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조 편성 (5)
“혹시 비테론에서 맨몸으로 빠져나온 건 아니죠? 그래도 벨지오스의 하수인들과 싸우다 나올 정도면, 저기 앉아 있는 법사들처럼 버프를 주는 복장이나 장신구 정도는 착용하고 있었을 것 같은데.”
“으음. 검에 베이는 과정에서 상의가 좀 크게 찢어지긴 했지만, 나머지 장비들은 그저 더러워진 정도니 사용하는데 큰 무리는 없을 걸세.”
“아, 그래요? 그럼 잘됐네요. 다시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해서 싹 다 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 한 달밖에 안 돼서 그런지 쉽게 버릴 수가 없더군. 뭐, 자네를 만나지 못했다면, 머지않아 추억과 함께 전부 태워버렸겠지만.”
마법의 존재 목적을 잃었다며 법사의 길을 포기했던 보르가넨이지만, 입가에 번지는 씁쓸한 미소를 보는 순간, 애써 외면하고 있던 마법에 대한 미련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근데 옷은 좀 바꿔야 되지 않을까요? 그 정도 상처에 치료까지 늦어졌으면, 상의는 물론 바지까지 다 피로 물들었을 텐데.”
“아니. 핏물만 닦아낸 뒤 기워서 입을 생각이네.”
“혹시 각종 버프가 붙은 마법 의상이라 그렇습니까? 그럼 장인에게 맡겨야 돼서 수선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요.”
“그저 천으로 만든 평범한 옷이니 걱정하지 말게.”
“다행이네요. 동료들을 모으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했는데……. 아, 참고로 전 해가 지기 전에 출발할 겁니다.”
“그렇게나 빨리?”
“늦어도 내일 새벽까진 선발대와 합류하기로 약속했거든요.”
“으음. 알았네. 뭐, 작별 인사를 나눌 사람도 없으니 굳이 지체할 이유도 없지. 그럼 난 가서 떠날 채비를 하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네. 그럼 전 그동안 나머지 동료들을 찾고 있겠습니다.”
“혼자서 가능하겠나? 자네가 어떠한 동료들을 찾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부탁하게.”
“아, 그래요? 그럼 기사와 사제를 좀 알아봐 주세요. 이왕이면 인성이나 평판보다 실력 위주로요.”
팀원 중에 오크와 도적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굳이 밝히지 않았다.
곧 있으면 알게 될 사실이지만, 사람에 따라 합류를 주저하게 만드는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와 사제? 으음. 비테론 출신 기사들은 전부 벨지오스의 하수인이 됐고…… 아, 사제라면 내 한 명 알고 있네.”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이 떠오른 보르가넨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리치며 말했다.
“피렐레라고, 비테론 출신의 젊은 사제인데, 개인적인 친분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안면 정도는 있는 사이니 제안을 해볼 수 있을 걸세.”
“잘됐네요. 안 그래도 교회 쪽을 한번 돌아볼까 생각 중이었는데.”
“그럼 내가 임시 거처에서 돌아오는 대로 같이 가보세. 어차피 비테론이나 베로닌이나 성채는 달라도 교회끼린 다 연결되어 있으니 말이야.”
“네. 그럼 이쯤에서 그만 흩어지도록 하죠.”
“알겠네. 그럼 좀 이따 보세.”
보르가넨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 편성에 적합한 인물의 등장을 알려주는 메시지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물론 10미터를 벗어났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일 뿐, 조원 리스트에 추가 되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사실 새로운 멤버의 소개를 약속할 만큼 보르가넨의 합류 의사는 확고해진 상태였다.
문제는 추가 검증의 필요성을 느낀 태주의 신중함이었는데, 시스템에서 이미 적합한 인물임을 알려주기도 했고, 발산되는 마력의 크기만 봐도 짐이 될 멤버가 아님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보르가넨의 전투 준비 상태만 확인한 뒤 마음을 굳힐 예정이었다.
‘이제 기사랑 도적만 구하면 되는데…….’
태주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동료를 부축하고 있는 하급 기사 두 명에게로 옮겨졌다.
“저기요.”
- “네?”
하급 기사 한 명이 태주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혹시 이곳의 모든 기사들은 베로닌 가문에게 귀속되어 있습니까?”
기사의 경우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에 동행을 위해선 본인이 아닌 성주의 허락이 필요했다.
- “뭐, 그런 셈이죠.”
“그런 셈이란 건 예외가 있다는 겁니까?”
- “성기사들은 가문이 아닌 교회에 속해 있거든요.”
‘뭐? 성기사?’
흑마법과 싸워야 하는 태주의 입장에선 성기사의 합류가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근데 멤버 구성엔 기사라고만 되어 있던데.’
물론 조원 리스트에 나온 기사 클래스의 범주에 성기사가 포함되는지에 대해선 좀 더 확인해 볼 필요성이 있었지만.
‘어차피 교회에 갈 거니까 일단 성기사부터 만나 보고, 안 되면 성주를 찾아가서 기사를 내어줄 수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나름의 설득 순서를 정한 태주가 마지막 히든 멤버인 도적 클래스를 찾기 위해 술집을 나섰다.
*
*
*
술집의 맞은편에 위치한 대장간 앞.
홀로 가게를 지키고 있는 대장장이는 여전히 달궈진 쇠를 망치로 두드리고 있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대장간 안으로 들어선 태주가 정중히 말을 걸었다.
“…….”
망치질을 멈춘 대장장이가 팔뚝으로 구슬땀을 훔치며 태주를 힐끗 쳐다봤다.
“수리는 하루, 제작은 일주일이네.”
땅! 땅! 땅! 땅!
그리고 이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망치질을 시작했다.
“아니요. 손님으로 온 게 아니라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미안하지만, 내가 아는 거라곤 이 망치질이 전부네.”
태주에게 망치를 들어 보인 대장장이가 흘러내린 땀방울에 한쪽 눈을 찡그렸다.
“뭐, 내세울 만한 지식은 없어도 일머리는 좀 있는 편이지만.”
틈새 자랑을 마친 대장장이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망치질을 이어갔다.
바로 그때.
“혹시 비테론으로 가는 손님은 없습니까?”
“……?!”
순간, 웃음기가 사라진 대장장이가 태주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보아하니 베로닌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웬만하면 다시 생각해보게.”
비테론에 가겠다는 뜻을 직접적으로 내비친 적은 없지만,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라는 듯 태주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내는 대장장이였다.
“왜죠?”
대장장이의 반응이 새로운 건 아니었지만, 비테론과 관련해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모른 척 이유를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잠시 망치를 내려놓은 대장장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디까지 알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테론 가문의 보물을 노리는 모험가들이 손님으로 왔었네. 다들 흑마법사 따윈 두렵지 않다며, 장비가 수리 되는 동안 허세 가득한 얼굴로 그동안 있었던 무용담들을 자랑스레 늘어놓곤 했었지. 하아…….”
태주보다 먼저 비테론으로 떠난 손님들의 모습을 회상하던 대장장이가 마치 누군가의 영을 위로하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그 한숨의 의미가…….”
“그동안 비테론으로 가는 손님들에겐 돈을 절반만 받았었네. 대신 보물을 찾게 되면, 못 받은 돈의 두 배를 달라는 식으로 욕심을 부린 것이었지. 뭐, 결과적으론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달아둔 외상값이 결국 노잣돈이 된 셈이네요.”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비테론으로 가겠다는 손님들의 장비만 취급하지 않게 되더군. 뭐, 오지랖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젠 비테론의 비자만 꺼내도 말려야겠다는 생각부터 들 정도니 말이야.”
대장장이의 말까지 듣고 나니 술집 안에서 보였던 손님들의 반응이 단순한 거부감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한탕을 노릴 생각하지 말고, 안전한 돈벌이를 찾아보게. 30년 놀고먹으려다 30년 먼저 가는 게 욕심이고, 인생의 허무함이니까.”
땅! 땅! 땅! 땅!
알아듣게 설명했다고 여긴 대장장이가 다시 망치를 집어 들어 달궈진 쇠를 내리쳤다.
“저,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말해 보게.”
“오는 길에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는데, 혹시 성채 안에서 도적을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까?”
“도적?”
비테론에 관한 질문을 예상했던 대장장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여기도 엄연히 사람이 살고 돈이 도는 곳인데, 그런 놈들 하나 없겠나? 더구나 그런 값비싼 장신구를 차고 다니면, 으음.”
태주의 반지와 팔찌를 본 대장장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아꼈다.
“근데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하지?”
“아니요. 그냥 제가 들은 얘기가 사실인지 궁금해서요.”
질문의 의도를 숨긴 태주가 길에서 만난 이름 모를 남자의 조언을 핑계로 적당히 둘러댔다.
“뭐, 안 마주치는 게 가장 좋겠지만, 이왕이면 도적보다 소매치기를 만나는 게 더 나을 걸세.”
치이익!
망치질을 하던 대장장이가 모양을 잡아가던 쇠를 물에 집어넣어 담금질을 했다.
“소매치기는 말 그대로 좀도둑에 속하지만, 도적은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 이외에 암살자의 역할까지 병행하고 있거든.”
“암살이라면, 누군가의 의뢰를 받기도 한다는 겁니까?”
“보물이나 목숨이나 훔치는 건 매한가지라고 여기는 악랄한 놈들이니 못할 것도 없지 않겠나? 물론 도적이라고 다 같은 도적은 아니지만.”
“마치 암살자의 실력에 따라 몸값이 다르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아무래도 테테처럼 악명 높은 녀석은 부르는 게 값이니 당연히 같다고 볼 수 없겠지.”
“네? 테테요?”
“아,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베로닌에서는 그냥 테테라고 불리고 있네. 뭐, 벌어들인 돈 만큼이나 쌓인 원한도 많아서 제명에는 못 가겠지만.”
‘테테라…….’
순간,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있지만, 공대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도적 클래스의 멤버로는 적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 테테라는 도적에게 암살을 의뢰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왜? 누구 죽이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나?”
“아니요. 그냥 그런 음지에서 활동하는 녀석과는 어떤 식으로 접선하는지 궁금해서요.”
“으음. 베일에 싸여 있는 녀석이긴 하지만, 의뢰를 받으려면 으레 접선을 해야 하다 보니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 정도는 모두에게 열어 둔 상태네. 뭐, 어차피 의뢰를 받아들일지 말지는 전적으로 테테의 마음이지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대장장이가 갑자기 헝겊 한 장을 찢어 태주에게 건넸다.
“이게 뭐죠?”
낡은 천 쪼가리 하나를 받아든 태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로 오기 전에 광장을 하나 지났지?”
“네.”
“광장 중앙에 보면 베로닌 1세의 동상이 세워져 있네. 사람들이 비둘기 광장이라고 부를 만큼 수많은 비둘기들이 동상 주위를 기웃거리고 있지.”
“네. 기억납니다.”
“근데 유심히 들여다보면 한쪽 발목에 빨간 가죽 끈이 묶여 있는 비둘기 몇 마리가 무리 중에 섞여 있을 걸세.”
“테테의 전서구 역할을 하는 녀석들인가 보네요.”
“맞아. 녀석들 중 한 마리의 다리에, 정확히 말하면, 빨간 가죽 끈이 묶여 있지 않은 다리에 의뢰할 내용, 약속 시간, 접선 장소, 의뢰인의 인상착의 등이 적힌 천을 묶어 하늘로 날려 보내면 그만이네. 물론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의뢰를 수락했을 경우에만 모습을 드러내겠지만.”
테테와의 접선 방법을 일러준 대장장이가 태주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겼다.
“근데 만에 하나 녀석을 만날 의향이 있다면, 조심하게. 테테는 돈 자루를 쥔 의뢰인이라고 해서 굽실거리는 성격이 아니니 말이야.”
“네. 뭐, 그럴 일도 없지만, 일단 명심하겠습니다.”
대장장이의 귀띔에 엷은 미소로 화답한 태주가 감사의 뜻을 전한 뒤 대장간을 나섰다.
물론 대장장이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단은 광장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 반대편 길로 향하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줬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