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138화 (138/242)

138. 공성전 (8)

“저기 앉아 있는 건 벨지오스가 아니라 비테론 4세라네!”

두 사람의 얼굴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 보르가넨이 소리쳤다.

“비테론 4세였겠죠.”

넓은 성주의 알현실을 홀로 지키고 있는 비테론 4세의 얼굴을 유심히 확인한 태주가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쉬이익!

태주의 손끝을 떠난 체이싱 애로우가 더 이상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비테론 4세의 흉측한 몰골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갔다.

푹!

화살이 비테론 4세의 이마를 정확히 관통했다.

퍽!

심지어 뒤통수를 빠져나간 화살촉이 의자의 등받이에 못을 박듯이 단단히 박혔다.

그 탓에 화살을 맞았음에도 비테론 4세의 자세는 꼿꼿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한 가지 이상한 건 태주의 공격에 그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는 것.

고통스러운 괴성이라도 질렀다면, 하다못해 약간의 미동이라도 있었다면 재차 활시위를 당겼겠지만, 확인 사살을 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비테론 4세의 모습은 눈 뜬 시체 그 자체였다.

“함정은 함정인데, 단순한 시간 끌기용이었나 보네. 시시하게.”

단검을 꺼내 들었던 테테가 전투 자세를 풀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온 걸 알고 몸을 피한 것 같네.”

벨지오스가 있을 만한 곳을 조언했던 보르가넨이 아쉬운 표정으로 태주에게 말했다.

“일단 밖의 상황은 어떤지 한번 내다봐 주세요.”

적의 동태가 궁금했던 태주가 발코니 쪽을 바라보며 보르가넨에게 부탁했다.

“그래. 알았네.”

외벽에 돌출된 발코니로 한걸음에 달려간 보르가넨이 난간을 잡고 비테론 전체를 훑어봤다.

물론 북서쪽에 치우친 비테론 성의 위치적 특성상 사각지대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지만.

“개미 한 마리 안 보이네.”

성과 없는 정찰을 마친 보르가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태주에게 보고했다.

“설마 다른 곳으로 이미 출정을 간 건 아니겠죠?”

피렐레가 한발 늦은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니요. 아무리 다른 성채를 치러 갔다고 해도 이렇게 경비 병력 하나 없이 빈집 수준으로 놔두진 않았을 겁니다.”

피렐레의 추측을 반박한 태주가 다음 작전을 지시했다.

“일단 성 안을 전체적으로 수색한 다음에 나가는 걸로 하죠.”

적들이 어딘가에 잠복해 있을 것이라 확신한 태주가 발걸음을 돌리려던 바로 그때.

푹!

미라처럼 앉아 있던 비테론 4세가 갑자기 이마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며 서서히 일어섰다.

“역시 선물을 남겨뒀군.”

▶ 아이스 애로우[I]를 선택하셨습니다.

화살을 교체한 태주가 맨손으로 다가오는 비테론 4세를 향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쉬이익! 푹!

화살이 가슴 정중앙에 정확히 명중했다.

그리고 이어진 빙결 효과의 확산.

화살촉에서 시작된 냉기가 비테론 4세의 몸통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태주가 적의 죽음을 확신하며 활을 내렸다.

“뭐야, 저거.”

내심 반전을 기대했던 테테가 즐길 틈도 없이 끝난 허무한 승부에 실소를 터뜨렸다.

“비테론 가문의 역사도 이렇게 막을 내리는군.”

보르가넨이 비테론 4세의 마지막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로 그때.

“어?!”

태주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이 하나둘 성주의 알현실을 나서는 동안, 가장 늦게까지 남아 권력의 덧없음을 느끼고 있던 보르가넨이 비테론 4세의 발 주위에 나타난 검은색 마법진을 발견했다.

“여기 와서 이것 좀 보게.”

벨지오스의 소행이라 여긴 보르가넨이 태주를 돌아보며 심상치 않은 기류가 있음을 알렸다.

“무슨 일입…… 어?”

발걸음을 돌이킨 태주가 마법진을 보는 순간 보르가넨의 얼굴을 쳐다봤다.

“흑마법이네.”

“네. 그래 보이네요.”

“죽어서도 조종을 당하다니. 쯧쯧. 여기는 내가 마무리 지을 테니 자네는 어서…… 어?!”

휘이잉!

비테론 4세를 향해 지팡이를 내밀던 보르가넨이 마법진 위로 솟구친 검은 회오리에 잠시 주춤했다.

쿠오오오!

회오리 안에서 인간의 성대로는 낼 수 없는 몬스터의 괴성이 들려왔다.

“이거 늦기 전에 도망쳐야 되는 거 아니야?”

팔짱을 낀 채 관망하던 테테가 불길한 듯 입구 쪽을 흘끗거렸다.

휘이잉!

점점 그 반경을 넓혀 가고 있는 회오리와 회오리 너머로 슬쩍슬쩍 보이는 비테론 4세의 기괴한 실루엣.

“도망치고 싶으면 혼자 가.”

반면, 양손에 도끼를 든 티마란은 죽음을 불사한 눈빛으로 회오리를 노려보며 앞으로 나섰다.

바로 그때.

높은 천장까지 치솟아 있던 회오리가 눈에 띄게 넓어지더니, 이내 조금 전에 들은 괴성과는 차원이 다른, 다시 말해, 울림통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 느껴지는 괴수의 포효가 알현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쿠오오오!

“성이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일단 밖으로 나가죠.”

아직 회오리에 가려진 실체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상대가 거대한 몸으로 돌진해 올 경우 벽과 기둥에 부딪혀 천장이 내려앉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퇴로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원거리 딜러의 장점을 이용, 도망치면서 공격하는 전술을 택한 태주였다.

“알았네!”

대답은 보르가넨이 했지만, 제일 먼저 알현실을 빠져나간 건 역시 테테였다.

쉬이익! 쉬이익!

태주가 회오리를 향해 화살을 퍼부으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바람이 너무 거세서 그런가? 화살이 힘을 못 쓰네.’

바람에 민감한 무기인 만큼 비테론 4세를 둘러싼 회오리가 존재하는 한 화살의 위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쿠오오오!

회오리를 뚫고 나온 네 발 달린 몬스터가 태주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다들 뛰어!”

동료들부터 내보낸 태주가 꼬꼬로와 함께 대피 시간을 벌기 위한 작전을 펼쳤다.

“꼬꼬로! 넌 문 앞에서 철벽을 써!”

“꼬꼬로!”

태주의 지시를 받은 꼬꼬로가 돔 형태의 철벽 스킬을 발동해 입구를 봉쇄했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꼬꼬로의 방어막 안으로 이동한 태주가 효율적인 전투를 위해 적의 약점부터 확인했다.

▶ 간파할 대상을 3초간 바라보십시오.

쿵!

고작 3초의 여유도 없이 황소를 닮은 녀석의 거대한 머리가 방어막의 표면을 사정없이 들이받았다.

‘이 정도 속도면 바로 따라잡혔겠는데?’

입구를 막는 기지를 통해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한 태주가 활시위를 당긴 채 분석 시간을 기다렸다.

▶ 스킬 『간파』가 발동되었습니다.

스킬이 활성화되자 간파 대상의 공략 포인트가 태주의 머릿속에 데이터처럼 전송됐다.

‘……?!’

간파를 마친 태주가 평소와 달리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조종하는 놈을 제거해야 죽는다고?’

비테론 4세를 괴물로 만든 벨지오스를 제거해야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 태주가 의미 없는 공격을 멈춘 채 방어막 뒤로 벗어났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꼬꼬로. 내가 이걸로 부를 때까지 최대한 버티고 있어.”

태주가 황금 호각을 들어 보이며 뒤를 부탁했다.

“꼬꼬로.”

고개를 끄덕인 꼬꼬로가 눈앞의 몬스터를 똑바로 쳐다보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

*

*

잠시 후.

1층에 도착한 태주가 고군분투하고 있을 꼬꼬로를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얼른 호각을 불었다.

삐이이이!

그러자 태주의 손바닥에 있는 것과 동일한 문양을 지닌 표식이 바닥에 나타났고, 그 위로 꼬꼬로의 몸이 순식간에 소환되었다.

“꼬꼬로, 괜찮아?”

“꼬꼬로.”

철벽 스킬의 도움 덕분에 거미들을 몰고 다녔을 때와는 달리 체력적인 소모는 거의 없었다.

콰과광!

입구를 열기 무섭게 머리 위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안 죽는다 이거냐?’

태주가 성이 무너지든 말든 자신의 뒤만 쫓고 있는 몬스터의 무식한 돌격에 헛웃음을 지었다.

“꼬꼬로. 빨리 나가자.”

“꼬꼬로.”

1층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태주가 먼저 나간 동료들을 따라 문을 밀어내던 바로 그때.

‘……?!’

놀랍게도 비테론 성 앞엔 수많은 하수인과 몬스터들이 원정대를 학익진 형태로 포위하고 있었다.

“이제 다 모인 건가?”

작은 드래곤을 타고 나타난 벨지오스가 대형의 중심부에 내려앉아 침입자들을 둘러봤다.

“아주 이색적인 조합이군.”

인간과 몬스터가 함께 있는 광경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벨지오스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코웃음을 쳤다.

“아, 거기 익숙한 얼굴도 보이는군.”

보르가넨을 알아본 벨지오스가 거만한 말투로 물었다.

“자넨 죽은 멜라임의 친구 아닌가?”

“알아봐 줘서 눈물 나게 고맙군.”

“여긴 어쩐 일이지?”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아아, 친구의 복수. 그럼 옆에 달고 온 저 하찮은 것들은 뭐지?”

벨지오스의 도발에 발끈한 티마란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닥치고 덤비기나 해!”

양 어깨에 도낏자루를 걸친 티마란이 당장이라도 상대를 조각낼 기세로 으름장을 놓았다.

“하하하하.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걸 보니 역시 오크는 오크군.”

티마란의 호기로운 도전장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벨지오스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무례하리만큼 크게 웃었다.

“자, 그럼 초록색 피가 분출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번 감상해볼까?”

벨지오스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하수인으로 변한 오크 전사들이 대열을 맞춰 맨 앞줄로 이동했다.

“크윽.”

또다시 동족의 피를 도끼날에 묻혀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 티마란이 벨지오스의 악행에 치를 떨었다.

▶ [알림] 팀워크 지수가 변동되었습니다. (45 → 25)

‘이런.’

▶ [알림] 팀워크 지수가 『적대』에서 『분열』 단계로 하락하였습니다.

앞에선 벨지오스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고, 뒤에선 불사의 몬스터로 변한 비테론 4세가 접근하고 있다 보니 조원들 모두 겉으로 내색은 안 해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 [경고] 팀워크 지수가 『분열』 단계로 내려가 일정 시간 지속될 경우 과제는 실패한 것으로 간주, F학점 처리와 함께 자동으로 종료됩니다.

‘알고 있다고.’

쿵! 쿵! 쿵! 쿵!

‘이제 시간이 없다.’

문을 등지고 있던 태주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몬스터의 발소리에 고민이 더 많아졌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들은 없나? 아, 물론 살려 달라거나 내 밑으로 들어오고 싶다는 말은 사양하겠네. 난 약해 빠진 것들은 딱 질색이거든.”

비테론 원정대를 마지막까지 조롱한 벨지오스가 선심을 쓰듯 물었다.

“내가 한마디 할게.”

마음의 결단을 내린 태주가 조별 과제의 성패가 달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활을 든 걸 보니 궁수인가 보군. 그래. 어디 한번 유언을 말해보게나.”

▶ 스킬 『간파』가 발동되었습니다.

“아, 아니다. 유언은 내가 아니라 네가 말해야 될 거 같은데?”

벨지오스가 방심하고 있는 동안 상대의 약점을 알아낸 태주가 투구를 뒤집어쓴 창병 하나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 벨지오스.”

▶ 『마지막 불꽃』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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