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 레이드의 기초1 (4)
함 교수의 정제되지 않은 발언이 모든 학생들의 이목을 단숨에 집중시켰다.
- “태주한테 갑자기 왜 저러시지?”
- “그러게. 태주만 마법에 안 걸려서 짜증난다는 건가? 교수로서의 체면이 떨어져서?”
- “어? 그럼 의욕적으로 만들지 말라는 건 또 뭐지?”
- “글쎄. 다음번엔 꼭 걸리게 만들겠다는 뜻 아닐까?”
- “그래? 근데 말은 그렇게 했어도 입은 웃고 있는 거 같은데? 태주도 딱히 혼나는 분위기는 아니고.”
상황 파악이 안 된 아이들이 추측성 발언들을 쏟아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에 하신 말씀은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태주는 함 교수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또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몸소 경험한 적이 있었다.
평범한 학생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자신의 시야가 아닌 마음에 들어온 학생에게만 관심을 갖는 편애의 아이콘인 함 교수에게 회귀 전 태주는 늘 뒷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시든지.”
특유의 무성의한 대답과 함께 발걸음을 돌린 함 교수가 이번엔 가벼운 설전을 벌인 바가 있는 당돌한 학생에게로 다가갔다.
“죽음을 직면해 본 소감은?”
다시 의욕 없는 눈빛으로 돌아온 함 교수가 이제 겨우 두려움의 여운에서 벗어난 학생의 지친 몰골을 내려다보며 감정 없이 물었다.
“하아…….”
거친 호흡으로 대답을 대신한 남학생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함 교수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래. 당연히 더럽겠지.”
가치관이 다른 상대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굴복시킨 함 교수가 초췌해진 학생들을 둘러보며 정신 교육을 이어 갔다.
“자신보다 소중한 타인은 없다.”
- “…….”
이견이 있을 수 있는 단정적인 주장에도 학생들은 침묵했고, 그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생존이란 단어 뒤엔 늘 이성이 아닌 본능이 따라붙지.”
함 교수의 견해엔 여전히 반대하지만, 똑같은 고통이 반복될까 두려운 아이들.
“이성은 잃어버릴 수 있지만, 본능은 절대 사라지지 않거든.”
그리고 조금 전 체험을 통해 함 교수와 같은 생각을 품게 된 아이들.
“오히려 이성을 상실했을 때 본능은 극대화된다.”
물론 함 교수는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동료를 잃은 슬픔과 거기서 오는 죄책감도 오직 살아남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안도감의 일종이지.”
지금은 남의 눈을 의식해 위선을 떨고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 다시 말해, 이성과 본능을 놓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순간, 인간은 결국 이기적인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았다. 다행이다. 나만 아니면 돼.”
함 교수는 다소 격양될 수 있는 주제를 한결같은 어조로 차분하게 풀어나갔다.
“이건 이기적이고 비열한 것이 아닌 솔직하고 당연한 생존의 본능 그 자체다.”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 함 교수의 입장에선 목소리를 높여 호소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개인적인 고집을 강요하고 주입시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교.”
생존에 대한 확고한 소신을 밝힌 함 교수가 모의 던전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조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 “네, 교수님.”
함 교수와 한두 번 손발을 맞춰본 것이 아닌 베테랑 조교들이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고글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 “아아, 이거 입시 때 보다 더 떨리는데?”
- “그러게. 아주 우릴 죽이려고 작정을 해놨겠지?”
- “으음. 최소 A급 게이트 이상으로 설정해 놓지 않았을까? 뭐, 초장부터 아예 S급으로 갈수도 있고.”
- “하긴, 던전 안에서 죽는 더러운 기분을 체험해보는 게 이 수업의 목표라고 했으니까.”
고글을 착용하던 학생들이 입장 전부터 던전의 난이도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 익숙한 태주는 동기들의 환호와 함 교수의 칭찬을 독차지할 수 있는 극적인 연출을 위해 잠시 뒤로 물러나 있었지만.
“준비된 조부터 출발.”
- “…….”
함 교수의 출발 신호가 떨어졌지만, 11개의 공대 모두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선뜻 입구 쪽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함 교수가 그토록 강조한 본능에 따라 첫 번째로 들어간 공대는 무조건 손해를 볼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내일까지 있든지.”
참을성과는 거리가 먼 함 교수가 단 한 번의 지시를 끝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어? 갑자기 어디 가시지?”
- “우리가 머뭇거려서 화나셨나?”
- “그냥 통제실에 가시는 거 아니야?”
- “아, 맞다. 여기선 던전 안을 볼 수 없지.”
- “와…… 근데 어떻게 두 번을 얘기하는 법이 없지? 성격 진짜 칼 같네.”
캐릭터가 확실한 함 교수의 중간이 없는 행동에 학생들이 혀를 내둘렀다.
- “야, 근데 진짜 누가 먼저 들어갈 거야?”
- “그냥 한 명씩 대표로 나와서 가위바위보나 할까?”
- “그래도 양심이 있으면, 힐러가 많은 쪽이 들어가야 되는 거 아니야?”
입장 순서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태주를 둘러싼 팀원들이 공대장인 태주에게 의견을 물었다.
- “태주야, 우린 어떻게 할 거야?”
“급할 거 없으니까 나중에 하지 뭐.”
무기조차 꺼내지 않은 태주가 팔짱을 낀 채 마지막 순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바로 그때.
- “그냥 우리가 먼저 할게.”
내부적인 합의를 마친 공대 하나가 모의 던전의 입구를 향해 자진해서 나아갔다.
- “오오, 멋있는데?”
- “수고해라. 멀리 안 나간다.”
- “야, 그냥 다 찢어버려.”
사방에서 응원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실상은 난이도 측정기의 역할을 담당할 첫 번째 희생양들에게 보내는 가식적인 격려에 불과했다.
- “자, 일단 전사랑 무투가는 앞에서 몸빵 해주면서 어그로 끌어주고, 법사는 궁수랑 같이 후방 지원, 어쌔신은 적진 침투 후 교란 작전 및 암살, 힐러는 탱커들 아웃되지 않게 신경 쓰면서 최대한 오래 살아남으면 돼.”
입구로 들어서기 전, 공대장을 맡은 학생이 팀원들의 클래스별 역할을 지정해주며 전술 대형을 정비했다.
‘길어야 2분 컷이다.’
물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주는 다 부질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 “자! 가즈아!”
- “가즈아!”
첫 번째 공대가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모의 던전 안으로 호기롭게 입장했다.
바로 그때.
- “야, 저기 봐봐. 저기.”
- “어? 저거 지금 들어간 애들 이름 아니야?”
모의 던전의 문이 닫히자 대기실에 설치된 대형 화면에 도전자들의 명단이 표시됐다.
[1. 안승섭 (전사) 00:00:01 (○)]
[2. 허준수 (전사) 00:00:01 (○)]
[3. 곽윤경 (전사) 00:00:01 (○)]
[4. 류정웅 (법사) 00:00:01 (○)]
[5. 주소영 (법사) 00:00:01 (○)]
[6. 최원무 (힐러) 00:00:01 (○)]
[7. 백민주 (궁수) 00:00:01 (○)]
[8. 김진현 (무투가) 00:00:01 (○)]
[9. 오세라 (어쌔신) 00:00:01 (○)]
- “역시 원무랑 소영이는 같은 조네.”
- “하여간 누가 CC 아니랄까봐.”
- “솔직히 법사는 흔한데, 원무가 힐러니까 소영이까지 받아준 경향이 없지 않아 있지.”
아이들의 말대로 레이드의 핵심 멤버인 힐러는 공대원의 구성에 개입할 만큼 영향력이 있는 클래스였다.
- “그건 그렇고, 이름이랑 직업은 알겠는데, 옆에 있는 시간은 뭐지? 지금도 계속 흘러가는데.”
- “저거 생존 시간 아니야? 아까 교수님이 그랬잖아. 고글에 스톱워치가 표시된다고. 아마 맨 끝에 있는 동그라미는 생존 여부를 표시하는 걸걸?”
- “뭐야, 그럼 여기 있는 애들이 다 내가 얼마나 버텼고, 몇 번째로 죽었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는 거야? 쪽팔리게?”
- “그러니까 동기들을 이용해서라도 오래 살아남으라는 거잖아. 쪽팔리게 1빠로 죽기 싫으면.”
다음 차례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동기들 앞에서 공개적인 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른침을 삼켰다.
- “와…… 저기는 조합이 환상적이네.”
- “그러게. 각 클래스별로 아주 적절하게 모였는데? 딱히 부족해 보이는 역할도 없고.”
화면을 보고 있던 태주의 공대원들이 앞서 들어간 공대의 이상적인 멤버 구성에 부러움을 드러냈다.
- “저기에 비하면 우린 진짜 밸런스 폭망이네.”
- “야, 그래도 우리한텐 태주가 있잖아. 안 그래?”
- “하긴, 전사 8명이 앞에서 두 겹으로 막고, 태주가 뒤에서 갈기면 뭐가 돼도 되겠지.”
“야! 나는! 나도 궁수인데 왜 언급을 안 해!”
팀원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세준이 발끈하며 끼어들었다.
- “으음. 너는 그냥 우리랑 같이 앞에서 몸빵이나 하자. 괜히 옆에서 태주 활 쏘는데 방해하지 말고.”
- “안 돼. 세준이는 태주 뒤에서 어깨를 주물러야 돼. 진정한 후방 지원.”
“아니, 이 칼잡이 새끼들이 진짜 단체로 미쳤나!”
- “하하하하!”
긴장을 풀기 위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장비를 체크하던 바로 그때.
“어! 저거 뭐야!”
다수의 전사들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던 세준이 화면을 검지로 가리키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1. 안승섭 (전사) 00:00:57 (×)]
[2. 허준수 (전사) 00:00:57 (×)]
[3. 곽윤경 (전사) 00:00:57 (×)]
[8. 김진현 (무투가) 00:00:57 (×)]
선두에 서서 적들의 공격을 막아야 할 전사들과 무투가의 생존 시간이 동시에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 “야! 동그라미가 다 엑스 표시로 바뀌었는데?!”
- “심지어 전부 다 57초야!”
- “뭐야! 그럼 탱커 넷이 다 죽었다는 거야?! 그것도 같은 타이밍에?!”
- “말도 안 돼. 어떻게 1분도 못 넘겼지?”
- “근데 1분이면 전술이고 뭐고, 그냥 들어가자마자 죽은 거 아니야?
- “도대체 안에 뭐가 있는 거야?”
예상치 못한 전개에 충격을 받은 아이들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 “어! 또 죽었다!”
[5. 주소영 (법사) 00:01:02 (×)]
[6. 최원무 (힐러) 00:01:02 (×)]
선발대의 연이은 탈락 소식에 대기실의 분위기가 안 좋은 방향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 “뭐야, 저것들은 마지막까지 붙어 있었던 거야?”
- “진짜 징하다 징해. 설마 여친한테만 힐을 넣다가 죽은 건 아니겠지?”
- “확실히 앞에서 막아주는 탱커들이 없으니까 속수무책이네.”
[4. 류정웅 (법사) 00:01:05 (×)]
[7. 백민주 (궁수) 00:01:07 (×)]
- “와…… 진짜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 “아주 줄초상이 따로 없네.”
[9. 오세라 (어쌔신) 00:01:10 (×)]
결국 첫 번째 희생자가 발생한 시점을 기준으로 고작 13초 만에 모든 공대원의 생존 시간이 멈췄다.
- “전멸이네.”
- “어디 뭐, 함정 같은 곳에 단체로 빠졌나?”
- “에이 씨, 이러니까 더 들어가기 싫어지네.”
- “야, 우리 이제 어떻게 하지?”
- “그러게. 최소한 플랜 B라도 잡고 들어가야 되는 거 아니야?”
사기가 급격히 떨어진 학생들이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대책 회의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고 있던 태주는 아이들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웃음을 삼키고 있었지만.
‘이번 생존의 열쇠는 간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