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조 편성 (4)
잠시 후.
한 블록을 돌아 광장에 도착한 태주가 정중앙에 위치한 베로닌 1세의 동상 앞으로 유유히 다가갔다.
‘설명 그대로네.’
대장장이의 말대로 동상 주위엔 구구거리는 비둘기 떼가 바닥을 쪼며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 찾았다.’
틀린 그림 찾기를 하듯 비둘기 다리만 열심히 들여다보던 태주가 한쪽 발목에 빨간 가죽 끈이 묶여 있는 테테의 전서구들 중 한 마리를 발견했다.
‘훈련을 받아서 그런가? 생각보다 얌전하네.’
다행히 지하철 역사나 공원에서 볼 수 있는 닭둘기처럼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피하지 않아 여느 새들과 달리 손쉽게 전서구를 포획할 수 있었다.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대장장이가 건넨 낡은 천 쪼가리를 인벤토리에서 꺼낸 태주가 빨간 가죽 끈이 묶여 있지 않은 다리에 접선 정보가 적힌 천 쪼가리를 단단히 묶었다.
물론 접선 정보 중 의뢰 내용의 경우 곧이곧대로 쓰는 순간 거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궁금증 유발의 차원에서 빈칸으로 남겨 두었지만.
‘잘 부탁한다.’
태주가 날린 전서구는 힘찬 날갯짓과 함께 광장을 가로지르며 건물들 사이로 사라졌다.
물론 비둘기의 뒤를 쫓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었지만, 공개적인 접선 수단이 마련되어 있는 상황에서 굳이 약속되지 않은 만남을 추구해 테테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까진 없었기 때문에 전서구가 날아가는 방향 정도만 체크한 뒤 발걸음을 돌린 태주였다.
바로 그때.
‘아, 테테에게 다른 선택지를 주면 안 되겠지?’
다른 매력적인 의뢰 내용과 경쟁하는 것이 신경 쓰였던 태주가 누구도 테테에게 전서구를 날릴 수 없도록 광장에 남아 있는 나머지 전서구들의 발목에 묶인 빨간 가죽 끈을 모두 풀어 다른 비둘기들과 구분이 안 되도록 만들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내 것만 봐.’
*
*
*
광장에서의 볼일을 모두 마친 태주가 술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보르가넨의 모습을 발견했다.
물론 술집 맞은편에 앉아 열심히 망치질을 하고 있는 대장장이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이번에도 역시 한 블록을 돌아 광장에서 오는 길이 아닌 것처럼 이동 경로를 속였지만.
▶ [알림] 조 편성에 적합한 인물이 반경 10미터 안에 존재합니다.
보르가넨과 가까워지자 다시 조원 후보의 등장을 알리는 시스템의 메시지가 태주의 눈앞에 떠올랐다.
“일찍 오셨네요.”
가벼운 인사를 건넨 태주가 보르가넨의 달라진 옷차림을 아래위로 빠르게 훑어봤다.
“급한 사람을 기다리게 할 순 없지. 뭐, 그 바람에 옷이 좀 덜 마르긴 했지만.”
탈출 당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보르가넨은 상하의에 묻어 있던 찌든 핏자국을 손빨래로 제거한 뒤 주름이 질 정도로 꽉꽉 물기를 짜 그대로 입고 온 상태였다.
“찢어진 부분도 다 수선하셨네요?”
검에 베인 상의에선 어설픈 솜씨로 급하게 기워 온 티가 났다.
“사실 실과 바늘을 빌리는 게 꿰매는 것보다 더 오래 걸렸네.”
바느질이 된 부분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보르가넨이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장비의 구성은 나쁘지 않은데?’
상하의의 상태는 좀 아쉬웠지만, 모자와 로브는 물론 지팡이에 각종 장신구들까지 빠짐없이 착용하고 나니 한결 출정 준비를 마친 믿음직한 법사처럼 보였다.
“근데 그 옷을 고집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태주의 입장에선 보르가넨이 왜 버프가 전혀 없는, 심지어 좋지 못한 기억까지 담고 있는 훼손된 의상에 집착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자네가 그랬지. 괴로울수록 눈을 더 크게 뜨라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면이 아닌 직면이라고……. 물론 이 옷을 볼 때마다 마음은 편치 않네. 마치 아물어 가는 딱지를 제 손으로 뜯어내는 기분이지.”
입으론 웃고 있었지만, 태주의 일침에 각성한 보르가넨의 눈빛엔 독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자네의 쓴소리에 생각이 바뀌었네. 정확히는 덩달아 무모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 옷은 마음의 짐과 함께 벗어던질 생각이네. 설령 비테론 탈환에 실패해 수의가 되는 한이 있어도 말이야.”
“친구분이 기뻐하겠네요. 늦게나마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돼서.”
보르가넨의 각오를 가만히 듣고 있던 태주가 확연히 달라진 의욕적인 마음가짐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바로 그때.
▶ 새로운 멤버가 조원으로 합류하였습니다.
태주가 보르가넨의 영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 물음표로 남아 있던 법사 클래스에 보르가넨의 이름이 추가되었다.
【조원 리스트】 (3/6)
1. 전사 (티마란)
2. 기사 (???)
3. 법사 (보르가넨)
4. 궁수 (신태주)
5. 사제 (???)
6. 도적 (???)
“약속?”
자신이 조원 리스트에 추가되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보르가넨이 의아한 얼굴로 태주가 언급한 약속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비테론 최고의 법사가 되자고 했던 멜라임과의 약속이요.”
“아, 그건…….”
“어찌 됐건 지금은 비테론을 구할 유일한 법사잖아요.”
“…….”
죄책감을 덜게 해주려는 태주의 가슴 뭉클한 격려에 말문이 막힌 보르가넨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고맙네.”
잠시 감정을 추스른 보르가넨이 고개를 들어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건 그렇고, 혼자 온 걸 보니 나머지 동료들을 찾는데 실패했나보군.”
보르가넨이 태주의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니요.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있던 태주는 보르가넨의 우려와 달리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일단 걸으면서 얘기할까요?”
비테론 출신 사제인 피렐레의 조원 후보 여부와 성기사의 합류 가능성 등을 확인해보고 싶었던 태주가 보르가넨의 발걸음을 완곡하게 재촉했다.
*
*
*
잠시 후.
“저기가 교회네.”
시장을 벗어나 한참을 걷던 보르가넨이 웅장함마저 느껴지는 거대한 종교 건축물을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비테론에 있는 교회도 저렇게 큰가요?”
“아니. 비테론은 작은 규모의 성채네. 베로닌에 비하면 성전의 크기도 작고, 사제의 수도 부족하지.”
“어? 그럼 성기사의 숫자도 베로닌에 비해 당연히 적겠네요.”
비테론 출신의 성기사도 소개받고 싶었던 태주가 보르가넨의 인맥을 기대하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자꾸 아니라고 해서 미안하네만, 비테론에 있는 교회는 성기사를 양성하고 관리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네.”
“아아, 네.”
원하는 대답은 얻지 못했지만, 아직 실망할 단계는 아니었다.
물론 가정에 불과하지만, 피렐레를 통해 베로닌에 있는 성기사를 소개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근데 벨지오스의 행보는 좀 의외네요. 비테론에 있는 거의 모든 병사들을 하수인으로 만들었으면, 뭔가 세력을 확장하는 등의 공격적인 움직임을 취했을 법도 한데, 왜 한 달이 넘도록 성채 안에만 있을까요?”
“안 그래도 이곳 베로닌을 포함해 비테론의 비보를 들은 주변 성채들에서 공성전을 대비한 긴급 방어 태세를 취했었네. 물론 2주가 넘도록 아무런 기미가 없자 지금처럼 다들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혹시 상대가 방심하도록 만든 다음 시간차 공격을 노리는 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아니,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벨지오스의 간악함을 몸소 체험한 보르가넨이 심각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다른 성채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으면, 차라리 다 같이 힘을 모아 비테론을 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네만, 작은 규모의 성채를 탈환해서 얻는 이익보다 벨지오스의 하수인들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입게 될 병력 손실이 더 크기 때문에 군사력이 곧 권력인 귀족들의 입장에선 선뜻 희생을 감수할 수 없는 거겠지. 그래서 돈에 눈이 먼 녀석들만 주인을 잃은 비테론 가문의 보물에 목숨을 거는 거고.”
연합 공격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아는 보르가넨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접근해야 소수의 인원으로도 성채를 공략할 수 있을까요?”
토박이만이 알 수 있는 고급 정보가 필요했던 태주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지닌 보르가넨에게 경험에 근거한 자문을 구했다.
“글쎄. 벨지오스가 있을 만한 곳은 몇 군데 알고 있지만, 그곳에 도달하는 것 자체가 쉽진 않을 걸세.”
현실적인 조언밖에 해줄 수 없는 보르가넨이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꼬꼬로의 탐색 스킬을 활용할 수도 있지만, 특정한 장소와 아이템 이외에 특정한 대상도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선 검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성문을 넘기 위해선 정면 돌파밖에 없다는 뜻인가요?”
“안타깝지만, 성채의 목적 자체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니 빈틈이 없을 수밖에.”
“으음. 그럼 비테론의 성문은 총 몇 개죠?”
“개수는 3개지만, 중앙 성문을 제외한 나머지 2개의 성문은 크기가 작고 경계 병력이 적으니 이왕이면 그쪽을 노리는 편이 나을 걸세. 물론 내가 아는 배치 정보는 어디까지나 벨지오스의 반란 이전의 것이지만.”
“아니요. 충분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채에 잠입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사이, 두 사람의 발걸음은 어느새 교회의 안뜰까지 이르러 있었다.
“저기, 말씀 좀 묻겠습니다.”
보르가넨이 지나가던 사제에게 말을 걸었다.
- “네. 무슨 일로 오셨죠?”
발걸음을 멈춘 사제가 차분한 목소리로 용건을 물었다.
“저희는 피렐레라는 사제분을 만나러 왔습니다.”
- “아아, 그 비테론에서 오신 분이요.”
“네. 지금 좀 만나 뵐 수 있을까요?”
- “교회는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따라오시죠.”
이름 모를 사제가 온화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앞장섰다.
*
*
*
잠시 후.
성전 안으로 들어선 태주와 보르가넨이 예배당 의자에 앉아 피렐레를 기다렸다.
바로 그때.
▶ [알림] 조 편성에 적합한 인물이 반경 10미터 안에 존재합니다.
‘피렐레인가? 알림이 안 뜨면 다른 사제를 알아보려고 그랬는데.’
사제들의 통로 근처에 앉아 있던 태주가 반가운 메시지의 등장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벅저벅.
점점 가까워지는 발자국의 울림.
“왔나보군.”
발소리를 들은 보르가넨이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 쪽을 바라봤다.
바로 그때.
“…….”
예배당 안으로 들어선 젊은 사제 한 명이 태주와 보르가넨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를 찾아오셨다고…….”
안면이 있는 사이라고 했던 보르가넨의 설명과 달리 피렐레의 눈빛에선 반가운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안면이 있는 거 맞아요?”
눈치 빠른 태주가 곁에 있던 보르가넨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내 얼굴이 상해서 잠시 못 알아본 것뿐이니 걱정하지 말게.”
손바닥으로 한쪽 뺨을 쓸어내린 보르가넨이 자리에서 벗어나 피렐레에게 다가갔다.
“난 비테론 출신의 법사 보르가넨이라고 하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자네와는 약 2년 전, 멜라임과 함께 주교를 만나러 갔을 때 잠깐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지.”
그리곤 모자를 벗으며 예의를 갖춘 뒤 정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보르가…… 아아, 이제야 기억납니다.”
“허허, 기억이 난다니 다행이군.”
피렐레의 기억을 끄집어내는데 성공한 보르가넨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태주를 돌아봤다.
“근데 저에겐 어쩐 일로…….”
“아, 지금부턴 저와 얘기하시죠.”
한 발짝 물러나 있던 태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서며 피렐레의 눈길을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