼬로. 오늘만큼은 소환이 되자마자 철벽 스킬을 써. 몇 번이고,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알았어?”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인벤토리를 열어 최고급 회복 포션인 파이안을 꺼낸 태주가 마력이 거의 소진되었을 꼬꼬로에게 직접 물약을 먹여주며 작전을 지시했다.
“꼬꼬로!”
금세 지친 기색에서 벗어난 꼬꼬로가 의욕적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회수가 완료되었습니다.
꼬꼬로를 표식 안으로 불러들이자 성 밖으로 나오기 위해 애쓰던 비테론 4세가 한 방에 성문을 부수며 투우처럼 뛰쳐나왔다.
콰광!
‘지금이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태주가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상대의 뒤편으로 타이밍 좋게 이동했다.
쿠오오오!
그러자 황소 형태의 거대한 몬스터로 변한 비테론 4세가 태주의 계획대로 앞에 있던 병사들을 불도저처럼 깨끗하게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터덩텅텅텅텅!
화살로 만든 길이 오솔길이었다면, 비테론 4세가 만든 길은 2차선 도로에 가까웠다.
‘뚫렸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적의 힘을 역이용해 활로를 개척한 태주가 단 한 번뿐인 역습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적진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찾았다.’
▶ 체이싱 애로우[C]를 선택하셨습니다.
문제의 창병을 발견한 태주가 투구 속 표정이 그려지는 상대의 당황한 몸짓을 비웃으며 활시위를 당겼다.
바로 그때.
쿠와아아앙!
벨지오스가 타고 있던 작은 드래곤이 태주를 향해 날아와 불을 내뿜었다.
화르르!
‘드래곤 브레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조준 타이밍을 빼앗긴 태주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얕볼 수 없는 드래곤의 거센 불길을 피해 황급히 자리를 옮겼다.
“하하하하! 하찮은 것들 틈에 나름 쓸 만한 녀석이 끼어 있었군.”
드래곤에 탄 벨지오스의 분신이 본체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한 속 보이는 대화를 시도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서 충성을 맹세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물론 간악하다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비열한 벨지오스의 속임수에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한 태주가 아니었지만.
“글쎄. 근데 왜 살려주겠다는 제안이 내 귀엔 살려달라는 소리로 들리지?”
“뭐?!”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들은 없어? 아, 물론 살려 달라거나 내 밑으로 들어오고 싶다는 말은 사양할게. 나도 약해 빠진 것들은 딱 질색이거든.”
▶ 소환이 완료되었습니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벨지오스에게 들은 모욕을 그대로 대갚음해 준 태주가 꼬꼬로를 소환시킴과 동시에 방어막 안으로 이동했다.
쉬이익!
그리곤 헐레벌떡 달아나고 있는 벨지오스의 뒤통수를 향해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안 돼!”
불을 내뿜는 드래곤의 쭉 찢어진 아가리처럼 턱이 빠질 듯이 외치는 분신의 의미 없는 절규.
쿠와아아앙!
화르르!
더구나 조금 전 상황과 달리 드래곤 브레스의 불길마저 꼬꼬로의 방어막에 가로막혀 견제의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텅! 푹!
‘맞았다!’
“으아아아악!”
화살촉이 투구를 관통하는 순간, 드래곤 위에 타고 있던 벨지오스의 분신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괴로움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물론 본체의 치명상에 반응하는 게 분신만은 아니었지만.
쿠와아아앙!
분신을 태우고 있던 드래곤이 긴 목을 이리저리 휘젓더니 나는 법을 잊은 새처럼 허무하게 바닥으로 추락했다.
쿵!
쿠오오오!
이번엔 돌진을 멈춘 비테론 4세가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벌러덩 누워 온몸을 비틀었다.
크아아아!
정신 지배의 주체가 사라지자 방어막을 두드리고 있던 하수인들 역시 무기를 떨어뜨리며 하나둘 힘없이 주저앉기 시작했다.
“꼬꼬로! 돌진!”
전투 의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태주가 벨지오스가 쓰러져 있는 곳을 가리키며 돌진 스킬의 발동을 명했다.
“꼬꼬로!”
철벽 스킬을 푼 꼬꼬로가 힘찬 발 구르기 동작과 함께 황금빛 오러에 휩싸였다.
터덩텅텅텅텅!
꼬꼬로가 돌진하자 디지니스에 걸린 것처럼 비틀거리던 벨지오스의 병사들이 볼링 핀처럼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꼬꼬로가 터준 길로 단숨에 이동한 태주가 바닥에 엎어져 있는 벨지오스의 참혹한 최후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음?!’
벨지오스의 숨통이 완전히 끊어지자 하수인으로 전락했던 병사들과 몬스터들의 몸이 회색빛 재로 변해 바람과 함께 흩날리기 시작했다.
“하아. 육체와 영혼 모두 흑마법에 잠식된 탓에 부활을 할 수 없는 거라네.”
어느새 다가온 보르가넨이 갑옷만 덩그러니 남은 비테론의 병사들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둘러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
▶ [조별 과제]를 완료하였습니다.
태주의 눈앞에 그토록 기다리던 과제 달성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 [서브 과제2]인 『의견 조율』의 팀워크 지수를 『최상』 단계로 마감하였습니다.
마지막 불꽃의 지속 시간이 남아 있던 덕분에 회복이 불가능해 보였던 팀워크 지수마저 최고 등급을 받게 된 태주였다.
▶ [서브 과제1], [서브 과제2] 그리고 [독립 과제]의 점수가 [메인 과제]의 점수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 리더십에 의거한 가산점이 반영되고 있습니다.
▶ 전원 생존에 대한 가산점이 반영되고 있습니다.
▶ 개개인의 기여도에 따른 가산점이 차등적으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시스템의 약속대로 늑대 인간 섬멸과 조장의 역할을 수행한 것에 대한 추가 점수도 빠짐없이 가산되고 있었다.
▶ [메인 과제]의 점수를 산정합니다.
‘과연.’
최종 성적표를 앞둔 태주가 긴장된 눈빛으로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