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콘텐츠 제작의 이해 (1)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5대 길드의 수장들은 하나같이 5차 각성에 성공한 정상급 헌터들이었다.
아레나, 풍림, 태동, SP, 신화.
물론 블루오션 시절의 수혜를 누린 건 60대 이상의 1세대 헌터들이었지만, 개인주의가 강했던 그들과 달리 소위 1.5세대라 할 수 있는 40대 중반의 헌터들은 길드의 개념을 도입시켜 업계의 규모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스카우트 전쟁.
사람이 곧 재산인 길드의 특성상 각성 수준이 높은 인재들은 늘 그들의 최우선 영입 대상이었다.
특히 N차 각성의 확률이 높은 아이들의 경우 이르면 2학년, 늦어도 졸업 전엔 길드의 관리 대상으로 분류되어 품위 유지비를 비롯한 각종 혜택들을 지원받을 수 있었는데, 태주처럼 신입생 때부터 러브콜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물론 20곳이 넘는 길드로부터 매달 4천만 원에 이르는 용돈을 받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었지만.
“아레나의 이 대표가 내게 이런 제안을 하더구나. 관행엔 어긋나는 건 알지만, 널 아레나에서 모집하는 여름 인턴십에 채용해 보고 싶다고.”
“네? 여름 인턴십이요?”
이동규의 파격적인 제안이 태주의 귀를 사로잡았다.
물론 태주의 성장세가 또래들에 비해 월등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길드에서 주최하는 인턴십의 경우 3, 4학년을 대상으로 선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뭐, 조금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다른 길드의 대표들도 모두 동조하는 분위기라 일단은 인턴십 참여에 대한 네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다.”
“아, 네.”
회귀 전 태주는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기 위해 중소 길드에서 모집하는 인턴십에 참여하곤 했었다.
물론 부족한 실력 탓에 평가도 좋지 못했고, 5대 길드에서 모집하는 인턴십은 높은 경쟁률로 인해 지원하는 족족
떨어져 안 좋은 기억만 가지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럼 제가 승낙을 하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인턴 시기를 앞당기자는 제안에 태주가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물론 던전을 미리 체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딱히 거절할 마음은 없었지만, 상대방이 먼저 관심을 보인 만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대화를 이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야 당연히 눈치 싸움이 벌어지겠지. 너의 선택을 얻기 위한 고도의 눈치 싸움이.”
길드 간의 신경전이 눈에 선한 협회장이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듣기론 그 다섯 곳에서 모두 용돈을 지급하고 있다더구나. 그것도 다른 학생들에게 배정된 액수보다 무려 3배나 더 높은 수준으로 말이다.”
협회장의 말대로 5대 길드에선 이미 현 시세를 훌쩍 뛰어 넘는 성의를 보이며 태주에 대한 확고한 영입 의사를 어필하고 있는 중이었다.
“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협회장 앞이라 겸손한 척, 입에 발린 대답을 하긴 했지만, 사실 태주는 어떠한 길드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 균형적인 처세술을 통해 자신의 몸값을 상승시키고 있었다.
만약 특정 길드와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순간, 영입 경쟁에서 밀렸다고 판단한 모든 길드들이 동시에 지원을 끊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첫발을 디딘 네가 업계의 현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행하게도 레드오션으로 변한 현 상황에선 동업자 의식보다 강한 것이 바로 길드의 존속을 위한 생존 본능이다.”
다소 냉정하게 들릴 순 있지만, 곱씹어 볼수록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신입 헌터인 유리가 S급 게이트 안에서 죽은 것도, 엄 교수의 길드가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어찌 보면 모두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도박 같은 결정에서 비롯된 불필요한 희생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길드는 자선 단체가 아니다. 생사의 경계를 오간 대가로 얻은 피 같은 돈을 허투루 투자하는 법 따윈 없다는 뜻이지.”
헌터 업계의 정점이자 살아 있는 권력으로 40년을 버텨 온 송기철 협회장은 길드가 지닌 어두운 이면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다.
“결국, 받은 만큼 증명해야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눈치 빠른 태주가 협회장의 의도를 정확히 집어냈다.
“솔직히 그 녀석들은 네가 공을 들인 만큼의 밥값을 할 수 있는 깜냥이 되는지 시험해 보고 싶은 거다.”
“상당히 조급해 보이네요. 설령 조기 졸업을 한다고 해도 최소 3년 이상은 남은 상황인데.”
“네가 아레나에서 보낸 현직 헌터를 은퇴로 내몰 만큼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재목이란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만, 최소 3년 이상의 장기 투자를 결정한 입장에선 트레이닝 돔 안에서의 실력보다 실전에서의 검증이 더 궁금한 법이니까.”
“한마디로 제가 안방 호랑이인지 아닌지를 인턴십이란 명분하에 확인해 보겠다는 거네요.”
“물론 사람에 따라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는 테스트지만, 어차피 해야 할 숙제를 남들보다 먼저 끝낸다고 생각하면, 한결 받아들이기가 쉬울 거다. 뭐, 썩 내키지 않으면, 다음으로 미뤄도 무방하고.”
태주를 마주하던 협회장의 시선이 손주에게로 돌아가려던 바로 그때.
“아니요. 그 말씀을 들으니까 오히려 더 참여하고 싶어지는데요?”
진지한 대화를 이어가던 태주의 입가에 강한 기대감이 번졌다.
헌터학과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인턴십의 경우 던전 실습과 마찬가지로 E급 게이트에서 대부분의 교육이 이루어졌는데, 그 난이도가 일일 과제에 비해 높다고 볼 수 없어 큰 변수가 없는 이상 무난한 클리어가 예상됐기 때문이다.
“사실 저도 좀 궁금했거든요. 제가 5대 길드의 지원을 받을 만큼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더구나 다른 참가자들과의 경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경우 지금보다 더 많은 길드로부터 러브콜을 받게 되는 것은 물론 태주에 대한 검증을 마친 5대 길드의 지원 또한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될 수밖에 없었다.
“으음. 그럼 다음 모임엔 나와 함께 가는 걸로 하지.”
태주의 참여를 내심 바라고 있던 협회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약속을 정했다.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5대 길드의 수장들을 상대로 이례적인 역제안을 준비한 태주가 자신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간결하게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검증은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 받게 될 거다.’
*
*
*
다음 날.
태주가 제일 먼저 클릭을 한 강의이자 유일한 교양 과목인 콘텐츠 제작의 이해를 듣기 위해 강의실로 들어섰다.
‘아주 바글바글하네.’
계단식으로 구성된 대형 강의실 안엔 태주를 포함한 100명 이상의 수강생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어! 태주야, 여기!”
맨 뒷줄에 앉아 있던 동기 한 명이 태주를 향해 번쩍 손을 들었다.
“어, 그래.”
뜻밖의 환대에 손인사로 화답한 태주가 점멸이 아닌 두 발로 천천히 걸어갔다.
태주의 스킬에 적응된 헌터학과 동기들과 달리 비각성자인 다른 학과 학생들은 진우가 그랬듯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화들짝 놀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무지함에서 비롯된 두려움이 놀라움으로 변하는 순간, 한 번 더 보여 달라는 팬들의 끊임없는 요청으로 인해 태주가 더 두려움을 느끼겠지만.
“내가 네 자리까지 맡아놨어.”
A급 힐러인 최원무가 하나로 길게 이어진 곡선형 책상 위에 올려둔 자신의 가방을 얼른 치워주며 말했다.
“어, 그래, 고마워.”
1학기 첫 수업이 직업 탐구였기 때문에 의자에 앉아서 편하게 듣는 강의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태주, 하이.”
원무에게 가려져 있던 A급 법사 주소영이 볼펜을 좌우로 흔들며 수줍게 인사했다.
“어, 안녕.”
콘텐츠 제작의 이해를 같이 듣게 된 동기는 총 2명.
실리에 따라 강의를 고른 태주와 달리 새터 때의 인연으로 CC가 된 원무와 소영은 직업 탐구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표를 동일하게 맞춰둔 상태였다.
물론 두 사람 모두 회귀 전의 태주와는 콘텐츠 제작의 이해가 종강할 때까지 별다른 교류가 없었지만.
“아, 맞다. 태주야, 너 어제 직업 탐구 시간을 완전 찢어놨다며?”
손바닥으로 자신의 무릎을 내리친 소영이 28기 단톡방을 뜨겁게 달군 태주의 활약상에 대해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찢기는 무슨. 그냥 한 번씩 잘 맞는 날이 있어서 그래.”
겸허하게 행동해도 실력까지 겸손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태주의 대답을 곧이곧대로 믿는 동기들은 없었다.
“와…… 겸손하기까지.”
중간에 앉아 있던 원무가 태주를 향한 소영이의 반짝이는 눈빛에 묘한 질투심을 느꼈다.
“근데 궁수들은 앞으로도 그렇게 빡세게 훈련하는 거야? 우린 힐러라 그런지 수업 분위기가 완전 평화로운데. 심지어 다음 시간엔 주택가를 돌면서 다친 동물들을 치료할 거래. 강아지든 고양이든 가릴 것 없이.”
태주에게 밀리고 싶지 않았던 원무가 힐러의 자애로운 이미지에 대해 어필하자 눈치 빠른 소영이 남친의 기분을 지혜롭게 풀어주었다.
“오오, 역시 귀족
힐러. 나중에 레이드 뛰다 다치면 꼭 나부터 고쳐줘야 돼. 알았지?”
힐러의 경우 던전을 클리어 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핵심적인 구성원이었는데, 다른 클래스에 비해 숫자가 적어 늘 모셔가는 그림이 그려졌고, 자연스레 귀족이란 수식어까지 붙게 되었다.
“어? 어, 그럼! 당연하지! 그냥 내 옆에 꼭 붙어 있으면 돼. 하하하하!”
소영의 칭찬에 금세 기분이 풀린 원무가 호탕하게 웃으며 힐을 넣는 동작을 취했다.
물론 의기양양해진 원무의 등 뒤로 눈을 마주친 태주와 소영이 그 모습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지만.
바로 그때.
덜컥!
강의실로 들어선 신문방송학과 정유진 교수가 해맑은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다 했어?”
강의대에 다다른 정 교수가 노트북을 연결하고 있던 조교에게 다정히 물었다.
“네, 교수님. 바로 쓰시면 됩니다.”
“어, 고마워, 땡큐.”
딸깍! 딸깍!
조교가 내어준 강의대 앞에 선 정 교수가 수강생 명단을 클릭해 거대한 스크린에 띄웠다.
“와…… 올해도 만석이네?”
스크롤을 내리며 인원수를 체크하던 정 교수가 좌우로 몸을 가볍게 흔들며 기쁨을 표현했다.
“다음 주가 수강 정정 기간이죠?”
- “네.”
마이크에 입을 댄 정 교수의 물음에 수강생들이 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 명단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오늘은 출석을 생략할게요. 괜찮죠?”
- “네.”
“뭐, 워낙 광클을 해서 수강한 과목이라 강의를 팔지 않는 이상 빠질 일도 없겠지만.”
- “하하하하.”
자신감이 묻어나는 정 교수의 농담에 강의실의 분위기가 금세 밝아졌다.
“자, 그럼 이제 제 소개를 해볼까요?”
톡톡!
정 교수가 마이크를 검지로 두드려 아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안녕하세요. 콘텐츠 제작의 이해를 맡게 된 정유진이라고 합니다. 수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멘트를 마친 정 교수가 강의대 옆으로 벗어나 학생들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 “와!”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소탈하고 권위의식이 없는 정 교수의 깔끔한 자기소개에 학생들이 박수로 호응했다.
“아, 그리고 좀 전에 나간 조교 말로는 이번 학기 수업에 아주 유명한 학생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던데.”
정 교수의 고개가 좌에서 우로 천천히 돌아가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원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태주에게 물었다.
“태주야, 저거 네 얘기 아니야?”
“…….”
물론 정답을 아는 태주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